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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는 것이 아니다 짓는 것이다 글쓰기 대가들에게 배우는 최고의 글쓰기 비법

김동인, 최학송, 김남천 외 저 | 루이앤휴잇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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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86273173 / 228쪽 146 x 2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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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반디앤루니스 리뷰

작가들도 배우는 글쓰기 대가들의 꼼꼼하고 탄탄한 글쓰기 비법

김동인, 김남천, 임화, 김영랑, 박용철, 이효석…… 각자 책 몇 권쯤은 너끈히 엮어낼 수 있는 우리 문학사의 내로라하는 작가들이자 글쓰기의 대가들로 꼼꼼하고 탄탄한 글쓰기로 이름 높다. 이에 많은 후배 문인들 역시 그들의 글에서 글쓰기를 배웠다고 고백한다.
그들에 의하면, 글은 무작정 쓴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적지 않은 사람이 글 때문에 고민하고, 글을 못 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에 목수가 집을 짓듯 꼼꼼하고 탄탄하게 글을 지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책은 탄탄하고 꼼꼼한 글 솜씨를 통해 수많은 독자를 매료시킨 그들의 글쓰기 철학과 비법, 원칙은 물론 글 쓰는 과정 및 글을 쓴 후에 생긴 흥미로운 뒷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이에 글쓰기를 두려워하거나 처음부터 글쓰기를 배우려는 사람들에게 매우 유용한 글쓰기 지침서이다.

출판사 리뷰

출판사 서평 “글은 쓰는 것이 아니라 짓는 것이다” 글을 쓰는 것은 집을 짓는 것과도 같다. 좋은 집을 지으려면 면밀한 설계도가 필요하듯, 글쓰기 또한 탄탄한 구조와 좋은 재료가 마련되지 않으면 좋은 글을 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그저 생각나는 대로 무작정 글을 쓰는 것은 설계도 없이 집을 짓는 것과도 같다. 과연, 그런 집이 세월의 무게를 이겨낼 수 있을까? 그런 집은 절대 오래 갈 수 없다. 또한, 독자를 설득하거나 이해시키는 것은 물론 감동하게 할 수도 없다. 독자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독자를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독자를 ... “글은 쓰는 것이 아니라 짓는 것이다” 글을 쓰는 것은 집을 짓는 것과도 같다. 좋은 집을 지으려면 면밀한 설계도가 필요하듯, 글쓰기 또한 탄탄한 구조와 좋은 재료가 마련되지 않으면 좋은 글을 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그저 생각나는 대로 무작정 글을 쓰는 것은 설계도 없이 집을 짓는 것과도 같다. 과연, 그런 집이 세월의 무게를 이겨낼 수 있을까? 그런 집은 절대 오래 갈 수 없다. 또한, 독자를 설득하거나 이해시키는 것은 물론 감동하게 할 수도 없다. 독자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독자를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독자를 감동하게 하기 위해서는 목수가 하나하나 정성을 다해 최고의 집을 짓듯 좋은 재료를 이용해 자신만의 철학과 생각이 담긴 글을 지어야만 한다. 작가들도 배우는 글쓰기 대가들의 꼼꼼하고 탄탄한 글쓰기 비법 버지니아 울프는 첫 소설 《출항》을 출간하기까지 무려 7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또한, 부커상 수상작인 살만 루시디의 《한밤의 아이들》은 16년 만에 세상에 나왔고,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거라》는 엔딩을 무려 47가지를 썼다가 하나로 결정했다. 그러니 그 작품의 얼개(어떤 사물이나 조직 전체를 이루는 짜임새나 구조)는 마치 잘 지은 한 채의 집처럼 꼼꼼하고 탄탄하기 이를 데 없다. 김동인, 김남천, 임화, 김영랑, 박용철, 이효석…… 각자 책 몇 권쯤은 너끈히 엮어낼 수 있는 우리 문학사의 내로라하는 작가들이다. 그들 역시 꼼꼼하고 탄탄한 글쓰기로 이름 난 대가들로, 많은 후배 문인들 역시 그들의 글에서 글쓰기를 배웠다고 고백한다. 그들에 의하면, 글은 무작정 쓴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적지 않은 사람이 글 때문에 고민하고, 글을 못 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에 목수가 집을 짓듯 꼼꼼하고 탄탄하게 글을 지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충분히 습작한 후 작가라고 불러도 전혀 부끄럽지 않을 때 비로소 작품을 발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도 부끄러운 증거물을 세상에 영원히 남기게 된다. - 김동인 어떤 지식이건 그 윤곽이나 일부분만 어렴풋이 알아서는 도저히 붓을 댈 수 없다. 사소한 부분까지 알아두지 않으면 단 한 줄의 묘사도 제대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 김남천 시, 소설 및 수필, 비평, 동요 등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에 관한 조언과 흥미로운 뒷이야기 《글, 쓰는 것이 아니다, 짓는 것이다》는 탄탄하고 꼼꼼한 글 솜씨를 통해 수많은 독자를 매료시킨 우리 문학사의 글쓰기 대가들의 글쓰기 철학과 비법, 원칙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시와 소설은 물론 수필, 비평, 동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 비법과 친절한 조언, 충고도 함께 제시하고 있어, 글쓰기를 두려워하거나 처음부터 글쓰기를 배우려는 사람들에게 매우 유용하다. 글 쓰는 과정 및 글을 쓴 후에 생긴 흥미로운 뒷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는 것 역시 하나의 볼거리다. 특히 글쓰기에 있어서 대가 소리를 듣는 그들 역시 글쓰기가 절대 쉽지만은 않음을 은밀히 고백하고 있다. 낳을 때의 고통이란! 그야말로 뼈가 깎이는 일이요, 살이 내리는 일이다. 그러니 펜을 들고 원고지를 대하기가 무시무시할 지경이다. 한 자를 쓰고 한 줄을 긁적거려 놓으면 벌써 상상할 때의 유쾌함과 희열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뜻대로 그려지지 않는 무딘 붓끝으로 말미암아 지긋지긋한 번민과 고뇌가 뒷덜미를 움켜잡는다. 피를 뿜는 듯한 느낌이란 아마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 현진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그리 든든하고 풍부한 천품을 타고 태어나지 못한 나로서는 무엇을 깨닫고, 느끼고, 사색하는 것이 아직 많이 부족하다. 그러니 펜을 잡는다는 것이 잘못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무엇을 쓴다는 것이 죄악 같을 뿐이다. - 나도향 글을 쓴다는 것은 제 살을 깎는 것과도 같았다. 쓰면 쓰는 만큼 건강이 부쩍 축났다. 이에 글이란 제 피로 아로새겨지는 것임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 계용묵

