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구간

김억 시집

시리즈 : 범우문고 [110]

김억 저 | 범우사 | 2020년 03월

북트리

정가
$9.80
판매가
$5.39 (45%↓) 최저가 보상
적립금
$0.11 (2%P)
출고예상일
2026년 10월 08일 수령예상일 안내
북카트 담기 바로구매하기 위시리스트담기

평점 -  ·  리뷰 0

리뷰 쓰기

ISBN : 9788908063150 / 172쪽 110 x 174 (㎜)

이 상품에 궁금하신점이 있으세요? 1:1상담문의

추천inside
Adobe Flash Player 가져오기

이 분야의 베스트셀러

아래의 도서와 구매하시면 이 도서들의 적립금을 즉시적용해 드립니다.

  • 17,820
  • 27,000
  • 16,650
  • 16,830

책 소개

반디앤루니스 리뷰

일제하에 김소월 스승이었던 안서 김억 시인의 창작 시집. 안서 김억은 우리 문학사상 최초로 본격적인 근대시를 발표한 시인이었다. 또한 그는 근대적인 시집을 처음 상재한 작가이며 한때 그의 손으로 이루어진 사화집의 수가 가장 많은 시인이기도 했다.

그가 엮어낸 역시집 <오뇌의 무도>는 1921년 3월에 상재되었다. <오뇌의 무도> 이후 그는 자작과 번역 시집을 합해 모두 20여 권에 이르는 사화집(1인 또는 다수 작가의 문장을 발췌해 엮은 책)을 보여 주었다. 물론 8·15 이후 본격적으로 활약이 시작된 시인 가운데는 이보다 더 많은 양의 사화집을 상재한 예도 있으나, 일제치하인 시인 가운데 김억처럼 많은 숫자의 사화집을 상재한 예는 일찍이 없었다.

그는 프랑스 상징파 시인들의 작품을 중심으로 한 해외시의 수입과 수용에도 독자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와 아울러 그는 시론을 중심으로 한 해외 문학이론의 수입, 소개에도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시인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한때 에스페란토의 보급과 교육에 힘쓴 바 있었는가 하면 김소월과 나도향을 필두로 몇 사람의 우수한 시인과 작가를 우리 문단에 소개하거나 그 문단활동을 도운 공로자이기도 하다. 한 마디로 한국문학사에 끼친 김억의 발자취는 매우 뚜렷하며 다양하다. 김억이 가장 크게 비중을 둔 것은 번역이 아니라 여기에 소개한 창작시라고 할 수 있다.

