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근대의 대표적인 사상가이자, 작가, 문학사가. 본명은 저우수런周樹人이다. 일본 유학시절 의학을 공부하다가 병든 육체보다 중국인들의 병든 정신을 개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문학으로 전환한다. 봉건주의와 서구 근대라는 이중의 억압 속에서 일생을 중국 현실의 변혁을 위해 살았다. 새로운 역사, 새로운 인간의 탄생을 위해 중국의 문명과 중국 현실을 철저히 해부하고 비판하는 한편, 봉건주의와 근대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을 바탕으로 독특한 시각을 지닌 문명비판을 전개하였다. 그런 글들은 ‘잡문雜文’ 혹은’잡감雜感’이라는 독특한 장르를 창조하였고 총 20여 권의 산문집으로 묶였다. 또한 <광인일기>(1918)를 시작으로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하여 <고향>, <아큐정전> 등을 발표하였고, 그의 소설은 ≪방황≫, ≪고사신편≫ 등의 소설집에 실렸다. 루쉰은 중국 근현대인들에게만이 아니라 동아시아 근현대인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일제 시대에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된 이래 우리 현실을 읽는 거울 역할을 해왔다.
1850년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에서 태어났다. 문학적 소양이 풍부했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문학적 재능을 보였으며 21세 때부터 문학수업을 받으며 창작에 전념했다. 1880년 발표한 「비곗덩어리」는 플로베르의 공식적인 찬사를 비롯하여 문단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1883년 발표한 『여자의 일생』 역시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과 함께 프랑스 사실주의 문학이 낳은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젊은 시절부터 그를 따라다니던 신경질환은 모파상을 평생 염세주의자로 남게 했으며, 「오를라」, 「자살」 등의 작품에는 인간성 깊은 곳에 도사린 어두운 공포의 그림자가 반영돼 있다. 1892년 니스에서 자살을 기도한 모파상은 1년 뒤 파리의 한 정신병원에 감금돼 1893년, 마흔셋의 나이로 요절한다. 불과 10년 간의 길지 않은 문단 생활에서 단편소설 약 300편, 기행문 3권, 시집 1권, 희곡 몇 편 외에 『벨 아미』, 『피에르와 장』, 『죽음처럼 강하다』 등의 장편소설을 남겼다.
1557년 아버지 존 셰익스피어 메리 아든과 결혼, 영국 중부 워릭셔 주(州) 스트랫퍼드에 자리 잡다.
1558년 존의 맏딸 조운 태어나다(9월 15일 세례 받다). 존, 시(市)의 보안관에 선출되다.
1561년 존, 시의 재무관에 임명되다(2기 동안 근무).
1562년 존의 둘째 딸 마거릿 태어나다(12월 20일 세례 받고 다음 해에 죽다).
1563년 존의 첫째 딸 조운 사망(4월 30일 매장).
1564년 존의 맏아들 윌리엄 셰익스피어 태어나다(4월 26일 홀리 트리니티 교회에서 세례 받다).
1565년(1세) 존, 시의회 참의원에 선출되다.
1566년(2세) 존의 둘째 아들 길버트 태어나다(10월 12일 세례 받다).
1568년(4세) 존, 시장에 선출되어 취임.
1569년(5세) 존의 셋째 딸 조운(맏딸이 죽음에 따라 같은 이름을 지음) 태어나다(4월 5일 세례 받다).
1571년(7세) 존, 시의회 의장 및 시장 대리에 선출되다. 존의 넷째 딸 앤 태어나다(9월 28일 세례 받다).
1574년(10세) 존의 셋째 아들 리처드 태어나다(3월 11일 세례 받다).
1576년(12세) 존, 문장(紋章) 사용의 허가원을 내다.
1578년(14세) 존, 집을 담보로 40파운드를 빚내다.
1579년(15세) 존, 아내의 재산 일부를 팔다. 넷째 딸 앤 사망.
1580년(16세) 존의 넷째 아들 에드먼드 태어나다(5월 3일 세례 받다).
