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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그레이엄 밸러드 시간의 목소리 외 24편

제임스 그레이엄 밸러드 저 | 조호근 역 | 현대문학 | 2017년 0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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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72757559 / 724쪽 145 x 2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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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출판사 리뷰

‘우리는 거대한 소설 속에 살고 있다.’ 병리학적인 현대 문명의 예언자 문체와 형식의 우아한 선지자 제임스 그레이엄 밸러드(1930~2009) 《타임스》 선정 ‘가장 위대한 영국 작가 50인’, 그리고 카프카Kafkaesque나 보르헤스Borgesian처럼 성姓의 형용사형만으로 설명 가능한 몇 안 되는 문인 중 한 명인 제임스 그레이엄 밸러드의 대표 단편소설이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스물다섯 번째 권으로 출간되었다. 20세기 후반 세계문학사에서 전대미문의 독창적이고 예언적인 목소리로 여겨지는 그는 1960년대 S... ‘우리는 거대한 소설 속에 살고 있다.’ 병리학적인 현대 문명의 예언자 문체와 형식의 우아한 선지자 제임스 그레이엄 밸러드(1930~2009) 《타임스》 선정 ‘가장 위대한 영국 작가 50인’, 그리고 카프카Kafkaesque나 보르헤스Borgesian처럼 성姓의 형용사형만으로 설명 가능한 몇 안 되는 문인 중 한 명인 제임스 그레이엄 밸러드의 대표 단편소설이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스물다섯 번째 권으로 출간되었다. 20세기 후반 세계문학사에서 전대미문의 독창적이고 예언적인 목소리로 여겨지는 그는 1960년대 SF 뉴웨이브 운동을 견인하며 소설의 새로운 차원을 개척함으로써 현대문학을 재정의했다고 평가받는 인물이다. 고도의 상징성과 시각 이미지를 다용한, 디스토피아적인 예지로 가득 찬 전인미답의 전위적인 작품들은 ‘현대’에 대한 세계인의 관점을 형성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책에는 『J. G. 밸러드 단편소설 전집THE COMPLETE SHORT STORIES of J. G. Ballard』(2014, 포스에스테이트)에서 옮긴이가 가려 뽑은 스물다섯 편을 실었으며, 평론가 애덤 서웰의 「해제」가 밸러드의 작품 세계에 대한 이해를 더한다. 밸러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10년 전 중화민국 상하이 조계租界에서 태어났다.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 민간인 포로수용소에 억류되었다가 종전 후 영국으로 송환된다. 대학에서 의학과 영문학을 공부했으며 공군에 입대하여 조종사 훈련을 받았다. 그는 인생의 전반前半을 비/초현실적인 ‘시간’과 ‘공간’의 극한상황에서 살았다고 할 수 있는데, 치외법권에서 보낸 유복한 유년기, 전란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투했던 수용소에서의 사춘기, 활자로만 접했던 모국에의 첫 방문에서 받은 문화 충격과 ‘잿빛의 춥고 흐린’ 전후戰後 영국에서의 청년기, 비행 훈련, 고속도로로 둘러싸이고 히스로 공항의 끊임없는 확장으로 타격을 받은 런던 교외에서의 생활, 아내의 비극적인 요절 등은 그의 존재 깊숙이 시간과 공간의 교란된 감각, 강박과 불안이라는 상흔을 남겼다. 개인과 사회의 무수한 파국을 마주하며 밸러드는 ‘소설은 이미 거기에 존재하므로 작가의 임무란 리얼리티를 창조해 내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면서, 다른 어떤 작가도 하지 못한 방식으로 삶의 극단을 묘사했고 모순으로 가득한 20세기 후반의 인간 존재 방식을 표현하려 했다. 그의 트라우마는 이미지의 반복으로 나타났는데 저공비행 항공기, 박살 난 자동차, 물 빠진 수영장, 버려진 호텔, 황량한 해변, 악취가 진동하는 강과 석호, 감정을 잃은 반쯤 미친 주인공 등 동일한 모티브가 다른 외피를 입고 변주된다. 그는 현대 문명의 병리학적인 잔혹상―다국적 기업이 주도하는 소비사회, 미디어 과잉으로 인한 생활의 통제, 음모론이 판치는 정부 간 이데올로기 담론, 과학기술의 비인간화 등을 동일한 폭력의 다른 형태로 간주하고, 이러한 세계에서 살아가는 주인공이 불안과 강박에 시달리다 ‘에로스’와 ‘타나토스’ 같은 강렬한 이미지에 매료되어 극단으로 치닫는 모습을 냉정하며 분석적인 시선으로 묘사했다. 