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1996.
1912년 평북 정주 출생으로 오산고보를 졸업했다. 1930년 1월 조선일보 신춘문예에서 소설 부문에 당선되었다. 이 인연으로 조선일보 사주인 계초 방응모 선생의 장학금을 받아 일본 청산 학원 영문과를 졸업했다.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로 근무하다가 함흥 영생고보 교사를 거쳐, 1940년 만주로 건너가 유랑생활을 했다. 1945년 해방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고당 조만식 선생의 비서로 활동했다. 시집 <사슴>을 발표하면서 1930년대부터 1940년대 초반까지 왕성한 시작 활동을 했으나 북한의 공산주의 하에서 아동문학, 특히 취학 전 아동을 대상으로 한 동화시 창작에 전념을 쏟았다. 1957년 북한에서 발행된 동화시집 <집게네 네 형제>는 일본에 소개되어 작품성이 높다는 평가를 받았다. 우리 문단에서는 잊혀져 오다1987년 <백석 시선집>, 1988년 <가즈랑집 할머니>, 1989년 <흰 바람벽이 있어>, 1991년 <멧새 소리> 등이 출판되었다.
만주 북간도에서 태어났다. 1931년, 14세에 명동소학교를 졸업했으며 15세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 1941년에는 서울의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시샤대학 영문과 학생으로 입학했다. 귀향하려던 시점에 항일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복역중 건강이 악화되어 1945년 2월에 짧은 생을 마친다. 그의 죽음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옥중에서 일제의 생체실험 대상이 되어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사를 주기적으로 맞은 결과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28세의 젊은 나이에 타계하고 말았으나, 그는 인생과 조국의 아픔에 고뇌하는 시인이었다. 자신의 작품들을 모아 1941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발간하려 하였으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하숙 친구였던 정병욱이 자필로 쓴 시들을 보관하고 있다가 그의 사후에 묶어 출간하였다. 이때 그의 유작인 <쉽게 쓰여진 시>가 《경향신문》에 게재되기도 했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그의 대표작으로, 어두운 시대 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았던 그의 인간됨과 사상을 반영하는 아름다운 시로 평가받고 있다. 현재 그의 유해는 용정에 묻혀 있으며 그를 기리는 시비(詩碑)가 연세대학교 교정에 세워져 있다.
1910년 9월 23일 새벽 6시경(음력 8월 20일 묘시경) 지금의 서울시 종로구 사직동에서 아버지 김연창(金演昌)과 어머니 박세창(朴世昌)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3세 때 조부 김병복(金炳福)의 성화로 자손이 없는 백부 김연필(金演弼)의 양자로 들어가게 된다. 1917년 4월 인왕산 밑에 자리한 4년제 학교인 신명학교(新明學校)에 입학한다. 과목 중에 지리와 도화를 특히 좋아했다고 한다.
1921년 신명학교를 졸업한 뒤 불교 재단에서 경영하는 견지동의 동광학교(東光學校)에 입학한다. 하지만 해경이 입학한 지 4년째 되던 해 동광학교가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이 인수한 보성고보에 합병되어 4학년으로 편입하게 된다. 그림을 잘 그렸으며, 교내 미술전람회에서 <풍경>으로 입선하기도 한다. 1926년 3월 5일 보성고보를 졸업하고 해경은 곧장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에 입학한다. 12명의 입학생 중에 조선인은 불과 3명에 지나지 않았으며, 해경은 3년 동안 수석을 다툴 정도로 뛰어난 성적을 유지한다. 2학년 때에는 경성고공 회람지인 <난파선>의 편집을 주도했으며 여기에 삽화와 자작시를 싣는다.
1929년 3월 경성고공을 졸업하고 그해 4월 조선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사로 취직한다. 그해 11월 조선총독부 관방회계과 영선계 기수로 자리를 옮긴다. 12월 조선건축학회 기관지 <조선(朝鮮)과 건축(建築)> 표지 도안 현상 공모에 1등과 3등으로 당선된다. 이듬해 그의 처녀작인 ≪십이월 십이일≫을 ≪조선(朝鮮)≫에 9회(2월∼12월)에 걸쳐 연재한다. 이 소설은 그의 최초의 한글 창작 소설이자 최초의 소설이며, 또한 유일한 장편소설이다. 그해 여름에는 그를 죽음으로 내몬 첫 각혈을 하게 되어 건강이 쇠약해진다.
