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 북간도에서 태어났다. 1931년, 14세에 명동소학교를 졸업했으며 15세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 1941년에는 서울의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시샤대학 영문과 학생으로 입학했다. 귀향하려던 시점에 항일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복역중 건강이 악화되어 1945년 2월에 짧은 생을 마친다. 그의 죽음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옥중에서 일제의 생체실험 대상이 되어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사를 주기적으로 맞은 결과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28세의 젊은 나이에 타계하고 말았으나, 그는 인생과 조국의 아픔에 고뇌하는 시인이었다. 자신의 작품들을 모아 1941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발간하려 하였으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하숙 친구였던 정병욱이 자필로 쓴 시들을 보관하고 있다가 그의 사후에 묶어 출간하였다. 이때 그의 유작인 <쉽게 쓰여진 시>가 《경향신문》에 게재되기도 했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그의 대표작으로, 어두운 시대 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았던 그의 인간됨과 사상을 반영하는 아름다운 시로 평가받고 있다. 현재 그의 유해는 용정에 묻혀 있으며 그를 기리는 시비(詩碑)가 연세대학교 교정에 세워져 있다.
1644년 지금의 우에노 부근에서 가난한 하급 무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23세 무렵 도세이로 이름을 바꾸고, 교토로 진출하여 기타무라 기긴에게 본격적으로 사사했다. 이후 에도에서 당시 발흥하던 단린풍을 익혔으며, 35세에 이르러서는 하이쿠의 스승으로 독립했다. 그러나 당시 하이쿠의 주류를 이루던 재기어린 말장난과 경박한 해학에 한계를 느낀 바쇼는 37세에 선생의 자리를 버리고, 암자에 은거하며 두보나 백거이, 소동파 등의 시풍에 심취했다. 이 무렵 그를 따르던 한 제자가 그의 암자에 파초나무를 심었는데, 이때부터 그를 파초, 즉 바쇼라 부르게 되었다.
이후 4년여의 암자 생활을 정리하고 오랜 방랑의 길을 나섰으며, 여러 차례의 여행을 통한 수많은 기행문을 남겼다. 그 중에서도 특히 7개월에 걸쳐 동북 지방을 여행하며 쓴 <오쿠로 가는 작은 길>은 오늘날에도 그가 남긴 족적을 따라 여행하는 수많은 살마들이 있을 정도로 사랑을 받고 있다. 자신만의 독특한 색체로 하이쿠에 높은 문학성을 부여한 '쇼풍'을 창시했으며, 1694년 나가사키로 가던 도중 오사카에서 객사했다. 지은 책으로 <노자라시 기행>, <오이노 고부미>, <사라시나 기행>, <사가 일기> 등이 있다.
1902년 5월 15일 충북 옥천 출생으로,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도쿄의 도시샤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휘문고등보통학교 시절,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선근과 함께 ‘학교를 잘 만드는 운동’으로 반일(半日) 수업제를 요구하는 학생대회를 열었고, 이 일로 무기정학 처분을 받기도 했다. 유학 시절에는 유학생 잡지인 《학조(學潮)》에 시 〈카페 프란스〉 등을 발표했다. 일본에서 귀국 후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영어교사로 재직하다가, 1945년 해방이 되자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로 일했다.
1930년에 김영랑과 박용철이 창간한 《시문학》의 동인으로 참가했으며, 1933년 《가톨릭 청년》 편집고문으로 있으면서 이상의 시를 세상에 알렸다. 모더니즘 운동의 산실이었던 ‘구인회(九人會)’에서 활동했고, 1939년에는 《문장》의 추천위원으로 있으면서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등의 청록파 시인을 등단시켰다.
1950년 한국전쟁 이후의 행적에 여러 설이 있으나 월북했다가, 1953년경 북한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879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났다. 자는 정옥, 속명은 유천이며, 득도 때의 계명은 봉완, 법명은 용운, 법호는 만해이다. 19세에 출가하여 강원도 인제 백담사에서 김연곡사에게서 득도했다.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을 주도했으며, 최남선이 작성한 '독립선언서'의 자구를 수정하고 공약삼장을 첨가했다.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발표했고, 그 후 「조선일보」, 「동아일보」, 「불교」지에 작품을 발표하며, 작품활동과 불교 혁신운동을 계속했다. 민족의 해방을 한 해 남긴 1944년 심우장에서 입적했다. 지은 책으로 <정선강의채근담>, <님의 침묵>, <조선불교유신론>, <십현담주해>, <불교대전>, <흑풍>, <박명> 등이 있다.
윤곤강(1911∼1950)은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는 시인이다. 같은 해에 태어난 문인으로 김남천, 노천명, 정비석, 안수길, 박영준, 윤석중, 이원수 등을 꼽을 수 있는데, 윤곤강은 이들과 더불어 척박한 한국의 근현대문학을 일군 시인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올해 한국작가회의와 대산문화재단 주관으로 개최된 ‘탄생 100주년 문학인 기념문학제’에서 그의 시 <별과 새에게>가 낭송된 것도 그의 위상을 어느 정도 가늠하게 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시 <나비>와 <해바라기> 등이 국어 교과서에 수록된 점과 그의 시론집 ≪시와 진실≫(1948)이 김기림의 ≪시론≫에 이어 우리 문학사에서 두 번째로 발간된 점도 한국의 근현대문학사에서 차지하는 그의 적잖은 비중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렇듯 윤곤강은 우리의 근현대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커다란 족적을 남긴 시인이라 할 수 있다.