출판사 리뷰

안서 김억(1896~1950?)은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으며 그곳 고향에서 10대 중반까지 살다가 오산학교에 진학하면서 거주지를 옮긴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우리 문학사상 최초로 본격적인 근대시를 발표한 시인이었다. 또한 그는 근대적인 시집을 처음 상재한 작가이며 한때 그의 손으로 이루어진 사화집의 수가 가장 많은 시인이기도 했다. 그가 엮어낸 역시집 《오뇌懊惱의 무도舞蹈》는 1921년 3월에 상재되었다. 또한 《오뇌의 무도》 이후 그는 자작自作과 번역 시집을 합해 모두 20여 권에 이르는 사화집詞華集(1인 또는 다수 작가의 문장을 발췌해 엮은 책)을 보여 주었다. 물론 8·15 이후 본격적으로 활약이 시작된 시인 가운데는 이보다 더 많은 양의 사화집을 상재한 예도 있으나, 일제치하인 시인 가운데 김억처럼 많은 숫자의 사화집을 상재한 예는 일찍이 없었다. 그는 프랑스 상징파 시인들의 작품을 중심으로 한 해외시의 수입과 수용에도 독자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와 아울러 그는 시론을 중심으로 한 해외 문학이론의 수입, 소개에도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시인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한때 에스페란토의 보급과 교육에 힘쓴 바 있었는가 하면 김소월金素月과 나도향羅稻香을 필두로 몇 사람의 우수한 시인과 작가를 우리 문단에 소개하거나 그 문단활동을 도운 공로자이기도 하다. 한 마디로 한국문학사에 끼친 김억의 발자취는 매우 뚜렷하며 다양하다. 김억이 가장 크게 비중을 둔 것은 번역이 아니라 그의 창작시였다. 우선 그는 문단 진출과 함께 창작시로 그 성과를 문단 안팎에 묻고자 한 사람이다. 그가 해외시의 수입을 시도하고 그 밖에 상당수의 비평을 쓴 것 역시 창작시를 위한 방편일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이 분야에서 그가 기울인 노력은 여느 경우와 크게 다른 것이었다. 김억이 최초에 발표한 작품은 1914년도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이것은 과도기적인 것이었다. 그가 제 모습을 갖춘 작품을 내놓은 것이 1918년 11월 《태서문예신보》의 〈봄〉〈봄은 간다〉부터이다. 이제까지 우리는 한국 근대시를 최초로 본격화한 시인으로 주요한을 들어왔다. 그에 의해서 우리 시가 육당六堂·고주孤舟 등 신체시의 과도기적 허물을 벗고 본격적인 의미의 근대시가 되었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우리 주변의 이와 같은 판단은 김억의 초기 활동이 고려되는 경우 다소간의 수정이 불가피해진다. 즉 발표시기로 볼 때 〈봄〉과 〈봄은 간다〉는 적어도 주요한의 처녀작들인 〈샘물이 혼자서〉나 〈복사꽃〉 또는 〈불노리〉보다 한발 앞서 있었다. 물론 여기서 작품의 질이 문제가 될 수는 있을 것이다. 김억의 〈봄은 간다〉가 아직 부분적으로 미숙한 것이었음에 반해서 주요한의 처녀작들은 처음부터 그 나름의 맵시를 갖추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으로 한국 현대시문학사에 등장하는 모든 시인들이 그런 것처럼 김억의 활동에는 평가되어야 할 부분과 함께 비판이 필요한 부분도 있다. 가령 해외 문학이론을 수입·소개한 경우 그는 원전들을 음미하고 거기서 얻은 결론으로 논지를 꾸려 나간 것이 아니라 가벼운 소개 정도의 글에 의거한 자취를 더 많이 드러내고 있다. 김억이 그의 번역시에서 보인 의미와 문제점은 창작시의 경우에도 거의 비슷하게 되풀이됨을 알 수 있다. 한국 근대시의 형성기에 보인 김억의 시는 그의 시론과 다소 어긋나는 것이었다. 시론에서 그는 한국적인 것의 추구를 필요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작품은 다분히 서구편향의 것이 되었던 것이다. 후에 그는 이에 대한 성찰도 가진 듯하다. 가령 《조선문단》에 연재한 〈작시법作詩法〉의 한 부분에서 그는 시를 형태 또는 언어의 형상화를 통한 예술화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그가 지향하는 올바른 시, 좋은 시가 ‘조선어의 성질과 조선 사람의 사상과 감정을 가장 근대적으로 표현할 때’ 달성이 가능한 목표라고 믿기에 이르렀다. 이 무렵에 김억은 그가 생각한 목표가 가능한 한 고운 울림을 주도록 우리말을 다듬어 쓴다든가 시의 형태를 정형에 가깝도록 만드는 일, 그리고 작품의 바닥에 순박한 정서를 깔아 두는 것으로 달성될 수 있으리라고 믿은 듯하다. 이 책은 안서 김억의 창작시를 위주로 구성했으며 뒷부분에 번역시를 일부 덧붙여 엮었음을 밝힌다. 김억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좋은 문고본 도서가 되리라 확신한다. ― 엮은이 편집부