1931년 7월 <조선과 건축> 표지 도안 현상 공모에 당선된 인연으로 이 잡지의 ‘만필(漫筆)’란에 일문 시 <이상(異常)한 가역반응(可逆反應)>을 발표한다. 시에 전념하면서도 해경은 그림을 놓지 않았으며, 조선미술전람회에 <자화상(自畵像)>이 입선되기에 이른다.
그는 서양화가 구본웅(具本雄)을 알게 된다. 꼽추 구본웅과의 교류는 그의 집으로까지 이어진다. 당시 구본웅의 집은 당대의 시인, 소설가, 화가, 영화감독 등이 모여들던 문화 아지트(구인회)였다. 1934년에 여기에 가입하여 박태원, 이태준, 정지용, 김기림, 김유정, 김환태 등과 교류한 전후로 수많은 작품이 탄생한다.
그러나 이러한 교류와 함께 고려해야 할 것은 백부의 죽음(1932년 5월 7일, 뇌일혈), 총독부 기수직 사임(1933년 3월), 금홍과의 만남과 다방 ‘제비’ 경영(1933년), 동거(1933∼1935년), 결별(1935년), 카페 ‘제비’·‘쓰루’·‘69’·‘무기’ 경영 실패, 결혼(1936년), 죽음(1937년) 등으로 이어지는 그의 생의 형언할 수 없고 돌이킬 수 없는 허무의 심연이다. 이것은 생의 아이러니와 역설을 가능하게 하여 독화(毒花)로서의 미적 파토스를 발생시킨다. 생의 파멸(육체의 죽음)과 예술의 탄생이 아이러니하게 혹은 역설적으로 뒤얽혀 있는 것이다.
1932년 3월과 4월에 소설 <지도(地圖)의 암실(暗室)>과 <휴업(休業)과 사정(事情)>, 시 <건축무한육면각체(建築無限六面角體)>는 그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후 <꽃나무>(1933), <이런 시(詩)>(1933), <거울>(1933)을, 1934년 8월에는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에 우리 시사(詩史)의 기념비적인 작품인 <오감도(烏瞰圖)>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독자의 거센 항의로 15회로 연재가 중단된 이 작품은 근대적인 삶과 예술 전반에 만연해 있는 상투성의 파괴와 해체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방가르드의 한 표상으로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그에게 1936년은 생의 한 정점을 이룬다. 무엇보다도 <지주회시>(6월), <날개>(9월), <봉별기>(12월) 같은 그의 생을 총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작품들이 모두 이해에 쓰였다. 그의 생이 맞닥트린 생의 심연을 넘어서려는 강한 열망을 담은 소설이 <날개>라면 <종생기>는 여기에서 훨씬 더 나아가 죽음 이후의 생이라는 역설까지 이야기하고 있다.
1936년 10월 중순경 동경에 건너가 동경부(東京府) 신전구(神田區) 신보정(神保町) 삼정목(三町目) 101의 4호의 니시카와가(西川家)에서 생활한다. 그곳에서 ‘삼사문학(三四文學)’ 동인들과 교유하기도 하고, 김기림, 안회남, 동생인 김운경과 서신을 교유하기도 하지만 동경 생활에 환멸을 느낀다. 1937년 2월 12일 일본 경찰에게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체포되어 니시간다(西神田) 경찰서에 34일간 수감되어 있다가 3월 16일 건강악화로 풀려난다. 결국 그는 1937년 4월 17일 새벽 동경제대 부속병원에서 생을 마감한다.
