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트리

정가
$32.00
판매가
$17.60 (45%↓) 최저가 보상
적립금
$0.35 (2%P)
출고예상일
2026년 10월 07일 수령예상일 안내
북카트 담기 바로구매하기 위시리스트담기

평점 -  ·  리뷰 0

리뷰 쓰기

북셀프

1시간도 길다! 5분만에 OK! 매장에서 직넙 책을 찾아가세요. 500원 추가적립!(선착순 천명/일)

가능매장 : 여의도신영증권점

북셀프로 구매하기 북셀프란?

ISBN : 9791186372166 / 344쪽 / 478g / 141 x 221 (㎜)

이 상품에 궁금하신점이 있으세요? 1:1상담문의

추천inside
Adobe Flash Player 가져오기

이 분야의 베스트셀러

아래의 도서와 구매하시면 이 도서들의 적립금을 즉시적용해 드립니다.

  • 19,800
  • 16,920
  • 11,700
  • 18,900

책 소개

출판사 리뷰

영미 작가들이 펼치는 산문의 향연 『천천히, 스미는』의 일본 문학 버전! 나와 멀지 않은 시공간을 살았던 작가들의 투명하고 섬세한 산문을 읽으며 나는 벚꽃과 전쟁을, 덧없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무자비한 문명의 광기를, 그것이 그이들의 내면에 만들어낸 특유의 그늘과 그을음 같은 것을 더듬어보기도 하였다. 누군가는 진진한 묘사로, 누군가는 따뜻한 유머로, 또 누군가는 서늘한 통찰로 그려낸 시대의 초상과 마음의 풍경들. ―허은실(시인) 일본 근현대 작가 26명, 41편의 산문 근대 이후 풍요로운 낭만과 지성이 꽃핀 시... 영미 작가들이 펼치는 산문의 향연 『천천히, 스미는』의 일본 문학 버전! 나와 멀지 않은 시공간을 살았던 작가들의 투명하고 섬세한 산문을 읽으며 나는 벚꽃과 전쟁을, 덧없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무자비한 문명의 광기를, 그것이 그이들의 내면에 만들어낸 특유의 그늘과 그을음 같은 것을 더듬어보기도 하였다. 누군가는 진진한 묘사로, 누군가는 따뜻한 유머로, 또 누군가는 서늘한 통찰로 그려낸 시대의 초상과 마음의 풍경들. ―허은실(시인) 일본 근현대 작가 26명, 41편의 산문 근대 이후 풍요로운 낭만과 지성이 꽃핀 시기의 정신을 이어받는 작품부터, 전쟁과 가난과 차별과 청춘 등 각종 파란 속 우울과 자포자기 가운데 치열하게 각자의 삶을 살다간 인간의 풍경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사랑한 스미다강의 푸른 물소리 같은 울림으로, 고바야시 다키지가 식민지 감방 동지를 향해 쿵쿵 굴러주던 발소리의 뜨거움으로, 다카무라 고타로가 감각의 본질에 육박해갔던 정신의 치열함으로, 하라 다이키가 자신의 전존재가 실린, 곧 생을 마감할 것 같은 아슬아슬한 느낌으로 나를 멈춰 세우고 밑줄 긋게 만든 문장들. 나쓰메 소세키, 「자전거 일기」「고양이의 무덤」「나와 만년필」,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피아노」「귤」「나의 스미다강」, 이즈미 교카, 「따뜻한 물만두」, 모리 오가이, 「사프란」, 마사오카 시키, 「램프 그림자」, 오카구라 덴신, 「고우야, 외롭니」, 가타야마 히로코, 「여행길 봇짐의 구성」「계절이 바뀔 때마다」「다섯 송이 장미」, 마사무네 하쿠초, 「꽃보다 경단」「한 가지 비밀」, 다카무라 고타로, 「촉각의 세계」, 나카야 우키치로, 「눈을 만드는 이야기」, 미야자와 겐지, 「영국 해안」「쇠락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미야모토 유리코, 「도서관」, 고바야시 다키지, 「감방 수필」, 오다 사쿠노스케, 「오사카의 우울」「가을에 오는 것」, 다자이 오사무, 「아, 가을」「온천」「그날그날을 가득 채워 살 것」, 하야시 후미코, 「나의 스무 살」「나폴리의 일요일」「저는 인간을 좋아합니다」, 이시카와 다쿠보쿠,「모래 한 줌」, 요사노 아키코, 「출산 이야기」, 나오키 산주고, 「가난뱅이의 기록」, 오카모토 가노코, 「복숭아가 있는 풍경」「갈색의 구도」, 나카하라 추야, 「산보 생활」, 하기와라 사쿠타로, 「나의 고독은 습관입니다」, 사카구치 안고, 「온천마을 엘리지」, 가지이 모토지로, 「벚나무 아래는」, 이쿠타 ?게쓰, 「실내여행」, 하라 다미키, 「불의 아이」「염원의 나라」

저자 소개

(夏目漱石) 

나쓰메 고헤나오카쓰(夏目小兵衛直克)의 5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유신 직후 가세가 기울면서 늦둥이였던 소세키는 태어나자마자 두 번이나 양자로 보내졌다가 되돌아오는 파란을 겪었다. 
어려서부터 문학에 흥미를 두어 니쇼가쿠샤(二松学舍)에서 한학을 공부했으며, 영어 교육 기관이었던 세이리쓰 가쿠샤(成立学舎)를 거쳐 17세에 도쿄대 예비 과정에 입학했다. 학창 시절에는 영어의 수재로 두각을 나타냈으며 장래 진로로 건축가를 꿈꾸기도 했다. 22세에 동급생 시키와 교제를 시작하면서 하이쿠를 짓기 시작했고, 시키의 고향을 방문해 훗날 그를 직업 작가의 길로 인도한 다카하마 교시(高浜虚子)를 처음 알게 되었다. 
1903년 귀국 후 도쿄 제국대학 강사로 재직하면서도 동양인으로서 영문학을 강의한다는 위화감에 힘겨워했는데, 그의 처녀작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신경 쇠약을 치유하기 위한 수단으로 집필한 것이다. 1907년부터는 대학 교수라는 최고 엘리트 신분을 박차고 ≪아사히(朝日) 신문≫의 전속 작가로 전향했다. 이후 10년간에 걸친 창작 활동을 통해 근대화의 모순, 근대 문명 속의 개인의 불안과 고독, 인간의 속물성과 에고이즘에 대한 탐구 등, 근본적인 고민을 이어 갔다. 
근대 지식인 청년의 사랑과 인생에 대한 모색을 그린 삼부작 ≪산시로≫, ≪문(門)≫, ≪그 후(それから)≫에 이어, ≪행인(行人)≫, ≪마음(こころ)≫의 대표작은 일관되게 개인의 내적 고뇌를 묘사한 것이다. 한편 근대 문명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전통과 탈속적 세계관으로 인생을 바라보고자 한 ≪풀베개(草枕)≫와 ≪열흘 밤의 꿈(夢十夜)≫, 만년의 자전적 소설 ≪길 위의 생(道草)≫ 등에 이르기까지, 독보적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 
정치적 사회적 격변이 휘몰아치는 시대에 태어나 근대의 빛과 그림자를 온몸으로 체득하고 고뇌한 지식인으로서, 그의 소설은 그의 삶 자체였으며 나아가 일본 근대의 표상이기도 하다. 그 오랜 고투의 상징이기도 한 위궤양 악화로 1916년, 49세로 타계했다. 마지막 작품 ≪명암(明暗)≫이 미완으로 남아 있다. 