윤곤강은 1911년 9월 24일에 충남 서산군 서산읍 동문리 777번지에서 부친 윤병규(尹炳奎)와 모친 김안수(金安洙) 사이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출생한다. 아호 ‘곤강(崑崗)’은 천자문의 “금생려수(金生麗水) 옥출곤강(玉出崑崗)”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1930년에 일본 센슈(專修)대학에 입학해 ≪시인춘추(詩人春秋)≫로 활동하던 그는 1931년 11월에 종합지인 ≪비판(批判)≫(7호)에 <녯 성터에서>를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데뷔하게 된다. 이후 이 ≪비판≫을 비롯해서 ≪조선일보≫, ≪우리들≫, ≪중앙≫, ≪조선중앙일보≫ 등에 시를 지속적으로 발표한다. 1933년 일본에서 귀국한 그는 ≪신계단(新階段)≫(8호)에 평론 <반종교문학의 기본적 문제>를 발표해 시뿐만 아니라 비평 활동도 같이 한다. 1934년 2월 10일 현실 비판적인 작품 활동을 해 오던 윤곤강은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인 ‘카프(KAPF)’에 가입한다. 그러나 몇 개월 뒤 제2차 카프 검거 사건에 연루되어 7월에 전북 경찰부로 송환되었다가 장수(長水)에서 5개월간 옥살이를 하고 12월에 석방된다. 당시 수감 생활의 모습은 그의 시 <향수 1>, <향수 2>, <향수 3>, <창공>, <일기초>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해에 처음으로 소설 <이순신>을 ≪형상≫(1호)에 발표한다. 이후 그는 충남 당진읍 유곡리로 낙향했다가 1936년에 상경해 본격적인 작품 활동에 들어간다.
1937년에 서울의 사립학교인 화산(華山)학교에서 교원으로 근무하며 그의 첫 시집 ≪대지(大地)≫(풍림사)를 발간하게 된다. 이듬해에 제2시집 ≪만가(輓歌)≫(동광당서점)를 펴낸다. 그리고 1939년에는 제3시집 ≪동물 시집≫(한성도서주식회사)을 발간하게 되고, 다음해에 제4시집 ≪빙화(氷華)≫를 출간하는 등 4년에 걸쳐 시집 네 권을 펴내는 왕성한 모습을 보여 준다. 1943년에 명륜전문학교(성균관대학교 전신) 도서관에서 근무하던 그는 ‘조선문인보국회(朝鮮文人報國會)’ 시부회(詩部會) 간사로 임명되기도 한다. 1944년 동거하던 김원자와 사별하게 된 그는 충남 당진읍 읍내리 368번지로 낙향한다. 이 시기 일제의 강제 징용을 피하기 위해 면 서기로 근무한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 상경한 그는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일제강점기 카프에 가담해 식민지 현실을 비판적으로 표출하던 작품 세계가 이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1946년 모교인 보성고보 교사로 근무하게 되고, 이후 그는 조선문학가동맹을 탈퇴한다. 이 시기 문우들과 함께 해방 기념 시집인 ≪횃불≫을 발간한다. 1947년 그는 성균관대 시간강사로 출강하면서 편주서인 ≪근고조선가요찬주(近古朝鮮歌謠撰註)≫(생활사)를 펴낸다. 1948년에 중앙대학교 교수로 부임한 그는 고독과 신경쇠약에 시달리면서도 왕성한 작품 활동을 보여 준다. 제5시집 ≪피리≫(정음사)와 제6시집 ≪살어리≫(정음사)를 펴냈으며, 김기림의 ≪시론≫에 이어 두 번째로 시론집 ≪시와 진실≫(정음사)과 찬주서 ≪고산가집(孤山歌集)≫(정음사)을 발간한다. 그러나 그는 건강이 악화되어 1950년 1월 7일 서울 종로구 화동 138−113번지에서 작고하게 되고, 충남 당진군 순성면 갈산리에 안장된다. 제주 조각공원과 보성고교, 그리고 충남 서산시 서산문화회관과 그의 묘소 입구 등에 시비가 세워져 있다.
본명 정식(廷湜). 평북 구성(龜城) 출생. 오산학교(五山學校) 중학부를 거쳐 배재고보(培材高普)를 졸업하고 도쿄상대[東京商大]에 입학하였으나 간토대진재[關東大震災]로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당시 오산학교 교사였던 안서(岸曙) 김억(金億)의 지도와 영향 아래 시를 쓰기 시작하였으며, 1920년에 [낭인(浪人)의 봄], [야(夜)의 우적(雨滴)], [그리워] 등을 [창조(創造)]지에 발표하여 문단에 데뷔하였다.
