김동리(金東里, 1913∼1995)는 경북 경주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시종(始鍾)이고 근대의 사상가로 유명한 범보(凡夫) 김정설의 아우다. 대구 계성중학을 거쳐 서울 경신중학에 전학했으나 중퇴했다. 이후 학교 교육은 받은 적이 없으며, 맏형인 범보의 지도 아래 독학했다. 1934년 <백로>(시), 1935년 <화랑의 후예>(소설), 1936년 <산화>가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시 창작과 소설 창작을 병행하는 작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경남 사천의 다솔사에서 운영한 ‘광명학원’의 교사로 일하는 등 지방에 은거하여 시대의 광풍을 피했으며, 당시의 대부분 문인들과는 달리 친일의 욕된 명부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김동리는 문인 단체의 조직과 운영에 깊이 관여하며 오랫동안 문단을 이끌었다. 1946년 좌익 진영의 문인 조직에 맞서 ‘전국문필가협회’ 결성에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곽종원, 서정주 등과 ‘한국청년문학가협회’를 조직하여 그 초대회장이 되었고, ‘한국문학가협회’ 부위원장, ‘한국문인협회’ 위원장, ‘한국문화예술원’ 회장, ‘한국소설가협회’ 회장 등을 지냈다.
한편 김동리는 교육자이기도 했다. 1953년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 교수로 취임한 이래 정년퇴임할 때까지 서라벌예술대학과 중앙대학교에서 이후 한국 문단을 주도하는 많은 제자를 길러내었다.
김동리 소설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은 어려운 상황 속에 들었지만 끝끝내 자신을 지켜 내는 강한 주체가 그 세계의 중심에 우뚝 서 있다는 점이다. 그 강한 주체는 무당, 주모, 낙백한 전향자 등 하나같이 주변부 존재로서 중심부를 장악한 지배 질서 밖으로 밀려났으며 동시에 스스로 그 같은 소외를 선택한 외로운 존재다. 말하자면 그는 ‘소외된/스스로를 소외시킨’ 존재다. 그는 또한 세계의 억압에 눌려 자신을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크게 제약당한 존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강한 주체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으며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는다.
김동리는 뛰어난 비평가이기도 했다. <이태준론>(≪풍림≫, 1937. 3)으로 비평 활동을 시작한 김동리는 1940년 전후의 세대 논쟁, 해방 직후의 민족문학 논쟁 등에서 이른바 민족주의 문학 진영의 대표적인 비평가로서 평필을 휘둘렀다. 이들 논쟁 과정에서 생산된 평문들을 중심으로 엮은 평론집 ≪문학과 인간≫(1948)은 이 시기 한국 비평계의 성과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다.
김동리의 비평은 위에서 살핀 바 그의 소설이 그러했듯이 문학 주체의 개성을 무엇보다 강조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의 비평을 이끄는 문학론이 ‘개성과 생명의 구경적 의의 추구의 문학론’이라는 것, 정치적인 이념을 강조하여 문학 주체의 개성을 억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종속시키는 정치적 운동으로서의 문학(이 시기 진보적 문학 진영에서 주장한 ‘당’과 ‘인민’에 복무하는 문학이 대표적이다)을 근본 부정했다는 것 등은 이와 관련된 것이다.
문학 주체의 개성을 무엇보다 강조하는 김동리의 문학관은 근본적으로 논쟁적이다. 소설 창작인 본업인 김동리가 논쟁의 한복판으로 뛰어들어 조금의 물러섬도 없이 당대 한국 문단의 중심을 장악한 문학 진영과 맞서 싸운 것은 이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김동리는 비평에서 또 휴머니즘을 강조했는데 ‘제3 휴머니즘’, ‘인간성 옹호’ 등의 말은 여기서 생겨난 것이다. 김동리 비평은 또 동서 문학 정신의 지양을 통해 세계문학의 한 부분으로서의 민족문학을 건설해야 함을 강조했다. 이는 한국 근현대 문학사를 관류해 온 외국 문학 추수주의와 배타적인 국수주의의 두 극단적 이념과 태도에 대한 비판적 성찰의 산물이다. ‘세계문학의 한 부분으로서의 민족문학’이란 김동리의 명제는 외국 문학과 우리 문학의 바람직한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원칙의 정립이라는 점에서 현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김동리는 소설 창작과 대학에서의 문학 교육 체험을 바탕으로 문학 개론과 소설 창작론을 저술하기도 했다. ≪문학개론≫(1953), ≪소설 작법≫(1965), ≪문예 창작법 신강≫(1976) 등이 그것들이다.
