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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녘 보랏빛

히구치 이치요 저 | 유윤한 역 | 궁리 | 2021년 0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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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58207115 / 264쪽 142 x 2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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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출판사 리뷰

여성들의 말없는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시대에 고결하고 단단한 문학의 목소리로 답하다 히구치 이치요가 살았던 메이지 시대는 국민국가가 형성되기 시작하던 격변기였으나, 사회는 아직 봉건제에 얽매여 있었고, 신분제는 철폐되었지만 빈부 격차가 여전했고 여성의 희생 위에 사회가 유지되고 있었다. 시민 세력의 남성들은 새롭게 얻은 사회적 지위를 확실히 다지기 위해 여성을 가정에 머무르게 했다. 물론 일부 전문직이나 다른 사람들을 보살피는 직종(교사나 간호사)에서 일하는 여성이 극히 드물게 있기는 했으나 대부분의 여성들은 집 안에서 아이를 낳아 기르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남성이 경제 활동을 통해 재산을 쌓으면, 여성들이 집 안에 머물며 살림을 하고 대를 이어 재산과 사회적 지위를 지켜줄 아들을 낳아 키워주기를 원했다. 히구치 이치요는 작품 속에서 여성들의 말없는 순종과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던 사회를 비판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또한 가부장제도 바깥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의 삶과 아픔을 작품에 섬세하게 녹여낸다. 히구치 이치요는 오빠와 아버지를 연이어 떠나보낸 후 열여섯 살에 호주가 되어 어머니와 여동생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빨래와 바느질로 어려운 생활을 이어가다, 호구지책으로 요시와라 유곽 근처에서 잡화점을 운영하면서 유녀들의 삶과 내면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경험은 「키 재기」나 「흐린 강」 같은 작품 속으로 녹아들게 된다. 원래 농민이었던 이치요의 아버지는 사족(士族) 신분을 사서 도쿄부의 관리로 일했으나, 새로운 메이지 시대에 적응하려고 시작한 사업의 실패 후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급기야 집안이 망한 후 약혼자로부터 파혼을 당하면서 이치요는 결혼제도를 누구보다 더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 결과 이치요의 작품은 결혼제도 안팎에서 고통을 겪는 여성들의 비애를 잘 보여주고 있다. 때로는 그 모습이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문체로 그려져 더욱 비통함이 느껴진다. “열여섯, 열일곱까지는 꽃이야, 나비야, 귀하게 컸는데…” 쇼타로는 떨리는 목소리로 요즘 요시와라에서 유행하는 노래를 읊조렸다. “이제는 이 일이 익숙해져…” 하며 몇 번이고 노랫말을 되뇌며 걸어가는데, 늘 그렇듯이 셋타 소리가 높이 울렸다. 쇼타로의 작은 몸은 들뜬 사람들 틈에 섞여 사라져버렸다. 그렇게 인파에 밀려 요시와라 모퉁이까지 갔을 때, 유녀를 보살피는 아주머니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가는 미도리가 보였다. -「키 재기」에서 차라리 그냥 돌아갈까? 돌아가서 다로 엄마라 불리며, 그냥 하라다의 사모님으로 살까? 부모님은 주임관 사위를 자랑할 수 있고, 나만 절약하면 가끔 입에 맞는 음식이나 용돈도 드릴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생각대로 이혼하면 다로는 계모 밑에서 고생해야 하고, 부모님은 지금까지 자랑스럽게 세우고 있던 콧대가 푹 꺾일 거야. 