1582년(18세) 윌리엄 셰익스피어 여덟 살 위인 앤 해서웨이와 결혼하다(11월 27일 결혼허가증 발행되다).
1583년(19세) 맏딸 수잔나 태어나다(5월 26일 세례 받다).
1585년(21세) 쌍둥이 남매 햄넷(남)과 주디스(여) 태어나다(2월 2일에 세례 받다).
1587년(23세) 존, 시의회에서 해임.
1589년(25세) 《소네트집》 완성.
1590년(26세) 《헨리 6세》 2 · 3부 초연.
1591년(27세) 《헨리 6세》 1부 초연.
1592년(28세) 《리처드 3세》 《실수의 희극》 초연. 《비너스와 아도니스》 집필.
1593년(29세) 《말괄량이 길들이기》 《타이터스 앤드러니커스》 초연됨. 《루크리스의 능욕》 집필.
1594년(30세) ‘궁내대신 소속 극장’의 간부로서 주주가 되다. 《타이터스 앤드러니커스》 《루크리스의 능욕》 출판. 《베로나의 두 신사》 《사랑의 헛수고》 《로미오와 줄리엣》 초연됨.
1595년(31세) 《존 왕》 《베니스의 상인》 초연됨.
1596년(32세) 쌍둥이로 태어났던 맏아들 햄넷 죽다(8월 11일 매장). 10월 20일 존에게 문장 사용의 허가가 내려지다. 《리처드 2세》 《한여름 밤의 꿈》 집필.
1597년(33세) 스트랫퍼드의 제일가는 저택을 60파운드로 사들이다. 《리처드 2세》 《리처드 3세》 《로미오와 줄리엣》 출판. 《헨리 4세》 1부 · 2부 집필.
1598년(34세) 벤 존슨의 희곡 《십인십색(十人十色)》에 출연하다. 《헨리 4세》 1부 · 2부 출판. 《사랑의 헛수고》 출판. 《헛소동》 《헨리 5세》 초연.
1599년(35세) ‘글로브 극장’ 개관되다. 글로브 극장 공동 경영자 중 한 사람이 되다. 《뜻대로 하세요》 《십이야(夜)》 초연. 《로미오와 줄리엣》 출판. 《줄리어스 시저》 집필.
1600년(36세) 《뜻대로 하세요》 《헛소동》 《한여름 밤의 꿈》 출판. 《윈저의 즐거운 아낙네들》 초연.
1601년(37세) 2월 7일 ‘글로브 극장’에서 《리처드 2세》 초연. 아버지 존 타계하다(9월 8일 매장). 《햄릿》 집필. 《트로일러스와 크레시다》 초연.
1602년(38세) 스트랫퍼드 에이번 가까운 교외의 토지 107에이커를 320파운드로 사들이다. 《윈저의 즐거운 아낙네들》 《헨리 6세》 2부 출판. 《끝이 좋으면 다 좋아》 초연.
1603년(39세) 5월 19일 ‘궁내대신 소속 극장’을 ‘국왕 극장’이라 개칭(改稱)하다. 《트로일러스와 크레시다》 《햄릿》 출판.
1604년(40세) 《되는대로》 《오셀로》 집필.
1605년(41세) 스트랫퍼드 에이번 부근 토지의 권리를 440파운드에 사다. 《리어 왕》 초연.
1606년(42세) 《맥베스》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초연.
1607년(43세) 6월 5일 맏딸 수잔나를 의사인 존 홀과 결혼시키다. 동생 에드먼드는 런던에서 죽다. 《아테네의 타이먼》 《코리올레이너스》 초연.
1608년(44세) 수잔나의 첫딸 엘리자베스 태어나다(2월 3일 세례 받다). 어머니 메리 세상을 떠나다(9월 5일 매장). 《리어 왕》 출판. 《페리클레스》 초연.
1609년(45세) ‘국왕 극장’이 옥내(屋內) 극장 ‘블랙 플라이어스’를 흡수, 따라서 ‘글로브 극장’과 함께 두 개의 극장을 소유하게 되다. 《트로일러스와 크레시다》 《페리클레스》 출판. 《심벌린》 초연.