1943년 만주 장춘(長春)에서 태어났다. 고교시절인 1962년에 사상계 신인문학상을 통하여 등단하고, 197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탑」과 희곡「환영(幻影)의 돛」이 각각 당선되어 문학 활동을 본격화했다.
1966∼67년 베트남전쟁 참전 이후 74년 들어와 본격적인 창작 활동에 돌입하여「객지」「한씨연대기」「삼포 가는 길」등 리얼리즘 미학의 정점에 이른 걸작 중단편들을 속속 발표하면서 진보적 민족문화운동의 추진자로서도 활약했다. 1974년 첫 소설집 <객지>를 냈으며, 대하소설 <장길산> 연재를 시작하여 1984년 전10권으로 출간하였다.
1976~85년 해남, 광주로 이주하였고 민주문화운동을 전개하면서 소설집 <가객(歌客)>(1978), 희곡집 <장산곶매>(1980), 광주민중항쟁 기록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1985) 등을 펴냈다. 중국에서 <장길산>(1985), 일본에서 <객지>(1986), <무기의 그늘>(1989), 대만에서 <황석영소설선집>(1988)이 번역·간행되기도 했다. 1989년 동경·북경을 경유하여 평양 방문. 이후 귀국하지 못하고 독일 예술원 초청 작가로 독일에 체류한다. 이해 11월, 장편소설 <무기의 그늘>로 제4회 만해문학상을 받았고 1990년 독일에서 장편소설 <흐르지 않는 강>을 써 한겨레신문에 연재했다.1991년 11월 미국으로 이주, 롱 아일랜드 대학의 예술가 교환 프로그램으로 초청받아 뉴욕에 체류했다. 1993년 4월 귀국, 방북사건으로 7년형 받고 1998년 사면되었다.
2000년대에 들어와서도 장편소설 『오래된 정원』, 『손님』, 『모랫말 아이들』, 『심청, 연꽃의 길』, 『바리데기』, 『개밥바라기별』, 『강남몽』, 『낯익은 세상』 등을 발표하며 쉼 없는 창작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무기의 그늘』로 만해문학상을, 『오래된 정원』으로 단재상과 이산문학상을, 『손님』으로 대산문학상을 수상했다. 그의 작품들은 프랑스, 독일, 스웨덴, 이탈리아, 미국, 일본, 중국 등 해외에서 번역 출간되고 있다.
소설가이자 시인으로 문학이 추구할 수 있는 서정적 아름다움과 예술성의 극치를 선보인 작가 황순원. 1915년 평안남도 대동에서 태어난 그는 평양 숭실중학교에 다니던 1931년에 17세의 나이로 [나의 꿈], [아들아 무서워 마라]를 '동광'에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그의 초기 작품들은 주로 소년소녀가 등장하는 동화류의 작품으로, 성숙으로 통하지 않은 낙원 같은 유년세계에 기조를 두고 있다. 그 한 예로 1941년에 발표한 단편 [별]은 죽은 어머니의 이미지를 집요하게 추구하는 소년의 내적 편력을 심리적인 흐름을 따라 묘사하고 있고,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소나기]는 성에 눈뜨게 되는 사춘기 소년소녀의 애수 어린 첫사랑의 경험을 통하여 인생의 입문 과정에서 보편적으로 겪게 되는 외상적인 아픔과 정서적인 손상을 다루고 있다. 구성의 치밀함과 함축성 있는 간결하고 세련된 문체, 소박하면서도 따듯하게 묻어나는 한국적인 전통의 색채,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눈부시게 빛내는 다양한 기법적 장치들로 자신의 문학세계를 탄탄하게 구축한 황순원. 그의 대표작으로는 [소나기]를 비롯해 [카인의 후예], [학], [나무들 비탈에 서다], [일월], [움직이는 성] 등이 있다.
1931년 경기도 개풍에서 태어났다. 1950년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했으나 한국전쟁으로 중퇴하였다. 1970년 마흔이 되던 해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나목』이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장편소설로 『휘청거리는 오후』 『도시의 흉년』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아주 오래된 농담』 등이 있고, 소설집으로 『세 가지 소원』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엄마의 말뚝』 『저문 날의 삽화』 『너무도 쓸쓸한 당신』 등이 있으며, 산문집으로 『세상에 예쁜 것』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살아 있는 날의 소망』 『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 『어른 노릇 사람 노릇』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등이 있다. 한국문학작가상, 이상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이산문학상, 현대문학상, 동인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2011년 1월 22일 여든 살에 암으로 세상을 떴다.