이어 [먼 후일(後日)], 등을 [학생계(學生界)] 제1호(1920.7)에 발표하여 주목을 끌기 시작하였다. 배재고보에 편입한 1922년에 [금잔디], [엄마야 누나야], [닭은 꼬꾸요], [바람의 봄] 등을 [개벽(開闢)]지에 발표하였으며, 이어 같은 잡지 1922년 7월호에 떠나는 님을 진달래로 축복하는 한국 서정시의 기념비적 작품인 [진달래꽃]을 발표하여 크게 각광받았다.
그 후에도 계속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못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등을 발표하였고, 이듬해인 1924년에는 [영대(靈臺)]지 3호에 인간과 자연을 같은 차원으로 보는 동양적인 사상이 깃들인 영원한 명시 [산유화(山有花)] 등을 차례로 발표하였다.
1925년에 그의 유일한 시집인 [진달래꽃]이 매문사(賣文社)에서 간행되었다. 33세 되던 1934년 12월 23일 부인과 함께 취하도록 술을 마셨는데, 이튿날 음독자살한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불과 5, 6년 남짓한 짧은 문단생활 동안 그는 154 편의 시와 시론(詩論) [시혼(詩魂)]을 남겼다.
1899년 서울 야주개(현 서울 종로구 당주동)에서 부친 방경수와 모친 손씨 사이에 태어났다. 열한 살에 매동보통학교에 입학한 뒤 미동보통학교로 전학을 가서 그곳에서 4학년 졸업을 한다. 15세에 할아버지의 권유로 선린상업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졸업을 1년 남긴 채 중퇴하고 가계를 돕기 위해 토지조사국의 사자생(寫字生)으로 조직해 류광렬과 봉놋방에서 기거하면서 독서에 심취했다.
1918년 비밀결사 단체인 ‘경성청년구락부’를 결성하고 문예 잡지 ≪신청년≫ 1호를 1919년 1월에 냈다. 1920년 보성전문 법과 학생 신분으로 학생강연단을 조직, 서북 지방을 순회하는 등 전국적으로 강연을 했으며, 1920년 9월 중순 일경의 감시망을 피해 개벽사 동경 특파원 자격으로 일본 동경으로 떠났다. 동경에 도착한 후, 1921년 2월 첫 번안동화 <왕자와 제비>를 발표하고, ‘동화예술’에 대한 강한 의지를 피력했다. 1921년 연말에 동경에서 세계명작동화 열 편을 역술해 1922년 7월 개벽사에서 ≪사랑의 선물≫을 출간하였다.
1923년 5월 1일 한국 최초의 아동문제 연구 단체인 ‘색동회’를 창립하였다. 다시 7월에는 국내에서 ‘전국조선지도자대회’를 갖는 등 우리나라 소년운동을 가장 힘 있게 일으켜 나가는 한편, ≪어린이≫의 발행으로 이 나라 아동문학의 기초를 정립하고 착실하게 성장해 나갈 수 있도록 중요한 공헌을 했다. 1925년 ‘소년운동협의회’를 조직해 ‘어린이의 날’이 전국적 운동으로 확산되도록 하였다.
방정환은 소년운동가, 동화구연가, 동요·동화작가, 소설가, 잡지 편집자, 교육자 등 각계 각 방면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가 주관한 잡지로는 1923년 3월에 창간한 ≪어린이≫가 가장 대표적이다. 그러나 실제로 방정환은 앞서 언급한 ≪신청년≫(1919) 외에도, 영화잡지 ≪녹성≫(1918), ≪개벽≫(1920), ≪신여성≫(1924), ≪학생≫(1929), ≪별건곤≫(1926), ≪혜성≫(1931) 등을 주재하며 우리나라 근대 신문예운동에 있어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31년 7월 23일 서른세 살의 짧고도 아까운 생애를 마쳤다.
조명희는 1894년 8월 10일 충북 진천군 진천읍 벽암리에서 부친 조병행과 모친 연일 정 씨 사이의 4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누대에 걸친 지배계급으로서의 가정환경은 조명희의 현실 인식의 밑바탕이 된다.
1907년경에 13세로 네 살 위인 여흥 민씨와 결혼했는데, 애정이 전제되지 않은 이 조혼은 이후 그가 가정 자체를 거부하는 것으로까지 확산된다. 이 무렵 포석은 진천사립소학교를 다녔고 졸업 후에는 서울로 유학하여 셋째 형 집에서 중앙고등보통학교를 다니다가 당시 유행하던 ‘영웅숭배열(英雄崇拜熱)’에 들떠서 북경사관학교에 들어가려고 고보를 그만두게 된다. 하지만 집으로 붙들려 오게 되고 이때 포석은 ‘소일 격(消日格)으로 소설(小說)이란 것을 읽’으며 문학을 접하게 된다.