1610년(46세) 은퇴 후 고향으로 돌아가다. 《겨울 이야기》 초연.
1611년(47세) 《템페스트》 집필.
1612년(48세) 동생 길버트 죽다. 《헨리 8세》 집필.
1613년(49세) 3월 런던에 140파운드를 주고 집을 사다. 6월 29일 《헨리 8세》 공연 도중 ‘글로브 극장’이 화재로 타버린다. 동생 리처드 죽다.
1614년(50세) 6월 ‘글로브 극장’을 다시 준공.
1616년(52세) 2월 10일 둘째 딸 주디스가 토머스 퀴니와 결혼하다. 3월 15일 유서(遺書)를 작성하다. 4월 23일 셰익스피어 세상을 떠나다(4월 25일 고향 홀리 트리니티 교회에 안장).
1622년 《오셀로》 출판.
1623년 아내 앤 해서웨이 죽다(8월 6일 묻히다).
안톤 체호프(Антон Павлович Чехов, 1860~1904)는 러시아 남부 아조프 해에 있는 항구도시 타간로크(Таганрог)에서 태어났다. 체호프가 열여섯 되던 해인, 1876년 그의 아버지는 파산했다. 파벨은 세간을 정리하고 모스크바로 이사했다. 그러나 체호프는 타간로크 중학교를 마쳐야 했기 때문에 홀로 고향에 남았다. 아버지가 돈을 보내 주지 않자 그는 돈을 벌어 스스로 생계를 꾸리고 나아가 가정교사 생활을 하면서 가족을 도와야 했다. 소년 체호프에게 이것은 혹독한 시련이었다. 그러나 이 경험은 체호프가 인간의 특성을 파악할 수 있게 해 주었으며, 이후 이러한 특성들은 예술적 이미지, 예술적 사실(작품)로 이어졌다. 여기서 소개하고 있는 <어수룩한 사람>과 <가정교사>는 이때의 경험이 녹아들어 있는 작품이다.
체호프의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면 한눈에 보기에도 참 어려운 시기였다. 명문가와는 거리가 먼 집안 내력에 경제적 어려움까지 겹쳤다. 어린 나이에 학교 공부와 집안을 돌보는 일까지 도맡아 해야 했다. 그러한 상황은 대학에 진학하고도 별반 달라질 것이 없었다. 1879년 체호프는 모스크바로 이주해 모스크바대학 의학부에 입학했다. 동시에 생활비를 벌기 위해 당시 유행하던 유머 잡지에 글을 싣기 시작했다. 물론 체호프의 문학적 재능은 타간로크 중학교에 다니던 시기부터 나타났다. 그러나 독자들과 폭넓은 관계를 만들어 내면서 체호프가 가진 작가적 역량을 발현하는 것은 대학에 진학한 이후로 보는 것이 옳다.
1880년 3월 페테르부르크의 주간지에 <박식한 이웃에 보내는 편지(Письмо к ученому соседу)>가 게재되었다. 오만한 어투를 활용한 서간체를 빌려 시골 지주의 교양 없는 상태를 풍자한 이 짧은 작품이 체호프가 지면을 통해 발표한 최초의 작품으로 간주된다. 그 후 체호프는 여러 필명을 이용해 패러디적 성향이 짙은 작품이나 소품을 대중 잡지에 실으면서 인기 있는 유머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가장 즐겨 사용한 필명인 안토샤 체혼테(Антоша Чехонте)에 근거해 이 시기를 ‘체혼테 시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1년에 100편이 넘는 작품을 쏟아 내는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면서도 <관리의 죽음(Смерть чиновника)>(1883), <뚱뚱이와 홀쭉이(Толстой и Тонкий)>(1883), <카멜레온(Хамелеон)>(1884) 등 지금도 회자되고 즐겨 읽히는 뛰어난 작품을 양산했다.
