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0년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에서 태어났다. 문학적 소양이 풍부했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문학적 재능을 보였으며 21세 때부터 문학수업을 받으며 창작에 전념했다. 1880년 발표한 「비곗덩어리」는 플로베르의 공식적인 찬사를 비롯하여 문단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1883년 발표한 『여자의 일생』 역시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과 함께 프랑스 사실주의 문학이 낳은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젊은 시절부터 그를 따라다니던 신경질환은 모파상을 평생 염세주의자로 남게 했으며, 「오를라」, 「자살」 등의 작품에는 인간성 깊은 곳에 도사린 어두운 공포의 그림자가 반영돼 있다. 1892년 니스에서 자살을 기도한 모파상은 1년 뒤 파리의 한 정신병원에 감금돼 1893년, 마흔셋의 나이로 요절한다. 불과 10년 간의 길지 않은 문단 생활에서 단편소설 약 300편, 기행문 3권, 시집 1권, 희곡 몇 편 외에 『벨 아미』, 『피에르와 장』, 『죽음처럼 강하다』 등의 장편소설을 남겼다.
안톤 체호프(Антон Павлович Чехов, 1860~1904)는 러시아 남부 아조프 해에 있는 항구도시 타간로크(Таганрог)에서 태어났다. 체호프가 열여섯 되던 해인, 1876년 그의 아버지는 파산했다. 파벨은 세간을 정리하고 모스크바로 이사했다. 그러나 체호프는 타간로크 중학교를 마쳐야 했기 때문에 홀로 고향에 남았다. 아버지가 돈을 보내 주지 않자 그는 돈을 벌어 스스로 생계를 꾸리고 나아가 가정교사 생활을 하면서 가족을 도와야 했다. 소년 체호프에게 이것은 혹독한 시련이었다. 그러나 이 경험은 체호프가 인간의 특성을 파악할 수 있게 해 주었으며, 이후 이러한 특성들은 예술적 이미지, 예술적 사실(작품)로 이어졌다. 여기서 소개하고 있는 <어수룩한 사람>과 <가정교사>는 이때의 경험이 녹아들어 있는 작품이다.
체호프의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면 한눈에 보기에도 참 어려운 시기였다. 명문가와는 거리가 먼 집안 내력에 경제적 어려움까지 겹쳤다. 어린 나이에 학교 공부와 집안을 돌보는 일까지 도맡아 해야 했다. 그러한 상황은 대학에 진학하고도 별반 달라질 것이 없었다. 1879년 체호프는 모스크바로 이주해 모스크바대학 의학부에 입학했다. 동시에 생활비를 벌기 위해 당시 유행하던 유머 잡지에 글을 싣기 시작했다. 물론 체호프의 문학적 재능은 타간로크 중학교에 다니던 시기부터 나타났다. 그러나 독자들과 폭넓은 관계를 만들어 내면서 체호프가 가진 작가적 역량을 발현하는 것은 대학에 진학한 이후로 보는 것이 옳다.
1880년 3월 페테르부르크의 주간지에 <박식한 이웃에 보내는 편지(Письмо к ученому соседу)>가 게재되었다. 오만한 어투를 활용한 서간체를 빌려 시골 지주의 교양 없는 상태를 풍자한 이 짧은 작품이 체호프가 지면을 통해 발표한 최초의 작품으로 간주된다. 그 후 체호프는 여러 필명을 이용해 패러디적 성향이 짙은 작품이나 소품을 대중 잡지에 실으면서 인기 있는 유머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가장 즐겨 사용한 필명인 안토샤 체혼테(Антоша Чехонте)에 근거해 이 시기를 ‘체혼테 시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1년에 100편이 넘는 작품을 쏟아 내는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면서도 <관리의 죽음(Смерть чиновника)>(1883), <뚱뚱이와 홀쭉이(Толстой и Тонкий)>(1883), <카멜레온(Хамелеон)>(1884) 등 지금도 회자되고 즐겨 읽히는 뛰어난 작품을 양산했다.