주인공이 경험하는 세계는 마치 ‘오브제’처럼 독특한 비유를 사용한 문체로 그려지고 주인공은 그 세계를 흘러가며 주체적인 판단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또한 ‘유일하게 진정한 외계 행성은 지구’라고 이야기해 왔던 그는 외부 환경과 인간의 내면에 펼쳐지는 의식/무의식의 상호작용에 초점을 맞추어 SF의 우주 개념을 ‘내우주inner space’로 전환시킴으로써 문학성을 꾀했다. 이와 같은 밸러드만의 문학적 특수성은 형용사 ‘밸러드풍Ballardian’이라는 신조어를 탄생시켰고, 사전에 등재되었다. 『콜린스 영어사전』에 따르면 ‘밸러드풍’은 ‘J. G. 밸러드의 장편소설과 단편소설에서 묘사된 환경―특별히 디스토피아적인 현대성, 암울한 인공 경관, 기술적이고 사회적 혹은 환경적 발전의 심리적인 효과―과 유사하거나 연상시키는’이다. 『영국인명사전』 항목에는 밸러드의 작품에 대해 ‘에로스, 타나토스, 대중매체와 신기술’로 가득 차 있다고 설명되어 있다. 내게 단편소설은 항상 중요한 지위를 차지했다. 순간을 포착해 내고, 단 한 가지의 주제를 맹렬히 파고들 수 있게 해 주는 특성도 마음에 들고, 이후에 장편으로 발전하게 될 아이디어를 시험해 보기에도 적합하다. 내가 쓴 모든 장편소설은 단편소설에서 시작되었다. […] _「제임스 그레이엄 밸러드 후기」에서 백과사전 외판원, 코번트가든 짐꾼, 과학 잡지의 편집자와 필자로 일하다가 1956년 첫 단편소설을 선보인 이후로 50년간 발표한 모든 단편소설 중에서 스물다섯 편을 엄선한 『제임스 그레이엄 밸러드』는 상상으로 충만하고 환상으로 가득한 밸러드의 걸작 단편소설을 연대순으로 접할 수 있어 그의 궤적을 조명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특히 장편소설로 진전되는 주제와 강박관념을 창안하고 발전시켰던 단편소설은 그의 전 작품 세계의 핵심으로 여겨진다. 대개 밸러드의 단편소설은 시선을 사로잡는 문장으로 시작하여, 초밀집 도시(「빌레니엄」), 에네웨타크의 버려진 벙커(「종막의 해안」), 꿈과 광기와 권태가 지배하는 휴양지 버멀리언샌즈(「스타스 가, 5번 스튜디오」「스텔라비스타의 천 가지 꿈」) 등과 같이 곧바로 독자를 어떤 환각적인 환경으로 몰아넣는다. 그리고 결국 모호하고 수수께끼 같은 현현顯現으로 막을 내린다. 밸러드의 초기 단편은 각각이 짧은 세 시기로 구분 지을 수 있는데, 우선 자연의 성질이 끔찍한 변화를 겪고 묘하게 과학기술과 유사한 형상을 가지는, SF 시기라고 부를 만한 연대가 존재한다. 두 번째 연대에 들어서면 밸러드는 시간과 공간에 손을 대며, 존재의 깊숙한 본질까지 파고들어 변조를 시작한다. 세 번째 연대에 이르면 그의 상상력은 더욱 종말론적 색채를 띠는데, 자연재해의 예언이 작품 속에 가득해진다. ‘밸러드풍’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예언적 디스토피아의 화풍이 완성된 것은 1960년대 중반 들어서이며, 이 단편들은 초현실적이고 대단히 함축적이다. 이들의 중심 주제는 어디까지나 디스토피아 그 자체이며, 주인공 또는 화자는 체제의 희생양이 되어 해악을 시연하는 역할을 맡는다. 그리고 「종막의 해안」(1964)에 이르러 비로소 작품은 기존의 틀을 벗어던지는데, 그의 디스토피아는 더 이상 미래라는 시간에 얽매이지 않는다. 인물의 내면과 외면을 오가고, 독백과 대화의 경계를 규정할 수 없는 서술 방식이 그 뒤를 받쳐 준다. 예언적 현재가 미래를 대체하고, 문체와 형식이 개념을 따라잡으며, 이후 작품들에서 펼쳐질 세계를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밸러드의 후기 단편에서 디스토피아는 부차적인 주제가 된다. 이제 전산화된 경제, 테러, 독재정치, 시시한 외설물 등 현대적인 분위기의 무대에서 우주적인 변화가 발생한다. 1960년대 후반부터 그는 다양한 장르와 서술 방식을 넘나들면서 현실의 모순을 직접 묘사하고 재단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속에 보이는 일부 작품들에서 디스토피아는 개인 안으로 침잠해 들어간다. 세계는 담담하게 파국을 향해 나아갈 뿐, 그 원인은 피상적으로만 제공되거나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고통은 현실과 갈등을 빚는 주인공의 내면에만 존재하며, 주인공을 제외한 다른 등장인물조차 빈 수영장의 표의문자처럼 피상적인 존재로만 묘사되기에 이른다. 밸러드풍 디스토피아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는 두 단편 「우주 시대의 기억」(1982)과 「근미래의 전설」(1982)에서, 디스토피아를 구성하는 요소는 전 지구적 규모의 신경증이나 다름없다. 밸러드의 단편에서 가장 긴 연대를 구성하는 것은 바로 이런 작품들,