1902년 5월 15일 충북 옥천 출생으로,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도쿄의 도시샤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휘문고등보통학교 시절,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선근과 함께 ‘학교를 잘 만드는 운동’으로 반일(半日) 수업제를 요구하는 학생대회를 열었고, 이 일로 무기정학 처분을 받기도 했다. 유학 시절에는 유학생 잡지인 《학조(學潮)》에 시 〈카페 프란스〉 등을 발표했다. 일본에서 귀국 후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영어교사로 재직하다가, 1945년 해방이 되자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로 일했다.
1930년에 김영랑과 박용철이 창간한 《시문학》의 동인으로 참가했으며, 1933년 《가톨릭 청년》 편집고문으로 있으면서 이상의 시를 세상에 알렸다. 모더니즘 운동의 산실이었던 ‘구인회(九人會)’에서 활동했고, 1939년에는 《문장》의 추천위원으로 있으면서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등의 청록파 시인을 등단시켰다.
1950년 한국전쟁 이후의 행적에 여러 설이 있으나 월북했다가, 1953년경 북한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명순은 1920년대 활동한 한국의 여성 시인이자 소설가다. 평안남도 평양 출생으로 1917년에 <청춘(靑春)>지의 현상문예에 단편 <의심(疑心)의 소녀>가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주요 작품은 소설에 <의심의 소녀>, <칠면조(七面鳥)>(1921), <외로운 사람들>(1924), <탄실이와 주영이>(1924), <도라다볼 >(1925), < 뭇는 날 밤>(1925), <손님>(1926), <나는 사랑한다>(1926), <모르는 사람갓치>(1929) 등이 있으며, 시에는 <동경>, <창궁>, <거룩한 노래> 등이 있다.
지금까지 밝혀진 김명순의 작품은 시 86편(번역시 포함), 소설 22편(번역소설·소년소설 포함), 수필·평론 20편, 희곡 2편 등이다(남은혜의 <김명순 문학 연구> 참조).
그의 소설 작품은 인물에 대한 지적인 분석과 심리 묘사에 치중하였으며, 시 작품은 연정(戀情), 자연의 아름다움, 추억 등을 노래한 것이 주류를 이루었다. 탄실(彈實)은 필명이자 아명이다. 1925년에 작품집 ≪생명의 과실(果實)≫(한성도서주식회사)과 발행연도 미상의 ≪애인의 선물≫(회동서관)을 출간하는 등 1910년대 등단하여 1930년대까지 작품을 발표한 김명순은 1920년대 중반에 나혜석, 김원주 등과 함께 근대 초기의 여성 문인으로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하지만 이후 도쿄(東京)로 가서 작품은 쓰지 못한 채 가난과 정신병에 시달리다 동경 아오야마 뇌병원(靑山腦病院)에서 죽은 것으로 전해진다.
1918년 충북 충주에서 태어난 권태응 선생님은 1937년 일본 와세다 대학 정경학과에 입학하였고, 1939년 ‘독서회 사건’으로 1년간 감옥 생활을 하였습니다. 귀국하여 폐결핵 요양을 하던 중 1951년 병세가 악화되어 34세의 나이로 돌아가셨습니다. 1948년 동시집 『감자꽃』을 냈습니다.
1911년 9월 2일 황해도(黃海道) 장연군(長淵郡) 전택면(專澤面) 비석리(碑石里) 281번지에서 소지주이면서 무역으로 성공했던 아버지 노계일(盧啓一)과 서울 출신의 어머니 김홍기(金鴻基) 사이에서 둘째 딸로 태어났다. 1917년 여섯 살 때 홍역을 심하게 앓다가 살아났는데, 하늘이 주신 명으로 살게 되었다 해서 천명(天命)으로 개명한 것이 호적명이 되었다.
열아홉 살이 되던 1930년 4월에 이화여전(梨花女專) 영문과에 입학해 변영로, 김상용, 정지용 등에게서 직접 가르침을 받았고, 시 습작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다음 해 이화여전 교지 [이화] 3호(3월 4일 발행)에 시 [고성허(古城虛)에서], 수필 [삼오(三五)의 달 아래서], 단편소설 [일편단심]을 발표했다.
