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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링궐 에디션 한국 대표 소설 110-18 식민지의 벌거벗은 자들

시리즈 : 바이링궐 에디션 한국 대표 소설 110 세트 [23]

김동인, 현진건, 최서해 외 저 | 케빈 오록 외 역 | 아시아 | 2015년 0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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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56621065 / 500쪽 115 x 1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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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출판사 리뷰

출판사 서평 식민지의 벌거벗은 자들 The Naked in the Colony 식민지 기간 동안 우리 민족의 절대 다수에게는 인간으로서 의당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존엄도 허락되지 않았다. 최소한의 법적, 경제적, 문화적 보호도 받을 수 없었던 우리 민족은 문자 그대로 벌거벗은 자들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기 수록된 김동인의 《감자》,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 최서해의 《탈출기》, 한설야의 《과도기》, 강경애의 《지하촌》은 제국에 의해 벌거벗겨진 자들의 처절한 생존기이다. 이들 소설에는 돈의 위력으로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잃어가는 ... 식민지의 벌거벗은 자들 The Naked in the Colony 식민지 기간 동안 우리 민족의 절대 다수에게는 인간으로서 의당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존엄도 허락되지 않았다. 최소한의 법적, 경제적, 문화적 보호도 받을 수 없었던 우리 민족은 문자 그대로 벌거벗은 자들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기 수록된 김동인의 《감자》,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 최서해의 《탈출기》, 한설야의 《과도기》, 강경애의 《지하촌》은 제국에 의해 벌거벗겨진 자들의 처절한 생존기이다. 이들 소설에는 돈의 위력으로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잃어가는 여인, 가난으로 거리의 맨 밑바닥을 헤매다가 아내마저 잃어버리는 인력거꾼, 귤껍질을 주워먹는 임신한 아내의 모습을 보며 절규하는 남편, 사라진 고향의 모습 앞에 망연자실해 하는 부부, 약 대신 쥐가죽을 뒤집어쓴 어린 동생을 무력하게 바라보는 청년의 형상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그러나 한국의 작가들은 이처럼 고통스런 현실에 절망만 한 것은 아니다. 이들 작품에는 그 엄혹한 상황에서도 한 줄기 빛을 들이고자 하는 정치적 자세가 문신처럼 깊이 새겨져 있으며, 그것이야말로 식민지 현실이 한국 문학에 가져다 준 가장 큰 선물인지도 모른다. 생의 비극성에 대한 인지의 구획이 마련되는 분기점에 서 있는 선도적인 작품 『감자』(potatoes) 1920년대 최고의 소설이자 한국문학사 최고의 공적 『운수 좋은 날』(A Lucky Day) 식민지 지식인의 이상과 좌절, 선택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문제적인 소설 『탈출기』(Escape) 한국현대소설사에서 매우 의미 있는 업적 『과도기』(Transition) 식민지 시대 빈궁문학의 대표작 『지하촌』(The underground Village) 출판사 서평 생의 비극성에 대한 인지의 구획이 마련되는 분기점에 서 있는 선도적인 작품 『감자』 김동인의 「감자」의 성공은 시간의 시험을 거친 대부분의 문학작품처럼 다양한 방식으로 읽고 이해하는 것을 허용한다는 점에 있다. 그리고 복녀를 계급, 성, 혹은 국제적인 역학관계 때문에 파멸될 운명에 있던 여자로 보든 안 보든 복녀가 사또인 변학도에게 저항한 춘향처럼 ‘인간다운 삶’을 살고자 하는 소망의 소유자였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1920년대 최고의 소설이자 한국문학사 최고의 공적 『운수 좋은 날』 식민지 서울에서의 삶을 너무나도 생생히 보여주는 「운수 좋은 날」은 아마 틀림없이 1920년대 최고의 소설일 것이다. 1920년대 서울 생활이 어떠했는지 알고자 한다면 「운수 좋은 날」은 필독해야 할 소설이다. 부자, 가난한 자, 학생, 기생, 노동자 등 서울 시민들의 공적, 사적 삶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식민지 지식인의 이상과 좌절, 선택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문제적인 소설 『탈출기』 『탈출기』는 식민지 지식인의 이상과 좌절, 그리고 새로운 선택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최서해의 문제적인 소설이다. 혜성처럼 등장하였다고 한 김동인의 평가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은 비참한 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당대의 독서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강렬한 인상 덕분에 한국 문학사에서 반드시 언급되어야 할 작품이 되었다. 한국현대소설사에서 매우 의미 있는 업적 『과도기』 「과도기」는 섣부른 관념으로 초월하거나 자연주의적 묘사에 매몰되지 않고, 창선이라는 민중이 느끼는 구체적 실감을 바탕으로 식민지 자본주의의 형성과정과 그것이 드리운 그늘을 형상화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이것은 한국현대소설사에서 매우 의미 있는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식민지 시대 빈궁문학의 대표작 『지하촌』 1936년에 발표된 이 작품은 간도에서 항일무장투쟁이 약화되고, 국내에서도 진보적인 문학 단체인 카프가 해산되고, 전반적으로 일본의 식민 지배가 강화된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작가는 현실을 변혁하려는 의지나 낙관적인 미래를 제시하기보다는 하층계급의 궁핍한 삶과 출구 없는 어두운 현실을 ‘있는 그대로’ 세세하게 묘사하는 방법을 택했다.