(1896~1933) 
일본의 국민작가로 불리는 미야자와 겐지는 1896년 헌옷가게와 전당포를 운영하는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중학교 시절부터 일본의 전통시인 단가(短歌)를 짓기 시작했으며, 모리오카고등농림학교 농학과에 입학한 뒤부터 활발하게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겐지는 이때부터 많은 동화와 시를 썼으며, 농업에 관한 연구논문도 활발하게 발표했다. 고향인 이와테 현에서 농업학교 교사로 일하면서도 시, 동화 등을 집필하며 작품 활동을 쉬지 않았다. 그러나 겐지는 서른일곱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비록 짧은 생애였 지만 겐지는 동화집 『주문이 많은 요리점』과 시집 『봄과 수라』를 비롯해 <은하철도의 밤> <첼로 켜는 고슈> <구스코 부도리의 전기> 등 100여 편이 넘는 작품을 썼으며 지금도 세대를 초월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1909년 아오모리 현 쓰가루 군 대지주 가문에서 태어났다. 프랑스 문학에 관심이 있어 1930년 도쿄제국대학 불문과에 입학하였으나, 그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수준 높은 대학 강의에 흥미를 잃었고, 좌익 운동에 심취하는 등의 이유로 중퇴했다. 본명은 ‘쓰시마 슈지’이나 소설가가 되기 위해서 이부세 마스지의 제자로 들어간 무렵에 ‘다자이 오사무’라는 필명을 쓰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의 인생 전반이 투영된 《인간 실격》 의 주인공 ‘오바 요조’처럼 술·담배·여자에 빠져 방탕하게 살기도 했고, 약물 중독에 빠지기도 했다. 네 번의 자살시도 끝에 결국 1948년 다마 강에서 애인 야마자키 도미에와 동반 자살하여 생을 마감했다. 다자이 오사무 문학의 중심 소재인 ‘죄의식’, ‘익살’, ‘파멸’은 작가 자신의 삶 속에서 배태된 것으로 그의 성장 과정이나 인생 편력을 아는 것은 그의 문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대표작으로는 《만년》 《추억》 《부악 백경》 《사양》 《인간 실격》등이 있으며, 시공간을 초월하여 오늘날의 수많은 독자들과도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1892년 3월 1일 도쿄에서 태어났다. 용띠에 용의 달, 용의 날, 용의 시에 태어났다 하여 ‘龍之介’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 생후 7개월경에 생모에게 정신이상이 와서 아기를 기를 수 없게 되자, 그는 외갓집으로 옮겨지고, 생모의 언니, 곧 이모가 맡아 기르게 된다. 웬일인지 늦도록 결혼도 하지 않고, 오빠 집에서 눈칫밥을 먹고 있던 그녀는, 이제야 내 역할이 생겼다는 듯, 과보호라고 할 정도로 아쿠타가와의 양육과 교육에 매달렸다. 이리하여 평생 이모에게 묶여 사는 심약한 천재 작가가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뛰어나게 머리가 좋았던 그는, 중학(구제 5년 과정) 성적이 워낙 우수하여 일본 제일의 명문인 일고(一高)에 무시험으로 들어갔고, 1913년 도쿄대학 영문과에 진학했는데, 이 학과는 겨우 몇 명밖에 합격자를 내지 못했을 정도의 난관이었다 한다. 대학 재학 중인 1914년에, 일고 때부터의 동기인 기쿠치 칸, 구메 마사오 등과 동인지 ‘신사조(新思潮)’(제3차)를 창간하여 문학활동을 시작한다. 1915년에는 대표작의 하나인 ‘라쇼몽(羅生門)’을 발표했고, 어떤 급우의 소개로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의 문하로 들어가 지도를 받게 되었는데, 그 이듬해에 발표한 ‘코’가 스승인 소세키의 격찬을 받고, 문학에의 결의를 굳힌다. 이해에 대학을 졸업한 아쿠타가와는 해군 기관(機關)학교의 영어 교관으로 있으면서 창작에 정진하여, 그 이듬해에는 이미 제2단편집을 발간하고 있다. 1918년에는 교직을 그만두고 어느 신문사의 객원(客員) 사원이 되어 창작에 전념하게 된다. 그리하여 수많은 화제작을 연이어 내 놓음으로써, 30도 되기 전에 이미 중견 작가로서 인정받게 된다. 1921년에는 신문사의 해외 시찰원으로서 중국을 방문하여 호적(胡適)을 만나 대담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행 중에 앓아눕는 등, 이 무렵부터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하여, 신경쇠약, 불면증, 소화불량 등의 질병에 시달리게 된다. 양부모와 이모를 둘러싼 가정생활의 갈등도 끊이지 않는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문단의 평가에 지나치게 예민하여, 누가 악평(惡評)이라도 하면 견딜 수 없어 한다. 그의 동시대의 몇몇 문인들은, 추문을 일으키고도 아랑곳하지 않고, 작품에 대한 악평 따위는 아예 무시해 버리는 배짱으로 장수(長壽)도 하고, 따라서 대가(大家)라는 대접을 받으며 대작(大作)도 남기곤 하는데, 그런 유들유들한 작가들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방대한 독서량으로 풍부한 지식과 천부적인 표현력을 가진 그는 끝까지 창작에 몰두하려 하지만, 차츰 육체적, 정신적으로 빠져나올 수 없는 어둠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게 된다. 그리하여 “인생은 지옥보다 더욱 지옥적이다”란 말을 연신 되뇌더니, 결국 작가로서의 무한한 가능성을 접고 35년의 생을 스스로 마감하게 된다. 시신이 된 남편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그의 부인이, “여보, 잘 하셨어요. 이제 좀 편안하시지요?” 하고 말했다고 하니, 그들의 악전고투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게 한다. 아쿠타가와의 죽음의 8년 후에, 친구이며 문예춘추사 사주인 기쿠치 칸이 아쿠타가와를 기념하는 신인문학상 ‘아쿠타가와상’을 제정했다. 아쿠타가와상은 일본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으로 발전하여,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아쿠타가와의 유작인 ‘어느 바보의 일생’을 ‘패배의 문학’이라고들 했는데, 그는 결코 패배하지 않았다. 일본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작가로서, 나쓰메 소세키, 모리 오가이에 이어 역대 3위의 작가로 선정되고 있고, 그의 작품만을 다룬 ‘아쿠타가와 문학사전’이 몇 가지나 나와 있을 정도로, 그의 문학은 현재도 국민적인 사랑을 받고 있다. 