저자 소개


공상과학소설SF의 뉴웨이브 운동을 주도해 20세기 후반 영국 소설계에서 가장 논쟁적인 작가로 불리는 제임스 그레이엄 밸러드는 1930년 부친이 사업차 머물던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났다. 일본이 진주만에 이어 홍콩을 공격하자 가족과 함께 민간인 포로수용소에 머물다가 1946년에 영국으로 송환됐다. 이후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2년간 의학을 공부하다 학교를 그만둔 뒤 영국 공군에 입대했다.
현대 문명의 어두운 이면과 비합리적이고 폭력적인 인간 본성을 파헤쳐온 밸러드는 수많은 소설과 에세이를 통해 공상과학소설의 우주 개념을 내우주로 전환시킴으로써 문학성을 꾀했다. 2009년 사망할 때까지 그는 탈정치, 소비사회, 미디어 과잉, 탈이데올로기 등의 시대적 경향을 깊숙이 파고들며 그 속에서 인간의 불안하고 어두운 심리를 묘사하여 초현실주의 문학에 가까운 SF 세계를 구축했다. 이러한 문학적 특성을 압축해 ‘밸러드적인ballardian’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났고, 사전에 등재되었다.
포로수용소 경험을 바탕으로 쓴 자전적 소설 《태양의 제국》으로 <가디언상>을 수상했으며, 이 작품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었다. 대표작으로는 ‘지구 종말 시리즈’인 《물에 잠긴 세계》 《불타버린 세계》 《크리스털 세계》, ‘도시 재앙 시리즈’인 《하이-라이즈》 《크래시》 《콘크리트 아일랜드》, 그 외에도 《무한한 꿈의 회사》, 《태양의 제국》의 후속작인 《여인들의 친절》, 《코카인의 밤》 《슈퍼-칸》 《밀레니엄 피플》 《나라가 임하옵시며》 등이 있다.

역자 소개

서울대학교 생명과학부를 졸업하고 아동과학서 및 SF소설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옮긴 책으로는 타임머신, 『SF 세계에서 안전하게 살아가는 방법』 『장르라고 부르면 대답함』 『SF 명예의 전당 2: 화성의 오디세이』(공역) 가 있다. 