그리고 동생의 앞날은… 아아, 이 한몸 살겠다는 마음으로 그 애의 출세 길을 막아선 안 돼. 돌아갈까? 돌아가야겠지? 그 악마 같은 남편에게 돌아가야겠지?” -「열사흘밤」에서 체념하는 비애의 감정에서, 다른 선택을 향한 기대까지 히구치 이치요 대표작과 일기 선집 「키 재기」는 요시와라 유곽 근처에 사는 어린아이들의 성장기를 통해 가난한 서민과 유녀의 삶을 더욱 비통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흐린 강」은 강한 자의식을 가진 유녀 리키를 통해 사회의 어두운 면을 그려 보인다. 「열사흘밤」은 결혼제도에 갇혀 자신의 감정도 생각도 억눌러야 하는 여성의 아픔을 사실적이면서도 서정적으로 그려낸 작품이며, 「가는 구름」은 자신의 의지대로 선택할 수 없는 삶의 애처로움과 덧없음을 이야기한다. 「섣달그믐」과 「해질녘 보랏빛」은 기존의 작품과 다른 결을 담아내는데, 두 작품의 주인공은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좀 더 적극적으로 행동한다. 「해질녘 보랏빛」은 이치요가 스물네 살 나이에 요절하면서 영원히 미완으로 남게 되었지만, 그 자체만으로 완결성을 지닌 작품이다. 책의 말미에 수록된 「달과 꽃과 먼지의 일기」는 히구치 이치요가 소설가이자 아사히 신문 기자 나카라이 도스이에게 소설 지도를 받기 시작한 이후의 일기 중 몇 편을 간추린 것이다. 도스이에 대한 내밀한 감정의 흔들림뿐 아니라 가난한 작가로서 직업에 대해 느끼는 회의, 여성 작가를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에 대한 불편함까지 담고 있어 히구치 이치요에게 한층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게 해주는 글들이다. 히구치 이치요의 작품들은 대화문이나 문단 구분이 없는 19세기 일본어로 쓰여 있다. 많은 부분이 생략되어 있어 직역하면 이해하기 쉽지 않은데, 독자들에게 내용을 정확하게 전달하면서도 이해하기 쉽게 하는 데 주력하여 작업했다. 아내는 가던 길을 되돌아섰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밤바람이 불어 차갑게 온몸을 스쳤고, 한바탕 꿈같던 생각들은 또다시 바람에 날리듯 사라졌다. ‘아니야, 그처럼 마음 약한 쪽으로 끌려가선 안 돼. 처음 그 집에 시집갈 때부터 도지로를 남편으로 생각하지 않았어. 이제 와서 새삼스레 무슨 의리를 찾는 걸까.’ 아내는 두건 위로 귀를 누르며 걸음을 재촉했다. -「해질녘 보랏빛」에서 말없는 달과 꽃의 목소리가 되고 싶었던 작가가 남긴 시대의 고전 가난과 생의 고단함 속에서도 글쓰기를 포기할 수 없었던 작가 히구치 이치요는 어머니와 함께 요시와라 근처에서 1년가량 운영했던 잡화점을 문 닫고 집필에 집중한다. “나는 하루의 편안함을 탐내느라 백 년 후를 근심하지 않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라고 일기에 쓰고 나서 얼마 후였다. 그 후 ‘기적의 14개월’ 동안 「키 재기」, 「흐린 강」 등의 수작을 발표하였고, 스물네 살의 나이에 짧은 생을 마감한다. 그가 남긴 작품은 진흙탕 같은 이 세상을 온몸으로 아파하며 쓴 글이라 쉬이 읽을 수 없다. 히구치 이치요는 당대 문단이 단지 자신을 ‘여성’ 작가인 것에만 흥미로워한다는 사실에 괴로워했다. 여전히 소외된 사람들과 인간다운 삶을 이야기해야 하는 지금, 히구치 이치요의 작품이 오래전 고전으로만 읽혀서는 안 된다는 점이 묵직한 무게감으로 다가온다.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장맛비와 까마귀가 한동안 울어대는 소리에 선잠의 꿈에서 깼다. 방금 꾸었던 꿈속에서는 내 생각을 그대로 이야기할 수 있었고, 사람들이 그것을 그대로 이해해주어 기뻤다. 꿈을 깨니 다시 이 세상의 나로 돌아와 있었다. 이곳에선 입 밖에 내면 안 될 일과 이야기하기 어려운 사연이 꽤나 많다. -「달과 꽃과 먼지의 일기」에서 조용히 세상을 움직여온 여성 작가들의 품격 있고 당당한 행진, 에디션F 시리즈! 그 여자가 온다. 사슬을 끊고 감옥을 벗어나서 왕관을 벗고 영광을 걷어차고서 그저 살아 숨 쉬는 사람으로 온다. -샬럿 퍼킨스 길먼 에디션F 시리즈는 주제와 작가들을 좀더 세심하게 나누어 궁리출판만의 색깔 있는 문학선집을 지향하고자 합니다. 에디션F의 ‘F’는 ‘feminism, female, friendship’을 상징합니다. 이 시리즈는 여성 작가가 능동적인 여성의 모습을 그려나가는 작품들을 골라 여성 번역가가 작업을 계속 해나갈 예정입니다.