모리 오가이(森 鷗外)는 1862년 현재의 시마네현(島根縣) 서부에 속하는, 옛 이름으로는 이와미(岩見) 지방의 쓰와노(津和野)라는 마을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번주(藩主)의 시의(侍醫)였다. 장남으로 태어난 오가이의 본명은 린타로(林太郞)로서, 다른 아이들이 대부분 하는 연날리기나 팽이치기도 못 해보고 어려서부터 독서에 몰두해야만 했다. 할머니와 어머니의 훈육으로 만 다섯 살 때부터 아침 일찍 일어나 1km나 떨어진 곳에 가서 [논어]와 [맹자]를 배웠으며 여덟 살부터는 한적(漢籍)을 익히며, 아홉 살쯤부터는 아버지를 통해 의학 서적을 공부하기 위해 화란어와 영어를 배우는 등, 유·소년기부터 매우 엄격한 교육을 받았다.
1872년 10살 되던 해에는 친척인 니시 아마네(西周)의 권유로 도쿄로 올라와 독일어를 배운다. 아마네는 일본 최초의 화란 유학생으로서 법률과 철학을 배워 메이지 정부에서 일했던 지식인 관료 겸 학자였다. 아마네의 집에서 5년이나 거처하며, 도쿄대학 의학부에 나이를 속여가며 입학한 오가이는 19세에 최연소로 졸업한다.
졸업 후, 육군 군의로 채용된 오가이는 1884년 스물 두 살 되는 해에 육군성(陸軍省)의 명령으로 독일에 유학하여, 위생학을 연구하는 한편 문학과 미술에도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공부에 열중한다.
1888년에 귀국하여 군의학교(軍醫學校) 교관이 된다. 그 이듬해부터는 번역시집 [모습(於母影)]을 발표하는 것을 시작으로, 문(文)과 무(武)의 두 가지 길에서 빛나는 업적을 남겼다. 외국의 문학 사상이나 예술 이론을 일본에 소개함과 동시에 [파우스트]를 비롯한 많은 작품을 번역하여 일본 문학자들을 자극하며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시, 소설, 평론, 미술, 단가, 번역 등 다방면에 걸쳐 지대한 공헌을 한 오가이는 일본 근대문학의 제일인자였다고 할 수 있다.
의학계에도 신풍을 일으키는 수많은 논문을 발표하며 무(武)의 길에서도 육군군의학교 교장을 거쳐 군의총감이라는 최고의 지위에 올랐던 그는 1916년 35년간의 군의 생활을 마치고, 여생은 제실박물관총장(帝室博物館總長), 제국미술원장(帝國美術院長) 등으로 지냈다. 그러나 그가 남긴 위대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1922년 이승을 떠날 때, 일체의 세간의 명예나 칭호를 거부하며 '나는 이와미 태생 모리 린타로로서 죽으려 한다'고 친구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도쿄도 미타카(東京都三鷹) 선림사(禪林寺)에 있는 오가이의 유택(幽宅)에는 간단히 '모리 린타로 묘(森林太郞墓)'라고만 새겨져 있다. 모든 무거운 짐을 훌훌 벗어놓고 산뜻하게 저승으로 이사를 간 맑은 영혼이 느껴진다.


 

하기와라 사쿠타로(萩原朔太郞, 1886년 11월∼1942년 3월)
하기와라 사쿠타로는 1886년 11월에 군마 현 마에바시 시에서 태어났다. 마에바시 중학교 때부터 당시의 가장 유명한 문학잡지인 ≪명성(明星)≫에 단가(短歌)를 투고하는 등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고향을 떠나 타지의 고등학교에 진학하지만 몇 번의 낙제를 거듭한 후 귀향해 1913년경부터 본격적인 시작 활동을 개시했다. 그 후로 수도 도쿄(東京)와 고향을 오가는 생활을 계속하면서 시작에 전념해 1917년, 처녀 시집 ≪달 보고 짖는다≫를 간행했다. 이 시집에서 근대인들의 고독감과 신경 쇠약, 우울증을 구어체(口語體)로 섬세하게 표현해 냄으로써, 하기와라 사쿠타로는 다카무라 고타로(高村光太郞)와 함께 ‘일본 근대 시의 완성자’의 한 사람으로 평가받게 된다.
1923년에 두 번째 시집 ≪우울한 고양이≫를 출판한다. 이 시집에서는 우울함과 무료함, 권태로움을 ‘우울한 고양이 스타일’이라 불리는 독특한 시 형식으로 표현했다. 쇼펜하우어와 니체, 불교의 영향을 받은 염세적 허무 의식과 관능적이며 퇴폐적인 시상이 주를 이루고 있다. 1925년에 발간한 ≪순정 소곡집≫은 단가에서 시로 옮길 때의 작품인 ‘애련(愛憐) 시편’과 30대 후반에 발표한 ‘향토망경(鄕土望景) 시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자에는 소년 시절의 순수한 감상과 영탄이, 후자에는 도쿄에서 바라본 변해가는 고향의 모습과 비속한 인생에 대한 분노가 표출되어 있다. 1934년에 출판된 마지막 시집 ≪얼음 섬≫에서는 고향을 상실한 영원한 방랑자로서 당시 사회에 대한 ‘분노와 증오와 적요(寂寥)와 격정’을 담은 ‘절규’를 비분강개의 한문 번역 투의 문어체로 표현했다. 그 밖에 아포리즘을 모은 책 ≪새로운 욕망≫(1922), 시론집 ≪시의 원리≫(1928), 수필집 ≪일본으로 회귀≫(1938), 산문시집 ≪숙명≫(1939) 등이 있다. 
일본 프롤레타리아문학 작가. 일본 아키타현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때 홋카이도로 이주했다. 오타루상업학교에 진학하면서 문학적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고, 오타루고등상업학교 졸업 후 은행에 취직했으나 하야마 요시키와 고리키 등의 작품을 읽고 프롤레타리아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928년 『방설림』을 완성했으며, 상경하여 일본 프롤레타리아문학의 대표적 이론가인 구라하라 고레히토를 방문하고 그에게 큰 영향을 받아 처녀작 『1928년 3월 15일』을 썼다. 1929년에는 자신의 대표작이자 일본 프롤레타리아문학뿐 아니라 일본 근대문학사에서도 획기적인 작품으로 손꼽히는 『게잡이 공선』을 완성했다. 1933년 2월에 가두연락을 위한 접선장소에서 체포되어, 그날 고문에 의해 학살되었다. 만 29세 4개월이었다. 
다키지가 남긴 작품으로는   『1928년 3월 15일』(1928), 『게 공선』(1929),『부재지주(不在地主)』(1929), 『동굿찬행』(1930), 『공장세포』(1930), 『전형기의 사람들』(1931), 『누마지리 마을(沼尻村)』(1932)『지구의 사람들』(1933) 등이 있다. 사후에 일본 문학에서 처음으로 공산주의적 인간의 조형에 성공하였다고 평가 받는 『당생활자』가 출판되었다. 
사카구치 안고 (坂口安吾). 본명은 헤이고다. 1906년 10월 20일 니가타현 니가타시에서 아버지 니이치로와 어머니 아사 사이의 5남으로 태어났다. 사카구치가의 선조는 지금의 후쿠오카현 가라쓰의 도공이었다가 후에 니가타로 이동해 온 지방 부호다. 아버지 니이치로는 당시 중의원 의원이자 니가타 신문사 사장이었고 한시 시인으로도 알려진 정치가로서 언제나 다망했으며 장남을 제외한 자식들에게는 무관심하고 냉담했다. 사카구치가의 재산은 체면과 의리를 중시했던 니이치로의 대에서 탕진되게 된다. 니이치로의 전처와 첩의 아이까지 합한 열세 명의 형제 중 열두 번째 아이로 태어난 안고는, 어린 시절 이미 방랑벽이 있었으며, 골목대장 행세를 하며 싸움질을 하고 돌아다녀 어머니의 미움을 사는 한편, 주로 무사들의 군담을 숙독했고, 남몰래 닌자의 인술을 연구하기도 했다. 