저자 소개

1906년 황해도 송화군 송화에서 가난한 농민의 딸로 태어났다. 그러나 어린 시절 아버지가 사망하고 어머니가 재가하는 바람에, 어머니를 따라 황해도 장연군으로 이사 가 그곳에서 성장한다. 강경애의 술회에 의하면, 그녀는 이 시절에 집안에 있던 ≪춘향전≫ 등과 같은 고소설을 읽으면서 한글을 깨쳤다. 1921년에 평양 숭의여학교에 진학했으나, 1923년 10월 엄격한 종교 생활에 항의해 숭의여학교 학생들이 일으킨 동맹휴학 사건으로 인해 퇴학당하자 동경 유학생이던 무애 양주동과 함께 서울로 올라와 동거하며 동덕여학교 3학년에 편입해 공부한다. 


 


강경애는 1924년 5월 양주동이 주재하던 ≪금성≫지에 <책 한 권>이라는 시를 가명으로 발표하고, 1925년 ≪조선문단≫에 <가을>이란 시를 발표한 적이 있다. 1931년에 ≪혜성≫지에 장편소설 ≪어머니와 딸≫을 연재함으로써 비로소 작가 생활을 시작한다. 같은 해 장연 군청에 고원으로 부임한 장하일과 결혼하지만 장하일의 조혼한 아내로 인해 인천과 간도 등지로 옮겨가면서 생활한다. 
이후 <그 여자>(1932), <부자>(1933), <소곰>(1934) 등의 작품을 발표하는데, 이 작품들은 고등학교 졸업 후 고향 장연과 만주 간도 등지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한 것이다. 1934년 그녀는 ≪동아일보≫에 장편소설 ≪인간문제≫를 연재한다. 이 작품은 황해도 용연과 인천을 배경으로 하여 농민들의 힘겨운 삶과 도시 노동자들의 현실을 고발한 문제작이다. 


 


1936년 강경애는 용정에서 안수길·박영준 등과 함께 ‘북향’ 동인을 결성하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적극적으로 활동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이 해에 <지하촌>과 같은 사실적인 작품을 발표했으며, 일본의 ≪오사카마이니치신문(大阪每日新聞)≫ 조선판에 <장산곶>을 발표한다. 1939년에는 ≪조선일보≫ 간도지국장을 역임했으나 신병이 악화되어 고향 장연으로 돌아왔으며, 이듬해 2월에 사영해 경성제대병원에서 치료를 받는다. 그러나 병이 악화되어 1944년 4월 26일 생을 마감한다. 