저자 소개

1922년 중앙고보를 거쳐 와세다대학 부속 제일와세다고등학원 문과에 입학했다. 이듬해 관동 대진재로 학업을 중도에 포기하고 귀국하여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기자를 역임했다. 1925년 단편 '세 길로'가 이광수의 추천으로 「조선문단」에 발표되어 문단에 등단했다. 이후 희곡 '사라지는 그림자', 단편 '화물자동차', '부촌' 등 동반작가적인 경향의 작품을 발표하다가 자전적 소설 '레디메이드 인생', '인텔리와 빈대떡' 등을 발표하면서 풍자성이 강한 사회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이어서 '치숙', 《탁류》 《태평천하》 등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특유의 풍자와 비판을 형상화시킴으로써 작가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다졌다. 120여 편의 소설 및 희곡과 50여 편의 평론 및 수필을 남겼다. 희곡 26편을 남길 정도로 다작한 극작가이기도 하다. 이 중에는 촌극이나 스케치 같은 짧은 작품이 많이 포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여건으로는 공연하기 어려운 작품이 많아 그중 <예수나 안 믿었드면> 한 편만 1937년 7월 중앙무대에서 공연되었다. 주목할 만한 희곡으로는 <제향날>, <심 봉사>, <당랑의 전설> 등이 있다. 해방 후 고향으로 내려가 힘겹게 생활하다가 지병인 폐결핵으로 인해 4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박용철(朴龍喆, 1904∼1938)
박용철은 1904년 8월 2일 전라남도 광산군 송정면 소촌리 363번지(현 광주광역시 광산군 소촌동 363번지)에서 마을의 대지주였던 부친 박하준(朴夏駿)과 모친 고광(高光)의 삼남으로 태어났으나, 장남과 차남이 어려서 죽었기 때문에 법률상 장남으로 자랐다. 
1920년 배재고등보통학교 졸업을 몇 달 앞두고 자퇴한 뒤, 1921년 봄 일본 도쿄의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중학부 4학년에 편입했다. 이곳에서 18세의 박용철은 한 살 연상인 김영랑과 처음 만난 이래 평생 교분을 나눴다. 1923년 도쿄외국어학교 독일문학과에 입학했으나,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이어서 연희전문학교 문과 1학년 2학기로 편입했으나 몇 달 만에 자퇴했다. 당시 연희전문학교에서 한문학과 조선 문학을 강의하던 위당 정인보에게 시조를 배우고, 일성(一星) 이관용에게 독일어를 배우면서 동시에 일어, 영어, 독일어로 된 해외 시집을 탐독했고 또 영국 낭만주의 시,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비극과 소네트를 탐독하면서 희곡에 심취하기도 했다. 1925년 봄 누이동생 박봉자가 배화여자고동보통학교에 입학하게 되면서 함께 상경한 이후 영어와 독일어 및 문학과 철학, 역사 등을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1926년 지속된 유폐 생활로 인한 위병(胃病)으로 세브란스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는 등 건강이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1926년 창작 희곡 <말 안 하는 시악시>가 연희전문학교 학생극 대본으로 선정되어 처음 공연되었다. 1928년 9월 박봉자의 요청에 따라 쓴 배화 학생극용 창작 희곡 <석양>이 공연 무대에 올랐다. 1929년 4월 박봉자가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학과에 입학했으나, 박용철은 소촌리에 남아 영시와 독일시 번역에 몰두했다. 박용철의 대표작으로 평가되는 시들, 즉 <떠나가는 배>, <이대로 가랴마는>, <밤기차에 그대를 보내고>, <싸늘한 이마> 등은 대부분 이 시기에 창작되었다.