1919년에는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몇 개월 동안 감옥 생활을 하고 동경으로 가서, 동양대학 인도철학윤리학과에 청강생으로 적을 두고 유학생들의 모임인 학우회 활동을 한다. 이때 와세다 대학 영문과에 재학 중이던 김우진을 만나게 되는데, 둘은 문학상의 영향을 서로 주고받으며, 포석은 이 인연으로 희곡을 창작하고 연극에 관심을 갖게 된다. 또한 일시적이나마 무정부주의 계열인 흑도회(黑濤會)에 가입해서 사상운동도 체험하게 된다. 동경에서의 생활은 힘든 것이었다. 기울어져 가는 가세로 학비를 전적으로 해결해 줄 수는 없는 일이어서 포석은 학비 구걸을 해야 했다. 그러나 가난이 그에게 상당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그가 생활인으로서의 책임을 강요당할 때, 즉 귀국한 후이다. 1923년 초, 포석은 어려웠지만 자유로울 수 있었던 유학을 중도에 끝내고 귀국한다. 1924년에는 시집 ≪봄 잔디밭 위에≫를 펴냈다. 가족에 대한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강요받는 이즈음에야 그 ‘고통의 떡메’와 같은 현실은 그의 의식 속에 자리를 잡게 된다. 1925년 무렵 포석은 ≪시대일보≫ 학예부 기자로 근무한다. 그가 투르게네프의 <그 전날 밤>을 번역, 연재하는 것도 이 무렵이다. 1925년 8월 창립된 카프 회원으로 가입해 카프의 열성적인 비해소파로 꼽히는 이기영, 한설야와 이념적인 동지로서 두터운 교분을 나누었다. 1925년에서 1928년까지는 조명희의 창작 기간 중에서 가장 활발한 시기다. 이 시기에 그는 단편소설 12편과 시, 수필, 평론 등을 발표했다.
1928년 여름 망명 직전에 포석은 가족을 이끌고 성공회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바 있는데, 그 심경은 짐작할 길이 없다. 그리고 얼마 후 모친에게만 하직 인사를 하고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포석은 종적을 감추었다. 하루쯤 지나 한 학생이 쌀 한 가마를 들여주면서 ‘선생님이 떠나셨다’고 알려줘서야 가족들은 비로소 그의 가출을 알았으며, 망명 사실은 한참 뒤 포석에게서 단 한 번 온 편지로 알았다고 한다. 망명 후 포석은 연해주 신한촌의 중학교와 우수리스크 조선사범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1931년에 황명희와 재혼했다. 구한말 전후에 두만강 건너 블라디보스토크 중심의 연해주 지역에 모여 살던 한인들의 한글 신문인 ≪선봉≫에 정기적인 문예 페이지를 마련했던 조명희는, 10년 가까이 수많은 현지의 한인 청년들에게 한글 문학을 지도했다. 강태수, 김기철, 김증송, 김광현, 조기천, 김두칠, 연성용, 태장춘 등이 포석의 제자다. 이들은 1937년에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된 후로 카자흐스탄 알마티 등에서 ≪선봉≫의 후신인 ≪레닌기치≫(현 ≪고려일보≫)를 창간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한글 문단을 형성해 왔다.
1934년 소련작가동맹의 맹원이 되기도 한 포석은 단편소설과 시, 동요, 희곡, 장편소설 등에 걸치는 폭넓은 작품 활동을 했다. 1937년에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기 직전, 익명의 편지에 의해 체포되고 1938년 5월 11일에 총살당했다. 당시 가족들은 이런 정황을 제대로 알지 못했으며, 아직까지도 조명희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진 바가 없다. 하지만 1956년 소련 정부 당국에 의해서 조명희에 대한 과거의 잘못된 결정을 파기하여 복권시킨 후에, 소련 과학원에서 한글판 ≪조명희 선집≫(1959)이 간행되었다. 그리고 1988년에는 그의 자녀가 살고 있는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 소재 국립 나보이 문학박물관에 ‘조명희 문학기념실’이 열린 데 이어 1992년에는 타슈켄트에 ‘조명희 거리’가 조성되었다.
1903년 전남 강진 출생으로 본병은 윤식, 아호는 영랑이다. 강진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휘문고를 거쳐, 1920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 학원 영문학과에서 수학했다. 그후 박용철, 정지용, 정인보 등과 《시문학》동인으로 참가하면서 활발히 시작활동을 펼쳤다. 영랑은 생전에 《영랑시집》(1935년), 《영랑시선》(1949년) 두 권의 시집을 출간했으나, 1950년 한국전쟁 때 북한군의 유탄을 맞아 47세로 애석하게 운명했다.
우리 민족의 정한을 노래한 시인으로 알려진 영랑의 시 세계는 동양적 은일의 시관과 한시, 특히 고산 윤선도의 시조 등에서 깊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랑의 시는 자연에 자신의 감정을 맑게 투영한 탁월한 서정시로, 추상적 관념을 거부하고 자연물에 대한 순정한 심정을 투사함으로써, 고요한 내면을 지순한 언어로 표상한 점이 특징이다. 그러나 그는 자연에 대한 음풍농월적인 태도를 지양하고, 자신의 내면을 관조하면서 동시에 순수하고 깨끗한 자연 앞에서 승복하는 자세를 보여줌으로써 일제 치하의 억압적 신민지 현실을 날카롭게 드러냈다. 또한 그는 창씨개명, 신사참배, 단발령을 끝가지 거부하는 절개와 기개를 보여주었다.