1884년 대학을 졸업한 후 체호프는 모스크바 근교에 병원을 개업해 시골 마을이나 소도시에 왕진을 다녔다. 그러면서도 젊고 유명한 예술가들 및 문학가들과 친교를 맺었다. 그는 개업의로 열심히 일하는 와중에 계속해서 많은 작품을 집필했다. 1884년 그의 첫 단편집이, 1886년에는 그의 두 번째 단편집이 출간되었다. 이 두 작품집은 작가로서 체호프의 명성을 높여 주었다. 체호프는 의사의 길을 접고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선다. 그러나 의과대학 공부와 개업의 활동, 여기에 지칠 줄 모르는 창작 활동이 겹치면서 폐결핵의 징후를 보인다. 정신착란이 고골의 평생 지병이었고, 신장결석이 투르게네프의 평생 지병이었으며, 간질이 도스토옙스키를 평생 따라다녔다면, 폐결핵은 체호프의 평생 지병이 된다.
1890년, 마차와 배를 이용해 시베리아를 통과해서 3개월간의 힘든 노정 끝에 사할린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할린 섬의 역사와 지리를 공부하고, 죄수들의 일상을 3개월여에 걸쳐 조사한 다음, 그해 10월 인도, 싱가포르, 스리랑카, 콘스탄티노플, 오데사를 거쳐 12월에 모스크바로 귀환했다. 무려 8개월간에 걸친 길고 긴 여행의 성과는 인상기 ≪시베리아 여행(Из Сибири)≫(1890)과 조사 보고서 ≪사할린 섬(Остров Сахалин)≫(1893)으로 남아 있다.
귀국 후, 1892년에 체호프는 모스크바 근교 멜리호보의 영지를 사들였다. 그곳에서 1897년까지 머문 ‘멜리호보 시대’는 건강을 회복하고 왕성한 작품 활동에 매진하던 시기였다. 1892년 6월 콜레라가 창궐하자 체호프는 톨스토이 등과 함께 구호 활동을 벌였다. 의사로서 봉사했으며 기아의 구원과 학교의 설립에 힘을 기울이는 등 사회 활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들로는 <다락방이 있는 집(Дом с мезонином)>(1895), <3년(Три года)>(1895), <나의 인생(Моя жизнь)>(1896), <농부들(Мужики)>(1897) 등을 꼽을 수 있다. 인간 생활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면서도, 등장인물의 행위와 사고를 보다 넓은 시야에서 밝히려는 자세가 두드러진다는 평가다.
체호프는 1897년 3월에 폐결핵이 악화되어 객혈을 하게 된다. 크림반도의 얄타로 거처를 옮겨 요양 생활을 시작한다. 얄타에서 고리키(М. Горьки, 1868~1936)나 부닌(И. А. Бунин, 1879~1953) 등 신진 작가들과 만남을 가졌으며, 톨스토이의 병문안을 받았다. 이러한 요양 생활의 와중에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Дама с собачкой)>(1899) 등의 소설을 내놓았다. 그러나 체호프의 말년을 대표하는 장르는 희곡이었다. ≪갈매기(Чайка)≫(1898), ≪바냐 아저씨(Дядя Ваня)≫(1900), ≪세 자매(Три сестры)≫(1900), ≪벚꽃 동산(Вишнёвый сад)≫(1903) 등이 모스크바예술극장에서 공연되어 관객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말년에 불후의 희곡 작품을 남겨 놓고, 체호프는 1904년 당시 유명한 요양지였던 독일의 바덴바덴에서 폐결핵이 악화되어 숨을 거두었다. 그의 시신은 러시아로 옮겨져 노보데비치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프랑스의 소설가, 극작가. 프로방스의 님 출생. 1857년 파리에서 시집 『사랑하는 여자』로문단에 데뷔하였다. 1866년에 발표한 걸작 단편집『풍차방앗간 편지』는 고향 프로방스 지방의 인물과 풍토를 추억하며 쓴 작품이며,「프티 쇼즈」또한 자전적인 이야기를 쓴 것이다. 그 후에 발표한 「쾌활한 타르타랭」은 「알프스의 타르타랭」과 「타라스콩 항구」등과 함께 3부작을 이룬다. 그는 자연주의 사실주의 작가로 불리기도 하나, 어느 유파에도 속하지 않는 독자적 경지를 이룩하였다. 그의 작품은 재치 있고 가벼운 아이러니와 인생에 대한 온정적인 공감과 유연한 감수성을 풍긴다. 그의 회상록 『어느 문필가의 회상』은 당시의 문단을 알 수 있는 귀중한 문헌이다. 주요 작품으로 「월요 이야기」「젊은 프로몽과 형 리슬레스」「자크」「나바브」「파리 30년」「누마 루메스탕」「전도사」「사포」「아를의 여인」등이 있다.
