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1892년 3월 1일 도쿄에서 태어났다. 용띠에 용의 달, 용의 날, 용의 시에 태어났다 하여 ‘龍之介’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 생후 7개월경에 생모에게 정신이상이 와서 아기를 기를 수 없게 되자, 그는 외갓집으로 옮겨지고, 생모의 언니, 곧 이모가 맡아 기르게 된다. 웬일인지 늦도록 결혼도 하지 않고, 오빠 집에서 눈칫밥을 먹고 있던 그녀는, 이제야 내 역할이 생겼다는 듯, 과보호라고 할 정도로 아쿠타가와의 양육과 교육에 매달렸다. 이리하여 평생 이모에게 묶여 사는 심약한 천재 작가가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뛰어나게 머리가 좋았던 그는, 중학(구제 5년 과정) 성적이 워낙 우수하여 일본 제일의 명문인 일고(一高)에 무시험으로 들어갔고, 1913년 도쿄대학 영문과에 진학했는데, 이 학과는 겨우 몇 명밖에 합격자를 내지 못했을 정도의 난관이었다 한다. 대학 재학 중인 1914년에, 일고 때부터의 동기인 기쿠치 칸, 구메 마사오 등과 동인지 ‘신사조(新思潮)’(제3차)를 창간하여 문학활동을 시작한다. 1915년에는 대표작의 하나인 ‘라쇼몽(羅生門)’을 발표했고, 어떤 급우의 소개로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의 문하로 들어가 지도를 받게 되었는데, 그 이듬해에 발표한 ‘코’가 스승인 소세키의 격찬을 받고, 문학에의 결의를 굳힌다. 이해에 대학을 졸업한 아쿠타가와는 해군 기관(機關)학교의 영어 교관으로 있으면서 창작에 정진하여, 그 이듬해에는 이미 제2단편집을 발간하고 있다. 1918년에는 교직을 그만두고 어느 신문사의 객원(客員) 사원이 되어 창작에 전념하게 된다. 그리하여 수많은 화제작을 연이어 내 놓음으로써, 30도 되기 전에 이미 중견 작가로서 인정받게 된다. 1921년에는 신문사의 해외 시찰원으로서 중국을 방문하여 호적(胡適)을 만나 대담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행 중에 앓아눕는 등, 이 무렵부터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하여, 신경쇠약, 불면증, 소화불량 등의 질병에 시달리게 된다. 양부모와 이모를 둘러싼 가정생활의 갈등도 끊이지 않는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문단의 평가에 지나치게 예민하여, 누가 악평(惡評)이라도 하면 견딜 수 없어 한다. 그의 동시대의 몇몇 문인들은, 추문을 일으키고도 아랑곳하지 않고, 작품에 대한 악평 따위는 아예 무시해 버리는 배짱으로 장수(長壽)도 하고, 따라서 대가(大家)라는 대접을 받으며 대작(大作)도 남기곤 하는데, 그런 유들유들한 작가들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방대한 독서량으로 풍부한 지식과 천부적인 표현력을 가진 그는 끝까지 창작에 몰두하려 하지만, 차츰 육체적, 정신적으로 빠져나올 수 없는 어둠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게 된다. 그리하여 “인생은 지옥보다 더욱 지옥적이다”란 말을 연신 되뇌더니, 결국 작가로서의 무한한 가능성을 접고 35년의 생을 스스로 마감하게 된다. 시신이 된 남편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그의 부인이, “여보, 잘 하셨어요. 이제 좀 편안하시지요?” 하고 말했다고 하니, 그들의 악전고투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게 한다. 아쿠타가와의 죽음의 8년 후에, 친구이며 문예춘추사 사주인 기쿠치 칸이 아쿠타가와를 기념하는 신인문학상 ‘아쿠타가와상’을 제정했다. 아쿠타가와상은 일본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으로 발전하여,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아쿠타가와의 유작인 ‘어느 바보의 일생’을 ‘패배의 문학’이라고들 했는데, 그는 결코 패배하지 않았다. 일본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작가로서, 나쓰메 소세키, 모리 오가이에 이어 역대 3위의 작가로 선정되고 있고, 그의 작품만을 다룬 ‘아쿠타가와 문학사전’이 몇 가지나 나와 있을 정도로, 그의 문학은 현재도 국민적인 사랑을 받고 있다.
1901.2.17~1932.3.24
1901년 2월 17일 오사카(大阪)에서 태어난다. 기타노(北野)중학교를 거쳐 1919년에 제3고등학교(第三高等学校) 이과에 진학하지만 점차 문학과 음악에 흥미를 느낀다. 1920년 9월에는 폐첨카타르 진단을 받고 잠시 학교를 떠나지만 11월에 다시 복귀한다. 문학에 대한 관심은 날로 깊어져 1922년부터 습작을 시작하는 한편, 방탕한 생활로 5년 만에 고등학교를 졸업한다.
1924년 도쿄제국대학 영문학과에 입학하고, 나카타니 다카오(仲谷孝雄) 등과 동인지《아오조라(青空)》의 창간을 준비한다. 같은 해에 객혈(喀血)과 이복 여동생의 죽음을 겪으며 심적으로 예민하고 불안정해진다.