* 국가 중요민속자료 영랑생가
강진읍 남성리 탑동에 있는 영랑 생가는 <모란이 피기까지는> <오-매 단풍 들것네>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같이> 등 주옥같은 영랑의 시가 탄생한 배경이기도 하다. 1903년 이 집에서 태어난 영랑이 1948년 서울로 이주한 뒤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었으나 1985년 강진군에서 매입하여 전라남도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영랑 후손들의 고증을 받아 전면 보수를 한 뒤 2007년 10월 12일 국가지정문화재인 중요민속자료 제252호로 승격되었다.
김억(金億, 1896~?)
김억(金億, 1896~?)은 1896년 11월 30일 평안북도 곽산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김희권(金熙權)이고 호는 안서(岸曙)다. 필명으로 ‘안서(岸曙)’, ‘안서생(岸曙生)’, 안서의 머리글자를 딴 ‘A. S.’, 에스페란토 이름인 ‘Verda E. Kim’ 등이 있다. 어린 시절 서당에서 한문 수업을 받았으며 1907년 정주 오산학교에서 신학문을 수학했다. 오산학교를 졸업한 후, 1913년 일본 게이오의숙(慶應義塾) 문과에 입학해 영문학을 전공했다. 그러나 1914년 부친의 사망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으며 1916년 모교인 오산학교에 부임했다. 1924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학예부 기자, 문예부장으로 활동했으며 1930년대 ≪매일신보≫ 기자를 거쳐 1930년대 후반부터 해방 직후까지 경성 중앙방송국에 근무했다. 1941년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문화위원, 조선문인협회 간사, 조선문인보국회 평의원 등을 지내며 친일 활동을 했다. 해방 후, 출판사인 수선사(首善社)의 주간을 맡았고 1946년부터 한국 전쟁 때까지 육군사관학교, 공군사관학교, 서울여자상업고등학교에서 강의했다. 한국 전쟁 당시 서울에서 납북되어 북한 국영출판사의 교정원으로 배치되었다. 1956년 납북 인사들로 구성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중앙위원으로 임명되었다가 평안북도 철산의 협동농장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그 이후의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김억은 1914년 일본 유학생들이 발간한 잡지인 ≪학지광≫에 <이별>을 발표하며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초기 작품으로 <야반>, <나의 적은 새야>, <내의 가슴>, <밤과 나> 등이 있다. 이후 개인적 감정을 중시하고 감각적인 시어와 개성적 리듬을 강조한 시를 통해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한편, 1916년 9월 ≪학지광≫에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베를렌의 시를 번역한 <내 가에 내리는 비>를 발표한 이래, 꾸준히 서구의 시와 시론을 번역·발표했다. 특히, 1918년 9월 창간된 ≪태서문예신보≫에 주로 프랑스 상징주의 시와 시론을 번역해 소개함으로써 한국 현대시에 상징주의 시풍을 정착시켰다. 1920년 ≪폐허≫ 동인으로 활동한 것을 비롯해 ≪개벽≫, ≪동광≫, ≪영대≫, ≪조선문단≫, ≪학생계≫ 등에 참여했다. 1925년 이후, 민요시 운동의 중심에 서서 한국적 정서와 가락을 담은 민요시 창작에 주력했으며 한시 번역에도 힘을 쏟았다.
김억은 한국 현대시 최초의 창작 시집 ≪해파리의 노래≫(1923)를 위시해 ≪봄의 노래≫(1925), ≪금모래≫(1925), ≪안서 시집≫(1929), ≪지새는 밤≫(1930), ≪안서 시초≫(1941), ≪먼동이 틀 제≫(1947), ≪민요 시집≫(1948) 등을 상재했다. 그리고 베를렌, 구르몽, 보들레르, 예이츠 등의 시가 수록된 최초의 번역 시집 ≪오뇌의 무도≫(1921)를 필두로, 타고르의 시를 번역한 ≪기탄자리≫(1923), ≪원정≫(1924), ≪신월≫(1924), 아서 시먼스(Arthur Symons)의 시를 번역한 ≪잃어진 진주≫(1924), 한시를 번역한 ≪망양초≫(1934), ≪동심초≫(1943), ≪꽃다발≫(1944), ≪야광주≫(1944), ≪지나 명시선≫(1944) 등을 남겼다.
파울 클레(Paul Klee, 1879-1940)는 스위스 베른 근교 뮌헨부흐제 출생의 화가로, 음악가였던 부모의 영향 아래 어려서 음악과 미술에 재능을 보였다. 성장하여 화가의 길을 선택했지만 음악은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바실리 칸딘스키, 프란츠 마르크 등과 더불어 ‘청기사파(靑騎士派, Der Blaue Reiter)’로 활동하였으며, 독일 바이마르에 설립된 조형예술학교 바우하우스(Bauhaus)의 교수를 지냈다. 평생 구천여 점의 작품을 제작하였으며, 『자연을 관찰하는 방법』 『교육 스케치북』 등의 저서가 있다. 말년에 나치 치하의 독일에서 추방되어 고향 베른으로 돌아와 로카르노에서 사망하였다.
