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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밤.비 오는 길 논술한국대표문학 48

시리즈 : 논술 한국대표문학 [30]

이태준, 최명익, 박태원 저 | 훈민출판사 | 2021년 0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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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56034980 / 230쪽 180 x 240 (㎜) / 양장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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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출판사 리뷰

저자 소개

1904년 11월 4일 강원도 철원군 묘장면 산명리에서 부친 이문교, 모친 안순흥 사이의 1남 2녀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1970(?)년 사망 추측). 상허(尙虛) 또는 상허당주인(尙虛堂主人) 이태준(李泰俊)은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블라디보스토크에 갔다가 1909년에 아버지를, 1912년에 어머니를 잃고 고아가 되었다. 1918년 고향으로 돌아와 친척집에 기거하면서 어렵게 철원 봉명학교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어려운 가정 상황으로 인해 방황을 하다가, 1921년 휘문고보에 입학했다. 여전히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교장 선생님 등 주위 사람들의 배려로 수학을 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이미 문학가가 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924년 동맹휴교 주모자로 낙인찍혀 5년제 과정 중 4학년 1학기에 퇴학을 당했다. 퇴학의 아픔을 위무하면서 상허는 일본 유학의 길을 떠나, 1927년 동경 조치대학(上智大學) 예과에 입학했다가 1928년 중퇴한다. 일본 유학 시절인 1925년에 단편 '오몽녀'를 '조선문단'에 투고하여 입선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는데, 귀국할 때까지 작품활동이 거의 없었다. 귀국하여 1929년 '개벽'에 입사한 후 '학생', '신생' 등의 잡지 편집에 관여했고, '어린이'에 수필과 소년독본을 발표하면서 창작 활동을 재개하였다. 1930년 이화여전 음악과를 졸업한 이순옥과 결혼하여 가정을 이룬다. 1931에는 '중외일보' 기자로 입사하였고, '중외일보'가 폐간되면서 개제(改題)된 '조선중앙일보'에서 학예부장으로 일하게 된다. 1933년에 '구인회'에 참여하면서 서정성이 농후한 작품을 발표하였고, 이화여전 등에 작문교사로 출강하였다. 1939년에는 '문장'지를 창간하여 책임편집을 맡아 일제 말기 문학을 지탱해 나갔으며, 1941년 제2회 조선예술상을 수상했다. 해방 후, 이태준은 지금까지의 문학적 태도와는 달리 좌익계열의 문학단체에 가담하는데, 1945년에 문화건설중앙협의회 조직에 참여하였고, 1946년에 조선문학가동맹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해방전후'로 조선문학가동맹이 제정한 제1회 해방기념 조선문학상을 수상했다. 1946년 7∼8월경 월북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월북 직후인 1946년 10월경 조선문화사절단의 일원으로 소련을 여행하고 돌아오는 길에 북한에 머물렀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종군작가로 낙동강 전선까지 내려온 것으로 전해진다. 1952년부터 사상검토를 당하다가 1956년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후의 행적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고 사망 연도도 불확실하다. 작가의 작품활동을 보면 다음과 같다. 1934년 첫 단편집 '달밤' 발간을 시작으로 '까마귀'(1937), '이태준 단편선'(1939), '이태준 단편집'(1941) 등 단편집 7권과 '구원의 여상'(1937), '화관'(1938), '청춘무성'(1940) 등 장편 13권을 발간하였고, 해방 후 '소련기행'(1947)이라는 기행문도 발간했다. 일제 강점기의 그의 작품은 대체로 시대적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보다는 현실에 초연한 예술지상적 색채를 나타냈다. 섬세하면서도 감각적인 묘사와 대상에 대한 연민과 동정의 시선을 통해 단편소설의 서정성과 그 예술적 완성도를 높였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단편소설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광복 이후 그의 작품은 조선문학가동맹의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생경한 이데올로기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작품을 발표함으로써 일제 강점기의 작품에 비해 예술적 완성도가 훨씬 떨어지고 있다.

