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리(金東里, 1913∼1995)는 경북 경주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시종(始鍾)이고 근대의 사상가로 유명한 범보(凡夫) 김정설의 아우다. 대구 계성중학을 거쳐 서울 경신중학에 전학했으나 중퇴했다. 이후 학교 교육은 받은 적이 없으며, 맏형인 범보의 지도 아래 독학했다. 1934년 <백로>(시), 1935년 <화랑의 후예>(소설), 1936년 <산화>가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시 창작과 소설 창작을 병행하는 작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경남 사천의 다솔사에서 운영한 ‘광명학원’의 교사로 일하는 등 지방에 은거하여 시대의 광풍을 피했으며, 당시의 대부분 문인들과는 달리 친일의 욕된 명부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김동리는 문인 단체의 조직과 운영에 깊이 관여하며 오랫동안 문단을 이끌었다. 1946년 좌익 진영의 문인 조직에 맞서 ‘전국문필가협회’ 결성에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곽종원, 서정주 등과 ‘한국청년문학가협회’를 조직하여 그 초대회장이 되었고, ‘한국문학가협회’ 부위원장, ‘한국문인협회’ 위원장, ‘한국문화예술원’ 회장, ‘한국소설가협회’ 회장 등을 지냈다.
한편 김동리는 교육자이기도 했다. 1953년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 교수로 취임한 이래 정년퇴임할 때까지 서라벌예술대학과 중앙대학교에서 이후 한국 문단을 주도하는 많은 제자를 길러내었다.
김동리 소설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은 어려운 상황 속에 들었지만 끝끝내 자신을 지켜 내는 강한 주체가 그 세계의 중심에 우뚝 서 있다는 점이다. 그 강한 주체는 무당, 주모, 낙백한 전향자 등 하나같이 주변부 존재로서 중심부를 장악한 지배 질서 밖으로 밀려났으며 동시에 스스로 그 같은 소외를 선택한 외로운 존재다. 말하자면 그는 ‘소외된/스스로를 소외시킨’ 존재다. 그는 또한 세계의 억압에 눌려 자신을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크게 제약당한 존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강한 주체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으며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는다.
김동리는 뛰어난 비평가이기도 했다. <이태준론>(≪풍림≫, 1937. 3)으로 비평 활동을 시작한 김동리는 1940년 전후의 세대 논쟁, 해방 직후의 민족문학 논쟁 등에서 이른바 민족주의 문학 진영의 대표적인 비평가로서 평필을 휘둘렀다. 이들 논쟁 과정에서 생산된 평문들을 중심으로 엮은 평론집 ≪문학과 인간≫(1948)은 이 시기 한국 비평계의 성과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다.
김동리의 비평은 위에서 살핀 바 그의 소설이 그러했듯이 문학 주체의 개성을 무엇보다 강조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의 비평을 이끄는 문학론이 ‘개성과 생명의 구경적 의의 추구의 문학론’이라는 것, 정치적인 이념을 강조하여 문학 주체의 개성을 억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종속시키는 정치적 운동으로서의 문학(이 시기 진보적 문학 진영에서 주장한 ‘당’과 ‘인민’에 복무하는 문학이 대표적이다)을 근본 부정했다는 것 등은 이와 관련된 것이다.
문학 주체의 개성을 무엇보다 강조하는 김동리의 문학관은 근본적으로 논쟁적이다. 소설 창작인 본업인 김동리가 논쟁의 한복판으로 뛰어들어 조금의 물러섬도 없이 당대 한국 문단의 중심을 장악한 문학 진영과 맞서 싸운 것은 이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김동리는 비평에서 또 휴머니즘을 강조했는데 ‘제3 휴머니즘’, ‘인간성 옹호’ 등의 말은 여기서 생겨난 것이다. 김동리 비평은 또 동서 문학 정신의 지양을 통해 세계문학의 한 부분으로서의 민족문학을 건설해야 함을 강조했다. 이는 한국 근현대 문학사를 관류해 온 외국 문학 추수주의와 배타적인 국수주의의 두 극단적 이념과 태도에 대한 비판적 성찰의 산물이다. ‘세계문학의 한 부분으로서의 민족문학’이란 김동리의 명제는 외국 문학과 우리 문학의 바람직한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원칙의 정립이라는 점에서 현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김동리는 소설 창작과 대학에서의 문학 교육 체험을 바탕으로 문학 개론과 소설 창작론을 저술하기도 했다. ≪문학개론≫(1953), ≪소설 작법≫(1965), ≪문예 창작법 신강≫(1976) 등이 그것들이다.