저자 소개

본명은 히구치 나쓰. 일본 근대의 서막이 열린 1876년 도쿄의 한 하급 무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책 읽기를 좋아하고 문학적인 재능을 보여 아버지의 권유로 당시 고전을 가르치고 습작하게 했던 하기노야라는 가숙에 들어갔다. 나쓰의 아버지는 본래 농민이었지만 에도 시대의 지배층이었던 무사 계급이 되고자 했고, 마침내 신분 상승의 꿈을 이루었다. 그러나 얼마 뒤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 막부가 붕괴하자 그 역시 무사에서 부르주아 시민으로 거듭나야만 했다. 이에 운반청부업조합을 세워 사업에 손을 댔지만 실패로 끝났고, 결국 번민으로 죽어 갔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16세의 나이에 호주가 된 그녀는 실질적으로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이때 정혼자와도 파혼을 당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소설을 써서 돈을 벌기로 결심하고 아사히신문에 소설을 쓰고 있던 나카라이 도스이(半井桃水)의 문하에 들어가 가르침을 받았다. 이 무렵부터 나쓰는 달마대사가 타고 강을 건넜던 일엽편주에 빗대어 ‘이치요’라는 필명을 사용했다. 

20세 때 데뷔작인 「밤 벚꽃」에 이어 「매목」을 발표했지만 큰 수입은 못 되었고, 전당포를 드나들었다. 돈이 바닥나자 그녀는 어머니와 변두리 상점가에 잡화점을 열었다. 그러나 잡화 가게도 얼마 뒤 접고는 혼고 마루야마 후쿠야마 정(丸山福山町)으로 이사했는데, 생을 마감할 때까지 이곳에서 지냈다. 

23세 때 『문학계』에 「키 재기」를 발표하기 시작했고, 『문예구락부』에 「탁류」, 「십삼야」 등도 연이어 발표했다. 이듬해에는 「갈림길」, 「나 때문에」 등을 발표했으며, 「키 재기」 또한 완성함으로써 문단의 총아로 부상했다. 당시 특권 계급의 여류 소설가들은 상류 사교계 등의 협소한 세계를 소재로 취하거나 대단원으로서의 결혼을 플롯으로 하여 작품을 구성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이치요의 소설은 이런 흐름에서 크게 벗어나 다양한 여성들의 삶과 고뇌를 언어화했다. 대표작인 「키 재기」에서는 요시와라의 구시대적 활기와 메이지적인 어둠, 사치와 빈곤, 해학과 슬픔이 교차하는 세계에서 살아가는 소년 소녀들의 성장을 그렸다. 

그러나 젊음의 꽃을 피우기도 전에 이치요는 1896년 과로로 인한 폐결핵 악화로 24년간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그녀의 비극적인 삶과 대조적으로 이치요는 사후 얼마 되지 않은 시기부터 당대 최고의 여성 소설가로 화려한 명성을 얻었다. 그녀의 작품은 그때부터 일본 근대 문학의 정전 목록에 올라 지금까지도 사랑받고 있다.

역자 소개

이화여자대학교 과학교육과를 졸업하고, 지금은 경영, 문학, 청소년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우리말로 옮기고 있다. 일본어책 번역을 주로 해왔으며, 교양 과학책의 저자로도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손정의 300년 왕국의 야망』, 『생각 버리기 연습』, 『이나모리 가즈오의 살아가는 힘』, 『스타메이커』, 『아마존의 야망』, 『카카오가 세계 역사를 바꿨다고?』, 『몸이 보내는 신호, 잠』 등이 있다. 


 

목차

섣달그믐·7
키 재기·31
흐린 강·101
열사흘밤·149
가는 구름·175
해질녘 보랏빛·195
달과 꽃과 먼지의 일기·201

옮긴이의 말·247
수록 작품의 원제명·256
히구치 이치요가 걸어온 길·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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