1948년 서울에서 태어나 고향인 경북 영양, 밀양, 부산 등지에서 자랐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서 수학했으며 1979년《동아일보》신춘문예에 중편「새하곡」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이후「그해 겨울」,「황제를 위하여」,「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등 여러 작품을 잇따라 발표하면서 다양한 소재와 주제를 독보적인 문체로 풀어내어 폭넓은 대중적 호응을 얻었다. 특히 장편소설『사람의 아들』은 문단의 주목을 이끈 초기 대표작이다.
작품으로 장편소설『젊은 날의 초상』,『영웅시대』,『금시조』,『시인』,『오디세이아 서울』,『선택』,『호모 엑세쿠탄스』등 다수가 있고,『이문열 중단편전집』(전 6권), 산문집『사색』,『시대와의 불화』,『신들메를 고쳐매며』, 대하소설『변경』(전 12권),『대륙의 한』(전 5권) 등이 있으며, 평역소설로『삼국지』,『수호지』,『초한지』가 있다.
오늘의 작가상,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현대문학상, 호암예술상 등을 수상하였으며, 2015년 은관문화훈장을 수상했다. 그의 작품은 현재 미국, 프랑스, 독일 등 전 세계 20여 개국 15개 언어로 번역, 출간되고 있다.
1957년 강원도 강릉 출생. 강릉상업고등학교·강원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1988년 《문학사상》 신인상에 단편 《낮달》이 당선되어 등단. 창작집에 《그 여름의 꽃게》 《얼굴》 《말을 찾아서》《어머니의 이슬털이》 등이 있고, 장편소설에 《우리들의 석기시대》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 《에덴에 그를 보낸다》 《미혼에게 바친다》 《수색, 그 물빛무늬》 《아들과 함께 걷는 길》 《독약 같은 사랑》등이 있으며, 1996년 단편 《수색, 어머니 가슴속으로 흐르는 무늬》로 제27회 동인문학상을, 1997년 중편 《은비령》으로 제42회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
1939년 전남 장흥에서 태어나, 서울대 독문과를 졸업했다. 1965년 '사상계'에 단편 '퇴원'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온 이후 40여 년간 수많은 작품들을 남겼다. 대표작으로 장편소설 '당신들의 천국', '낮은 데로 임하소서', '씌어지지 않은 자서전', '춤추는 사제', '이제 우리들의 잔을', '흰옷', '축제', '신화를 삼킨 섬', '신화의 시대' 등이, 소설집 '별을 보여드립니다', '소문의 벽', '가면의 꿈', '자서전들 쓰십시다', '살아 있는 늪', '비화밀교', '키 작은 자유인', '서편제', '꽃 지고 강물 흘러', '잃어버린 말을 찾아서', '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 등이 있다. 한양대와 순천대 교수를 역임하였으며,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을 지냈다. 동인문학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대한민국문화상, 한국일보 창작문학상, 이상문학상, 이산문학상, 21세기문학상, 대산문학상, 인촌상, 호암상 등을 수상했으며, 사후에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2008년 7월, 지병으로 타계하여 고향 장흥에 안장되었다.