1919년 니가타 중학교에 입학했으나 이 무렵부터 집과 학교를 싫어해서 수업을 빠지고 홀로 방황하는 날들을 보내다 낙제하게 되고, 다니자키 준이치로와 발자크 등의 소설을 탐독하며 지내다가 결국 1922년에 퇴학당했다. 그해 가을 상경해 부잔 중학교에 입학했고 에드거 앨런 포와 이시카와 다쿠보쿠 등을 인생의 낙오자로서 사랑하며 그들의 작품을 숙독했다. 막연하게 엄격한 구도자의 삶을 동경하여 1926년, 도요 대학 인도철학윤리과에 입학한다. 입학 후 불교서와 철학서를 섭렵하는 데 몸을 혹사하며 공부에 매진한 탓에 생긴 신경쇠약 증세를 극복하기 위해 다시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티베트어, 라틴어, 프랑스어 등 어학을 맹렬히 공부한다. 

1930년, 대학을 졸업한 후 동인지 <말>과 <청마>를 창간했다. 1931년에 발표한 단편소설 <바람 박사>와 <구로타니 마을>이 소설가 마키노 신이치의 극찬을 받음으로써 신진 작가로 급부상한다. 1932년 여류 작가 야다 쓰세코를 알고 사랑에 빠지지만 1936년 절교한 후 신생을 기하며 교토를 방랑하면서 그녀와의 사랑을 소재로 한 장편소설 ≪눈보라 이야기≫를 썼다. 1946년, 전후의 시대적 본질을 예리하게 통찰하고 파악한 <타락론>과 <백치>에 의해 일약 시대의 총아, 오피니언 리더로 떠오르며 인기 작가의 반열에 오른다. 

1947년 가지 미치요와 결혼하고, 전후의 시대상을 반영한 소설과 에세이, 탐정소설, 역사 연구, 문명 비평 르포르타주 등 다채로운 집필 활동을 전개하여 전후의 난세에 문화와 역사 및 사회의 흐름에 대한 대중의 지적 갈증을 해소해 주는 역할을 한다. 그와 동시에 세무 당국을 상대로 한 소송, 경륜 부정 사건 고발, 각성제와 수면제 중독에 의한 정신착란 발작 등 실생활 면에서도 언제나 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1955년 2월 17일 지방 취재 여행에서 돌아온 후 자택에서 뇌일혈로 급사했다. 향년 50세였다. 전후 일본 사회의 혼란과 퇴폐를 반영한 작풍을 확립하고 시대의 새로운 윤리를 제시함으로써 일본인에게 충격과 감동을 안겨준 사카구치 안고는 다자이 오사무와 오다 사쿠노스케 등과 함께 전후 일본 문학을 대표하는 무뢰파 작가로 평가된다. 

1905년~1951년. 히로시마 출생. 피폭 체험을 작품에 새긴 소설가, 시인. 1933년에 게이오 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1936년부터 잡지 《미타 문학》을 무대로 단편소설을 다수 발표하기 시작했다. 1945년에 전쟁을 피해 고향인 히로시마의 형님 댁으로 옮겼지만 8월에 원폭투하를 경험하게 된다. 이 체험은 〈여름의 꽃〉〈진혼가〉 등의 작품을 낳았다. 특히 〈여름의 꽃〉은 아름답고 냉정하고 투명한 문체로 묘사된 작품인데 원폭을 묘사한 수많은 문학작품 중에서도 가장 빼어나다는 평가를 얻고 있다. 1951년, 중앙선 철도에서 자살했다. 향년 45세. 대표작으로는 〈여름의 꽃〉〈폐허에서〉〈괴멸의 서곡〉〈진혼가〉〈원폭 소경小景〉 등이 있다.