1910년 9월 23일 새벽 6시경(음력 8월 20일 묘시경) 지금의 서울시 종로구 사직동에서 아버지 김연창(金演昌)과 어머니 박세창(朴世昌)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3세 때 조부 김병복(金炳福)의 성화로 자손이 없는 백부 김연필(金演弼)의 양자로 들어가게 된다. 1917년 4월 인왕산 밑에 자리한 4년제 학교인 신명학교(新明學校)에 입학한다. 과목 중에 지리와 도화를 특히 좋아했다고 한다.
1921년 신명학교를 졸업한 뒤 불교 재단에서 경영하는 견지동의 동광학교(東光學校)에 입학한다. 하지만 해경이 입학한 지 4년째 되던 해 동광학교가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이 인수한 보성고보에 합병되어 4학년으로 편입하게 된다. 그림을 잘 그렸으며, 교내 미술전람회에서 <풍경>으로 입선하기도 한다. 1926년 3월 5일 보성고보를 졸업하고 해경은 곧장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에 입학한다. 12명의 입학생 중에 조선인은 불과 3명에 지나지 않았으며, 해경은 3년 동안 수석을 다툴 정도로 뛰어난 성적을 유지한다. 2학년 때에는 경성고공 회람지인 <난파선>의 편집을 주도했으며 여기에 삽화와 자작시를 싣는다.
1929년 3월 경성고공을 졸업하고 그해 4월 조선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사로 취직한다. 그해 11월 조선총독부 관방회계과 영선계 기수로 자리를 옮긴다. 12월 조선건축학회 기관지 <조선(朝鮮)과 건축(建築)> 표지 도안 현상 공모에 1등과 3등으로 당선된다. 이듬해 그의 처녀작인 ≪십이월 십이일≫을 ≪조선(朝鮮)≫에 9회(2월∼12월)에 걸쳐 연재한다. 이 소설은 그의 최초의 한글 창작 소설이자 최초의 소설이며, 또한 유일한 장편소설이다. 그해 여름에는 그를 죽음으로 내몬 첫 각혈을 하게 되어 건강이 쇠약해진다.
1931년 7월 <조선과 건축> 표지 도안 현상 공모에 당선된 인연으로 이 잡지의 ‘만필(漫筆)’란에 일문 시 <이상(異常)한 가역반응(可逆反應)>을 발표한다. 시에 전념하면서도 해경은 그림을 놓지 않았으며, 조선미술전람회에 <자화상(自畵像)>이 입선되기에 이른다.
그는 서양화가 구본웅(具本雄)을 알게 된다. 꼽추 구본웅과의 교류는 그의 집으로까지 이어진다. 당시 구본웅의 집은 당대의 시인, 소설가, 화가, 영화감독 등이 모여들던 문화 아지트(구인회)였다. 1934년에 여기에 가입하여 박태원, 이태준, 정지용, 김기림, 김유정, 김환태 등과 교류한 전후로 수많은 작품이 탄생한다.
그러나 이러한 교류와 함께 고려해야 할 것은 백부의 죽음(1932년 5월 7일, 뇌일혈), 총독부 기수직 사임(1933년 3월), 금홍과의 만남과 다방 ‘제비’ 경영(1933년), 동거(1933∼1935년), 결별(1935년), 카페 ‘제비’·‘쓰루’·‘69’·‘무기’ 경영 실패, 결혼(1936년), 죽음(1937년) 등으로 이어지는 그의 생의 형언할 수 없고 돌이킬 수 없는 허무의 심연이다. 이것은 생의 아이러니와 역설을 가능하게 하여 독화(毒花)로서의 미적 파토스를 발생시킨다. 생의 파멸(육체의 죽음)과 예술의 탄생이 아이러니하게 혹은 역설적으로 뒤얽혀 있는 것이다.
1932년 3월과 4월에 소설 <지도(地圖)의 암실(暗室)>과 <휴업(休業)과 사정(事情)>, 시 <건축무한육면각체(建築無限六面角體)>는 그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후 <꽃나무>(1933), <이런 시(詩)>(1933), <거울>(1933)을, 1934년 8월에는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에 우리 시사(詩史)의 기념비적인 작품인 <오감도(烏瞰圖)>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독자의 거센 항의로 15회로 연재가 중단된 이 작품은 근대적인 삶과 예술 전반에 만연해 있는 상투성의 파괴와 해체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방가르드의 한 표상으로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그에게 1936년은 생의 한 정점을 이룬다. 무엇보다도 <지주회시>(6월), <날개>(9월), <봉별기>(12월) 같은 그의 생을 총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작품들이 모두 이해에 쓰였다. 그의 생이 맞닥트린 생의 심연을 넘어서려는 강한 열망을 담은 소설이 <날개>라면 <종생기>는 여기에서 훨씬 더 나아가 죽음 이후의 생이라는 역설까지 이야기하고 있다.