(1901∼1946)
시인 오일도는 1901년에 경북 영양에서 태어났다. 영양의 천석 거부 오익휴의 차남으로 본명은 희병(熙秉)이었다. 일도는 아명이었는데, 후에 필명으로 사용했다. 한학에 대한 조예가 깊은 집안이라 8세부터 14세까지 한학을 공부했다. 이때 공부한 한학의 영향으로 한시를 창작했으며 한시 78수를 남겼다. 아들의 증언에 따르면 굉장히 과묵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17세에 영양보통학교를 다니면서 근대 교육 체계 속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학습에 뛰어난 성취를 보여 1922년 18세 때에 경성제일고보에 진학했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릿쿄대학 철학과에 진학했다. 유학 중이던 1925년 ≪조선문단≫을 통해 <한가람 백사장에서>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초기 시들은 비극적인 낭만성과 압축미가 있어 높은 미학적 완성도를 보여 주었다는 평을 받았다.
릿쿄대학(立敎大學)을 졸업하고 1929년 조선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에 중앙, 휘문 등 여러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고 전하나 이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오일도가 집안이 부유해서 일상적인 사회생활을 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73년 ≪현대시학≫에 그의 유고가 발표되면서 함께 실린 김해성(金海星)의 <오일도의 시>에 그가 교편을 잡았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과 유고 시집 ≪저녁놀≫에도 그러한 기록이 실린 것으로 보아 한동안 교편을 잡고 학생들을 가르쳤던 것이 사실로 보인다.
귀국 후 여러 시인들과 교우를 쌓았다. 특히 이하윤과는 절친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30년대는 오일도가 시인으로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시기다. 이는 특히 그가 1935년 시 전문 문예지 ≪시원≫을 창간한 것과 관련이 깊다. ≪시원≫은 범시단적 잡지로 출범하면서 여러 시인들의 호응을 얻었다. 카프 계열의 시인들 작품을 싣지 못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오일도는 ≪시원≫을 발간하면서 잡지 발행인으로 뛰어난 능력을 보여 주지만 안타깝게도 ≪시원≫은 5호를 마지막으로 종간되었다. 채 1년이 못 되는 기간 동안 총 5호 정도만 발간했지만 ≪시원≫은 1930년대 한국 문단에 커다란 영향을 남겼다. 그 외에 1936년에 ≪을해 명시 선집(乙亥明詩選集)≫과 1938년에 조동진의 유고 시집 ≪세림 시집≫을 발간하는 등 편집자로서의 재능도 발휘했다. 이들 시집은 한국 문학사에서 중요한 자료들로 평가되고 있다.
≪시원≫의 종간은 오일도의 심신에 큰 충격을 남겼다. 그는 이후 폭음 등으로 건강을 상했으며 결국 1942년 고향으로 낙향해 요양하게 된다. 1945년 해방을 맞이해 서울로 올라가 ≪시원≫을 복간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이데올로기의 갈등이 심화되어 ≪시원≫이 추구하는 방향성에 대해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게다가 건강이 악화되면서 오일도는 귀향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결국 1946년 고향 영양에서 투병 중에 병세가 악화되면서 여의전병원에서 운명했다. 사인은 과도한 폭음으로 인한 간경화로 추정된다.
오일도 시인의 대표작으로는 <내 소녀>, <도요새>, <지하실(地下室)의 달> 등이 있다. 한국 문학사에 길이 남을 작품을 남기지는 못했지만 오일도 시인은 ≪시원≫을 창간함으로써 1930년대 문단에 다양성을 가져오고 활력을 불어넣었다는 평과 함께 문학사적으로 조명받고 있다. 1973년 ≪현대시학≫을 통해 유고 시들이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3년 뒤엔 1976년 유고 시집 ≪저녁놀≫이 근역서재에서 발간되었다. 이들 유고는 오일도 시인이 생전에 조지훈 선생에게 맡겨 두었던 것인데, 조지훈 선생 사후 조지훈 선생의 고모인 시조 시인 조애영 선생이 묶었다. 이후에 ≪지하실의 달≫이 문화공론사에서 출간되었으며 1988년에는 영양 출신 시인 이병각, 조지훈, 조동진, 오일도 네 사람의 시를 묶어 낸 ≪영양 시선집≫이 나오기도 했다. 현재 경북 영양에는 오일도 생가가 보존되어 있으며 그 인근에 오일도 시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1900∼1929)
이장희(李章熙)는 1900년 11월9일, 경상북도 대구부 서성정 1정목 103번지에서 당대 손꼽히는 부호이자 전에 중추원 참의를 지낸 이병학과 박금련의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박금련은 이병학 사이에서 3남 1녀를 낳았다).
이장희의 처음 이름은 양희였으나 그가 20세 되던 해인 1920년 4월에 개명한 호적에는 장희(樟熙)로 고친 바 있고 뒤에 작품을 쓰기 시작한 1923∼1924년 사이에는 장희(章熙)로 줄곧 썼는데 이것이 필명이 되었다. 아호는 고월(古月. 혹 근자에 ‘孤月’·‘苦月’ 등을 그의 아호의 하나로 보고자 하는 일이 있으나 그는 아호로서 ‘古月’만을 썼을 뿐이다)이다. 아버지 이병학은 장희의 생모 박금련이 1905년 사망한 이래 박강자, 조명희 등을 맞아들여 슬하에 12남 9녀를 두었는데 이들 중 유아 때 사망한 7남매(3남 4녀)를 제외하면 모두 9남 5녀의 14남매가 된다.