1904년 11월 4일 강원도 철원군 묘장면 산명리에서 부친 이문교, 모친 안순흥 사이의 1남 2녀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1970(?)년 사망 추측). 상허(尙虛) 또는 상허당주인(尙虛堂主人) 이태준(李泰俊)은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블라디보스토크에 갔다가 1909년에 아버지를, 1912년에 어머니를 잃고 고아가 되었다. 1918년 고향으로 돌아와 친척집에 기거하면서 어렵게 철원 봉명학교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어려운 가정 상황으로 인해 방황을 하다가, 1921년 휘문고보에 입학했다. 여전히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교장 선생님 등 주위 사람들의 배려로 수학을 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이미 문학가가 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924년 동맹휴교 주모자로 낙인찍혀 5년제 과정 중 4학년 1학기에 퇴학을 당했다. 퇴학의 아픔을 위무하면서 상허는 일본 유학의 길을 떠나, 1927년 동경 조치대학(上智大學) 예과에 입학했다가 1928년 중퇴한다. 일본 유학 시절인 1925년에 단편 '오몽녀'를 '조선문단'에 투고하여 입선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는데, 귀국할 때까지 작품활동이 거의 없었다. 귀국하여 1929년 '개벽'에 입사한 후 '학생', '신생' 등의 잡지 편집에 관여했고, '어린이'에 수필과 소년독본을 발표하면서 창작 활동을 재개하였다. 1930년 이화여전 음악과를 졸업한 이순옥과 결혼하여 가정을 이룬다. 1931에는 '중외일보' 기자로 입사하였고, '중외일보'가 폐간되면서 개제(改題)된 '조선중앙일보'에서 학예부장으로 일하게 된다. 1933년에 '구인회'에 참여하면서 서정성이 농후한 작품을 발표하였고, 이화여전 등에 작문교사로 출강하였다. 1939년에는 '문장'지를 창간하여 책임편집을 맡아 일제 말기 문학을 지탱해 나갔으며, 1941년 제2회 조선예술상을 수상했다. 해방 후, 이태준은 지금까지의 문학적 태도와는 달리 좌익계열의 문학단체에 가담하는데, 1945년에 문화건설중앙협의회 조직에 참여하였고, 1946년에 조선문학가동맹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해방전후'로 조선문학가동맹이 제정한 제1회 해방기념 조선문학상을 수상했다. 1946년 7∼8월경 월북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월북 직후인 1946년 10월경 조선문화사절단의 일원으로 소련을 여행하고 돌아오는 길에 북한에 머물렀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종군작가로 낙동강 전선까지 내려온 것으로 전해진다. 1952년부터 사상검토를 당하다가 1956년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후의 행적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고 사망 연도도 불확실하다. 작가의 작품활동을 보면 다음과 같다. 1934년 첫 단편집 '달밤' 발간을 시작으로 '까마귀'(1937), '이태준 단편선'(1939), '이태준 단편집'(1941) 등 단편집 7권과 '구원의 여상'(1937), '화관'(1938), '청춘무성'(1940) 등 장편 13권을 발간하였고, 해방 후 '소련기행'(1947)이라는 기행문도 발간했다. 일제 강점기의 그의 작품은 대체로 시대적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보다는 현실에 초연한 예술지상적 색채를 나타냈다. 섬세하면서도 감각적인 묘사와 대상에 대한 연민과 동정의 시선을 통해 단편소설의 서정성과 그 예술적 완성도를 높였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단편소설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광복 이후 그의 작품은 조선문학가동맹의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생경한 이데올로기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작품을 발표함으로써 일제 강점기의 작품에 비해 예술적 완성도가 훨씬 떨어지고 있다.
가산 이효석은 강원도 평창에서 출생하였다.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거쳐 경성 제국대학 영문과를 졸업하였으며, 1928년 '조선지광'지에 단편소설 '도시와 유령'을 발표하면서 문단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효석의 문학은 시적 서정을 소설의 세계로 승화함으로써 한국 단편소설의 백미를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사실적 묘사보다는 장면의 분위기를, 섬세한 디테일보다는 상징과 암시의 수법을 이용하는 그의 문체는 우리 단편소설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메밀꽃 필 무렵'에 이르러 전성기를 누렸다. 또한 '돈''메밀꽃 필 무렵' 등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성(性)의 탐색을 통해 그는 일제시대의 암울한 현실과 대비되는 순수하고, 순결한 세계를 인간의 원초적 본능인 성(性)과 결합시킨 시적 서정소설로 새로이 개척해냈다. 이로써, 자연과 인간 본능의 순수성을 시적 경지로 끌어올렸다는 평가와 함께 당시 이태준, 박태원 등과 함께 대표적 작가로 주목받았던 이효석은 그러나 그의 황금 같은 문학적 결실을 다 누려보지도 못한 채 1942년 결핵성 뇌막염으로 36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1908년 강원도 춘천에서 출생.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고독과 빈곤 속에서 우울하게 자랐다. 고향을 떠나 열두 살 때 서울 재동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고 휘문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27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으나 이듬해 그만두었다. 1930년 늑막염을 앓기 시작한 이래 평생을 가난과 병마에 시달렸다. 유명한 명창이자 기생인 박녹주를 짝사랑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실의에 빠진 김유정은 고향인 춘천 실레 마을에 금병의숙錦屛義塾을 세워 불우한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1935년 이무영, 이상, 정지용 등이 속한 순수문예 단체인 구인회九人會에 가입하고, 같은 해 , <조선일보>에 , <소낙비>, , <중외일보>에 , <노다지>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짧은 문단 생활 중에도 김유정은 병과 가난과 싸우면서 30여 편의 단편을 남기고, 1937년 스물아홉의 젊은 나이로 누나 집에서 결핵과 늑막염으로 세상을 떠났다. 대표작으로는 <금따는 콩밭>, <봄봄><따라지>, <두꺼비>, <동백꽃>, <땡볕> 등이 있다.