책 속에서

콘래드는 그 말을 무시했다. “총기 소지가 불법인 이유는 다른 사람을 쏠 수 있기 때문이잖아요. 하지만 시계를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힐 수가 있나요?”
“당연한 소리 아니냐? 시간을 측정하면 어떤 일을 하는 데 얼마나 걸리는지를 정확하게 알 수가 있지.”
“그래서요?”
“그러면 그 일을 더 빠르게 하도록 만들 수 있잖니.”
_ 54쪽, 「크로노폴리스」에서

“박사님은 혼자가 아닙니다. 혼자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이건 시간의 목소리고, 모두가 박사님에게 작별을 고하고 있는 겁니다. 자신을 보다 넓은 견지에서 생각하세요. 박사님의 신체를 구성하는 모든 입자가, 모든 모래 알갱이들이, 모든 은하가 동일한 표식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방금 말씀하셨듯이 이제는 진정한 시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휴식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계속 시계를 보고 있을 필요는 없어요.”
_ 126쪽, 「시간의 목소리」에서

나는 힘없이 그의 옆자리에 주저앉았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그가 2분 만에 설명해 주었다. 오로라가 그에게 전설을 이야기해 주었고, 그는 반쯤은 동정에서 그리고 반쯤은 놀이 삼아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가오리의 위험과 난폭함을 설명한 것은 모두 오로라를 부추기기 위해 일부러 한 행동이었다. 덕분에 그녀는 그가 자신을 희생해 자살할 완벽한 기회를 만들어 냈던 것이다.
“물론 자살이 아니라 살인이었지만 말이야.” 나는 그에게 말했다. “내 말 믿게. 눈 속에 살의가 담겨 있었다니까. 정말로 자네를 죽이려 한 거야.”
트리스트럼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게 놀란 표정 짓지 마요, 폴. 애초에 시를 짓는다는 건 그렇게 위험한 일이잖아요.”
_ 207~208쪽, 「스타스 가, 5번 스튜디오」에서

천장을 조작하는 것은 뻔뻔한 집주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속임수였다. 대부분의 거주 공간 평가는 편의상 천장 면적을 측정한 값으로 이루어졌고, 합판 칸막이를 슬쩍 기울이기만 하면 우량 세입자를 위해 칸막이실의 면적을 늘리거나(수많은 부부들이 이런 식으로 속아서 칸막이실에 살게 되었다) 주택 감독관이 방문할 때면 일시적으로 줄일 수 있었다. 천장은 늘 연필 자국으로 빼곡했는데, 벽 건너편 세입자들과 영토 분쟁을 벌인 자취였다. 소심해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못하는 사람은 말 그대로 존재 자체가 짓눌려 사라질 수도 있었다. 사실 ‘조용한 이웃’을 강조하는 광고는 보통 이런 부류의 약탈 행위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려 주는 암묵적인 초대나 다름없었다.
_ 214쪽, 「빌레니엄」에서

자극에 반응하는 능력이야말로, 설령 그 반응이 비논리적일지라도 진정한 자유의 기준이라 할 수 있었다. 그에 비하면 프랭클린의 자유는 삶의 중심에 존재하는 온갖 의무의 제약을 받는 피상적인 것이었다. 세 군데에 걸려 있는 주택 융자금,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하는 수많은 칵테일파티, 온갖 가전제품과 옷과 휴가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토요일 거의 대부분을 보내는 개인 진료 근무까지. 그가 홀로 보낼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은 직장으로 출퇴근하며 운전대를 잡고 있는 동안뿐이었다.
_ 327쪽, 「잠재의식 인간」에서

근처에서 행방불명된 우주선이 발견될 것이라는, 페레이라의 어설프지만 커져 가는 확신에도 불구하고 코널리는 여전히 회의적이었다. 아슬아슬한 탈출 이후로 그는 묘하게 차분하고 감정이 흐릿한 상태가 되었고, 당시 눈앞까지 찾아왔던 죽음을 운명으로 여기듯 초연하게 반추했다. 아마존 정글에서 명멸하는 생명의 총량 전체와, 기억되지 않은 수많은 죽음과, 촌락 주변을 둘러싸고 방사형으로 뻗은 정글의 오솔길들을 따라 끝없이 누워 있는 수많은 나무들을 자신과 동일시하면서.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정글의 논리가 그의 정신을 잠식해 들어갔고, 우주선이 이곳에 불시착했을 가능성은 갈수록 희박하게 느껴지기만 했다. 자연의 질서 속에서 서로 다른 계에 속해 있는 두 가지 요소가 교차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 자체가 갈수록 비현실적으로만 느껴졌다. 게다가 회의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보다 깊은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라이커가 우주탐사의 ‘실제’ 이유에 대해 물은 이후 더욱 강해지는 생각이었다. 그가 말하고자 한 것은 우주 계획 자체가 인류의 깊은 무의식에 숨겨진 질병의 발현이고, 우주선이며 인공위성을 띄운 것은 그런 기구의 비행이 인간의 내면에 파묻혀 있는 특정 충동과 욕망을 만족시켜 주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반면 정글에서는, 무의식이 발현되고 드러나게 되는 이곳에서는, 그런 식으로 욕망을 광기에 실어 표출할 필요가 없었다. 따라서 아마존이 우주 비행의 성공이나 실패에 어떤 식으로든 관련될 수 있다는 가정은, 일종의 정신적인 시차를 고려하면 갈수록 흐릿해지고 멀어지기만 했다. 사라진 캡슐 그 자체도 부서지는 거대한 환상의 파편으로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_ 384~385쪽, 「재진입의 문제」에서