 

마사오카 시키(正岡子規, 1867∼1902)
마사오카 시키는 1867년 음력 9월 17일 마쓰야마(松山)에서 무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쓰네노리(常規)였으며, 술을 많이 마셨던 아버지를 다섯 살 되던 해 여의고 세 살 아래인 여동생 리쓰(律)와 함께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헤이지 모노가타리(平治物語)≫, ≪삼국지≫ 등 전쟁 소설 읽기를 좋아하던 시키는 사춘기에 들어서는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자유 민권 운동에 귀를 기울이며, 15세 때는 교내뿐만 아니라 청년 연설회에서 ‘자유’에 대해 연설하기도 한다. 정치열에 들떠 공부도 등한히 하게 된 시키는 정치가가 되려는 야심에 도쿄의 외무성에서 근무하고 있던 외삼촌에게 편지를 보내 그 허락으로 16세에는 꿈에 그리던 도쿄로 올라온다. 
그 이듬해 1884년부터 옛 번주(藩主)의 육영 단체인 도키와카이(常盤會)의 급비생이 되어 공부하면서 도쿄대학 예비문에 합격, 이해에 수필 <붓 가는 대로>를 쓰기 시작한다. 도쿄대학 예비문은 2년 후 1886년에 제일고등중학교로 재편되었는데 이곳에서 시키는 동갑내기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도 만난다. 1889년 2월, 시키가 각종 문예 형식으로 집필한 7편을 ≪칠초집(七草集)≫ 한 권으로 묶어 비평을 부탁했을 때 나쓰메 긴노스케(夏目金之助)는 크게 칭찬하며 ‘소세키(漱石)’라는 필명으로 서명했고, 마사오카 쓰네노리(正岡常規)는 9월에 소세키의 기행·한시문집 ≪목설록(木屑錄)≫을 비평해 주었을 때 ‘시키(子規)’라는 필명을 쓴다. 시키는 이해 5월에 일주일 정도 객혈을 계속한 후, 이제부터 울며 피를 토한다는 두견새[子規]를 필명으로 하자고 결심하며 처음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이듬해 9월 시키는 도쿄제국대학 문과대학 철학과에, 소세키는 같은 대학 영문과에 입학한다. 그러나 시키는 다시 철학과에서 국문과로 전과해 하이카이(俳諧) 분류에 착수한다. 
1892년 25세 되던 해 11월, 어머니와 여동생을 도쿄로 불러 함께 지내며 12월 1일부터 일본신문사에 입사해 하이쿠 시평(俳句時評)을 담당한다. 대학은 그 이듬해 3월 정식으로 그만둔다. 
시키의 네기시 전셋집은 ‘시키암(子規庵)’ ‘네기시암(根岸庵)’이라 불리며 하이쿠와 단카 제자들은 물론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문예를 담론하던 ‘문학 살롱’ 구실을 했다. 시키는 ≪일본≫이 폐간되고 발간한 ≪소일본(小日本)≫의 삽화가로 일하게 된 나카무라 후세쓰(中村不折)와 만나 자연의 실경(實景)에 관심을 가지며 그의 예술적 지향이 된 ‘사생(寫生)’에 눈을 뜨게 된다. 27세 가을 무렵이다.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 유능한 신문기자는 모두 종군 기사를 써서 인기를 떨치고 있을 때 시키도 간절히 원했던 종군이 허락되어 1895년 3월 중국으로 떠나 요동반도의 서쪽 금주(金州)·여순(旅順) 등에서 1개월 정도 머문다. 그때 육군 군의 부장으로 종군하고 있던 모리 오가이(森鷗外)를 매일같이 방문하기도 한다. 전쟁은 곧 끝나고 5월, 돌아오는 배 안에서 지병인 폐결핵이 재발해 고베(神戶)에 도착하자 병원에 입원한다. 8월 고향 마쓰야마에 돌아가 마쓰야마중학교 영어 교사로 근무하던 소세키의 하숙에서 동거하다가 11월에 도쿄로 돌아온다. 
1896년 29세부터는 결핵균이 척추로 옮아가 보행이 불편해 대부분의 시간을 병상에서 지내게 된다. 하이쿠 혁신이 문단에서도 인정받아 이해 1월 3일, 시키암(子規庵)에서 열린 하이쿠 짓기 모임에는 오가이와 소세키도 교시(虛子), 헤키고토(碧梧桐) 등과 함께 참석한다. 4월부터 12월에 걸쳐 수필 <송라옥액(松蘿玉液)>을 신문 ≪일본(日本)≫에 연재한다. 
병세가 악화하는데도 시키는 해를 거듭하며 <하이진 부손(俳人蕪村)>을 비롯해 <가인에게 보내는 글(歌よみに与ふる書)> 등을 연달아 발표하며 단카 혁신에도 힘을 쏟는다. 1898년 3월에는 최초의 단카 모임인 가회(歌會)를 시키암에서 개최했으며, 하이쿠 전문 잡지인 ≪호토토기스(ホトトギス: 두견새)≫를 도쿄에서 발간, 시키의 주재(主宰)로 교시(虚子)가 편집을 담당하도록 한다. 이해까지는 인력거를 타고 수차례 외출을 시도했다. 그러나 병세는 더욱 악화해 누워 지내는 나날 속에 1899년 3월에는 ‘네기시 단카회’가 정식으로 발족한다. 이해 가을부터 시키는 나카무라 후세쓰가 쓰던 그림물감을 건네받고 수채화를 그리기 시작한다. 
시키는 자신의 생존 기간과 경쟁이라도 하듯이 1901년 1월부터 7월에 걸쳐서는 <묵즙일적(墨汁一滴)>을 연재하고 9월부터는 병상 일지와 다름없는 <앙와만록(仰臥漫録)>을 쓰기 시작한다. 1902년 1월부터는 병세가 더욱 급격히 악화해 문하생들이 교대로 간호하며, 원고는 구술로 집필된다. 5월 5일 <병상육척(病牀六尺)>을 연재하기 시작해 9월 17일 127회로 이승을 마감하기 이틀 전까지 계속한다. 그사이 6월 27일부터 8월 6일에 걸쳐서는 갖가지 과실을 그린 ≪과일첩≫을, 8월 1일부터 8월 20일 <나팔꽃>을 마지막으로 그린 ≪화초첩≫도 완성하고 있다.
9월 18일 오전, 어머니는 의사를 부르러 가고, 구가 가쓰난 부부, 헤키고토, 여동생 리쓰가 둘러앉아 머리맡을 지키는 가운데 마지막 힘을 다해 먹물을 머금은 붓으로 절필 3구(句)를 쓰고 나서는 곧 혼수상태에 들어간 채로 이튿날 9월 19일 새벽 1시에 영원히 숨을 거둔다. 만 35년의 생애였다. 