본관은 전주이며, 호는 금동, 금동인, 춘사 등을 사용했다. 1919년 최초의 문학동인지인 《창조》를 발간하고, 처녀작 「약한 자의 슬픔」을 발표했다. 하지만 이 때문에 귀국 후 출판법 위반 혐의로 일제에 체포되었고 사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목숨」(1921), 「배따라기」(1921), 「감자」(1925), 「광염 소나타」(1929) 등의 단편소설을 통해 간결하고 현대적인 문체로 문장 혁신에 크게 기여했다. 춘원 이광수의 계몽적인 경향에 맞서 사실주의적 수법을 사용했으며, 1925년 무렵부터 유행한 신경향파 및 프로문학에 맞서 예술지상주의를 표방하고 순수문학운동을 벌였다. 1933년에는 《조선일보》에 『운현궁의 봄』을 연재하는 한편 학예부장으로 입사했으나 얼마 후 사임하였다. 우익적 성향의 문인단체 결성을 주도하고, 제헌국회의 부의장을 지내는 등 해방 이후에도 활발한 사회 활동을 펼쳤으나 중풍으로 쓰러져 1951년 초 하왕십리의 자택에서 병사했다. 그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는 ‘동인문학상’이 1955년 제정되어 지금까지 명맥을 잇고 있다. 
1900년 경북 대구에서 태어났다. 보성고보를 마치고 중국 상해 호강江대학교에서 독일어를 공부하다 3·1 운동을 맞아 귀국하였다. 《개벽》 《동명》 《시대일보》 등을 거치며 세계 문학 사조와 문화론에 대한 견문을 넓혔다. 단편 소설 「빈처」 「술 권하는 사회」 「운수 좋은 날」 등을 통해 현실 문제를 세련된 형식과 언어 감각으로 담아내는 데 성공하며 당대 최고의 기교주의 작가로 꼽혔다. 단편 소설로는 일제하 민족 문제를 포괄적으로 표현하지 못한다는 고민에서 점차 장편 소설로 창작 방향을 전환하였다. 그 결과 작가 활동 후반에 이르러 단편 소설의 담박한 문장 구성과 장편 소설의 역사적 시간관이 결합된 장편 소설 『무영탑』을 썼다. 단편 소설의 구성과 언어에 있어 뛰어난 감각을 가졌으면서도 장편 소설의 현실 지향성을 작품 세계 속에 포괄하기 위해 노력한 작가다. 1930년을 전후하여 《동아일보》 사회부장으로 재직하면서 언론인으로 활약한 바 있으며, 이 시기 ‘일장기 말살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기도 하였다. 1943년 지병으로 타계하였다. 
본명은 학송이고 서해는 호이다. 1901년 1월 21일 함경북도 성진에서 태어났으며 1911년 성진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가난으로 5학년 때 중퇴하고 독학으로 문학을 공부하였다. 1917년 간도(間島)로 이주해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방랑하다가 1923년 귀국하였다. 1918년 3월 《학지광》에 시 [우후정원의 월광], [추교의 모색], [반도청년에게]를 발표하여 창작 활동을 시작했고, 1924년 《조선문단》에 단편 [고국]이 추천되어 등단하였다. 1924년 1월 28일부터 2월 4일까지 동아일보에 [토혈]을 연재해 소설가로서의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했으며, 1925년 극도로 빈궁했던 간도 체험을 바탕으로 한 자전적 소설 [탈출기]를 발표해 당시 문단에 충격을 주었다. 특히 [탈출기]는 살길을 찾아 간도로 이주한 가난한 부부와 노모, 이 세 식구의 눈물겨운 참상을 박진감 있게 묘사한 작품으로 신경향파 문학의 대표작으로 평가된다. 그의 작품은 모두가 빈곤의 참상과 체험을 토대로 묘사한 것이어서 그 간결하고 직선적인 문체에 힘입어 한층 더 호소력을 지니고 있었으나, 예술적인 형상화가 미흡했던 탓으로 초기의 인기를 지속하지 못하고 1932년 7월 지병인 위문협착증으로 사망한다.
한설야(韓雪野)
1900년 8월 3일 함흥 지역 한씨 집성촌인 함경남도 함흥군 주서면 하구리 503번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한직연은 청주 한씨 안양공파 31대손이며 사상의학을 창시한 이제마의 문하생이다. 
1915년 경성제일고보에 입학했고, 1918년 함흥고보로 전학했다. 1919년 함흥법전에 진학했지만 같은 해 동맹휴교 사건의 주동자로 몰려 제명당한다. 1920년부터 1년 남짓 베이징의 이즈(益智)영어학교에서 사회과학을 수학했으며, 중국 육군성 조선인 관리의 집에서 가정교사 노릇을 했다.
1921년 귀국한 후 북청 학습강습소에서 교사 생활을 했고, 시 <부벽누에셔>를 ≪매일신보≫에 발표했다. 정식으로 등단할 때까지 10여 편의 창작시, 번역시, 소개문, 추도문 등을 발표했다.
1923년 도쿄의 니혼대학에서 수업을 들으며 사회과학 공부와 문학작품 습작에 열중하던 중 관동대지진이 나자 대학을 휴학하고 가을에 귀국했다. 1924년 북청에 있는 대성중학교에서 교원으로 근무하다가, ‘북청자전거운동회사건’을 계기로 북청을 떠나게 된다.