1884년 대학을 졸업한 후 체호프는 모스크바 근교에 병원을 개업해 시골 마을이나 소도시에 왕진을 다녔다. 그러면서도 젊고 유명한 예술가들 및 문학가들과 친교를 맺었다. 그는 개업의로 열심히 일하는 와중에 계속해서 많은 작품을 집필했다. 1884년 그의 첫 단편집이, 1886년에는 그의 두 번째 단편집이 출간되었다. 이 두 작품집은 작가로서 체호프의 명성을 높여 주었다. 체호프는 의사의 길을 접고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선다. 그러나 의과대학 공부와 개업의 활동, 여기에 지칠 줄 모르는 창작 활동이 겹치면서 폐결핵의 징후를 보인다. 정신착란이 고골의 평생 지병이었고, 신장결석이 투르게네프의 평생 지병이었으며, 간질이 도스토옙스키를 평생 따라다녔다면, 폐결핵은 체호프의 평생 지병이 된다.
1890년, 마차와 배를 이용해 시베리아를 통과해서 3개월간의 힘든 노정 끝에 사할린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할린 섬의 역사와 지리를 공부하고, 죄수들의 일상을 3개월여에 걸쳐 조사한 다음, 그해 10월 인도, 싱가포르, 스리랑카, 콘스탄티노플, 오데사를 거쳐 12월에 모스크바로 귀환했다. 무려 8개월간에 걸친 길고 긴 여행의 성과는 인상기 ≪시베리아 여행(Из Сибири)≫(1890)과 조사 보고서 ≪사할린 섬(Остров Сахалин)≫(1893)으로 남아 있다.
귀국 후, 1892년에 체호프는 모스크바 근교 멜리호보의 영지를 사들였다. 그곳에서 1897년까지 머문 ‘멜리호보 시대’는 건강을 회복하고 왕성한 작품 활동에 매진하던 시기였다. 1892년 6월 콜레라가 창궐하자 체호프는 톨스토이 등과 함께 구호 활동을 벌였다. 의사로서 봉사했으며 기아의 구원과 학교의 설립에 힘을 기울이는 등 사회 활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들로는 <다락방이 있는 집(Дом с мезонином)>(1895), <3년(Три года)>(1895), <나의 인생(Моя жизнь)>(1896), <농부들(Мужики)>(1897) 등을 꼽을 수 있다. 인간 생활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면서도, 등장인물의 행위와 사고를 보다 넓은 시야에서 밝히려는 자세가 두드러진다는 평가다.
체호프는 1897년 3월에 폐결핵이 악화되어 객혈을 하게 된다. 크림반도의 얄타로 거처를 옮겨 요양 생활을 시작한다. 얄타에서 고리키(М. Горьки, 1868~1936)나 부닌(И. А. Бунин, 1879~1953) 등 신진 작가들과 만남을 가졌으며, 톨스토이의 병문안을 받았다. 이러한 요양 생활의 와중에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Дама с собачкой)>(1899) 등의 소설을 내놓았다. 그러나 체호프의 말년을 대표하는 장르는 희곡이었다. ≪갈매기(Чайка)≫(1898), ≪바냐 아저씨(Дядя Ваня)≫(1900), ≪세 자매(Три сестры)≫(1900), ≪벚꽃 동산(Вишнёвый сад)≫(1903) 등이 모스크바예술극장에서 공연되어 관객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말년에 불후의 희곡 작품을 남겨 놓고, 체호프는 1904년 당시 유명한 요양지였던 독일의 바덴바덴에서 폐결핵이 악화되어 숨을 거두었다. 그의 시신은 러시아로 옮겨져 노보데비치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프랑스의 소설가, 극작가. 프로방스의 님 출생. 1857년 파리에서 시집 『사랑하는 여자』로문단에 데뷔하였다. 1866년에 발표한 걸작 단편집『풍차방앗간 편지』는 고향 프로방스 지방의 인물과 풍토를 추억하며 쓴 작품이며,「프티 쇼즈」또한 자전적인 이야기를 쓴 것이다. 그 후에 발표한 「쾌활한 타르타랭」은 「알프스의 타르타랭」과 「타라스콩 항구」등과 함께 3부작을 이룬다. 그는 자연주의 사실주의 작가로 불리기도 하나, 어느 유파에도 속하지 않는 독자적 경지를 이룩하였다. 그의 작품은 재치 있고 가벼운 아이러니와 인생에 대한 온정적인 공감과 유연한 감수성을 풍긴다. 그의 회상록 『어느 문필가의 회상』은 당시의 문단을 알 수 있는 귀중한 문헌이다. 주요 작품으로 「월요 이야기」「젊은 프로몽과 형 리슬레스」「자크」「나바브」「파리 30년」「누마 루메스탕」「전도사」「사포」「아를의 여인」등이 있다.