저자 소개

김억(金億, 1896~?)
김억(金億, 1896~?)은 1896년 11월 30일 평안북도 곽산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김희권(金熙權)이고 호는 안서(岸曙)다. 필명으로 ‘안서(岸曙)’, ‘안서생(岸曙生)’, 안서의 머리글자를 딴 ‘A. S.’, 에스페란토 이름인 ‘Verda E. Kim’ 등이 있다. 어린 시절 서당에서 한문 수업을 받았으며 1907년 정주 오산학교에서 신학문을 수학했다. 오산학교를 졸업한 후, 1913년 일본 게이오의숙(慶應義塾) 문과에 입학해 영문학을 전공했다. 그러나 1914년 부친의 사망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으며 1916년 모교인 오산학교에 부임했다. 1924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학예부 기자, 문예부장으로 활동했으며 1930년대 ≪매일신보≫ 기자를 거쳐 1930년대 후반부터 해방 직후까지 경성 중앙방송국에 근무했다. 1941년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문화위원, 조선문인협회 간사, 조선문인보국회 평의원 등을 지내며 친일 활동을 했다. 해방 후, 출판사인 수선사(首善社)의 주간을 맡았고 1946년부터 한국 전쟁 때까지 육군사관학교, 공군사관학교, 서울여자상업고등학교에서 강의했다. 한국 전쟁 당시 서울에서 납북되어 북한 국영출판사의 교정원으로 배치되었다. 1956년 납북 인사들로 구성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중앙위원으로 임명되었다가 평안북도 철산의 협동농장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그 이후의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김억은 1914년 일본 유학생들이 발간한 잡지인 ≪학지광≫에 <이별>을 발표하며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초기 작품으로 <야반>, <나의 적은 새야>, <내의 가슴>, <밤과 나> 등이 있다. 이후 개인적 감정을 중시하고 감각적인 시어와 개성적 리듬을 강조한 시를 통해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한편, 1916년 9월 ≪학지광≫에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베를렌의 시를 번역한 <내 가에 내리는 비>를 발표한 이래, 꾸준히 서구의 시와 시론을 번역·발표했다. 특히, 1918년 9월 창간된 ≪태서문예신보≫에 주로 프랑스 상징주의 시와 시론을 번역해 소개함으로써 한국 현대시에 상징주의 시풍을 정착시켰다. 1920년 ≪폐허≫ 동인으로 활동한 것을 비롯해 ≪개벽≫, ≪동광≫, ≪영대≫, ≪조선문단≫, ≪학생계≫ 등에 참여했다. 1925년 이후, 민요시 운동의 중심에 서서 한국적 정서와 가락을 담은 민요시 창작에 주력했으며 한시 번역에도 힘을 쏟았다.
김억은 한국 현대시 최초의 창작 시집 ≪해파리의 노래≫(1923)를 위시해 ≪봄의 노래≫(1925), ≪금모래≫(1925), ≪안서 시집≫(1929), ≪지새는 밤≫(1930), ≪안서 시초≫(1941), ≪먼동이 틀 제≫(1947), ≪민요 시집≫(1948) 등을 상재했다. 그리고 베를렌, 구르몽, 보들레르, 예이츠 등의 시가 수록된 최초의 번역 시집 ≪오뇌의 무도≫(1921)를 필두로, 타고르의 시를 번역한 ≪기탄자리≫(1923), ≪원정≫(1924), ≪신월≫(1924), 아서 시먼스(Arthur Symons)의 시를 번역한 ≪잃어진 진주≫(1924), 한시를 번역한 ≪망양초≫(1934), ≪동심초≫(1943), ≪꽃다발≫(1944), ≪야광주≫(1944), ≪지나 명시선≫(1944) 등을 남겼다.




 

목차

■ 이 책을 읽는 분에게·9

《해파리의 노래》에서·13
피리|가을|눈|별낚으기|고적
눈|하품론|입|탄식
새빨간 피빛의 진달래꽃이 질 때|황포의 바다
참살구|죽음|언제 오셔요|삼월에도 삼짇날|별후
설은 희극|기도|탈춤|실제|사랑의 때
때|전원의 황혼|북방의 따님|나의 이상

《안서 시집》에서·51
황해의 첫 봄|여봅소 서관 아가씨|오다가다
비|물결|눈|별|지는 몸|산고개|곽산 노을|봄비
야화|거울|포도|무심|해당꽃|봄바람
송경서|어느 친우에게|춘향이와 이도령
꿈|좁은 잠자리|장미꽃

《민요시집》에서·80
명주딸기(1)|명주딸기(2)|물레|세월아 네월아
장산곧이|삼수갑산|새라 새봄|여름 바다|동로방천
넝쿨타령|사공의 아내|그래 옳소 누나님|삼팔선
서관 아가씨|꿈길|무심|갈매기|내 고향

《오뇌의 무도》에서·110
베르렌의 시·가을의 노래|흰달|작시법|도시에 나리는 비
구르몽의 시·흰 눈|낙엽
싸멘의 시·반주|가을
뽀드레르의 시·죽음의 즐거움|구적
이예츠 시·낙엽|꿈
모레쓰의 시·가을은 또다시 와서
시몬즈의 시·사랑과 잠
쁘렉크의 시·장미꽃은 병들었어라
왓손의 시·새

《기탄자리》에서·141

《꽃다발》에서·157
송별|시와 술|꿈|반달|고향을 돌아보며
가을은 깊어가고|봄바람|아기를 잃고

■ 연 보·166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