미국의 소설가이며 본명은 윌리엄 시드니 포터(William Sydney Porter)다. 오 헨리의 직업 경력 및 인생 경력은 그야말로 다양하다. 20대 중반까지 약제사, 목장 일꾼, 점원, 직공, 제도사, 은행원 등의 직업을 전전했다. 1898년에는 은행에서 출납 결손 문제로 인해 사직한 것은 물론 교도소 신세까지 3년간 지게 된다. 17살 때 첫 결혼을 했고, 40대 중반이었던 1907년에는 어릴 적 친구였던 샐리 린제이 콜먼과 재혼했으나 건강과 금전 문제, 알코올 중독 등의 문제로 그의 결혼 생활은 그리 순탄치 못했다. 오 헨리가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교도소에 복역하던 시절이었다. 1898년에 <맥 클뤼어> 지를 통해 마침내 자신의 첫 단편소설 「레이버 캐년의 기적」을 발표했다. 이후 여러 필명으로 단편소설을 출간하던 그는 <맥 클뤼어> 지에 「휘파람 부는 딕의 크리스마스 스타킹」을 발표한 후로 오 헨리라는 필명으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1901년 출감한 그는「하그레이브즈의 1인 2역」을 발표하고 뉴욕으로 이주하여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02년부터 <뉴욕월드 선데이 매거진>에 단편을 연재하기 시작하여 총 381편의 단편을 선보였다. 큰 명성과 부를 얻었지만, 1908년에는 건강이 심하게 악화되어 글쓰기를 중단했다. 1910년 6월 5일 과로에 당뇨병 합병증이 겹쳐 사망했으며 그후 유고집 「회전목마」가 발표되었다.
만주 북간도에서 태어났다. 1931년, 14세에 명동소학교를 졸업했으며 15세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 1941년에는 서울의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시샤대학 영문과 학생으로 입학했다. 귀향하려던 시점에 항일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복역중 건강이 악화되어 1945년 2월에 짧은 생을 마친다. 그의 죽음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옥중에서 일제의 생체실험 대상이 되어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사를 주기적으로 맞은 결과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28세의 젊은 나이에 타계하고 말았으나, 그는 인생과 조국의 아픔에 고뇌하는 시인이었다. 자신의 작품들을 모아 1941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발간하려 하였으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하숙 친구였던 정병욱이 자필로 쓴 시들을 보관하고 있다가 그의 사후에 묶어 출간하였다. 이때 그의 유작인 <쉽게 쓰여진 시>가 《경향신문》에 게재되기도 했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그의 대표작으로, 어두운 시대 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았던 그의 인간됨과 사상을 반영하는 아름다운 시로 평가받고 있다. 현재 그의 유해는 용정에 묻혀 있으며 그를 기리는 시비(詩碑)가 연세대학교 교정에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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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분 : 저서
- 이름 :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1828.09.00)
- 국적 : 러시아
- 직업 : 소설가, 철학가
- 분류 :
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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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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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종교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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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경영/자기계발 저자
,
예술/취미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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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청소년 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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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험/학습서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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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일러스트레이터
,
기타
- 인기지수 [13,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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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1828~1910.