1929년 10월 22일 김영랑과 함께 시 잡지를 발간하기 위해 경성으로 가서 정지용을 처음 만났고, 12월 10일경 변영로와 정인보 등을 만나 순수 서정시파인 ‘시문학’ 동인을 구성했다. 이렇게 해서 ≪시문학≫에 수록된 외국 시 번역에서 영미 시는 정지용이, 프랑스 시는 이하윤이, 독일 시는 박용철이, 한시는 정인보가 전담하게 되었다. 이후 1930년 가을 무렵 박용철이 옥천동에서 견지동으로 이사하면서 견지동 집은 ‘문예월간사’ 사무실 역할을 겸하게 되었다. ≪문예월간≫이 종간된 이후 박용철은 신문과 잡지에 글을 기고하기 시작했다. 평론을 비롯해 해외 번역시와 수필, 창작시를 꾸준히 발표했다. 같은 해 7월 ‘해외문학파’가 주축이 된 ‘극예술연구회’가 결성되면서 이하윤의 중재로 박용철이 ‘극예술연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후 1934년 1월 ≪문학≫ 창간호를 발간, 편집과 발행 및 재정을 박용철이 맡았다. 이어서 같은 해 4월 ‘극예술연구회’의 기관지 ≪극예술≫의 편집과 발행을 담당했다. 



1935년 봄 박용철은 정지용, 김영랑과 함께 폐병으로 병석에 누운 임화의 병문안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시집 발간에 대해 합의하고 나서 산실된 원고들을 모아 10월 27일 ≪정지용 시집≫을 발간하고 이어 같은 해 11월 5일 ≪영랑 시집≫을 시문학사에서 발간했다. 이후 <‘기교주의’설의 허망>, <기술의 문제> 등을 발표하면서 비평 활동에 전념했다.



1936년 무렵 박용철의 공식적인 문단 활동은 거의 눈에 띄지 않지만 다시 문학잡지 간행을 계획했다. 이헌구, 구본웅 등과의 논의를 거쳐 잡지명을 ≪청색지(靑色紙)≫로 하고, 이듬해 1월 문단인들에게 발간 취지서를 발송하기까지 했으나 결국 잡지 간행은 무산되고 말았다. 1937년 초겨울부터 박용철의 건강이 다시 악화되기 시작했다. 병석에서 <시단: 정축년 회고>, <시적 변용에 대해서>를 발표하고 곧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다. 의사소통이 불가능해 필답으로만 겨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태에서 시와 편지를 썼다고는 하나, 시 <만폭동>이 그의 마지막 공식 발표작이 되었다. 
1938년 5월 12일 오후 5시 후두결핵으로 사직동 자택에서 3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가산 이효석은 강원도 평창에서 출생하였다.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거쳐 경성 제국대학 영문과를 졸업하였으며, 1928년 '조선지광'지에 단편소설 '도시와 유령'을 발표하면서 문단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효석의 문학은 시적 서정을 소설의 세계로 승화함으로써 한국 단편소설의 백미를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사실적 묘사보다는 장면의 분위기를, 섬세한 디테일보다는 상징과 암시의 수법을 이용하는 그의 문체는 우리 단편소설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메밀꽃 필 무렵'에 이르러 전성기를 누렸다. 또한 '돈''메밀꽃 필 무렵' 등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성(性)의 탐색을 통해 그는 일제시대의 암울한 현실과 대비되는 순수하고, 순결한 세계를 인간의 원초적 본능인 성(性)과 결합시킨 시적 서정소설로 새로이 개척해냈다. 이로써, 자연과 인간 본능의 순수성을 시적 경지로 끌어올렸다는 평가와 함께 당시 이태준, 박태원 등과 함께 대표적 작가로 주목받았던 이효석은 그러나 그의 황금 같은 문학적 결실을 다 누려보지도 못한 채 1942년 결핵성 뇌막염으로 36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1908년 강원도 춘천에서 출생.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고독과 빈곤 속에서 우울하게 자랐다. 고향을 떠나 열두 살 때 서울 재동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고 휘문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27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으나 이듬해 그만두었다. 1930년 늑막염을 앓기 시작한 이래 평생을 가난과 병마에 시달렸다. 유명한 명창이자 기생인 박녹주를 짝사랑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실의에 빠진 김유정은 고향인 춘천 실레 마을에 금병의숙錦屛義塾을 세워 불우한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1935년 이무영, 이상, 정지용 등이 속한 순수문예 단체인 구인회九人會에 가입하고, 같은 해 , <조선일보>에 , <소낙비>, , <중외일보>에 , <노다지>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짧은 문단 생활 중에도 김유정은 병과 가난과 싸우면서 30여 편의 단편을 남기고, 1937년 스물아홉의 젊은 나이로 누나 집에서 결핵과 늑막염으로 세상을 떠났다. 대표작으로는 <금따는 콩밭>, <봄봄><따라지>, <두꺼비>, <동백꽃>, <땡볕> 등이 있다. 