1901.2.17~1932.3.24
1901년 2월 17일 오사카(大阪)에서 태어난다. 기타노(北野)중학교를 거쳐 1919년에 제3고등학교(第三高等学校) 이과에 진학하지만 점차 문학과 음악에 흥미를 느낀다. 1920년 9월에는 폐첨카타르 진단을 받고 잠시 학교를 떠나지만 11월에 다시 복귀한다. 문학에 대한 관심은 날로 깊어져 1922년부터 습작을 시작하는 한편, 방탕한 생활로 5년 만에 고등학교를 졸업한다. 
1924년 도쿄제국대학 영문학과에 입학하고, 나카타니 다카오(仲谷孝雄) 등과 동인지《아오조라(青空)》의 창간을 준비한다. 같은 해에 객혈(喀血)과 이복 여동생의 죽음을 겪으며 심적으로 예민하고 불안정해진다. 
1925년 1월,《아오조라》창간호에「레몬」을 발표하고, 병이 깊어가는 와중에도 창작 활동을 이어간다. 1926년 말부터 요양을 위해 이즈(伊豆)의 유가시마(湯ヶ島)온천에 머물며 1년여를 보낸다. 이를 계기로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를 비롯한 당시의 문인들과 교류하게 된다. 1927년 6월 《아오조라》는 폐간된다. 
1928년에 상경하지만 병세가 악화되어 오사카로 돌아간다. 병상에서도 창작을 멈추지 않았으며, 1931년 5월 작품집 『레몬(檸檬)』이 간행되었으나 이듬해인 1932년 3월 24일, 서른한 살이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1883.3.13~1956.4.2.


1883년 3월 13일 도쿄[東京]에서 출생하였다. 조각가인 아버지 다카무라 고운[高村光雲]의 뜻에 따라 일찍이 조각 공부를 시작하였다. 14세 때인 1897년 아버지가 교수로 있던 도쿄미술학교 예과에 입학하였으나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사진으로 보고 감동하여 22세에 다시 양화과(洋畵科)에 재입학하였다. 이듬해 아버지의 후원하에 미국으로 건너가 조각을 공부하다가 다시 유럽으로 건너가 파리에서 생활하며 프랑스 시인들의 시에 심취하였다. 4년 동안의 외국생활을 끝내고 귀국한 뒤에는 미술비평에 뛰어들어 기존의 미술계를 혹독하게 비판하며, 로댕과 관련된 책들을 번역하였다. 

1914년 처녀시집 《도정 道程》을 자비 출판하여 시인으로서의 재능을 인정받고, 1911년 화가인 나가누마 지에코[長沼智惠子]를 만나 1914년 12월 결혼하였다. 1931년 아내에게 정신분열 증세가 나타나자 장소를 옮겨가며 간호에 전력하였으나 1932년 결국 아내를 잃고 이후 그녀에 대한 추억을 시에 담았다. 제2차세계대전 무렵에는 천황과 전쟁을 찬양하는 시를 주로 썼으나, 패전 뒤에는 자신의 역사관을 후회하며 개인적인 기억들을 평이한 언어로 옮긴 자유시를 발표하였다. 대표작으로 《지에코초 智惠子抄》(1941)와 시문집 《지에코초 그후 智惠子抄その後》(1950)가 있으며, 시작(詩作)과 조각활동을 병행하다가 1956년 4월 2일 사망하였다


 

요사노 아키코(與謝野晶子, 1878∼1942)
요사노 아키코는 사카이(堺)의 전통 과자점 스루가야(駿河屋)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12세 무렵부터 가업을 도와 장부를 기록하거나 대나무 껍질로 단팥묵을 포장하는 등 일에 쫓기는 생활을 해야 했다. 후일 유년 시절을 회상한 글에서 그녀는 “밤일이 끝나기를 기다려 밤 12시에 꺼지는 전등 아래서 겨우 1시간 또는 30분 부모의 눈을 피해가며 내가 읽은 책들은 여러 가지 공상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어 나를 위로하고 용기를 주었다”고 술회했는데, 답답한 일상 속에서 그녀의 유일한 벗은 문학 작품 속의 주인공들이었다. 부친의 장서였던 ≪겐지 이야기(源氏物語)≫, ≪마쿠라노소시(枕草子)≫, ≪영화 이야기(榮華物語)≫ 등 고전문학 작품 속의 주인공들을 동경하며 소녀 아키코는 암울한 현실의 저편에 있는 감미로운 사랑의 세계를 꿈꾸었을 것이다. 또한 그녀의 독서 목록에는 제국대학에 재학 중이던 오빠가 보내오는 당시의 최신 문예 잡지와 신소설이 포함되어 있었다. 소학교 졸업 후 진학한 사카이 여학교는 현모양처를 양성하는 봉건적 여성 교육을 주로 하는 학교였으나, 아키코는 독서를 통해 새로운 시대의 사조를 체감하고 가부장적 구습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할 의식을 키워갔다. 그녀의 재기는 1899년 서일본 지방 문학청년들의 모임인 관서청년문학회 입회를 통해 싹트기 시작해, 요사노 뎃칸과의 운명적인 만남과 함께 일시에 분출되었다. 그 첫 번째 결실인 ≪헝클어진 머리칼≫은 근대적 자아에 눈뜬 새로운 여성의 목소리를 대담하고 분방하게 표현한 것으로, 단숨에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초기 일본 낭만주의의 거점이었던 문예지 <묘조>의 여왕으로 활약하며 일본 문학사상 ‘정열의 가인’으로 기록된다. 결혼 후에는 소설, 시, 평론, 고전 연구 등 다방면에서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는 한편, 11명의 자녀를 키우며 가계를 꾸려가는 정력적인 삶을 영위했다. 그사이 작풍은 초기의 격정적인 어조는 퇴색되었으나 낭만적 미질을 유지하는 가운데 점차 내면적인 깊이를 더해 고요한 자기 관조와 사색적 서정을 내포해 가게 되었다. 1912년 뎃칸과 함께한 유럽 여행 이후에는 여권 신장 운동 체험을 바탕으로 넓은 사회적 시야를 갖고 부인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문화학원(文化學院)을 창립(1921)해 초대 학감에 취임하는 등 문학은 물론 교육 활동에 있어서도 폭넓은 족적을 남겼다. ≪헝클어진 머리칼≫과 함께 널리 회자되는 그녀의 대표작으로는 반전시로 일컬어지는 장시 <너는 죽지 말거라(君死にたまふことなかれ)>(1904)를 들 수 있다. 아키코는 무엇보다 진실한 마음을 표현하는 시의 가치를 믿었으며 전 생애를 다해 사랑을 노래한 작가로 기억된다. 1942년 뇌일혈 투병 중 사망하기까지 그녀가 남긴 가집은 20권, 약 5만 수다. 