1938년 1월 1일에 시 49편을 수록한 첫 시집 [산호림]을 자비로 출판, 김상용, 정지용, 변영로 등 이화여전 은사들이 주선해 남산동 경성호텔에서 출판기념회를 열었는데, 이 자리에서 '한국의 마리 로랑생'이라는 칭송을 들었다. 1942년에는 조선문인협회에 모윤숙, 최정희 등과 함께 간사로 참여했는데, 이 협회가 조선문인보국회로 강화 개편될 때에도 적극 참여했다. 이 시기부터 친일시를 쓰는 등 친일 행위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1945년 2월 25일 두 번째 시집 [창변(窓邊)](29편 수록)을 매일신보 출판부에서 간행했다.
1950년(39세) 한국전쟁 때 미처 피난하지 못하고, 문학가동맹에 가입해 우익 문인들을 체포하는 일을 도왔다. 이로 인해 9 28 수복 후 10월에 반역문화인으로 서울시경 수사본부에 잡혀가서 부역자 처벌 특별법에 의해 20년 형을 받고 서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다시 부산으로 이감되었다. 1 4 후퇴 후 당시 대통령 비서실에 있던 김광섭(金珖燮)의 도움으로 출감하게 되었다.
1953년(42세) 3월 30일 세 번째 시집 [별을 쳐다보며]를 희망출판사에서 간행했다.
마흔여섯 살이 되던 1957년, 3월 7일 오후 3시에 거리에서 쓰러져 청량리 위생병원 1호실에 입원했다. 병명은 재생 불능성 뇌빈혈로 얼마 후 회복해 퇴원했으나, 그 후 병세가 악화되어 6월 16일 새벽 1시 30분에 누하동 자택에서 사망했다. 사후 1년 만에 유고 시집인 네 번째 시집 [사슴의 노래](42편 수록)를 한림사에서 간행했다. 김광섭과 모윤숙이 서문을 썼다.
1903년 전남 강진 출생으로 본병은 윤식, 아호는 영랑이다. 강진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휘문고를 거쳐, 1920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 학원 영문학과에서 수학했다. 그후 박용철, 정지용, 정인보 등과 《시문학》동인으로 참가하면서 활발히 시작활동을 펼쳤다. 영랑은 생전에 《영랑시집》(1935년), 《영랑시선》(1949년) 두 권의 시집을 출간했으나, 1950년 한국전쟁 때 북한군의 유탄을 맞아 47세로 애석하게 운명했다.
우리 민족의 정한을 노래한 시인으로 알려진 영랑의 시 세계는 동양적 은일의 시관과 한시, 특히 고산 윤선도의 시조 등에서 깊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랑의 시는 자연에 자신의 감정을 맑게 투영한 탁월한 서정시로, 추상적 관념을 거부하고 자연물에 대한 순정한 심정을 투사함으로써, 고요한 내면을 지순한 언어로 표상한 점이 특징이다. 그러나 그는 자연에 대한 음풍농월적인 태도를 지양하고, 자신의 내면을 관조하면서 동시에 순수하고 깨끗한 자연 앞에서 승복하는 자세를 보여줌으로써 일제 치하의 억압적 신민지 현실을 날카롭게 드러냈다. 또한 그는 창씨개명, 신사참배, 단발령을 끝가지 거부하는 절개와 기개를 보여주었다.
* 국가 중요민속자료 영랑생가
강진읍 남성리 탑동에 있는 영랑 생가는 <모란이 피기까지는> <오-매 단풍 들것네>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같이> 등 주옥같은 영랑의 시가 탄생한 배경이기도 하다. 1903년 이 집에서 태어난 영랑이 1948년 서울로 이주한 뒤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었으나 1985년 강진군에서 매입하여 전라남도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영랑 후손들의 고증을 받아 전면 보수를 한 뒤 2007년 10월 12일 국가지정문화재인 중요민속자료 제252호로 승격되었다.
