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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도기.남매 논술한국대표문학 42

시리즈 : 논술 한국대표문학 [30]

한설야, 김남천, 조명희 저 | 훈민출판사 | 2021년 0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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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56034928 / 230쪽 180 x 240 (㎜) / 양장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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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출판사 리뷰

저자 소개

1911∼1953.


소설가·평론가·수필가로서, 남과 북에서 많은 글을 남긴 이 땅의 대표적인 문인 중 한 사람이다. 김남천은 카프의 조직원으로서, 문학을 통해 한국 사회의 근본 변혁을 이루고자 했다. 김남천의 삶과 문학의 근저에 놓인 것이 혁명적 정치성인 것은 이와 관련된 것이다. 

김남천은, 혁명적 정치성의 이념에 몸을 싣고 한국 사회의 변혁을 향해 내달았던 많은 문인들과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금기의 대상으로 묶여 있다가 1988년의 해금 조치에 따라 서점에서, 학교의 문학 교실에서 다시 만날 수 있게 된 문인이다. 

김남천의 삶과 문학은 한국 근현대사의 격랑 속에서, 그것을 넘어 나아가고자 하는 어기찬 열정에 이끌려 펼쳐졌다. 역사의 거친 물결 한복판에 들어 크게 흔들렸지만 김남천은 쓰러지지 않고 고투하여 큰 문학을 일구었다. 90여 편의 평론, 40여 편의 소설, 두 편의 희곡, 한 권으로 묶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수필 등이 구축하는 높은 봉우리가 염상섭, 채만식, 이기영, 임화 등 다른 우뚝한 봉우리들과 나란히 20세기 초중반기 문학사의 산줄기에 솟아 있다. 

연구자들의 오랜 추적에도 불구하고 김남천의 최후는 정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이 사실은 상징적이다. 휴전선을 넘어 전해진 ‘소문’에 근거한 몇 가지 설만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당대 한국 사회의 주변부였던 평안남도 성천에서 태어나 한국 사회의 전면 해체와 재구성을 꿈꾸었으나 실패하여 캄캄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만 한 진보적 정신의 삶과 문학을 압축해서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된다. 

김남천은 생전에 장편소설 ≪대하≫(1939)와 ≪사랑의 수족관≫(1940), 창작집 ≪소년행≫(1939)과 ≪삼일운동≫(1947) 그리고 ≪맥≫(1947) 등, 다섯 권의 책을 펴냈다. 생산량에 비해 터무니없다 할 정도로 적은데,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미완성 작품이 많다는 점이다. 김남천 연보 속에는 ≪낭비≫, ≪1945년 8·15≫, ≪시월≫ 등 미완의 장편들이 줄지어 서 있다. 그것들을 포함하여 책에 묶이지 않은 작품들을 찾아 정리하는 것은 후인들의 책무일 터이다. 