 林芙美子
일본 쇼오와 시기를 대표하는 소설가. 야마꾸찌 현 시모노세끼에서 출생했으며 어릴 때부터 행상을 하는 양부와 생모를 따라 여러 지역을 전전했다. 1916년 히로시마 현 오노미찌에 정착하여 휴일과 밤에 일을 하면서 고등여학교를 다녔고, 졸업 후 토오꾜오로 가서 목욕탕 잡일꾼, 여공, 사무원, 여급 등을 하며 생계를 꾸려갔다. 1924년 시 동인지 『두사람』을 3호까지 간행했으며, 1928년 『여인예술』에 시 「수수밭」을 발표하고 이어서 『방랑기』를 20회에 걸쳐 연재했다. 1930년 어렵게 살아온 체험을 녹인  『방랑기』를 출간하자 공황기에도 불구하고 60만부나 팔렸다. ‘서민 문학’ 작가로서 얻은 이런 대중의 사랑은 생전에는 물론이고 사후에도 이어져 다수의 작품이 영화, 연극, 드라마로 제작됐다. 1948년에 제3회 여류문학자상을 수상했다.
일본의 시인. 야마구치현에서 출생, 야마구치 중학을 거쳐 교토 대학에서 수학하였다. '사계', '역정'의 동인 되어 <문학계> 등에 왕성하게 작품을 발표했다.
오카쿠라 텐신
저자 오카쿠라 텐신은 일본 미술운동의 지도자이자 문명 사상가. 세계를 향해 막 문을 연 일본 최대의 무역항 요코하마(橫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비록 하급무사이기는 했지만 요코하마에서 번(藩)이 운영하는 무역상을 책임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어렸을 적부터 서양 문물을 직접 맛보며 자랐다. 더구나 6살 때부터 미국인에게 영어를 배워 영어가 제2의 모국어나 다름없었다. 11살 때 도쿄외국어학교에 입학했으며, 14살의 나이로 현재의 도쿄대학 제1기생이 됐다. 학교 졸업 후 문부성 관리가 되어 미술행정을 담당하던 오카쿠라는 1889년 도쿄미술학교(현재의 도쿄예술대학 미술학부)를 건립했고,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여기서는 오로지 일본 전통미술만을 가르치도록 했다. 1893년에는 중국으로 건너가 동양 예술의 근원을 찾아 헤맸으며, 특히 이 시기에 도교의 노장 사상을 만나 깊이 빠져 그 후 그의 인생관, 예술관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904년 미국으로 활동거점을 옮겨 보스턴미술관 동양미술 부문 책임자로 고미술품 수집활동을 펴는 한편, 서양세계를 향해 동양 전통문명을 퍼트리는 데 힘을 쏟았다. 그 성과가 『차 이야기』를 비롯한 여러 영문저작으로 나타났다. 
(石川啄木)

1886년 이와테현에서 태어났다. 모리오카 보통중학교를 중퇴한 후 문학지 『묘조』의 동인으로 활동하며 시부타미 보통소학교·야요이 보통소학교 대리교사와 『하코다테 일일신문』 ·『기타몬신보』 ·『오타루일보』 ·『구시로 신문』 기자 등 여러 직장을 전전했다. 이후 『아사히 신문』 교정계에 취직하여 후타바테이 시메이 전집을 교정하고 아사히가단의 선자(選者)로 일하던 중 1912년에 폐결핵으로 요절했다. 저서로는 가집 『한 줌의 모래』, 『슬픈 장난감』, 시집 『동경』, 『호루라기와 휘파람』, 소설 『구름은 천재로소이다』 등이 있다.
1900년 이시카와현에서 태어나 1962년에 사망한 물리학자이자 수필가. 홋카이도제국대학 이학理學부 교수가 된 1932년 무렵부터 눈雪 결정結晶 연구를 시작했고, 1936년에 대학교 저온실험실에서 세계 최초로 인공눈 제작에 성공하는 등 저온과학에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또한 과학을 주제로 한 수필도 다수 남겼다. 저서로 《겨울 꽃》, 《입춘의 알》 등이 있고, 국내 번역서로는 《눈》(지만지고전천줄, 2014)이 있다. 
오카모토 가노코(岡本かの子, 1889∼1939)
오카모토 가노코(岡本かの子)는 1889년 3월 1일, 대대로 막부(幕府)와 번(藩)에 물품을 납품하는 호상(豪商)의 장녀로 도쿄의 다마강(多摩川) 근처에서 태어났다. 선병질(腺病質) 때문에 양부모 집에서 자란 가노코는 어려서부터 한문을 배우고 ≪겐지 모노가타리(源氏物語)≫ 수업을 듣는 문학소녀였다. 13세 때 여학교 교우회 잡지를 통해 단가를 발표했고 16세 때는 신문 문예란에 투고를 시작했다. 당시 도쿄대학에 다니던 친오빠가 문학 활동을 시작하자 후에 탐미주의 문학의 거장이 되는 다니자키 준이치로(谷崎潤一郞)가 집에 드나들게 되면서 가노코도 자연스레 영향을 받게 된다. 17세 때 친오빠와 함께 와카(和歌) 작가로 유명한 요사노 아키코(与謝野晶子)를 찾아가 신시사(新詩社)의 동인이 되면서 ≪명성≫와 ≪스바루≫를 통해 신체시와 와카를 발표했다. 지인의 소개로 만난 오카모토 잇페이(岡本一平)와 21세 때 결혼해 이듬해 훗날 예술가로 명성을 떨치는 다로(太郎)를 낳는다. 그러나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남편 잇페이는 아사히(朝日)신문사에 입사해 만화를 연재해 독자적인 스타일로 주목을 끌면서 방탕한 생활을 시작했고 부부 사이가 틀어진 가노코는 대학생 호리키리 마사오(堀切茂雄)와 사랑에 빠지면서 남편과 애인이 함께 동거하는 기묘한 부부 생활을 시작했다.
1929년, 남편 잇페이가 런던 군축 회의의 아사히신문 특파원이 되면서 장남 다로와 새로운 애인이자 외과 의사인 닛타 가메조(新田亀三)를 데리고 4년에 걸쳐 파리와 베를린 등지를 돌아다녔다. 1932년 가노코 일행은 미국을 경유해 귀국길에 오르지만 다로는 파리에 남아 추상 예술가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데, 가노코는 이때의 심경을 바탕으로 <모자 서정>을 쓴다. 파리에서 돌아온 가노코는 잇페이의 헌신적인 협조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후원에 힘입어 시인과 불교 연구자에서 그토록 염원하던 소설가로 전향한다. 1923년 가마쿠라(鎌倉)에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와 만난 일을 소설로 옮긴 <두루미는 병들었다>를 발표하면서 세간의 주목을 끌었고, 이후 놀라운 속도로 많은 소설을 발표한다. 특히 장편 소설인 ≪생생유전(生々流転)≫(1940)은 다마강을 무대로 가노코의 어릴 적 추억과 파란만장한 인생 드라마를 생생하게 그린 대표작이다. 
1938년 뇌일혈로 쓰러져 요양을 하던 가노코는 1939년 2월 18일 잇페이와 애인 닛타 가메조가 지켜보는 가운데 50여 년의 짧은 생애를 마친다.

