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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 [개정판] 넬슨 만델라 자서전

넬슨 만델라 저 | 김대중 역 | 두레 | 2020년 0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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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74431273 / 960쪽 140 x 210 (㎜) / 양장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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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출판사 리뷰

넬슨 만델라가 남긴 최고의 자서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흑인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이 나라의 흑인 어린이는 흑인 전용 병원에서 태어나 흑인 전용 버스로 집에 돌아오고, 흑인 거주지역에서만 살아야 하며, 흑인 전용 학교에만 다녀야 한다. 커서도 흑인들만 다니는 직장에만 취직할 수 있고, 흑인 거주지역 내에서만 집을 빌릴 수 있으며, 흑인 전용 기차만 탈 수 있다. 밤낮을 불문하고 통행증을 제시하기 위해 수시로 가던 길을 멈추어야 하며, 통행증을 보여주지 못하면 경찰서에 연행된다. 한 가족인데도 피부색에 차이가 난다는 이유로 ?집단구역법(Group Areas Act)?에 따라 서로 다른 지역에 헤어져 살아만 하기도 했다. 백인들이 남아프리카에 상륙한 이래 약 340년 동안에 걸쳐 흑인들은 가혹한 억압체제 속에서 노예와 같이 생활해왔으며, 이런 잔인무도한 체제에 저항하다가 수많은 사람이 살해당하거나 실종되는 참상을 겪었다. 만델라는 소수의 백인이 다수의 흑인의 인권을 짓밟고 고문하고 투옥하고 살해하는 것을 보면서 이러한 인간 파괴는 억압받는 흑인들만이 아니라 그들을 탄압하는 백인들의 영혼도 똑같이 파괴하고 타락시킨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일어나 싸웠고, 그러다가 27년이라는 긴 세월을 감옥에서 보내야만 했다. 만델라는 이 책에서 도피생활에서 겪었던 두려움, 오랜 감옥생활의 고통, 죽음의 공포, 가족과 동지의 고난을 바라보고 있어야만 하는 안타까움, 가족에 대한 그리움 등을 진솔하면서도 감동적인 필체로 전해준다. 그는 이러한 고통을 통해 깨달은 인간의 존엄과 자유의 소중함을 역설한다. 그리고 부당한 힘에 의해 때때로 좌절하고 패배를 당할지도 모르지만, 인간은 스스로 좌절하지 않는 한 결코 패배자가 될 수 없다는 교훈을 전해준다. 패배가 지닌 숭고한 의미도 말해준다. 감옥은 그에게 큰 고통을 주었지만, 만델라는 그런 시련을 통해 더욱 강해졌고, 관용과 용서로 자신의 적들까지도 끌어안을 수 있는 크고 성숙한 사람이 되어 다시 세상에 나왔다. 시련 속에서 높이 들어 올려진 그의 영혼, 그의 인간의 크기와 진정성, 그리고 그가 내민 용서와 화해의 손길이 이르는 곳마다 백인세력의 와해를 가져오는 극적인 모습도 보여준다. 폭력보다는 비폭력의 힘이, 사랑과 용서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증언해준다. 이 책은 우리의 과거사 정리 및 역사 바로 세우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만델라의 ‘진실과 화해 위원회(TRC)’를 부록에서 아주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망각에 맞선 기억의 전쟁’이라고도 불리는, ‘진실을 밝히는 조건으로 범죄자들을 사면한’ 이 위원회가 왜, 어떤 과정을 통해 생겨났으며 어떻게 활동했고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가, 그리하여 그것이 왜 세계적인 모델이 될 수밖에 없었는가를 상세하게 소개해주고 있다. ‘진실과 화해 위원회’의 청문회를 통해 드러난 야만적인 범죄의 실상도 눈에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전해주어 우리를 전율케 한다. TRC에 접수된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의 인권유린 사건(1960년부터 1994년까지)은 약 2만 1,300건에 이르렀고, 이들 사건으로 인한 피해자 수는 약 305만 명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사면을 청구한 범죄자들은 약 7천 명이었으며, 이 가운데 10분의 1인 7백 명이 청문회에 나와 진실을 밝혀야만 했다. 만델라의 생애, 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 1918년 트란스케이의 한 조그만 시골 마을에서 추장의 아들로 태어난 만델라. 그는 자신이 용감한 템부족의 후예임을 자랑스러워하며 평화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학생 시절 그의 생각과 시야는 자신의 고향과 부족의 울타리를 넘어서지 못했다. 그는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친절’을 베풀어준 백인들에게 고마워하며 성실하게 공부하는 학생이었으며, 공무원이나 통역관이 되는 꿈을 키우며 살아가는 평범한 흑인 젊은이였다. 하지만 현실은 이러한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소년 시절의 자유는 환상일 뿐이라는 것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리고 젊은 시절 이미 자유를 빼앗겼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부터” 그는 자유를 갈망하며, 자신뿐만 아니라 “나의 형제와 자매들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천천히 깨닫게 되었다.” 