1900년 황해도 송화군 상리면 양지리에서 태어났다. 평양 숭실중학교에 입학, 신문학을 접하면서 톨스토이, 하이네, 보들레르, 단눈치오를 탐독했다. 졸업 후 귀향해 교편을 잡지만 문학에 대한 열정만큼은 여전했다. 낮에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밤에는 문학에 대한 꿈을 불태우며 “죽기까지 문학에 헌신”하고자 했다. 1920년 봄, 교사 생활을 접고 상경해 한성도서주식회사 편집부에 취직하면서 문단 활동을 시작한다.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발행하는 ≪학생계≫와 ≪서울≫지 기자로 활동하면서 여기에 시를 발표했다. ‘花爛春城’을 줄여 ‘춘성(春城)’이란 호를 사용한 것도 이때부터다. 표절 시비에 휘말린 뒤 울분과 억울함, 자괴감으로 괴로워하다 1926년 늦은 나이로 동경 유학길에 오른다. 폐 질환으로 학업을 채 마치지 못하고 귀국해 병상에서 은둔 생활을 했다. 1931년 문단에 복귀, 1934년에 ≪신인문학≫을 창간하며 출판 사업에 뛰어들지만 경제난으로 지속하지 못했다. 1937년 ≪조선일보≫에 취직해 소설 ≪인생특필≫을 연재하면서 대중적 인기를 재확인하고 시집 ≪백공작≫을 비롯해 수필집을 발간하며 정력적으로 문학 활동을 이어 갔다. 그러던 중 1940년 41세 나이에 갑작스런 발병으로 사망했다.
(金尙鎔, 1902∼1951)
월파(月坡) 김상용(金尙鎔)은 1902년 8월 27일(음력), 경기도 연천군 군남면 왕림리에서 출생했다. 1917년에는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것과 동시에 학생 운동에 가담했다. 그 후 낙향해 한 살 위인 박애봉(朴愛鳳)과 결혼했다. 학생 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경성제일고보에서 제적당하고 보성고보로 전학해 1921년 졸업했다. 1922년에는 일본 도쿄로 건너가 릿쿄대학 예과에 입학했고, 그해 장녀 정호(貞浩)를 얻었다. 1924년 릿쿄대학 영문학과에 진학했고, 1926년에 시 <일어나거라>를 10월 5일자 ≪동아일보≫에 발표함으로써 시인으로서 생을 시작한다. 1927년 릿쿄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귀국해 보성고보 교원 겸 이화여자전문학교 강사로 부임했다. 1928년에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했다. 1932년 시 <무제(無題)> 및 투르게네프의 산문시 번역을 ≪동아일보≫와 ≪동방평론(東方評論)≫ 등에 발표했다. 1933년에는 시 <무제(無題)>를 ≪신동아(新東亞)≫ 3월호에 발표했다. 1934년 차남 성호(聖浩)가 출생했고, 1935년에는 논문 <오오마아 카이얌의 루바이야트 연구>를 ≪시원(詩苑)≫ 1호부터 5호까지 연재했으며, 시 <나>를 ≪시원≫ 1호에 발표하는 등 ≪시원≫에서 집중적으로 작품을 발표한다. 1936년 시 <그대들에게>를 ≪신동아≫ 3월호에 발표했다. 이해에 구인회에 가담해 구인회 기관지 ≪시와 소설≫에 시 <눈 오는 아침>을 발표했다. 1938년 수필 <우부우어(愚夫愚語)>를 ≪삼천리문학≫ 창간호에 발표했다. 1939년에는 시 <어미소>, <추억>을 ≪문장≫ 창간호에 발표했고, 이해 5월에 모두 27편의 시를 수록한 유일 시집 ≪망향(望鄕)≫을 문장사에서 간행했다. 1941년 시 <병상음이수(病床吟二首)>를 ≪춘추(春秋)≫ 12월호에 발표했다. 1943년 일제의 탄압으로 영문학 강의가 철폐되어 이화여전을 사임했고, 해방이 될 때까지 종로 2가 장안빌딩 자리에서 장안화원을 김신실(金信實)과 공동 경영했다. 1945년 해방을 맞아 군정 때 강원도 도지사로 발령받았지만, 수일 만에 사임하고 다시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로 부임했다. 1946년 미국으로 건너가 보스턴대학에서 영문학을 연구하다가, 1949년 귀국해 이화여자대학교 학무처장을 맡는다. 1950년 2월 풍자적 내용의 수필집 ≪무하 선생 방랑기≫를 수도문화사에서 간행했고, ≪망향≫을 이대출판부에서 재간행했다. 9·28 수복 후 공보처 고문, 코리아타임즈 사장을 역임하다가 1951년 부산으로 피난해 6월 20일쯤 김활란의 부산 대청동 집 필승각에서 식사한 후 식중독에 걸려 몸이 상했고 그 후유증으로 이틀 후 부전동 57번지 셋집에서 49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1955년 부산에 가매장했던 유해를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마련한 비용으로 서울 망우리 묘지로 이장했다. 그의 묘비에는 시 <향수>가 새겨져 있다.