1936년 10월 중순경 동경에 건너가 동경부(東京府) 신전구(神田區) 신보정(神保町) 삼정목(三町目) 101의 4호의 니시카와가(西川家)에서 생활한다. 그곳에서 ‘삼사문학(三四文學)’ 동인들과 교유하기도 하고, 김기림, 안회남, 동생인 김운경과 서신을 교유하기도 하지만 동경 생활에 환멸을 느낀다. 1937년 2월 12일 일본 경찰에게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체포되어 니시간다(西神田) 경찰서에 34일간 수감되어 있다가 3월 16일 건강악화로 풀려난다. 결국 그는 1937년 4월 17일 새벽 동경제대 부속병원에서 생을 마감한다.
본관은 전주이며, 호는 금동, 금동인, 춘사 등을 사용했다. 1919년 최초의 문학동인지인 《창조》를 발간하고, 처녀작 「약한 자의 슬픔」을 발표했다. 하지만 이 때문에 귀국 후 출판법 위반 혐의로 일제에 체포되었고 사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목숨」(1921), 「배따라기」(1921), 「감자」(1925), 「광염 소나타」(1929) 등의 단편소설을 통해 간결하고 현대적인 문체로 문장 혁신에 크게 기여했다. 춘원 이광수의 계몽적인 경향에 맞서 사실주의적 수법을 사용했으며, 1925년 무렵부터 유행한 신경향파 및 프로문학에 맞서 예술지상주의를 표방하고 순수문학운동을 벌였다. 1933년에는 《조선일보》에 『운현궁의 봄』을 연재하는 한편 학예부장으로 입사했으나 얼마 후 사임하였다. 우익적 성향의 문인단체 결성을 주도하고, 제헌국회의 부의장을 지내는 등 해방 이후에도 활발한 사회 활동을 펼쳤으나 중풍으로 쓰러져 1951년 초 하왕십리의 자택에서 병사했다. 그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는 ‘동인문학상’이 1955년 제정되어 지금까지 명맥을 잇고 있다.
1900년 경북 대구에서 태어났다. 보성고보를 마치고 중국 상해 호강江대학교에서 독일어를 공부하다 3·1 운동을 맞아 귀국하였다. 《개벽》 《동명》 《시대일보》 등을 거치며 세계 문학 사조와 문화론에 대한 견문을 넓혔다. 단편 소설 「빈처」 「술 권하는 사회」 「운수 좋은 날」 등을 통해 현실 문제를 세련된 형식과 언어 감각으로 담아내는 데 성공하며 당대 최고의 기교주의 작가로 꼽혔다. 단편 소설로는 일제하 민족 문제를 포괄적으로 표현하지 못한다는 고민에서 점차 장편 소설로 창작 방향을 전환하였다. 그 결과 작가 활동 후반에 이르러 단편 소설의 담박한 문장 구성과 장편 소설의 역사적 시간관이 결합된 장편 소설 『무영탑』을 썼다. 단편 소설의 구성과 언어에 있어 뛰어난 감각을 가졌으면서도 장편 소설의 현실 지향성을 작품 세계 속에 포괄하기 위해 노력한 작가다. 1930년을 전후하여 《동아일보》 사회부장으로 재직하면서 언론인으로 활약한 바 있으며, 이 시기 ‘일장기 말살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기도 하였다. 1943년 지병으로 타계하였다.
1904년 평북에서 전통적인 대가족 제도의 전통을 지켜나가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삼봉공립보통학교를 나와서 중동학교에 입학했으나 근대적 교육제도를 멀리하는 조부의 엄명으로 중단하고, 다시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지만 역시 조부에 의해 중단하고 귀향했다. 한문 수학을 하면서도 김동인이 펴낸 동인지 《창조》를 읽으며 문학의 꿈을 키웠다. 1925년 조선문단에 <상환>이 추천되면서 문단에 나타났으며, 일본 도요대학에 유학하면서 새로운 문학의 길을 찾아 나섰다. 1935년 조선문단에 <백치 아다다>를 발표하여 작가로서의 지위를 확보했다. 조선일보 출판부에 근무하였으며 일본 천황 불경죄로 2개월간 수감되기도 했다. 1961년 현대문학에 <설수집>을 연재하던 중 사망했다.
군산에서 태어나 원광대학교에서 동양화를 공부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만화를 그리다가 그림책이 좋고 아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서 그림책 화가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그린 그림책으로는 「책상 서랍 속의 동화」「아파트를 지키는 구렁이」「열 살 아저씨」「느낌표 동화」「우리 생활을 편리하게 해 준 인류 최고의 발명왕 에디슨」「아우내 장터를 뒤흔든 열여덟 살 소녀의 만세 유관순」 「독창적인 서체를 만들어 낸 조선 최고 명필가 한석봉」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