만델라는 아프리카 민족회의(ANC)와 만나게 되었고, 그때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세계로 뛰어들게 되었다. 그의 말처럼 “남아프리카에서 흑인으로 산다는 것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정치화될 수밖에 없는 것”을 뜻했기 때문이다. 만델라는 동지들과 함께 1944년 ANC 청년동맹을 창설하고, 인종차별적인 법안들을 철폐하기 위한 활동과 흑인 인권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하지만 1947년 ANC 트란스발 지부 집행위원으로 선출되면서부터 ANC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그때 남아프리카는 국민당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더욱 가혹한 인종차별 정책을 실시함으로써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었다. 1952년 만델라는 올리버 탐보와 함께 남아프리카에서는 최초로 흑인 변호사 사무실을 열어 흑인들의 희망으로 떠오른다. 또한 ANC의 저항운동을 이끌면서 ANC 내부에서도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비폭력 저항운동을 주장하던 그에게 1960년 70여 명이 살해당하는 샤프빌 대학살 사건은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만델라는 투쟁 방식을 비폭력 저항운동에서 무장폭력 저항운동으로 바꾸게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1956년 체포되어 반역죄로 기소되었지만 1961년 무죄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더 이상 자유롭게 활동할 수 없게 되어 지하생활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후 만델라는 폭력저항 단체인 ‘민족의 창(MK)’을 창설하고 무력투쟁을 추구하는 투사가 되었다. “나의 사명은 억압하는 자와 억압받는 자 모두를 해방시키는 것” 지하생활을 계속하던 1962년 8월, 만델라는 차를 타고 가다가 석연치 않은 이유로 경찰에 체포되었다. 전설적인 ‘검은 별봄맞이꽃’이 드디어 잡힌 것이다. 이때부터 시작된 일명 ‘리보니아 재판’에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사형을 면할 수 없으리라는 절박함 속에서도 신념을 굽히지 않았던 만델라는 1964년 사형이 아닌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그리고 27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감옥에 갇혀 지내게 되었다. 그는 감옥 안에서도 인종차별적인 요소들을 없애기 위해, 그리고 범아프리카회의(PAC)를 비롯한 모든 저항단체의 단결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종종 탈출하고 싶은 유혹을 견뎌냈다. 로벤 섬, 폴스무어 등 악명 높은 교도소에서 보낸 감옥 생활은 만델라와 남아공 정부 모두를 변화시키는 데 충분한 시간이었다. 만델라는 백인 정부와 대화를 시작해 많은 변화를 이끌어낸다. 백인 정부의 상황도 그리 낙관적이지 못했다. 국제적으로는 남아공에 대한 경제제재 조치가 더욱 강화되었고, 만델라의 위상은 날로 높아져만 갔다. 감옥에 있는 만델라는 이제 남아공 인권운동을 상징하는 인물이 되어 있었다. 인내를 갖고 백인 정부와 대화한 끝에 만델라는 마침내 자기보다 먼저 많은 동지들을 감옥에서 석방시키고, 1990년 2월 11일 자신도 약 1만 일 동안의 감옥 생활을 끝내고 석방된다. 백인 정권은 만델라의 높아진 위상과 국제적인 압력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석방된 후에도 인종차별을 없애고 흑인들의 인권 회복을 위해 노력하던 만델라는 1993년 데 클레르크와 함께 공동으로 노벨평화상을 받는다. 1994년, 마침내 340여 년간의 인종차별을 종식시키는 남아프리카 최초로 흑인이 참여하는 총선거가 실시되고, 만델라는 남아프리카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만델라는 자신의 신념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위대한 사람들을 보면서 진정한 용기란 무엇인지 깨달았다고 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용기란 두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임을 배웠다. 나는 내가 기억할 수 없을 만큼 수없이 많은 두려움을 느꼈으나, 용기라는 가면 속에 두려움을 감췄다. 용감한 사람이란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그 두려움을 정복하는 사람이다.” 만델라는 모든 인간의 깊은 마음속에는 자비와 관용이 있다는 점을 늘 잊지 않았다. “피부 색깔이나 가정 배경과 종교 때문에 다른 사람을 증오하도록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람들은 증오를 배울 수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증오를 배운다면 사랑도 배울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 마음에서 사랑은 그 반대보다 훨씬 더 본성적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착함이란 가려 있으나 결코 꺼지지 않는 불꽃이다.” 그리고 그는 억압받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억압하는 사람도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만델라는 말했다. “다른 사람의 자유를 빼앗은 사람은 증오의 포로가 되어 편견과 편협심의 창살에 갇혀 있게 된다. 내가 만약 다른 사람의 자유를 빼앗는다면 남에게 나의 자유를 빼앗긴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진정으로 자유롭지 못하다.”