이장희는 아호 고월 이외에 어렸을 적에 ‘꿀돼지’, ‘꿀봉’, ‘박쥐’와 같은 별명이 있었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신동이란 소릴 들었으며 1905년 다섯 살에 어머니와 사별하고 계모 슬하에서 자랐다. 박금련이 사망한 후 들어온 계모 박강자는 1923년 8월 사망하기까지 이병학과의 사이에 11남매를 두었다.
1906년 이장희는 6세로 대구보통학교에 입학해 1912년 졸업했으며, 1913년 13세로 일본에 건너가 경도중학교에 입학한다(하나 근자 조사해 확인한 결과 이장희가 경도중학에 입학 내지 졸업한 사실이 없다고 한다). 1918년 18세로 귀국했는데 일설에는 일본 청산학원을 지망하려다가 실패했다는 설이 있으나 그 근거는 극히 희박하다.
1924년 24세 때 5월 문예 동인지 ≪금성≫ 3호에 이장희라는 필명으로 시 <실바람 지나간 뒤>, <새 한 머리>, <불노리>, <무대>, <봄은 고양이로다> 등 5편을 처음으로 발표했다. 이 가운데 <봄은 고양이로다>는 그가 첫 번째로 발표한 시 작품 중에서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또한 이 잡지에 톨스토이의 소설 <장구한 귀양>을 번역해 실었다. 12월 여성 전문지 ≪신여성≫(2권 12호)에 시 <동경>을 발표했는데 혹 일설에는 이 작품의 모티프는 이장희가 일본 경도에 체류했을 때 알고 지냈던 소녀 에이코에게서 찾은 것이라고 한다.
1925년 25세가 된 그는 ≪신여성≫(3권 2호, 1월호)에 시 <석양구>를 ,종합 문예지 ≪생장≫(5호, 5월호)에 <고양이의 꿈>, <가을밤>을 발표하고 시사 종합지인 ≪여명≫(1호, 6월호)에 <청천의 유방>과 <비 오는 날>을, ≪신민≫(5호, 9월)에 <사상(沙上)>, <비인 집>을 발표한다. 계속해서 ≪신민≫(6호, 10월호)에 <달밤 모래 우에서>와 <연> 등을 발표한다.
1926년 26세로 ≪신민≫(9호, 1월호)에 시 <겨울의 모경>을, ≪여명≫(7호, 6월호)에 <봄 하눌에 눈물이 돌다>와 ≪신민≫(16호, 8월호)에 <하일 소경>을, ≪신민≫(19호,11월호)에 <들에서>와 <눈>을 발표한다.
1927년에는 ≪조선문단≫ 20호, 4월호)에 시 <가을ㅅ밤>을, ≪신민≫(26호, 6월)에 <눈은 나리네>, <봄철의 바다>를, ≪신민≫(28호, 8월)에 <저녁>을 발표했으며, 이듬해에는 ≪여시≫(45호, 6월호)에 시 <저녁>, <녀름ㅅ밤 공원에서>를 발표한다.
1929년에는 ≪신민≫(45호, 1월호)에 <버레 우는 소리>, <귓드람이>를, ≪문예공론≫ (1호, 5월호)에 <적은 노래>, <봉선화>, <눈 나리는 날>을, ≪중외일보≫(11월 14일)에 <어느 밤>을 발표한다. 그리고 발표연대 및 게재지 미상의 <여름밤>, <쓸쓸한 시절>을 남겼다.
11월 3일 오후 3시경, 이장희는 대구부 서성정 1정목 103번지 본가의 머슴이 거처하던 작은 방에서 극약을 복용하고 유서 한 장, 유언 한마디도 남기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두 계모와 배다른 형제와의 갈등, 일제 식민지 정책에 동조해 항상 일본인의 통역을 종용하던 아버지와의 사상적 대립과 갈등, 버린 자식 취급과 냉대로 인해 자존심 강하고 섬세하던 그는 죽기 2, 3년 전부터 심한 신경쇠약에 시달렸다고 한다. 자살하기 몇 달 전, 서울에서 고향인 대구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는 외출도 않고 거의 두문불출이었다. 다만 죽기 3, 4일 전 평소 친하게 지내던 공초 오상순의 거처를 찾아갔다. 공초가 머물던 여관집 주인이 한 달 전에 동래에 가고 없다고 말하니, 안색이 돌연 창백해지며 어깨를 툭 떨어트리고 멍하니 한참 동안 말도 없이 서서 있다가 눈에 눈물이 글썽해 가지곤 힘없이 발길을 돌리더란 것이다. 주인은 하도 이상하기에 문 밖에 서서 황혼 가운데 사라져 가는 그의 뒷모양을 멀리 바라본즉 곧 쓰러질 듯해서 마음이 몹시 안됐더라고 했다는 것이다(공초의 술회). 그 후 그는 2, 3일간 방에서 나오지도 않고 배를 깔고 엎드려 수없이 금붕어를 방바닥에 그려 놓고 1929년 11월 3일 오후에 극약을 마셨다고 전해진다.