1925년 1월,《아오조라》창간호에「레몬」을 발표하고, 병이 깊어가는 와중에도 창작 활동을 이어간다. 1926년 말부터 요양을 위해 이즈(伊豆)의 유가시마(湯ヶ島)온천에 머물며 1년여를 보낸다. 이를 계기로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를 비롯한 당시의 문인들과 교류하게 된다. 1927년 6월 《아오조라》는 폐간된다.
1928년에 상경하지만 병세가 악화되어 오사카로 돌아간다. 병상에서도 창작을 멈추지 않았으며, 1931년 5월 작품집 『레몬(檸檬)』이 간행되었으나 이듬해인 1932년 3월 24일, 서른한 살이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본명은 히구치 나쓰. 일본 근대의 서막이 열린 1876년 도쿄의 한 하급 무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책 읽기를 좋아하고 문학적인 재능을 보여 아버지의 권유로 당시 고전을 가르치고 습작하게 했던 하기노야라는 가숙에 들어갔다. 나쓰의 아버지는 본래 농민이었지만 에도 시대의 지배층이었던 무사 계급이 되고자 했고, 마침내 신분 상승의 꿈을 이루었다. 그러나 얼마 뒤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 막부가 붕괴하자 그 역시 무사에서 부르주아 시민으로 거듭나야만 했다. 이에 운반청부업조합을 세워 사업에 손을 댔지만 실패로 끝났고, 결국 번민으로 죽어 갔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16세의 나이에 호주가 된 그녀는 실질적으로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이때 정혼자와도 파혼을 당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소설을 써서 돈을 벌기로 결심하고 아사히신문에 소설을 쓰고 있던 나카라이 도스이(半井桃水)의 문하에 들어가 가르침을 받았다. 이 무렵부터 나쓰는 달마대사가 타고 강을 건넜던 일엽편주에 빗대어 ‘이치요’라는 필명을 사용했다.
20세 때 데뷔작인 「밤 벚꽃」에 이어 「매목」을 발표했지만 큰 수입은 못 되었고, 전당포를 드나들었다. 돈이 바닥나자 그녀는 어머니와 변두리 상점가에 잡화점을 열었다. 그러나 잡화 가게도 얼마 뒤 접고는 혼고 마루야마 후쿠야마 정(丸山福山町)으로 이사했는데, 생을 마감할 때까지 이곳에서 지냈다.
23세 때 『문학계』에 「키 재기」를 발표하기 시작했고, 『문예구락부』에 「탁류」, 「십삼야」 등도 연이어 발표했다. 이듬해에는 「갈림길」, 「나 때문에」 등을 발표했으며, 「키 재기」 또한 완성함으로써 문단의 총아로 부상했다. 당시 특권 계급의 여류 소설가들은 상류 사교계 등의 협소한 세계를 소재로 취하거나 대단원으로서의 결혼을 플롯으로 하여 작품을 구성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이치요의 소설은 이런 흐름에서 크게 벗어나 다양한 여성들의 삶과 고뇌를 언어화했다. 대표작인 「키 재기」에서는 요시와라의 구시대적 활기와 메이지적인 어둠, 사치와 빈곤, 해학과 슬픔이 교차하는 세계에서 살아가는 소년 소녀들의 성장을 그렸다.
그러나 젊음의 꽃을 피우기도 전에 이치요는 1896년 과로로 인한 폐결핵 악화로 24년간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그녀의 비극적인 삶과 대조적으로 이치요는 사후 얼마 되지 않은 시기부터 당대 최고의 여성 소설가로 화려한 명성을 얻었다. 그녀의 작품은 그때부터 일본 근대 문학의 정전 목록에 올라 지금까지도 사랑받고 있다.
안영신 옮김
건국대학교 일어교육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엔도 슈사쿠 문학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건국대학교, 동남보건대학교,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 출강하였고, 타자론과 육체 담론에 관심을 갖고 일본문학을 연구하고 있다. 논문으로는 <엔도 슈사쿠 문학과 마르키 드 사드>, <일본 전후문학과 노년의 젠더>, <일본 전후문학에 나타난 육체의 표상>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조선’ 표상의 문화지≫(공역), ≪황후의 초상≫(공역)이 있다.
박은정 옮김
건국대학교에서 일본어교육을 전공하고 일본 도야마대학교에서 석사, 히로시마대학교에서 언어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검도를 배우면서 문학과 번역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2009년 시즈오카 세계번역 콩쿠르에서 대상을 받아 시즈오카대학교에서 연구생으로 1년 동안 수학했다. 옮긴 책으로는 다케다 타이준의 ≪반짝이끼≫와 나카지마 아쓰시의 ≪빛과 바람과 꿈≫이 있으며, 임철우의 ≪이별하는 골짜기(別れの谷)≫(공역)를 일본어로 번역했다.
서홍 옮김
성신여자대학교에서 일어일문학을 전공했으며, 일본 히로시마대학교에서 아베 코보의 문체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9년 시즈오카 세계번역 콩쿠르에서 한국어 번역 부분 우수상을 받았으며, 현재 단국대학교에서 강의 중이다. 옮긴 책으로는 ≪함께하는 다문화 교육≫(공역), ≪조선교통사≫ 제2권(공역)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