1828년 러시아 중부 지방에 있는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집에서 교육을 받았고, 카잔 대학에 입학해 동양어와 법을 공부하다가 중간에 자퇴했다. 1851년 카프카스에 주둔한 포병대에 들어갔고, 크림 전쟁에 참전한 경험을 토대로 <세바스토폴 이야기>(1855~56)를 써서 작가로서의 명성을 확고히 했다. 1862년에 평생의 후원자가 된 소피야 베르스와 결혼한 뒤, 볼가 스텝 지역에 있는 영지를 경영하며 농민들을 위한 교육 사업을 계속해 나갔고, 대표작 <전쟁과 평화>(1869)와 <안나 카레니나>(1877)를 집필하는 등 작품 활동도 활발히 했다. 그 자신은 백작의 지위를 가진 귀족이었으나,<바보이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등의 집필을 통해 러시아 귀족들이 너무 많은 재산을 갖고 있기 때문에 대다수의 민중들이 가난하게 살고 있음을 비판하는 문학 활동을 하여, 러시아 귀족들의 압력으로 <참회록>과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의 출판 금지를 당했다. 하지만 독자들은 필사본이나 등사본으로 책을 만들어서 몰래 읽었고, 유럽, 미국, 아시아에 있는 출판사들이 그의 작품을 출판하여 외국에서는 그의 작품이 유명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극단적인 도덕가가 되어 1880년 이후에 낸 일련의 저술에서 국가와 교회를 부정하고, 육체의 나약함과 사유재산을 비난하는 의견을 발표했다. 저작물에서 개인의 이득을 취하는 것이 부도덕하다는 생각으로 자신의 저작권을 포기하는 선언을 했고(1891), 마지막 소설인 <부활>(1899)은 평화주의를 표방하는 두호보르 종파를 위한 자금을 모으려고 쓴 것이었다. 1910년 장녀와 함께 집을 떠나 방랑길에 올랐으나 아스타포보라는 작은 시골 기차역에서 사망했다. 2010년 사후 백 주년을 맞는 톨스토이는 팔십여 년이라는 생애 동안 방대한 양의 작품을 남겼다.
미국의 시인·소설가·비평가. 보스턴 출생. 어릴 때 고아가 되어 리치먼드의 담배상인 J. 앨런의 양자로 갔으나 양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못하였다. 14세 때 친구의 젊은 어머니를 열애하였는데 뒤에 유명한 서정시 《헬렌에게(1831)》를 쓰는 계기가 되었다. 1826년 버지니아대학에 입학하였으나, 양아버지의 송금이 끊어져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도박을 하여 큰 빚을 지게 되고 마침내 퇴학당하였다. 1831년부터 4년간 미망인인 숙모 클렘 모녀와 함께 볼티모어에서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 단편소설 현상공모에 당선되었는데, 특히 《병 속의 수기(1833)》로 인정받아 문예잡지 편집자가 되었으나 엄격한 서평 때문에 반감을 샀고 술버릇으로 물러났다. 이때부터 왕성한 창작활동이 시작되어 《리지아(1838)》 《윌리엄 윌슨(1839)》 《어셔가(家)의 몰락(1839)》 등을 수록한 최초의 단편집 《그로테스크하고 아라베스크한 이야기(2권, 1840)》를 출판하여, 작품 속에서 공포·우울·불쾌감 등 특이한 정서를 나타내는 데 성공하였다. 이어서 《모르그가(街)의 살인사건(1841)》 《큰 소용돌이에 빨려들어서(1841)》 《붉은 죽음의 가면(1842)》 《황금벌레(1843)》 《마리 로제 사건의 불가사의(1842~43)》 등을 쓰고, 《검은 고양이(1843)》 등을 포함한 《단편집(1845)》을 출판하였다. 그의 소설은 죽음·공포감·불쾌감·우울·괴기미(怪奇美) 등을 창조하여 특이한 낭만적 작풍을 이루었다. 《모르그가의 살인사건》 《마리 로제 사건의 불가사의》 《도둑맞은 편지(1845)》 등은 소설 영역과 추리소설 장르를 확립한 것으로 뒤에 추리소설의 모범이 되었으며, 《황금벌레》에서는 보석 찾기에 암호를 푸는 장면을 넣어 추리소설의 또다른 일면을 개척하였다. 가난·술버릇·정신착란, 주위의 반감 속에서 짧고 불행한 생애를 보냈으나 근대 문학에 끼친 그의 영향과 공적은 매우 크다.