 

1911∼1953.


소설가·평론가·수필가로서, 남과 북에서 많은 글을 남긴 이 땅의 대표적인 문인 중 한 사람이다. 김남천은 카프의 조직원으로서, 문학을 통해 한국 사회의 근본 변혁을 이루고자 했다. 김남천의 삶과 문학의 근저에 놓인 것이 혁명적 정치성인 것은 이와 관련된 것이다. 

김남천은, 혁명적 정치성의 이념에 몸을 싣고 한국 사회의 변혁을 향해 내달았던 많은 문인들과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금기의 대상으로 묶여 있다가 1988년의 해금 조치에 따라 서점에서, 학교의 문학 교실에서 다시 만날 수 있게 된 문인이다. 

김남천의 삶과 문학은 한국 근현대사의 격랑 속에서, 그것을 넘어 나아가고자 하는 어기찬 열정에 이끌려 펼쳐졌다. 역사의 거친 물결 한복판에 들어 크게 흔들렸지만 김남천은 쓰러지지 않고 고투하여 큰 문학을 일구었다. 90여 편의 평론, 40여 편의 소설, 두 편의 희곡, 한 권으로 묶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수필 등이 구축하는 높은 봉우리가 염상섭, 채만식, 이기영, 임화 등 다른 우뚝한 봉우리들과 나란히 20세기 초중반기 문학사의 산줄기에 솟아 있다. 

연구자들의 오랜 추적에도 불구하고 김남천의 최후는 정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이 사실은 상징적이다. 휴전선을 넘어 전해진 ‘소문’에 근거한 몇 가지 설만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당대 한국 사회의 주변부였던 평안남도 성천에서 태어나 한국 사회의 전면 해체와 재구성을 꿈꾸었으나 실패하여 캄캄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만 한 진보적 정신의 삶과 문학을 압축해서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된다. 

김남천은 생전에 장편소설 ≪대하≫(1939)와 ≪사랑의 수족관≫(1940), 창작집 ≪소년행≫(1939)과 ≪삼일운동≫(1947) 그리고 ≪맥≫(1947) 등, 다섯 권의 책을 펴냈다. 생산량에 비해 터무니없다 할 정도로 적은데,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미완성 작품이 많다는 점이다. 김남천 연보 속에는 ≪낭비≫, ≪1945년 8·15≫, ≪시월≫ 등 미완의 장편들이 줄지어 서 있다. 그것들을 포함하여 책에 묶이지 않은 작품들을 찾아 정리하는 것은 후인들의 책무일 터이다. 

본관은 전주이며, 호는 금동, 금동인, 춘사 등을 사용했다. 1919년 최초의 문학동인지인 《창조》를 발간하고, 처녀작 「약한 자의 슬픔」을 발표했다. 하지만 이 때문에 귀국 후 출판법 위반 혐의로 일제에 체포되었고 사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목숨」(1921), 「배따라기」(1921), 「감자」(1925), 「광염 소나타」(1929) 등의 단편소설을 통해 간결하고 현대적인 문체로 문장 혁신에 크게 기여했다. 춘원 이광수의 계몽적인 경향에 맞서 사실주의적 수법을 사용했으며, 1925년 무렵부터 유행한 신경향파 및 프로문학에 맞서 예술지상주의를 표방하고 순수문학운동을 벌였다. 1933년에는 《조선일보》에 『운현궁의 봄』을 연재하는 한편 학예부장으로 입사했으나 얼마 후 사임하였다. 우익적 성향의 문인단체 결성을 주도하고, 제헌국회의 부의장을 지내는 등 해방 이후에도 활발한 사회 활동을 펼쳤으나 중풍으로 쓰러져 1951년 초 하왕십리의 자택에서 병사했다. 그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는 ‘동인문학상’이 1955년 제정되어 지금까지 명맥을 잇고 있다. 
1900년 경북 대구에서 태어났다. 보성고보를 마치고 중국 상해 호강江대학교에서 독일어를 공부하다 3·1 운동을 맞아 귀국하였다. 《개벽》 《동명》 《시대일보》 등을 거치며 세계 문학 사조와 문화론에 대한 견문을 넓혔다. 단편 소설 「빈처」 「술 권하는 사회」 「운수 좋은 날」 등을 통해 현실 문제를 세련된 형식과 언어 감각으로 담아내는 데 성공하며 당대 최고의 기교주의 작가로 꼽혔다. 단편 소설로는 일제하 민족 문제를 포괄적으로 표현하지 못한다는 고민에서 점차 장편 소설로 창작 방향을 전환하였다. 그 결과 작가 활동 후반에 이르러 단편 소설의 담박한 문장 구성과 장편 소설의 역사적 시간관이 결합된 장편 소설 『무영탑』을 썼다. 단편 소설의 구성과 언어에 있어 뛰어난 감각을 가졌으면서도 장편 소설의 현실 지향성을 작품 세계 속에 포괄하기 위해 노력한 작가다. 1930년을 전후하여 《동아일보》 사회부장으로 재직하면서 언론인으로 활약한 바 있으며, 이 시기 ‘일장기 말살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기도 하였다. 1943년 지병으로 타계하였다. 
호는 도향·소정지옹(笑亭之翁)·은하(隱荷), 필명은 빈(彬). 처음에는 감상과 낭만을 주조로 했으나, 차츰 당대 현실문제를 파헤친 사실주의 계열의 소설을 썼다. 본명은 경손(慶孫). 아버지 성연(聖淵)과 어머니 김성녀(金姓女)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경손이라는 이름은 할아버지 병규(炳奎)가 41세에 얻은 아들에게서 회갑에 손자를 얻자 '경사스런 손자'라는 뜻으로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1914년 기독교청년회관 안에 있던 공옥보통학교를 거쳐 1918년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21년 〈계명〉 편집일을 했고, 1922년 홍사용·현진건·이상화·박영희 등과 함께 〈백조〉 동인으로 참여했다. 이듬해 경북 안동에서 1년간 보통학교 교사로 일했다. 