조명희는 1894년 8월 10일 충북 진천군 진천읍 벽암리에서 부친 조병행과 모친 연일 정 씨 사이의 4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누대에 걸친 지배계급으로서의 가정환경은 조명희의 현실 인식의 밑바탕이 된다. 
1907년경에 13세로 네 살 위인 여흥 민씨와 결혼했는데, 애정이 전제되지 않은 이 조혼은 이후 그가 가정 자체를 거부하는 것으로까지 확산된다. 이 무렵 포석은 진천사립소학교를 다녔고 졸업 후에는 서울로 유학하여 셋째 형 집에서 중앙고등보통학교를 다니다가 당시 유행하던 ‘영웅숭배열(英雄崇拜熱)’에 들떠서 북경사관학교에 들어가려고 고보를 그만두게 된다. 하지만 집으로 붙들려 오게 되고 이때 포석은 ‘소일 격(消日格)으로 소설(小說)이란 것을 읽’으며 문학을 접하게 된다. 
1919년에는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몇 개월 동안 감옥 생활을 하고 동경으로 가서, 동양대학 인도철학윤리학과에 청강생으로 적을 두고 유학생들의 모임인 학우회 활동을 한다. 이때 와세다 대학 영문과에 재학 중이던 김우진을 만나게 되는데, 둘은 문학상의 영향을 서로 주고받으며, 포석은 이 인연으로 희곡을 창작하고 연극에 관심을 갖게 된다. 또한 일시적이나마 무정부주의 계열인 흑도회(黑濤會)에 가입해서 사상운동도 체험하게 된다. 동경에서의 생활은 힘든 것이었다. 기울어져 가는 가세로 학비를 전적으로 해결해 줄 수는 없는 일이어서 포석은 학비 구걸을 해야 했다. 그러나 가난이 그에게 상당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그가 생활인으로서의 책임을 강요당할 때, 즉 귀국한 후이다. 1923년 초, 포석은 어려웠지만 자유로울 수 있었던 유학을 중도에 끝내고 귀국한다. 1924년에는 시집 ≪봄 잔디밭 위에≫를 펴냈다. 가족에 대한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강요받는 이즈음에야 그 ‘고통의 떡메’와 같은 현실은 그의 의식 속에 자리를 잡게 된다. 1925년 무렵 포석은 ≪시대일보≫ 학예부 기자로 근무한다. 그가 투르게네프의 <그 전날 밤>을 번역, 연재하는 것도 이 무렵이다. 1925년 8월 창립된 카프 회원으로 가입해 카프의 열성적인 비해소파로 꼽히는 이기영, 한설야와 이념적인 동지로서 두터운 교분을 나누었다. 1925년에서 1928년까지는 조명희의 창작 기간 중에서 가장 활발한 시기다. 이 시기에 그는 단편소설 12편과 시, 수필, 평론 등을 발표했다. 
1928년 여름 망명 직전에 포석은 가족을 이끌고 성공회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바 있는데, 그 심경은 짐작할 길이 없다. 그리고 얼마 후 모친에게만 하직 인사를 하고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포석은 종적을 감추었다. 하루쯤 지나 한 학생이 쌀 한 가마를 들여주면서 ‘선생님이 떠나셨다’고 알려줘서야 가족들은 비로소 그의 가출을 알았으며, 망명 사실은 한참 뒤 포석에게서 단 한 번 온 편지로 알았다고 한다. 망명 후 포석은 연해주 신한촌의 중학교와 우수리스크 조선사범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1931년에 황명희와 재혼했다. 구한말 전후에 두만강 건너 블라디보스토크 중심의 연해주 지역에 모여 살던 한인들의 한글 신문인 ≪선봉≫에 정기적인 문예 페이지를 마련했던 조명희는, 10년 가까이 수많은 현지의 한인 청년들에게 한글 문학을 지도했다. 강태수, 김기철, 김증송, 김광현, 조기천, 김두칠, 연성용, 태장춘 등이 포석의 제자다. 이들은 1937년에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된 후로 카자흐스탄 알마티 등에서 ≪선봉≫의 후신인 ≪레닌기치≫(현 ≪고려일보≫)를 창간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한글 문단을 형성해 왔다. 
1934년 소련작가동맹의 맹원이 되기도 한 포석은 단편소설과 시, 동요, 희곡, 장편소설 등에 걸치는 폭넓은 작품 활동을 했다. 1937년에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기 직전, 익명의 편지에 의해 체포되고 1938년 5월 11일에 총살당했다. 당시 가족들은 이런 정황을 제대로 알지 못했으며, 아직까지도 조명희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진 바가 없다. 하지만 1956년 소련 정부 당국에 의해서 조명희에 대한 과거의 잘못된 결정을 파기하여 복권시킨 후에, 소련 과학원에서 한글판 ≪조명희 선집≫(1959)이 간행되었다. 그리고 1988년에는 그의 자녀가 살고 있는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 소재 국립 나보이 문학박물관에 ‘조명희 문학기념실’이 열린 데 이어 1992년에는 타슈켄트에 ‘조명희 거리’가 조성되었다.