1879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났다. 자는 정옥, 속명은 유천이며, 득도 때의 계명은 봉완, 법명은 용운, 법호는 만해이다. 19세에 출가하여 강원도 인제 백담사에서 김연곡사에게서 득도했다.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을 주도했으며, 최남선이 작성한 '독립선언서'의 자구를 수정하고 공약삼장을 첨가했다.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발표했고, 그 후 「조선일보」, 「동아일보」, 「불교」지에 작품을 발표하며, 작품활동과 불교 혁신운동을 계속했다. 민족의 해방을 한 해 남긴 1944년 심우장에서 입적했다. 지은 책으로 <정선강의채근담>, <님의 침묵>, <조선불교유신론>, <십현담주해>, <불교대전>, <흑풍>, <박명> 등이 있다.
본명 정식(廷湜). 평북 구성(龜城) 출생. 오산학교(五山學校) 중학부를 거쳐 배재고보(培材高普)를 졸업하고 도쿄상대[東京商大]에 입학하였으나 간토대진재[關東大震災]로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당시 오산학교 교사였던 안서(岸曙) 김억(金億)의 지도와 영향 아래 시를 쓰기 시작하였으며, 1920년에 [낭인(浪人)의 봄], [야(夜)의 우적(雨滴)], [그리워] 등을 [창조(創造)]지에 발표하여 문단에 데뷔하였다.
이어 [먼 후일(後日)], 등을 [학생계(學生界)] 제1호(1920.7)에 발표하여 주목을 끌기 시작하였다. 배재고보에 편입한 1922년에 [금잔디], [엄마야 누나야], [닭은 꼬꾸요], [바람의 봄] 등을 [개벽(開闢)]지에 발표하였으며, 이어 같은 잡지 1922년 7월호에 떠나는 님을 진달래로 축복하는 한국 서정시의 기념비적 작품인 [진달래꽃]을 발표하여 크게 각광받았다.
그 후에도 계속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못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등을 발표하였고, 이듬해인 1924년에는 [영대(靈臺)]지 3호에 인간과 자연을 같은 차원으로 보는 동양적인 사상이 깃들인 영원한 명시 [산유화(山有花)] 등을 차례로 발표하였다.
1925년에 그의 유일한 시집인 [진달래꽃]이 매문사(賣文社)에서 간행되었다. 33세 되던 1934년 12월 23일 부인과 함께 취하도록 술을 마셨는데, 이튿날 음독자살한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불과 5, 6년 남짓한 짧은 문단생활 동안 그는 154 편의 시와 시론(詩論) [시혼(詩魂)]을 남겼다.
본명은 이원록李源祿. 다른 이름으로는 이활李活, 이원삼李源三, 육사肉瀉, 이육사李戮史, 이육사二六四. 경북 안동에서 출생. 부친은 퇴계 이황의 13대손(이가호)이며 모친은 의병장 허형의 딸(허길). 유년기에 조부祖父에게서 소학을 배우고 도산공립보통학교 졸업 후 16세 무렵 대구로 이사. 1921년 결혼 후 백학학원에서 수학. 1924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고등예비학교에서 1년간 재학. 1925년 귀국, 대구 조양회관을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항일단체에 입단. 1926년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가 중국대학에 입학하였으나 이듬해 중퇴하고 귀국. 그해 장진홍 의거(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구속, 3년간 옥고를 치르고 출소. 1930년 중외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입사, 기자활동을 하면서 은밀히 항일활동을 펼치다가 1932년 다시 중국행. 항일활동 인사들과 접촉 후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입교. 귀국 후 다시 구속되었다가 석방, 문필활동을 펼치던 중 1943년 피검, 북경으로 압송되어 1944년 일본영사관 감옥에서 순국. 「절정」 「광야」 「청포도」 「꽃」 「황혼」 등의 대표시를 남겼으며, 1946년 비평가인 아우 이원조의 편집으로 유고 시집 『육사시집』이 출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