미국의 소설가이며 본명은 윌리엄 시드니 포터(William Sydney Porter)다. 오 헨리의 직업 경력 및 인생 경력은 그야말로 다양하다. 20대 중반까지 약제사, 목장 일꾼, 점원, 직공, 제도사, 은행원 등의 직업을 전전했다. 1898년에는 은행에서 출납 결손 문제로 인해 사직한 것은 물론 교도소 신세까지 3년간 지게 된다. 17살 때 첫 결혼을 했고, 40대 중반이었던 1907년에는 어릴 적 친구였던 샐리 린제이 콜먼과 재혼했으나 건강과 금전 문제, 알코올 중독 등의 문제로 그의 결혼 생활은 그리 순탄치 못했다. 오 헨리가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교도소에 복역하던 시절이었다. 1898년에 <맥 클뤼어> 지를 통해 마침내 자신의 첫 단편소설 「레이버 캐년의 기적」을 발표했다. 이후 여러 필명으로 단편소설을 출간하던 그는 <맥 클뤼어> 지에 「휘파람 부는 딕의 크리스마스 스타킹」을 발표한 후로 오 헨리라는 필명으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1901년 출감한 그는「하그레이브즈의 1인 2역」을 발표하고 뉴욕으로 이주하여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02년부터 <뉴욕월드 선데이 매거진>에 단편을 연재하기 시작하여 총 381편의 단편을 선보였다. 큰 명성과 부를 얻었지만, 1908년에는 건강이 심하게 악화되어 글쓰기를 중단했다. 1910년 6월 5일 과로에 당뇨병 합병증이 겹쳐 사망했으며 그후 유고집 「회전목마」가 발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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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분 : 저서
- 이름 :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1828.09.00)
- 국적 : 러시아
- 직업 : 소설가, 철학가
- 분류 :
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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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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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종교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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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경영/자기계발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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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취미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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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청소년 문학가
,
수험/학습서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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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일러스트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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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 인기지수 [13,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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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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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1828~1910.