1911년 9월 2일 황해도(黃海道) 장연군(長淵郡) 전택면(專澤面) 비석리(碑石里) 281번지에서 소지주이면서 무역으로 성공했던 아버지 노계일(盧啓一)과 서울 출신의 어머니 김홍기(金鴻基) 사이에서 둘째 딸로 태어났다. 1917년 여섯 살 때 홍역을 심하게 앓다가 살아났는데, 하늘이 주신 명으로 살게 되었다 해서 천명(天命)으로 개명한 것이 호적명이 되었다. 
열아홉 살이 되던 1930년 4월에 이화여전(梨花女專) 영문과에 입학해 변영로, 김상용, 정지용 등에게서 직접 가르침을 받았고, 시 습작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다음 해 이화여전 교지 [이화] 3호(3월 4일 발행)에 시 [고성허(古城虛)에서], 수필 [삼오(三五)의 달 아래서], 단편소설 [일편단심]을 발표했다. 
1938년 1월 1일에 시 49편을 수록한 첫 시집 [산호림]을 자비로 출판, 김상용, 정지용, 변영로 등 이화여전 은사들이 주선해 남산동 경성호텔에서 출판기념회를 열었는데, 이 자리에서 '한국의 마리 로랑생'이라는 칭송을 들었다. 1942년에는 조선문인협회에 모윤숙, 최정희 등과 함께 간사로 참여했는데, 이 협회가 조선문인보국회로 강화 개편될 때에도 적극 참여했다. 이 시기부터 친일시를 쓰는 등 친일 행위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1945년 2월 25일 두 번째 시집 [창변(窓邊)](29편 수록)을 매일신보 출판부에서 간행했다. 
1950년(39세) 한국전쟁 때 미처 피난하지 못하고, 문학가동맹에 가입해 우익 문인들을 체포하는 일을 도왔다. 이로 인해 9 28 수복 후 10월에 반역문화인으로 서울시경 수사본부에 잡혀가서 부역자 처벌 특별법에 의해 20년 형을 받고 서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다시 부산으로 이감되었다. 1 4 후퇴 후 당시 대통령 비서실에 있던 김광섭(金珖燮)의 도움으로 출감하게 되었다. 
1953년(42세) 3월 30일 세 번째 시집 [별을 쳐다보며]를 희망출판사에서 간행했다.
마흔여섯 살이 되던 1957년, 3월 7일 오후 3시에 거리에서 쓰러져 청량리 위생병원 1호실에 입원했다. 병명은 재생 불능성 뇌빈혈로 얼마 후 회복해 퇴원했으나, 그 후 병세가 악화되어 6월 16일 새벽 1시 30분에 누하동 자택에서 사망했다. 사후 1년 만에 유고 시집인 네 번째 시집 [사슴의 노래](42편 수록)를 한림사에서 간행했다. 김광섭과 모윤숙이 서문을 썼다.