‘작가정신의 승리’라 불릴 만큼 온 생애를 문학에 바쳐온 조정래 작가는 한국문학뿐 아니라 세계문학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뛰어난 작품 활동을 펼쳐왔다. 작가정신의 결집체라 할 수 있는 대하소설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은 ‘20세기 한국 현대사 3부작’으로, 1천 5백만 부 돌파라는 한국 출판사상 초유의 기록을 수립했다.
1943년 전라남도 승주군 선암사에서 태어나 광주 서중학교, 서울 보성고등학교를 거쳐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70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후, 왜곡된 민족사에서 개인이 처한 한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역을 아우르며 소설을 집필했다.
대하소설 3부작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을 비롯해, 장편소설 『천년의 질문』 『풀꽃도 꽃이다』 『정글만리』 『허수아비춤』 『사람의 탈』 『인간연습』 『비탈진 음지』 『황토』 『불놀이』 『대장경』, 중단편소설집 『그림자 접목』 『외면하는 벽』 『유형의 땅』 『상실의 풍경』 『어떤 솔거의 죽음』 등을 발표했다.
산문집으로 『누구나 홀로 선 나무』 『황홀한 글감옥』 『조정래의 시선』『조정래 사진 여행: 길』과 함께, 문학인생 50년을 담은 『홀로 쓰고, 함께 살다』를 출간했다. 또한 고등학생 손자와 함께 집필한 『할아버지와 손자의 대화』와 청소년을 위한 위인전인 『신채호』 『안중근』 『한용운』 『김구』 『박태준』 『세종대왕』 『이순신』을 발표했다.
현대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단재문학상, 노신문학상, 광주문화예술상, 만해대상, 현대불교문학상, 심훈문학대상 등을 수상했고, 은관문화훈장을 수훈했다.
조정래 작가의 작품은 영어·프랑스어·독일어·일본어 등으로 세계 곳곳에서 번역 출간되었고, 영화·오페라·뮤지컬·만화로 만들어졌으며, TV 드라마 등으로도 제작되고 있다.
1942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났다. 1961년 전주사범학교와 원광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6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회색 면류관의 계절'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한국문학작가상, 현대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2007년 현재 한서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 [황혼의 집],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장마], [에미], [밟아도 아리랑], [빛 가운데로 걸어가면] 등이 있다.
189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이의경이며, 이미륵은 필명이자 아명이다. 해주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의학전문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하다가, 3.1운동에 가담한 뒤 일본 경찰을 피해 중국 상하이를 거쳐 1920년 독일로 망명하였다. 뷔르츠부르크대학교와 하이델베르크대학교에서 의학을, 뮌헨대학교에서 철학과 생물학을 전공하였고, 이후 동대학교의 동아시아학과에서 한국어와 한국문학 등을 강의했다. 문예지 [다메]에 '하늘의 천사'를 발표하면서 작가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1946년에 자신의 어린 시절을 그린 자전소설 [압록강은 흐른다]를 출간하여 독일 문단과 언론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으면서 '독일어로 쓰인 올해 최고의 책'에 선정되었다. 광복을 맞은 고국의 땅을 밟지 못한 채 1950년, 위암으로 타계하여 그레펠핑 시립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이 밖에 지은 책으로 [이야기], [무던이], [이상한 사투리], [그래도 압록강은 흐른다]가 있다.
오영수(1911∼1979)
오영수는 1911년 2월 11일 경남 울주군 언양면 동부리 313번지에서 아버지 오시영 씨와 어머니 손필옥 씨 사이의 4남 3녀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호는 월주(月洲) 또는 난계(蘭溪)이며 9세까지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1928년 언양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32년 일본 오사카에서 나니와중학 속성과를 수료하고 1935년 일본대학 전문부에 적을 두었으나 각기병으로 중퇴하고 귀국하여 ≪조선일보≫, ≪동아일보≫에 동시를 발표한다. 1937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국민예술원에 입학한 뒤 도중에 학도병에 징집당하지 않으려고 숨어 다닌다. 1938년 국민예술원을 졸업한 뒤에 귀국하여 동래 일신여고 출신의 김정선과 결혼한다. 1939년 만주 신경으로 가서 방랑생활을 하다가 1943년 처가가 있는 경남 양산군 일광면 산전리로 이사하여 김동리와 교우를 갖는다. 1945년 부산 경남여고에서 미술교사로 근무하다가 나중에는 국어를 가르친다.