가나자와 시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이즈미 교타로(泉鏡太郞)이다. 예술가이자 장인 가문에서 태어나 부모로부터 신앙심과 예술적인 자질을 물려받았다. 메이지 시대 후기부터 다이쇼 시대를 거쳐 쇼와 시대 말기까지 활동했으며 장?단편소설과 수필, 가부키 등 3백여 편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1895년 「외과실(外科室)」과 「야행순사(夜行巡査)」를 발표하면서 문단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고야성(高野聖)」 「유지마 참배」 등의 작품을 내놓았다. 여성을 찬미하거나 낭만적이고 신비로운 독특한 세계를 창조하여 등장인물로 하여금 작가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도덕적 가치를 대표하게 했다. 


 

 소설가, 사회운동가. 도쿄의 명망 있는 건축가의 장녀로 태어나 유복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열여덟 살에 소설 「가난한 사람들」을 발표해 천재소녀로 주목 받았다. 자본주의 사회의 폐해를 깨닫고 문학으로 민주주의 운동을 펼쳤으며 수차례 투옥 및 집필 금지처분을 받았다. 패전 후 피폐해진 사회상을 여성의 시선으로 섬세하게 그려낸 소설 「반슈평야」를 비롯해 「두 개의 정원」, 「도표」 등 역작을 남겼으며 집필, 강연, 집회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시인, 수필가, 아일랜드문학 번역가. 외교관의 장녀로 도쿄 아자부에서 태어났다. 아일랜드문학에 매력을 느껴 예이츠, 존 싱, 그레고리 부인 등의 작품을 번역했다. 자기 삶의 소소한 단상을 절제되고 우아한 문체로 엮은 만년의 수필집 『등화절』은 근대여성의 아름다운 산문으로 이름이 높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와 깊은 문학적 교류를 통해 서로 사랑의 감정을 느끼기도 했는데, 아쿠타가와가 『어느 바보의 일생』 「나보다 나은 사람」 편에서 “재능 면에서 나와 겨룰 수 있는 여자를 우연히 만났다”며 “어찌 내 이름을 아낄까, 아껴야 할 것은 그대 이름인 것을”이라 노래한 대상으로 알려졌다. 


 

다자이 오사무, 사카구치 안고와 함께 사회통념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저작활동을 펼친 전후 무뢰파 작가. 스탕달의 영향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폐결핵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이미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아 건강을 해친 상태였다. 오사카에서 나고 자란 오다사쿠(애칭)는 왁자한 오사카 풍경과 저잣거리 사람들의 삶과 사랑을 생생하게 묘사한 장편소설 『메오토젠자이(부부 단팥죽)』로 큰 사랑을 받았다. 한편 「수필 오사카」, 「오사카의 얼굴」, 「오사카의 발견」 등 오사카의 감수성을 유쾌하고도 시니컬한 필체로 써내려간 산문을 다수 남겼다.
소설가, 각본가. 오사카에서 헌옷가게를 운영하는 집안 장남으로 태어났다. 대학에 진학했지만 학비를 내지 못해 제적당했다. 그러나 수업은 꾸준히 들어서 졸업사진까지 찍었다고 한다. 동료의 도움으로 톨스토이 전집 번역에 참여했으며 서른한 살에 필명을 산주이치(三十一)로 짓고 매년 숫자를 늘려 이름을 바꾸다 산주고(三十五)에서 멈췄다. 「남국태평기」, 「구스노키 마사시게」 등 장르소설, 시국소설을 주로 다뤘으며 무성영화 각본을 쓰기도 했다. 『문예춘추』 창간으로 큰 성공을 거둔 기쿠치 간은 친구의 업적을 기리며 뛰어난 대중소설에 수여하는 나오키상을 제정했다.
문학가로 활동했다. 요미우리신문에 문학, 미술, 음악, 연극, 종교 등 다양한 분야의 평론을 썼으며 「어디로」, 「포구 근처」, 「올해 가을」 등 자연주의 경향의 소설을 썼다. 특유의 절제되고 초탈한 문체로 니힐리즘에 가까운 수필을 많이 남겼으며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에서 안도 슈사쿠에 이르기까지 문인들이 사랑한 작가들의 작가였다.
시인, 번역가. 돗토리현 출생. 『감상의 봄』, 『영혼의 가을』 등 아름다운 시집을 남겼으며, 하이네의 시를 사랑하여 시집을 번역하고 일본에 가장 먼저 그를 알렸다. 오사카에서 벳부로 향하는 뱃길 여행 중 세토내해에서 투신자살했다. 

역자 소개

경희대를 졸업하고 와세다대 문학연구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옮긴 책으로 다자이 오사무 전집 『만년』, 『신햄릿』, 『판도라의 상자』, 『인간실격』, 오에 겐자부로 『읽는 인간』, 오카자키 다케시 『장서의 괴로움』, 나가이 가후 『게다를 신고 어슬렁어슬렁』, 미즈노 루리코 『헨젤과 그레텔의 섬』, 다케히사 유메지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등이 있다. 

목차


나쓰메 소세키, 「자전거 일기」「고양이의 무덤」「나와 만년필」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피아노」「귤」「나의 스미다강」
이즈미 교카, 「따뜻한 물두부」
모리 오가이, 「사프란」
마사오카 시키, 「램프 그림자」
오카구라 덴신, 「고우야, 외롭니」
가타야마 히로코, 「여행길 봇짐의 구성」「계절이 바뀔 때마다」「다섯 송이 장미」
마사무네 하쿠초, 「꽃보다 경단」「한 가지 비밀」
다카무라 고타로, 「촉각의 세계」
나카야 우키치로, 「눈을 만드는 이야기」
미야자와 겐지, 「영국 해안」「쇠락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미야모토 유리코, 「도서관」
고바야시 다키지, 「감방 수필」
오다 사쿠노스케, 「오사카의 우울」「가을에 오는 것」
다자이 오사무, 「아, 가을」「온천」「그날그날을 가득 채워 살 것」
하야시 후미코, 「나의 스무 살」「나폴리의 일요일」「저는 인간을 좋아합니다」
이시카와 다쿠보쿠,「모래 한 줌」
요사노 아키코, 「출산 이야기」
나오키 산주고, 「가난뱅이의 기록」
오카모토 가노코, 「복숭아가 있는 풍경」「갈색의 구도」
나카하라 추야, 「산보 생활」
하기와라 사쿠타로, 「나의 고독은 습관입니다」
사카구치 안고, 「온천마을 엘리지」
가지이 모토지로, 「벚나무 아래는」
이쿠타 슌게쓰, 「실내여행」
하라 다미키, 「불의 아이」「염원의 나라」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