1828년 러시아 중부 지방에 있는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집에서 교육을 받았고, 카잔 대학에 입학해 동양어와 법을 공부하다가 중간에 자퇴했다. 1851년 카프카스에 주둔한 포병대에 들어갔고, 크림 전쟁에 참전한 경험을 토대로 <세바스토폴 이야기>(1855~56)를 써서 작가로서의 명성을 확고히 했다. 1862년에 평생의 후원자가 된 소피야 베르스와 결혼한 뒤, 볼가 스텝 지역에 있는 영지를 경영하며 농민들을 위한 교육 사업을 계속해 나갔고, 대표작 <전쟁과 평화>(1869)와 <안나 카레니나>(1877)를 집필하는 등 작품 활동도 활발히 했다. 그 자신은 백작의 지위를 가진 귀족이었으나,<바보이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등의 집필을 통해 러시아 귀족들이 너무 많은 재산을 갖고 있기 때문에 대다수의 민중들이 가난하게 살고 있음을 비판하는 문학 활동을 하여, 러시아 귀족들의 압력으로 <참회록>과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의 출판 금지를 당했다. 하지만 독자들은 필사본이나 등사본으로 책을 만들어서 몰래 읽었고, 유럽, 미국, 아시아에 있는 출판사들이 그의 작품을 출판하여 외국에서는 그의 작품이 유명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극단적인 도덕가가 되어 1880년 이후에 낸 일련의 저술에서 국가와 교회를 부정하고, 육체의 나약함과 사유재산을 비난하는 의견을 발표했다. 저작물에서 개인의 이득을 취하는 것이 부도덕하다는 생각으로 자신의 저작권을 포기하는 선언을 했고(1891), 마지막 소설인 <부활>(1899)은 평화주의를 표방하는 두호보르 종파를 위한 자금을 모으려고 쓴 것이었다. 1910년 장녀와 함께 집을 떠나 방랑길에 올랐으나 아스타포보라는 작은 시골 기차역에서 사망했다. 2010년 사후 백 주년을 맞는 톨스토이는 팔십여 년이라는 생애 동안 방대한 양의 작품을 남겼다.
미국의 시인·소설가·비평가. 보스턴 출생. 어릴 때 고아가 되어 리치먼드의 담배상인 J. 앨런의 양자로 갔으나 양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못하였다. 14세 때 친구의 젊은 어머니를 열애하였는데 뒤에 유명한 서정시 《헬렌에게(1831)》를 쓰는 계기가 되었다. 1826년 버지니아대학에 입학하였으나, 양아버지의 송금이 끊어져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도박을 하여 큰 빚을 지게 되고 마침내 퇴학당하였다. 1831년부터 4년간 미망인인 숙모 클렘 모녀와 함께 볼티모어에서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 단편소설 현상공모에 당선되었는데, 특히 《병 속의 수기(1833)》로 인정받아 문예잡지 편집자가 되었으나 엄격한 서평 때문에 반감을 샀고 술버릇으로 물러났다. 이때부터 왕성한 창작활동이 시작되어 《리지아(1838)》 《윌리엄 윌슨(1839)》 《어셔가(家)의 몰락(1839)》 등을 수록한 최초의 단편집 《그로테스크하고 아라베스크한 이야기(2권, 1840)》를 출판하여, 작품 속에서 공포·우울·불쾌감 등 특이한 정서를 나타내는 데 성공하였다. 이어서 《모르그가(街)의 살인사건(1841)》 《큰 소용돌이에 빨려들어서(1841)》 《붉은 죽음의 가면(1842)》 《황금벌레(1843)》 《마리 로제 사건의 불가사의(1842~43)》 등을 쓰고, 《검은 고양이(1843)》 등을 포함한 《단편집(1845)》을 출판하였다. 그의 소설은 죽음·공포감·불쾌감·우울·괴기미(怪奇美) 등을 창조하여 특이한 낭만적 작풍을 이루었다. 《모르그가의 살인사건》 《마리 로제 사건의 불가사의》 《도둑맞은 편지(1845)》 등은 소설 영역과 추리소설 장르를 확립한 것으로 뒤에 추리소설의 모범이 되었으며, 《황금벌레》에서는 보석 찾기에 암호를 푸는 장면을 넣어 추리소설의 또다른 일면을 개척하였다. 가난·술버릇·정신착란, 주위의 반감 속에서 짧고 불행한 생애를 보냈으나 근대 문학에 끼친 그의 영향과 공적은 매우 크다.