한설야(韓雪野)
1900년 8월 3일 함흥 지역 한씨 집성촌인 함경남도 함흥군 주서면 하구리 503번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한직연은 청주 한씨 안양공파 31대손이며 사상의학을 창시한 이제마의 문하생이다. 
1915년 경성제일고보에 입학했고, 1918년 함흥고보로 전학했다. 1919년 함흥법전에 진학했지만 같은 해 동맹휴교 사건의 주동자로 몰려 제명당한다. 1920년부터 1년 남짓 베이징의 이즈(益智)영어학교에서 사회과학을 수학했으며, 중국 육군성 조선인 관리의 집에서 가정교사 노릇을 했다.
1921년 귀국한 후 북청 학습강습소에서 교사 생활을 했고, 시 <부벽누에셔>를 ≪매일신보≫에 발표했다. 정식으로 등단할 때까지 10여 편의 창작시, 번역시, 소개문, 추도문 등을 발표했다.
1923년 도쿄의 니혼대학에서 수업을 들으며 사회과학 공부와 문학작품 습작에 열중하던 중 관동대지진이 나자 대학을 휴학하고 가을에 귀국했다. 1924년 북청에 있는 대성중학교에서 교원으로 근무하다가, ‘북청자전거운동회사건’을 계기로 북청을 떠나게 된다.
1925년 이광수의 추천으로 ≪조선문단≫에 <그날 밤>을 발표하며 소설가로 등단한다. 1926년 봄에 부친이 타계하자, 중국 동북 지방의 대표적인 탄광 지대인 푸순(撫順)으로 이주한다. 이 시기에도 문학평론이나 사회과학 서적을 읽는 데 전념하며 창작을 지속했다.
1927년 1월에 귀국한 후 카프에 가입한다. 가입과 동시에 아나키즘 논쟁에 적극적으로 나서 김화산을 강력 비판한다. 제3전선파의 이북만과도 격렬한 논쟁을 벌이고, 이후에도 여러 편의 문예학 및 사회과학 원론들을 발표한다. 1928년 문예운동의 방향 전환과 관련하여 박영희 등의 카프 지도부를 비판하는 <문예운동의 실천적 근거>를 발표한다. 이후 카프 내의 논쟁에서 패배한 후 낙향하여 ≪조선일보≫ 지국을 경영한다. 이 논쟁을 통해 한설야는 계급문학과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의 옹호자라는 강한 인상을 남긴다.
1929년 여름에는 압록강과 백두산 일대의 국경 지방을 여행하기도 한다. 1930년 경성에 올라와 조선지광사에 입사하고, ≪신계단≫, ≪대조≫, ≪조선지광≫ 등의 편집에 관여한다. 1933년 조선일보사에 입사하고, 간도에 특파돼 공산당의 경찰서 습격 사건인 ‘팔도구 습격 사건’을 취재하기도 한다. 1934년 신건설사 사건(카프 제2차 사건) 때 체포되어 전주 감옥에서 영어 생활을 한다. 1935년 12월 집행유예로 석방되어 함흥으로 귀향한 후, 동명극장과 인쇄소를 동시에 경영한다. 1940년 6월경에 베이징을 두 번째로 방문한다. 1943년 유언비어 유포 혐의를 받고 문석준과 함께 징역형을 선고받아 투옥된다. 1944년 5월 감옥에서 병보석으로 풀려나 자전적 장편소설 ≪해바라기≫를 집필하던 중 해방을 맞는다.
1945년 9월 이기영 등과 함께 ‘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을 결성하고, 12월 10일 분열된 문학계의 통합 논의를 위해 상경하여 아서원 좌담회와 봉황각 좌담회에 참여한다. 서울에 조선문학동맹이 결성되는 것을 보고 12월 말에 북한으로 귀환한다.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함경도 대표로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을 만나고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조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는다. 당시 문인 중에서 가장 발빠르게 김일성 형상화에 착수했다. 1947년 7월부터 9월까지 소련을 여행하고, 이 경험을 토대로 이듬해 ≪쏘련 여행기≫를 발간했다. 1949년 4월 ‘평화 옹호세계대회’ 참석차 파리를 방문하여, 세계적 예술가들과 교류했다. 1951년 어머니가 타계했고, 1953년 임화를 중심으로 한 월북 문인의 숙청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1940년대 후반부터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장,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교육문화상 등을 역임했다. 1960년 ≪력사≫로 인민상을 수상했고, 한설야 선집이 15권 계획으로 출간되기 시작했다.
1962년 김창만 등이 주축이 된 김일성 세력은 한설야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12월 10일 당 4기 4차 전원회의에서 숙청이 결정되었다. 1963년 전 재산을 몰수당하고 자강도 시중군의 협동농장으로 쫓겨났다가 1976년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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