장지는 선산인 대구부 신암정으로 정해져 유해가 안치되었으나 지금 현재 그의 묘소는 찾을 수가 없다고 한다.
加賀千代尼. 1703~1775. 여성 시인. 원래 이름은 ‘지요조(千代女)’이나 불교에 귀의했기 때문에 ‘지요니’라고 불린다. 나팔꽃 하이쿠로 친숙하다. 바쇼의 제자 시코가 어린 지요니의 재능을 발견하고 문단에 소개함으로써 이름이 알려졌다.
시인. 1927년경부터 시작을 시작하여 많은 작품을 신문과 잡지에 발표했다. 기독교계에서 운영하는 잡지 《청년(靑年)》에 발표하면서부터 등단했다. 독실한 신앙심을 바탕으로 한 맑고 고운 서정성의 종교 시를 씀으로써 선구자적 소임을 다한 여류시인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西行. 1118~1190. 헤이안 시대의 승려 시인이며 와카 작가(歌人)이다. 속명은 사토 노리키요(佐藤義淸). 무사의 신분을 버리고 승려가 되어 일본을 노래했다. 그의 가문은 무사 집안으로 사이교 역시 천황이 거처하는 곳(황거)의 북면을 호위하는 무사였다. 하지만 그는 1140년에 돌연 출가하여 불법 수행과 더불어 일본의 전통 시가인 와카 수련에 힘썼다. 각지를 돌아다니며 많은 와카를 남겼는데, 《신고금와카집(新古今和歌集)》에는 그의 작품 94편이 실려 있다. 와카(和歌)와 고시쓰(故?)에 능통하였던 사이교는 스토쿠 천황의 와카 상대를 맡기도 했으나, 호엔 6년(1140년) 23세로 출가해 엔기(円位)라 이름하였다가 뒤에 사이교(西行)로도 칭하였다. 승려로 은둔하게 된 뒤 사이교는 구라마 산 등, 히가시야마와 사가 근교에 초막을 짓고 살며 전에 일한 적 있는 다이켄몬인의 뇨보들과도 교류하였고, 요시노와 구마노, 무쓰, 사누키 등 일본 곳곳을 돌며 불도를 수행하거나 우타마쿠라(歌枕)를 찾기도 하고, 때로 와카를 지었다.
良寬. 1758~1831. 에도 시대의 승려이자 시인. 무욕의 화신, 거지 성자로 불리는 일본의 시승이다. 시승이란 문학에 밝아, 특히 시 창작에서 뛰어난 역량을 발휘한 불교 승려를 지칭하는 말이다. “다섯 줌의 식량만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라는 말이 뜻하듯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무욕과 무소유의 최고 경지를 몸으로 실천하며 살았다. 료칸은 살아가는 방도로 탁발, 곧 걸식유행(乞食遊行)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오늘날 일본 곳곳에 세워진 그의 동상 역시 대개 탁발을 하는 형상이다. 료칸은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도 시를 써가며 내면의 행복을 유지하며 청빈을 실천했고, 그의 철학관은 시에 그대로 담겨 있다.
1741~1789. 30세 때 요사 부손에 입문했다. 입문 초기부터 두각을 나타내 부손을 보좌하여 일가를 묶어 냈다. 1779년에는 부손과 둘이서 오사카 · 셋츠 · 하리마 · 세토 우치 방면으로 음행의 여행에 나섰다. 온후한 성격으로 부손의 제자 모두와 친교를 가졌다. 부손 모음집을 편집하는 등 하이쿠의 중흥에 진력했다.
在原業平. 825~880. 헤이안 시대의 귀족. 시인. 아리와라노 나리히라는 825년 헤이제이 천황의 첫째 황자인 아보 친왕과 간무 천황의 딸인 이토 내친왕 사이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따라서 나리히라는 헤이제이 천황의 손자이자 간무 천황의 손자이기 때문에 천황 가문의 적통이었다. 그러나 구스코의 난에서 헤이제이 천황 세력이 패하면서 그의 후손들은 황위 계승과 멀어지고 황통은 사가 천황의 후손에게 이어졌다. 826년 사가 천황은 헤이제이 천황의 후손들에게 아리와라노아소미(在原朝臣)라는 성을 내려 황족이었으나 신민의 신분으로 강하시켰다. 《삼대실록(三代實錄)》에 의하면 아리와라노 나리히라는 수려한 외모와 자유분방하고 정열적인 삶을 살며, 당시 관료에게 필요한 한문학보다는 사적인 연애 감정 등을 읊는 와카(和歌)에 뛰어난 인물이었다고 한다. 《고금와카집(古今和歌集)》에 그가 읊은 와카 30수가 실려 있고, 이 작품의 가나(假名, 일본 고유의 글자)로 된 서문에는 그의 정열적 가풍에 대한 평이 실려 있다. 와카 명인으로서 6가선, 36가선 중 한 사람인 그는 설화집 《이세 모노가타리(伊勢物語)》의 주인공과 동일시되는 인물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