(1900∼1929)
이장희(李章熙)는 1900년 11월9일, 경상북도 대구부 서성정 1정목 103번지에서 당대 손꼽히는 부호이자 전에 중추원 참의를 지낸 이병학과 박금련의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박금련은 이병학 사이에서 3남 1녀를 낳았다).
이장희의 처음 이름은 양희였으나 그가 20세 되던 해인 1920년 4월에 개명한 호적에는 장희(樟熙)로 고친 바 있고 뒤에 작품을 쓰기 시작한 1923∼1924년 사이에는 장희(章熙)로 줄곧 썼는데 이것이 필명이 되었다. 아호는 고월(古月. 혹 근자에 ‘孤月’·‘苦月’ 등을 그의 아호의 하나로 보고자 하는 일이 있으나 그는 아호로서 ‘古月’만을 썼을 뿐이다)이다. 아버지 이병학은 장희의 생모 박금련이 1905년 사망한 이래 박강자, 조명희 등을 맞아들여 슬하에 12남 9녀를 두었는데 이들 중 유아 때 사망한 7남매(3남 4녀)를 제외하면 모두 9남 5녀의 14남매가 된다.
이장희는 아호 고월 이외에 어렸을 적에 ‘꿀돼지’, ‘꿀봉’, ‘박쥐’와 같은 별명이 있었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신동이란 소릴 들었으며 1905년 다섯 살에 어머니와 사별하고 계모 슬하에서 자랐다. 박금련이 사망한 후 들어온 계모 박강자는 1923년 8월 사망하기까지 이병학과의 사이에 11남매를 두었다.
1906년 이장희는 6세로 대구보통학교에 입학해 1912년 졸업했으며, 1913년 13세로 일본에 건너가 경도중학교에 입학한다(하나 근자 조사해 확인한 결과 이장희가 경도중학에 입학 내지 졸업한 사실이 없다고 한다). 1918년 18세로 귀국했는데 일설에는 일본 청산학원을 지망하려다가 실패했다는 설이 있으나 그 근거는 극히 희박하다.
1924년 24세 때 5월 문예 동인지 ≪금성≫ 3호에 이장희라는 필명으로 시 <실바람 지나간 뒤>, <새 한 머리>, <불노리>, <무대>, <봄은 고양이로다> 등 5편을 처음으로 발표했다. 이 가운데 <봄은 고양이로다>는 그가 첫 번째로 발표한 시 작품 중에서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또한 이 잡지에 톨스토이의 소설 <장구한 귀양>을 번역해 실었다. 12월 여성 전문지 ≪신여성≫(2권 12호)에 시 <동경>을 발표했는데 혹 일설에는 이 작품의 모티프는 이장희가 일본 경도에 체류했을 때 알고 지냈던 소녀 에이코에게서 찾은 것이라고 한다.
1925년 25세가 된 그는 ≪신여성≫(3권 2호, 1월호)에 시 <석양구>를 ,종합 문예지 ≪생장≫(5호, 5월호)에 <고양이의 꿈>, <가을밤>을 발표하고 시사 종합지인 ≪여명≫(1호, 6월호)에 <청천의 유방>과 <비 오는 날>을, ≪신민≫(5호, 9월)에 <사상(沙上)>, <비인 집>을 발표한다. 계속해서 ≪신민≫(6호, 10월호)에 <달밤 모래 우에서>와 <연> 등을 발표한다.