 

임화(林和, 1908∼1953)의 본명은 임인식(林仁植)이다. 임화는 필명이다. 1908년 10월 13일, 서울 종로의 낙산 아래에 위치한 보통 가정에서 태어난다. 1926년부터 본격적으로 문학 활동을 시작한다. 시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하는 한편, 카프(KAPF)에 가입해 이후 우리나라 프롤레타리아문학 활동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다. 1927년에는 ‘임화’라는 필명을 쓰기 시작하면서 다다이즘 성격의 시를 발표하기도 한다. 카프에 몸을 담기 시작한 이래 일관되게 계급주의문학을 추구해 나갔다. 이듬해인 1928년에는 박영희의 지도를 받으며 김기진, 송영, 김영팔, 최서해, 최승일, 박팔양, 이기영, 안석영 등 카프 맹원들과 친교를 맺고 프로문학 운동에 더욱 깊숙이 관여한다. 
1929년에 박영희의 도움으로 동경으로 가서 김남천, 안막 등을 만나 훗날 카프를 장악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다. 이른바 제3전선파로 불리는 일본 유학파들과 함께 활동하면서 카프시인으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때다. 바로 이 시기, 도일을 전후해 단편 서사시 양식을 개척한다. 또한 이즈음에 김기진과 박영희의 이른바 내용·형식 논쟁이 일어나는데, 임화는 박영희의 편에 서서 김기진을 기회주의적 개량형 활동가라고 비판한다. 이 무렵 영화에도 관심을 보여 <유랑>의 주인공으로 출연하는 한편 <혼가>를 직접 제작하여 개봉하기도 한다. 
1931년, 동경 생활을 끝내고 귀국해 안막, 김남천, 권환 등과 손잡고 카프의 구세대 인물들을 일선에서 후퇴시키고 카프의 주도권을 장악한다. 1931년에 벌어진 일제의 카프 맹원들에 대한 제1차 검거 사건에서 박영희와 함께 체포되어 3개월간 옥고를 치른다. 이듬해에 김남천 등과 함께 카프의 제2차 방향 전환을 주도한 후 최고 지도자인 서기장 자리에 오른다. 1934년에는 박영희의 전향 선언이 나오고 세칭 신건설사 사건(전주 사건)으로 불리는 카프 제2차 검거 사건이 일어난다. 이때에 카프 맹원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에도 불구하고 그 핵심 인물이었던 그는 폐병으로 투옥을 면한다. 그러나 조직 내외의 여건이 악화되자 임화는 1935년에 카프 해소파들과 함께 카프를 해산하기에 이른다. 
1936년 이후 정세 악화로 문학을 통한 정치적 투쟁이 원천적으로 봉쇄되자, 문학의 정치적·현실적인 문제보다는 그 본질 문제나 문학사 쪽으로 관심을 돌린다. 1938년에 이르러 첫 시집 ≪현해탄(玄海灘)≫을 발간하는데, 이 시집은 계급주의 이념과 서정성이 절실하게 조화를 이룬 수준 높은 시 세계를 보여 주었다. 이듬해에는 ≪개설 신문학사≫를 집필하고 1940년에는 일제 치하에서 가장 방대하고 수준 높은 평론집인 ≪문학의 논리≫를 발간하는 한편, 1944년에는 ≪조선 영화 연감≫과 ≪조선 영화 발달사≫ 등 영화 관련 저서를 집필하기도 한다. 
광복이 되자 임화는 이원조, 김남천, 이태준 등과 함께 ‘조선문학건설본부’를 결성하고 그 중심인물이 된다. 1946년에는 위조지폐 사건인 이른바 ‘정판사 사건’이 터지면서 미군정의 남로당 탄압이 적극화되는데, 이 어려운 때에 임화는 남로당 외곽 단체인 ‘민전(民戰)’의 기획 차장을 맡아 남로당 문화 담당 최고 이론가로 활동한다. 그런 와중에도 1947년에는 제2시집 ≪찬가(讚歌)≫와 시선집 ≪회상시집(回想詩集)≫을 발간해 문학 활동을 꾸준히 전개한다. 미군정의 남로당원 탄압이 심해지자 끝내 월북해 황해도 해주로 이동한다. 
1948년 이후 박헌영이 있는 평양으로 가서 그를 지지하는 문학 노선을 견지하면서 ‘조선문화예술총동맹’ 부위원장으로 활동한다. 1950년, 6·25전쟁이 터지자 인민군을 따라 서울로 돌아와 잠시 머문 뒤 종군작가단의 일원으로 낙동강 전선까지 내려간다. 이때의 전선 체험은 1951년에 발간한 네 번째 시집 ≪너 어느 곳에 있느냐≫에 생생하게 형상화되어 있다. 이듬해에 관제 비평가 엄호석 등에 의해 이 시집의 시편들이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원칙에 위배된다는 정치적 비판을 받는다. 1953년 8월 6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재판부에서 미제의 고정간첩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지은 책으로 시집 <현해탄>, <찬가>, <회상 시집>, 평론집 <문학의 논리>가 있다.
1904년 평북에서 전통적인 대가족 제도의 전통을 지켜나가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삼봉공립보통학교를 나와서 중동학교에 입학했으나 근대적 교육제도를 멀리하는 조부의 엄명으로 중단하고, 다시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지만 역시 조부에 의해 중단하고 귀향했다. 한문 수학을 하면서도 김동인이 펴낸 동인지 《창조》를 읽으며 문학의 꿈을 키웠다. 1925년 조선문단에 <상환>이 추천되면서 문단에 나타났으며, 일본 도요대학에 유학하면서 새로운 문학의 길을 찾아 나섰다. 1935년 조선문단에 <백치 아다다>를 발표하여 작가로서의 지위를 확보했다. 조선일보 출판부에 근무하였으며 일본 천황 불경죄로 2개월간 수감되기도 했다. 1961년 현대문학에 <설수집>을 연재하던 중 사망했다.
1903년 전남 강진 출생으로 본병은 윤식, 아호는 영랑이다. 강진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휘문고를 거쳐, 1920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 학원 영문학과에서 수학했다. 그후 박용철, 정지용, 정인보 등과 《시문학》동인으로 참가하면서 활발히 시작활동을 펼쳤다. 영랑은 생전에 《영랑시집》(1935년), 《영랑시선》(1949년) 두 권의 시집을 출간했으나, 1950년 한국전쟁 때 북한군의 유탄을 맞아 47세로 애석하게 운명했다. 
우리 민족의 정한을 노래한 시인으로 알려진 영랑의 시 세계는 동양적 은일의 시관과 한시, 특히 고산 윤선도의 시조 등에서 깊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랑의 시는 자연에 자신의 감정을 맑게 투영한 탁월한 서정시로, 추상적 관념을 거부하고 자연물에 대한 순정한 심정을 투사함으로써, 고요한 내면을 지순한 언어로 표상한 점이 특징이다. 그러나 그는 자연에 대한 음풍농월적인 태도를 지양하고, 자신의 내면을 관조하면서 동시에 순수하고 깨끗한 자연 앞에서 승복하는 자세를 보여줌으로써 일제 치하의 억압적 신민지 현실을 날카롭게 드러냈다. 또한 그는 창씨개명, 신사참배, 단발령을 끝가지 거부하는 절개와 기개를 보여주었다. 