1948년 시 <산골 아가>(<백민>)를 발표하고, 1949년 단편 <남이와 엿장수>(<고무신>으로 개제)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고, 1950년 단편 <머루>가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된 뒤 본격적인 창작 활동을 진행한다. 6·25를 맞아 청마 유치환과 함께 동부전선에 종군하고, 1954년 첫 창작집 ≪머루≫를 문화당에서 간행한다. 1955년 조연현을 주간으로 ≪현대문학≫ 창간호를 편집, 발행하고 제1회 한국문학가협회상을 수상한다. 1956년 제2창작집 ≪갯마을≫을 간행하고 1957년 서울 성북구 돈암동으로 이사하는데, 이 무렵부터 신경성 위궤양을 앓는다. 1958년 제3창작집 ≪명암≫을 간행하고 1959년 제7회 아세아자유문학상을 수상한다. 1960년 제4창작집 ≪메아리≫를 간행한다. 1963년 서울 도봉구 우이동으로 이사하고, 1965년 제5창작집 ≪수련≫을 간행한 뒤 1966년 위궤양으로 ≪현대문학≫사의 실무를 떠난다. 1968년 ≪오영수 전집≫ 전 5권을 현대서적에서 간행하고 1970년에는 한국문인협회 소설분과위원장에 피선된다. 1974년 ≪오영수 대표작 선집≫ 전 7권이 동림출판사에서 간행되고, 1977년 제22회 대한민국예술원상을 수상한다. 1978년 창작집 ≪읽어버린 도원≫을 간행하고 1979년 5월 15일 경남 울주군 웅촌면 곡천리 자택에서 간염으로 타계한 뒤 언양면 송태리 선영에 안장된다.
그는 토착적인 한국인의 정서와 풍경을 간결하고 서정적인 필치로 그려내는 데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작가다. 향토성 짙은 서정성을 바탕으로 자연과 인간의 조화와 대립을 통해 선량한 인간성을 탐구하고 묘사해 온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서민층 생활의 애환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을 드러낸 작품세계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실되어 가는 인간성의 회복을 제시해 줄 뿐만 아니라, 각박한 현실의 폐해를 비판함으로써 따사로운 인정의 미학을 선보인다.
평소 성품이 소박하고 낚시와 그림을 좋아했던 그는 만년에는 고향 근처로 낙향하여 요양과 창작에 정진했으나 1979년 발표한 단편 <특질고(特質考)>로 인해 뜻하지 않은 파문을 일으켜 정신적인 타격을 받는다. 이 작품은 사투리와 지역민의 특성을 담은 작품으로 작가의 의도는 향토성의 고찰 속에 방언의 고수를 피력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지만, 소설의 내용이 사실적 기록으로 받아들여져 특정 지역을 비하했다는 시비에 휘말리면서 결국 문협에서 오영수가 제명되고, 그의 사과문이 공개됨으로써 사건이 마무리된다.
1931년 10월 21일 경북 영천 출생. 1945년 전주사범학교 입학했으나 전주사범 재학 중 교원시험에 합격해 학교를 그만두고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1954년 부산 동아대 토목과에 입학, 이듬해 '신태양' 주최 전국학생문예작품 공모에 「혈육」이 당선되었으며, 1957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수난이대」가 당선되었다. 1969년 이후에는 대한교련공제조합 '새교실' 편집부 기자를 그만두고 집필에만 전념했다. 1970년 제7회 한국문학상, 1983년 제2회 조연현 문학상, 1984년 제1회 요산문학상, 1989년 제6회 유주현 문학상, 1998년 보관문화훈장 수상했고 2007년 11월 25일 사망했다.
김은국은 1932년 함경북도 함흥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대부분을 황해도에서 보냈다. 해방 후 월남하여 서울대학교 재학 중 6.25전쟁이 일어나자, 군에 복무한 뒤 미국으로 이주했다. 미들버리 대학, 존스 홉킨스 대학, 아이오와 대학에서 공부했으며, 하버드 대학에서 문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메사추세츠 대학 영문학과 부교수, 서울대학교 교환 교수를 역임하였다. 1964년 발표한 처녀작 "The Martyred"는 도스토예프스키와 카뮈의 문학적 전통을 이어받은 작품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고, 이후 "Lost Names" "The Innocent" 등 한국을 무대로 한 작품들을 계속 발표하였다. 이 작품들은 각각 "순교자""잃어버린 이름""심판자"라는 제목으로 한국어로 번역 출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