1925년 이광수의 추천으로 ≪조선문단≫에 <그날 밤>을 발표하며 소설가로 등단한다. 1926년 봄에 부친이 타계하자, 중국 동북 지방의 대표적인 탄광 지대인 푸순(撫順)으로 이주한다. 이 시기에도 문학평론이나 사회과학 서적을 읽는 데 전념하며 창작을 지속했다.
1927년 1월에 귀국한 후 카프에 가입한다. 가입과 동시에 아나키즘 논쟁에 적극적으로 나서 김화산을 강력 비판한다. 제3전선파의 이북만과도 격렬한 논쟁을 벌이고, 이후에도 여러 편의 문예학 및 사회과학 원론들을 발표한다. 1928년 문예운동의 방향 전환과 관련하여 박영희 등의 카프 지도부를 비판하는 <문예운동의 실천적 근거>를 발표한다. 이후 카프 내의 논쟁에서 패배한 후 낙향하여 ≪조선일보≫ 지국을 경영한다. 이 논쟁을 통해 한설야는 계급문학과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의 옹호자라는 강한 인상을 남긴다.
1929년 여름에는 압록강과 백두산 일대의 국경 지방을 여행하기도 한다. 1930년 경성에 올라와 조선지광사에 입사하고, ≪신계단≫, ≪대조≫, ≪조선지광≫ 등의 편집에 관여한다. 1933년 조선일보사에 입사하고, 간도에 특파돼 공산당의 경찰서 습격 사건인 ‘팔도구 습격 사건’을 취재하기도 한다. 1934년 신건설사 사건(카프 제2차 사건) 때 체포되어 전주 감옥에서 영어 생활을 한다. 1935년 12월 집행유예로 석방되어 함흥으로 귀향한 후, 동명극장과 인쇄소를 동시에 경영한다. 1940년 6월경에 베이징을 두 번째로 방문한다. 1943년 유언비어 유포 혐의를 받고 문석준과 함께 징역형을 선고받아 투옥된다. 1944년 5월 감옥에서 병보석으로 풀려나 자전적 장편소설 ≪해바라기≫를 집필하던 중 해방을 맞는다.
1945년 9월 이기영 등과 함께 ‘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을 결성하고, 12월 10일 분열된 문학계의 통합 논의를 위해 상경하여 아서원 좌담회와 봉황각 좌담회에 참여한다. 서울에 조선문학동맹이 결성되는 것을 보고 12월 말에 북한으로 귀환한다.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함경도 대표로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을 만나고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조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는다. 당시 문인 중에서 가장 발빠르게 김일성 형상화에 착수했다. 1947년 7월부터 9월까지 소련을 여행하고, 이 경험을 토대로 이듬해 ≪쏘련 여행기≫를 발간했다. 1949년 4월 ‘평화 옹호세계대회’ 참석차 파리를 방문하여, 세계적 예술가들과 교류했다. 1951년 어머니가 타계했고, 1953년 임화를 중심으로 한 월북 문인의 숙청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1940년대 후반부터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장,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교육문화상 등을 역임했다. 1960년 ≪력사≫로 인민상을 수상했고, 한설야 선집이 15권 계획으로 출간되기 시작했다.
1962년 김창만 등이 주축이 된 김일성 세력은 한설야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12월 10일 당 4기 4차 전원회의에서 숙청이 결정되었다. 1963년 전 재산을 몰수당하고 자강도 시중군의 협동농장으로 쫓겨났다가 1976년 별세했다.


역자 소개

아일랜드 태생이며 1964년 가톨릭 사제로 한국에 왔다. 연세대학교에서 한국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한국의 소설과 시를 영어권에 소개하는 데 중점적인 역할을 해 왔다.


역서 《무진기행》《수난이대》등이 있다.


 


 


 

목차

목차
감자 ? 김동인 Potatoes-Kim Tong-in
운수 좋은 날 ? 현진건 A Lucky Day-Hyon Chin'gon
탈출기 - 최서해 Escape-Ch'oe So-hae
과도기 - 한설야 Transition-Han Seol-ya
지하촌 ? 강경애 The Underground Village-Kang Kyong-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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