1926년 26세로 ≪신민≫(9호, 1월호)에 시 <겨울의 모경>을, ≪여명≫(7호, 6월호)에 <봄 하눌에 눈물이 돌다>와 ≪신민≫(16호, 8월호)에 <하일 소경>을, ≪신민≫(19호,11월호)에 <들에서>와 <눈>을 발표한다.
1927년에는 ≪조선문단≫ 20호, 4월호)에 시 <가을ㅅ밤>을, ≪신민≫(26호, 6월)에 <눈은 나리네>, <봄철의 바다>를, ≪신민≫(28호, 8월)에 <저녁>을 발표했으며, 이듬해에는 ≪여시≫(45호, 6월호)에 시 <저녁>, <녀름ㅅ밤 공원에서>를 발표한다.
1929년에는 ≪신민≫(45호, 1월호)에 <버레 우는 소리>, <귓드람이>를, ≪문예공론≫ (1호, 5월호)에 <적은 노래>, <봉선화>, <눈 나리는 날>을, ≪중외일보≫(11월 14일)에 <어느 밤>을 발표한다. 그리고 발표연대 및 게재지 미상의 <여름밤>, <쓸쓸한 시절>을 남겼다.
11월 3일 오후 3시경, 이장희는 대구부 서성정 1정목 103번지 본가의 머슴이 거처하던 작은 방에서 극약을 복용하고 유서 한 장, 유언 한마디도 남기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두 계모와 배다른 형제와의 갈등, 일제 식민지 정책에 동조해 항상 일본인의 통역을 종용하던 아버지와의 사상적 대립과 갈등, 버린 자식 취급과 냉대로 인해 자존심 강하고 섬세하던 그는 죽기 2, 3년 전부터 심한 신경쇠약에 시달렸다고 한다. 자살하기 몇 달 전, 서울에서 고향인 대구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는 외출도 않고 거의 두문불출이었다. 다만 죽기 3, 4일 전 평소 친하게 지내던 공초 오상순의 거처를 찾아갔다. 공초가 머물던 여관집 주인이 한 달 전에 동래에 가고 없다고 말하니, 안색이 돌연 창백해지며 어깨를 툭 떨어트리고 멍하니 한참 동안 말도 없이 서서 있다가 눈에 눈물이 글썽해 가지곤 힘없이 발길을 돌리더란 것이다. 주인은 하도 이상하기에 문 밖에 서서 황혼 가운데 사라져 가는 그의 뒷모양을 멀리 바라본즉 곧 쓰러질 듯해서 마음이 몹시 안됐더라고 했다는 것이다(공초의 술회). 그 후 그는 2, 3일간 방에서 나오지도 않고 배를 깔고 엎드려 수없이 금붕어를 방바닥에 그려 놓고 1929년 11월 3일 오후에 극약을 마셨다고 전해진다.
장지는 선산인 대구부 신암정으로 정해져 유해가 안치되었으나 지금 현재 그의 묘소는 찾을 수가 없다고 한다.
《매일신보》 현상 공모에 단편 <구룡산>이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농촌을 중심으로 민족 현실에 대한 다채로운 깨달음과 질병(폐결핵)에 맞서 싸우는 한 개인의 실존적 고독 등을 작품에 담았다. 주요 작품으로 시 《봄과 님이》, 소설 《석이》와 《사장》이 있다.
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가 해체된 시기인 1935∼36년부터 평론, 산문, 시에 이르는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며 자유롭게 작품활동을 하였지만, 요절하여, 그 활동 기간은 카프 해소 이후 10여 년뿐이다. 현실도피적인 성향인 데다 후두결핵으로 문단활동도 활발하게 하지 못하였다. 그는 병든 몸으로 직접 한지에다 모필로 시집을 묶었는데, 그 첫 장에는 ‘가장 괴로운 시대에 나를 나허주신 어머님게 드리노라’(1940년 2월)라고 쓰여 있다.