* 국가 중요민속자료 영랑생가 
강진읍 남성리 탑동에 있는 영랑 생가는 <모란이 피기까지는> <오-매 단풍 들것네>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같이> 등 주옥같은 영랑의 시가 탄생한 배경이기도 하다. 1903년 이 집에서 태어난 영랑이 1948년 서울로 이주한 뒤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었으나 1985년 강진군에서 매입하여 전라남도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영랑 후손들의 고증을 받아 전면 보수를 한 뒤 2007년 10월 12일 국가지정문화재인 중요민속자료 제252호로 승격되었다.
신경향파의 대표적 소설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각지를 전전하며 밑바닥 생활을 뼈저리게 체험하였으며, 이것이 그의 문학의 근간을 이루었다. 대표작으로 《탈출기》, 《홍염》, 《폭군》 등이 있다. 
《매일신보》 현상 공모에 단편 <구룡산>이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농촌을 중심으로 민족 현실에 대한 다채로운 깨달음과 질병(폐결핵)에 맞서 싸우는 한 개인의 실존적 고독 등을 작품에 담았다. 주요 작품으로 시 《봄과 님이》, 소설 《석이》와 《사장》이 있다.

책 속에서

좋은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습작을 충분히 해야 한다. 그리고 그 기간을 넘어선 뒤에 비로소 정식으로 발표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지나치게 서두르는 경향이 있다. 세상으로부터 인정받고, 작가로 인정받으려는 성급함 때문이다. 그러나 완전하지 못한 작품을 발표하는 것은 자신에게도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작가로서 칭송받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부끄러운 증거물을 세상에 영원히 남기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충분히 습작한 후 작가라고 불러도 전혀 부끄럽지 않을 때 비로소 작품을 발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모욕에 불과하다.
- 김동인, <소설가 지망생에게 해주고 싶은 당부> 중에서

아무리 훌륭한 생각이라도 그것을 표현할 만한 기교가 없다면 그 생각은 하나의 생각으로서 머릿속에서만 맴돌고 있을 뿐, 예술품은 아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내용 없이 기교로서만 읽히는 작품이 적지 않다. 그런 화장 미인 같은 작품은 우리의 생활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 설령, 도움을 준다고 한들 미미함에 지나지 않으며, 오히려 독이 될 뿐이다. 따라서 기교는 내용의 종속물로 삼아야 한다.
- 최학송, <내용과 기교> 중에서

테마는 현실에 배양시켜야만 비로소 생명을 갖는다. 현실적인 생활을 시킨다고 해도 좋다. 다시 말해 테마와 현실이 털끝만큼이라도 빈틈이 있어서는 안 되며, 무리가 있어서도 안 된다. 즉, 서로 어울려야 한다. 이것이 소설을 잘 쓰는 원칙 제1장 1조다.
- 채만식, <소설을 잘 씁시다> 중에서

신인은 글자 한 자 한 자에 문인의 생애가 묻어 있어야 하며, 글 한 구, 글 한 편에 각기 생명이 깃들어 있어야 한다. 또한 기성작가를 능가할 만한 작품을 창작함으로써 신인 된 패기와 실력을 보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피와 땀이 섞인 노력과 파도와 같은 정열, 바다와 같은 끈기가 필요하다. 나아가 문학의 생리를 벗어난 일체의 행동은 자신의 문학을 그릇되게 하는 원인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 김영랑, <신인에게 주는 글> 중에서