다음으로 해변을 방문한 것은 사흘 후였다. 도서관의 친구들은 하던 일로 돌아갔고, 거인을 계속 관찰하고 소식을 알리는 일은 내 몫으로 돌렸다. 어쩌면 내가 이번 일에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는지도 모른다. 다시 해변에 가 보고 싶어 몸이 달아 있었던 것은 사실이니까. 시체애호증과는 다른 종류의 관심이었다. 내게 있어 그 거인은 아직 살아 있는 존재, 심지어 그를 구경하는 사람들 중 몇몇보다 더욱 살아 있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토록 그에게 매료된 이유 중에는 그의 놀라운 규모, 사지가 차지하는 거대한 공간도 있었다. 보고 있으면 그 존재로부터 나의 왜소한 사지의 존재를 인정받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삶의 다른 모든 요소가 의심의 대상이 될지라도 그 거인은 생사와 관계없이 절대적인 존재이며, 해변에 모인 우리 불완전하고 하찮은 구경꾼들이 그와 비슷한 절대적인 존재의 세계를 엿볼 수 있게 해 주는 매개체였기 때문이다.
_ 463~464쪽, 「거인의 익사체」에서

최초로 벌어진 일련의 상표권 분쟁이 진정된 후(한 일본인 사업가가 역사 자체의 상표권을 등록하는 일에 거의 성공할 뻔했다. 이후 시간은 ‘공공의’ 영역으로 규정되었다), 시간 여행에 따르는 가장 큰 장애물은 우주의 물리법칙이 아니라 제반 시설을 건설하고 전력을 공급하는 데 필요한 엄청난 양의 자금이란 사실이 밝혀졌다. 과거로의 사파리 여행에는 분당 거의 100만 달러의 돈이 들어갔던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형, 「마그나 카르타」 서명,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을 확인하기 위해 몇 번의 단기 탐사를 수행하고 나자, 정부의 재정 지원을 받는 프린스턴 대학교 아인슈타인 기념시간센터조차도 더 이상 시간 여행을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두말할 나위 없이 과거로의 여행에 따르는 재정 부담을 감수할 수 있는 조직은 이제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바로 전 세계의 거대 텔레비전 방송국들이었다. 그들이 과도한 선정성을 지양할 것이라 맹세하자, 정부 지도자들 또한 그런 텔레비전 여행기의 교육적 효과가 지닌 장점이 심미적으로 끔찍한 결과물이 나올 위험을 감수할 정도는 된다고 설득되기에 이르렀다.
_ 478쪽, 「지상 최대의 텔레비전 쇼」에서

굴드는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도 기형이 아닐세. 카르멘과 마찬가지야. 우리가 모두 진실로 받아들인, 소위 말하는 ‘인구 감소’와 마찬가지인 걸세. 사실 감소는 전혀 일어나지 않았어. 친자 살해라는 도덕적 쇠퇴가 있었을 뿐이지. 지난 50년 동안 출산율은 감소한 것이 아니라 증가했으니까.” 포리스터가 항변하기 전에 그는 말을 이었다. “잠시만 열린 마음을 가져 보게나. 성행위 빈도는 급격하게 상승했고, 가임률은 유례없을 정도로 높지 않은가. 심지어 자네 아내도 일곱 차례나 출산을 했지.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우리는 방대한 교체 프로그램을 수행하고 있는 거라네. 애석하게도 교체되어 사라질 존재는 바로 우리겠지만. 우리의 임무는 그저 우리 후손들로 세상을 채우는 것뿐이지. 우리가 고독을 필요로 하고, 홀로 있으면서 극도로 행복을 느끼고, 어떤 절망도 느끼지 못하는 현상은 아마도 자연이 우리에게 건네는 작별 인사가 아닐까 싶다네.”
_ 525쪽, 「저공비행」에서