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Иван Сергеевич Тургенев , 1818~1883)는 러시아 중부 오룔 시의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1818년 10월 28일에 태어났다. 아버지가 육군 대령으로 퇴직하고 스파스코예 마을로 이주함에 따라서 투르게네프는 유년 시절의 대부분을 이 시골 마을에서 보냈다. 그 후 모스크바 대학 문학부와 페테르부르크 대학 철학부, 그리고 독일의 베를린 대학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러시아 고전 작가들 가운데 가장 서구적인 작가로 알려져 있다. 인생의 많은 세월을 서유럽에서 보냈고 서구인들과의 교류도 활발했으며, 사상적 기반도 서구주의적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작품에는 러시아의 대자연과 시골 풍경이 섬세하고 수려한 필치로 묘사되고 있으며, 동시에 서구의 자유주의 사상과 휴머니즘이 조화롭게 반영되어 있다. 그는 1852년에 25편의 중단편 모음집으로 출간된 ≪사냥꾼의 수기≫로 주목받는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그 후 당시의 시대상과 인간상을 섬세한 서정적 필치로 심층 묘사하여 그에게 ‘러시아 인텔리겐차의 연대기 작가’라는 별칭을 얻게 해준 장편소설들 ≪루딘(1856년)≫, ≪귀족의 둥지(1859년)≫, ≪아버지와 아들(1862년)≫, ≪연기(1869년)≫, ≪처녀지(1877년)≫ 등이 출판되었다. 그는 1883년 8월 22일 러시아가 아닌 프랑스 남부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유해는 러시아로 옮겨져 그 해 9월 27일에 페테르부르크에 안장되었다.
토머스 하디(Thomas Hardy, 1840∼1928)
토머스 하디(Thomas Hardy)는 1840년 6월 2일 영국의 남서부 도싯 주의 도체스터 부근에 있는 하이어복햄프턴에서 석공의 4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일찍부터 문학적 열정을 가지고 있었기에, 공식적인 교육을 그다지 많이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독학으로 예술적 소양을 쌓을 수 있었다. 소년 시절부터 이웃에 사는 시인 윌리엄 반스(William Barnes)와 함께 공부를 했으며, 그리스어와 라틴어 공부는 물론, 성경, 셰익스피어, 그리고 에우리피데스, 호라티우스, 루크레티우스 등을 비롯한 많은 고전 작가들에게 몰두해 그들의 작품을 탐독했다. 또한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을 숭배했으며, 30대 후반과 40대 초반에는 아널드, 칼라일, 밀, 스펜서, 콩트와 같은 사상가들의 작품도 많이 읽었으며, 염세주의에 관한 카로, 루이스 등의 작품을 읽고, 후에는 쇼펜하우어와 하르트만 등을 만나기도 했다.
하디는 지나친 독서로 건강을 해쳐 여름에 고향으로 돌아가 요양을 하면서, 이전부터 써 오던 시를 써서는 생계를 유지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절감하고 소설을 쓰기로 결심했다. 그 후 소설 ≪궁여지책(Desperate Remedies)≫과 ≪푸른 나무 그늘 아래서(Under the Green Wood Tree)≫를 써서 출판사에 보냈지만 거절당했다. 이후 익명으로 ≪푸른 나무 그늘 아래서≫가 출간되면서,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내건 소설 ≪파란 눈동자(A Pair of Blue Eyes)≫와 ≪광란의 무리를 떠나서(Far from the Madding Crowd)≫를 잡지에 연재하기 시작했다. 그 후 소설 ≪에설버타의 손(The Hand of Ethelberta≫, ≪얼간이(A Laodicean)≫, ≪탑 위의 두 사람(Two on a Tower)≫, ≪사랑하는 사람(The Well Beloved)≫, ≪캐스터브리지의 시장(The Mayor of Casterbridge)≫, ≪숲 속에 사는 사람들(The Woodlanders)≫을 출간하며 소설가로서 명성을 날렸다.
그러나 1890년대가 끝날 무렵 그는 도시 생활에 지쳐 고향인 도체스터 근교에 땅을 사고 스스로 설계한 맥스게이트(Max Gate)라는 저택을 건축해 그곳에서 은둔의 삶을 살았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두 편의 소설, ≪더버빌가의 테스(Tess of the d'Urbervilles)≫와 ≪무명의 주드(Jude the Obscure)≫가 세상 사람들의 신랄한 비평을 받자 그는 낙담하게 되었다.