1909년 1월 서울에서 태어나 경성사범부속보통학교와 경성제일공립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경성제일고보 재학 시절에 [동명]의 '소년칼럼'에 [달맞이]가 뽑혔으며, 춘원 이광수에게 개인적으로 문학 지도를 받기도 했다. 일본 동경법정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한 1930년 [신생]에 단편 [수염]을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문단에 나왔다. 1933년에는 사회주의 및 민족주의에 반기를 든 '구인회'에 가입하여 이태준, 정지용, 김기림, 이상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1935년 첫 장편소설 [청춘송]을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였고, 1936년에는 [조광]에 [천변풍경]을 연재했다. 1946년에 남로당 계열 문학 단체였던 조선문학가동맹의 중앙집행위원에 취임했으나, 1948년에는 좌익 인사를 감시, 관리하던 보도연맹에 가입하여 전향성명서에 서명을 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서울에 온 이태준, 안회남을 따라 가족을 남겨둔 채 월북하였고, 북한 쪽 중군기자로 활동했다고 한다. 1953년 평양문학대학 교수로 취임했으나, 1956년 남로당 계열로 몰려 숙청당하면서 창작 금지 조처를 받았다. 1960년에 창작 금지 조처가 풀려 작가로 복귀하면서 대하역사소설 [갑오농민전쟁]의 집필을 착수하였지만 당뇨병으로 인한 안질환으로 실명하고 고혈압으로 전신불수가 되는 등 시련을 겪는 가운데 1977년과 1980년에 [갑오농민전쟁] 1,2부를 출간한 후, 1986년 7월 10일에 사망했다. 사망 후에 박태원의 구술을 정리하여 [갑오농민전쟁]3부가 출간되었다.

최명익(崔明翊, 1903∼?)은 평남 강서군 증산면 고산리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산삼 교역상으로 큰돈을 벌었지만 최명익이 평양고보에 입학한 이듬해에 사망한다. 1921년 일본 유학을 통해 도스토옙스키 문학에 심취한다. 1928년 최명익은 홍종인, 김재광, 한수철 등과 함께 동인지 ≪백치≫를 만들고 여기에 <희련시대>, <처의 화장>을 발표한다. 이때 유방(柳妨)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며 콩트 <붉은 코>, <목사>, 평론 <이광수 씨의 작가적 태도를 논함> 등을 집필한다.  
1936년 최명익은 <비 오는 길>로 문단의 주목을 받게 되고 “도스토옙스키의 수법”을 제대로 활용할 줄 아는 작가라는 평가가 뒤따른다. <무성격자>, <역설>, <봄과 신작로>, <폐어인>, <심문>, <장삼이사> 등 일제강점기 동안 총 일곱 편의 소설을 창작한다. 그의 작품은 “비록 자조로 일관하고 있지만, 그 자조는 자포자기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활”(백철)을 찾으려는 것이며 “결말을 맺는 기술이 매우 수준이 높고, 아울러 인생의 순수성과 청신성을 빚어내는 데 성공”(김동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일제 말을 경과하면서 그는 도스토옙스키의 심리적 고뇌로서는 “이러한 세계에서는 더 배겨낼 수가 없고 따라서 자기를 그런 투로 학대할 필요나 이유가 없다”(<레프 톨스토이에 대한 단상>)라고 진단한다. 지식인이라는 한계에 봉착한 그는 <장삼이사>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민중에 대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해방 후 ‘평양예술문화협회’를 결성하는데 주도적으로 참여한다. 그러나 이 단체에서 간행된 ≪관서 시인집≫이 쉬르레알리슴의 시라는 점이 문제가 되어 공산주의 계열의 비평가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게 된다. 이때 최명익은 김조규, 양명문 등과 함께 자기비판의 과정을 거쳐 공산주의를 수용하는 길을 선택하게 된다. 1947년 최명익은 단편집 ≪맥령≫을 문화전선사에서 출간하며, 남한의 을유문화사에서 일제하의 작품을 모은 ≪장삼이사≫를 출간한다. 1956년 발표한 역사소설 ≪서산대사≫는 북한 문예의 모범작으로 평가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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