10월 동안 표면적으로는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월말이 다가오자 예루살렘에서 세계신앙연합회의 두 번째 총회가 열렸다. 여기서 영향력 있는 대주교 한 명이 신을 중립적인 거대 지성체로 여기는 과학적 관점에 대해 공공연한 비판을 쏟아 냈다. 그의 발언에 따르면, 그런 인식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조잡한 관측 장비를 사용한 결과에 따른 순진하고 과도하게 단순화된 관점일 뿐이었다. 신이 완벽하게 수동적인 존재일까, 아니면 바다처럼 온갖 형상과 감정을 드러내 보이는 존재일까? 마니교의 이단 교리를 언급하는 것이 조금도 부끄럽지 않다는 점을 덧붙이면서, 대주교는 옛날부터 인간과 자연 모든 곳에 선악의 양면성이 존재했으며, 앞으로도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악이 본질적으로 인간 천성의 일부라거나 인간이 회개를 할 수 없는 존재라고 말하는 건 아니지만, 보이지 않는 신에 대해 수동적으로 숙고하는 일에 눈이 멀어 스스로에 적대감을 가지거나 실패하는 일이 생겨서는 곤란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위대한 업적, 통상과 예술과 산업은 인류의 양면성과 동기를 건전하게 이해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최근 들어 문명적인 삶이 쇠퇴 양상을 보이는 것은 인류가 자신의 본질을 깨닫기를 거부하고 자신들을 절대자와 지나치게 가까운 존재로 인식하고자 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죄를 저지를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회개를 하기 위한 필수 요건인 것이다.
_ 537~538쪽, 「어느 절대자의 탄생과 죽음」에서

어떻게 봐도 셰플리의 죽음은 우주에서 일어난 첫 살인 사건이었다. 맬러리가 연출하고, 동시에 무의식적으로 환영한 파국이었다. 우주 비행사가 저지른 살인과 뒤따른 대중의 불안은 우주 시대의 종막을 상징했다. 인간이 우주로 진출함으로써 진화의 범죄를 저질렀으며, 자신의 의식을 구성하는 요소를 잘못 다루었다는 자각이 찾아왔다. 우주센터 근처의 마을 주민들이 시간 감각에 혼란을 겪는 현상을 통해, 인간의 정신이 수백 년에 걸쳐 이룩한 연약한 연속성에 금이 가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케이프케네디와 플로리다 전역이 반드시 피해야 하는 오염 지역이 되고 말았다. 마치 네바다와 유타의 핵실험지처럼.
_ 585쪽, 「우주 시대의 기억」에서

“로저, 당신 아내는 석 달 전에 죽었어요. 사망증명서 사본을 보여 줬잖아요.”
“그래요, 죽었죠.” 셰퍼드도 동의했다. “하지만 그건 단편적인 시각일 뿐입니다. 아내는 여전히 전체 시간 속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어요. 일단 한 번 살았던 사람은 그 누구도 진짜로 죽을 수 없으니까. 나는 아내를 찾아낼 겁니다. 그녀가 여기서 내가 자신을 되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는 침실 사방에 가득한 사진들 쪽으로 가볍게 손짓했다.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이 은유는 제대로 작동할 겁니다.”
_ 644~645쪽, 「근미래의 전설」에서

목차

수용소 도시
12번 트랙
크로노폴리스
시간의 목소리
고더드 씨의 마지막 세계
스타스 가, 5번 스튜디오
빌레니엄
시간의 정원
스텔라비스타의 천 가지 꿈
감시탑
잠재의식 인간
재진입의 문제
사라진 레오나르도
종막의 해안
거인의 익사체
다운힐 자동차 경주로 살펴본 존 피츠제럴드 케네디 암살 사건
지상 최대의 텔레비전 쇼
웨이크 섬으로 날아가는 꿈
저공비행
어느 절대자의 탄생과 죽음
유타 해변의 어느 오후
우주 시대의 기억
근미래의 전설
미확인 우주정거장 조사 보고서
꿈 화물
제임스 그레이엄 밸러드 후기
해제
옮긴이의 말―파괴된 세상의 예언자
제임스 그레이엄 밸러드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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