애초에 런던이 그의 개성적인 시에 비우호적인 태도를 취하자 소설을 쓰기 시작해서 30년간에 걸쳐 걸작들을 비롯해 10여 편의 장편을 집필했었다. 하지만 그의 소설, 특히 그의 마지막 소설인 ≪무명의 주드≫가 비우호적인 평가를 받게 되자, 다시 그는 58세의 나이에 소설을 떠나 시 쓰기로 돌아서게 되었다. 그리고 1898년 출간된 그의 첫 시집 ≪웨섹스 시편과 기타 시편들(Wessex Poems and Other Verses)≫을 비롯해, 서사시 ≪제왕들(The Dynasts)≫, 이후 ≪시간의 노리개들과 기타 시편들(Time's Laughingstocks and Other Verses)≫, ≪상황의 풍자(Satires of Circumstance)≫, ≪통찰의 순간(Moments of Vision)≫, ≪후기 서정시와 그 이전의 기타 시편들(Late Lyrics and Earlier with Many Other Verses)≫, ≪인간의 모습들, 먼 환상들, 노래와 하찮은 것들(Human Shows, Far Phantasies, Songs and Trifles)≫, ≪다양한 분위기와 운율로 쓴 겨울의 말(Winter Words in Various Moods and Metres)≫ 등의 시집을 출간함으로써 장시 ≪제왕들≫을 제외하고도 거의 1000편에 달하는 방대한 양의 시 작품을 출간했다.
말년의 하디는 생존한 영국 작가들 중 최고로 널리 칭송을 받았다. 그는 D. H. 로런스와 버지니아 울프로부터 찬사를 받았으며, 왕실로부터 공로훈장을 받았고, 도체스터의 명예시민이 되었으며, 영국문학협회로부터 생일 축하 기념의 금메달을 받았고, 예이츠가 찾아오기도 했으며, 케임브리지대학으로부터 명예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 1928년 1월 11일, 88세의 나이로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하디는 60여 년간 작품 활동을 했는데, 전반 30년은 소설에, 후반 30년은 시에 전념했다고 할 수 있다.
1804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 세일럼에서 태어났다. 메인 주 브런즈윅에 있는 보든 대학교에 입학하지만, 학업에는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작가로서의 길을 모색했다. 졸업 후 고향 세일럼에서 여러 잡지에 단편소설을 기고하다 1828년 익명으로 첫 장편소설 『팬쇼』를 자비 출판하나 별 반응을 얻지 못했다. 1837년 발표한 첫 단편집 『두 번 들은 이야기』에 에드거 앨런 포의 찬사가 실리면서 비로소 작가로서 인정받기 시작했다. 화가인 소피아 피바디와 결혼해 매사추세츠 주 콩코드의 ‘옛 목사관’에 정착해 살다가 세일럼으로 돌아가 두 번째 단편집 『옛 목사관의 이끼』(1846)를 출간했다. 보스턴 세관 자리에서 물러난 이후 발표한 장편소설 『주홍 글자』(1850)로 작가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당시 친하게 지내던 허먼 멜빌은 그의 천재성에 감탄해 자신의 작품 『모비 딕』을 호손에게 헌정했다. 이어 『일곱 박공의 집』(1851), 『블라이스데일 로맨스』(1852) 등의 장편소설을 차례로 발표했다. 『일곱 박공의 집』은 호손 자신의 문학적 화두인 인간 심연의 악과 죄업, 인과응보의 문제를 당대 미국 사회의 현실과 연결해 초자연적 요소와 사실주의가 결합된 독특한 로맨스 형태로 풀어낸 작품으로 미국 낭만주의 문학의 정점을 찍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53년부터 1957년까지 영국 리버풀 영사를 지내고 이탈리아를 여행한 뒤 장편소설 『대리석 목양신』(1958)을 발표했다. 1864년 여행 중 뉴햄프셔 주 플리머스에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