몇 천 년을 흘러온 문학의 역사를 볼 때, 세계적인 명작은 그 어느 것을 막론하고 새로운 사상과 감정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표현과 새로운 작품을 위해서는 기성의 문학이 표현하지 못한 새로운 사상과 감정이 필요하다. 이에 새로운 사상과 감정 찾기에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새로운 감정이야말로 새로운 문학의 모태이기 때문이다.
- 계용묵,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 중에서

어떤 지식이건 그 윤곽이나 일부분만 어렴풋이 알아서는 도저히 붓을 댈 수 없다. 사소한 부분까지 알아두지 않으면 단 한 줄의 묘사도 제대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태 혹은 풍속과 함께 당대 사회의 세계사적 이념까지 자세히 알지 않고는 어떤 인물이나 사건도 자세히 묘사할 수 없다. 또 안다고 해서 전부를 그릴 수 있는 것도 아니요, 아는 것을 그대로 고스란히 기록화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 김남천, <창작여묵> 중에서

정말 좋은 수필은 시시하고 지루한 일상의 사소사(아주 작은 일)를 사상의 높이까지 고양하고, 거목의 잎사귀 하나하나가 강하고 신선한 생명을 간직하듯, 일상사가 작가가 가진 높은 사상과 순량한 모럴리티의 충만한 표현으로서의 가치를 품고 있어야 한다. 즉, 수필은 좋은 생각만으로 써지는 것이 절대 아니다. 명철한 관찰안(사물을 바라보는 눈)이 있어야만 한다. 여기에 좋은 사상 역시 필요하다.
- 임화, <수필론> 중에서

시인은 오늘 불러야 할 시의 소재가 뒹굴고 있는 청계천 다리 밑이며, 성 언저리의 빈민굴, 부랑아 수용소의 주변을 답사하고, 쓰레기통을 헤쳐, 거기서 아름다운 장미를 피워야 한다. 그것이 오늘 한국 시인들의 노래가 되어야 한다. 쓰레기통보다 더 추한 것이라도 상관없다. 요는 이 추한 소재를 시인이 아름답게 처리하는 데 달려 있기 때문이다.
- 노천명, <시의 소재에 대하여> 중에서

작품의 아기가 설 때처럼 유쾌한 일은 없다. 그 거룩한 맛, 기쁜 맛이란 하늘을 줘도 바꾸지 않을 것이며, 아무리 큰 땅덩어리를 줘도 바꾸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낳을 때의 고통이란! 그야말로 뼈가 깎이는 일이요, 살이 내리는 일이다. 그러니 펜을 들고 원고지를 대하기가 무시무시할 지경이다. 한 자를 쓰고 한 줄을 긁적거려 놓으면 벌써 상상할 때의 유쾌함과 희열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뜻대로 그려지지 않는 무딘 붓끝으로 말미암아 지긋지긋한 번민과 고뇌가 뒷덜미를 움켜잡는다. 피를 뿜는 듯한 느낌이란 아마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 현진건, <쓸 때의 유쾌함과 낳을 때의 고통>

목차

목차
프롤로그 | 글! 쓰는 것이 아니다, 짓는 것이다
소설가 지망생에게 해주고 싶은 당부 _ 김동인
창작수첩 _ 김동인
비평에 대하여 _ 김동인
내용과 기교 _ 최학송
소설을 쓰지 않는 이유 _ 채만식
소설을 잘 씁시다 _ 채만식
문학을 나처럼 해서는 안 된다 _ 채만식
한 작가로서의 항변 _ 채만식
여백록 _ 채만식
신인에게 주는 글 _ 김영랑
나의 집필 태도 _ 계용묵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 _ 계용묵
소설가란 직업 _ 계용묵
나는 이렇게 소설가가 되었다 _ 계용묵
무명작가 목 군에게 _ 계용묵
내 붓끝은 먼 산을 바라본다 _ 계용묵
편지 쓰는 요령 _ 계용묵
창작일기 _ 계용묵
글 쓰는 사람들에게 _ 박용철
문학의 본질 _ 김남천
시대와 문학의 정신 _ 김남천
작가의 생활 _ 김남천
작가의 정조 _ 김남천
작품의 제작과정 _ 김남천
창작 여묵 _ 김남천
잠자는 목공 _ 허 민
수필론 _ 임 화
작가의 눈과 문학의 세계 _ 임 화
소재의 빈곤 _ 이효석
기교 문제 _ 이효석
첫 고료 _ 이효석
수상록 _ 이효석
독서 _ 이효석
시의 소재에 대하여 _ 노천명
병상의 생각 _ 김유정
쓸 때의 유쾌함과 낳을 때의 고통 _ 현진건
쓴다는 것이 죄악 같다 _ 나도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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