시인. 1927년경부터 시작을 시작하여 많은 작품을 신문과 잡지에 발표했다. 기독교계에서 운영하는 잡지 《청년(靑年)》에 발표하면서부터 등단했다. 독실한 신앙심을 바탕으로 한 맑고 고운 서정성의 종교 시를 씀으로써 선구자적 소임을 다한 여류시인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일본 에도 시대 활약했던 하이카이시(俳諧師, 일본 고유의 시형식인 하이카이, 즉 유머러스한 내용의 시를 짓던 사람)이다. 15세 때 고향 시나노를 떠나 에도를 향해 유랑 길에 올랐다. 그 과정에서 소바야시 지쿠아로부터 하이쿠(俳句) 등의 하이카이를 배웠다. 잇사는 39세에 아버지를 여윈 뒤, 계모와 유산을 놓고 다투는 등 어려서부터 역경을 겪은 탓에 속어와 방언을 섞어 생활감정을 표현한 구절을 많이 남겼다.
일본의 방랑시인. 5.7.5의 정형시인 하이쿠에 자유율을 도입한 일본의 천재시인이다. 그의 평생소원은 ‘진정한 나의 시를 창조하는 것’과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고 죽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이쿠 하나만을 쓰는 데 삶을 바쳤다. 겉으로는 무전걸식하는 탁발승이었지만, 어쩔 수 없는 한량에 술고래에다 툭하면 기생집을 찾는 등 소란을 피우며 문필가 친구들에게 누를 끼쳤다. 그래도 인간적인 매력이 많아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산토카를 모델로 한 만화 〈흐르는 강물처럼〉의 실제 주인공이다.
이세(伊勢) 하이카이의 선조. 전국(戰國)시대 내궁(內宮4)의 신관(神職)이다. 내궁 네기(禰宜)인 소노다 모리히데의 9남으로 저명한 후지나미 우지츠네의 외손이다. 신궁의 세력이 아주 쇠약하던 중세 말엽, 정사위(正四位)·일네기(一禰宜)가 되었다. 신을 모시는 한편, 이이오 소기 소장을 존경하고 사모하여 하이카이(徘諧)·연가(連歌)에 관심을 두고 《신센츠쿠바슈(新撰莵玖波集)》에 투고했다. 덴분 5년(天文,1536)에 ‘초하루구나! 신의 시대도 생각나는구나’라고 읊었다. ‘가미지산 내가 지금까지 해온 일도, 앞으로 할 일도 산봉우리의 소나무 바람 소나무 바람’은 유명하다.
미국의 인상주의 화가. 미국의 도시와 해안을 주로 그렸다. 3,000점이 넘는 그림, 유화, 수채화, 에칭, 석판화 등을 제작했으며 20세기 초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가 중 한 명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미술품 및 공동품을 많이 소장한 성공한 사업가이며, 어머니는 미국의 소설가 너새니엘 호손의 후손이다. 1879년경부터 초기 유화를 만들기 시작했으나 선호하는 장르는 수채화였고 대부분 풍경화였다. 정식 미술 교육을 받지 못했으나, 1886년 프랑스의 줄리앙 아카데미에서 구상적 드로잉과 회화를 공부했으며, 인상주의를 미국 미술계에 알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미국 인상주의의 선도적 역할을 했지만, 신인상주의와 후기인상주의로 전환될 때 뒤늦게 인상주의에 합류했다. 후기 작품 중에 가장 독특하고 유명한 작품으로는 ‘깃발 시리즈(Flag Series)’로 알려진 30여 점의 그림이 있다. 1916년 뉴욕 5번가에서 열린 미국의 세계1차대전 참전 퍼레이드에서 영감을 얻어 연작을 만들었다. 그중 〈빗속의 거리〉는, 2009년 재선에 성공한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자신의 집무실을 재정비하면서 걸어놓아 화제가 되었다.
1960년대 미국에서 인상주의 화풍이 부활하기 전까지, 하삼은 ‘비운의 버려진 천재’로 남았으나, 1970년대에 프랑스의 인상주의 작품들이 천문학적인 가격으로 거래되자, 하삼과 미국의 인상주의학파들은 다시 인기를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