저자 소개

1918년 7월 18일에 남아프리카 트란스케이에서 태어났다. 1944년 아프리카민족회의(ANC)에 들어가고 1962년 8월 체포될 때까지 오랫동안, 집권당인 국민당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에 저항하는 운동에 매진했다. 27년 넘게 감옥에 갇혀 있었고, 그동안 반아파르트헤이트 운동을 상징하는 강력한 인물로서 그 명성이 점점 높아졌다. 1990년 2월 출소했으며, 1993년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고, 1994년에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민주적으로 선출된 첫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이후 발표한 자서전 『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Long Walk to Freedom, 1994)』은 전 세계에서 600만 부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 되었다. 자와할랄 네루 상, 유네스코 시몬 볼리바르 국제상 등 지금까지 1,115회 이상 각종 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UN 총회는 만델라의 생일인 7월 18일을 ‘국제넬슨만델라데이’로 선포하고 그가 세계의 자유에 기여한 공을 치하했다.


넬슨 만델라 주요 연표
1918년  7월 18일, 음베조에서 태어나다. 롤리흘라흘라라는 이름으로 불리다.
1925년  감리교 선교 학교에 입학하다. 교사에게 넬슨이라는 이름을 받다.
1927년  아버지 헨리 가들라 음파카니스와가 사망하다. 만델라, 욘긴타바 달린디에보의 집으로 들어가다.
1934년  클라크베리 기숙학교에 입학하다.
1937년  포트 보퍼트에 있는 웨슬리교 대학 힐드타운에 입학하다.
1939년  포트헤어 대학교에 입학하다.
1940년  학생회 임원 사퇴 사건으로 포트헤어 대학교를 떠나다.
1941년  저스티스와 함께 요하네스버그로 도망치다.
1944년  ANC에 가입해 청년동맹 결성에 앞장서다. 에블린 메이스와 결혼하다.
1948년  아파르트헤이트 법이 처음으로 도입되다.
1952년  만델라와 올리버 탐보,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흑인 법률 사무실을 열다. ANC와 SAIC(남아프리카 인도인 회의), 불복종 운동을 시작하다.
1955년  국민회의에서 「자유헌장」을 작성하다.
1956년  만델라 등 155명이 반역죄로 기소되다. 4년 동안 계속되는 법정 소송이 시작되다.
1958년  에블린 메이스와 이혼하다. 위니 마디키젤라와 결혼하다.
1960년  샤프빌 학살이 일어나다. 정부, ANC를 불법화하다.
1961년  반역죄 재판이 끝나고, 만델라 무죄 판결을 받다. ANC 군대 ‘민족의 창(MK)’이 창설되다.
1962년  만델라, 다른 나라들의 지지와 도움을 얻기 위해 해외로 나가다.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돌아온 뒤 다시 체포되다. 불법 출국과 파업 선동 혐의로 5년형을 선고 받다.
1963년  복역한 지 9개월 만에 다시 법정에 서게 될 것이라는 소리를 듣다.
1964년  사보타주 혐의로 월터 시술루, 아메드 카트라다, 레이먼드 음흘라바, 고반 음베키, 데니스 골드버그, 엘리어스 모초알레디, 앤드류 음랑게니와 유죄 판결을 받다. 종신형을 선고 받고 로벤 섬으로 이송되다.
1969년  만델라의 아들, 템베킬레가 자동차 사고로 사망하다.
1980~82년 수천 명이 ‘만델라를 석방하라’는 청원서에 서명하다.
1982년  만델라 폴스무어 교도소로 옮겨지다.
1988년  빅터 버스터 교도소로 옮겨지다.
1989년  만델라와 함께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들 중 시술루, 카트라다, 음흘라바, 모초알레디, 음랑게니 등 다섯 명이 석방되다(골드버그는 1985년, 음베키는 1987년에 풀려났음).
1990년  만델라, 감옥에서 풀려나다.
1993년  드 클레르크와 함께 노벨 평화상을 받다.
1994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민주적인 선거에서 생애 최초로 투표하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되다.


2013년 12월 5일 서거

역자 소개

1924년 1월 6일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에서 태어나 하의공립보통학교, 목포제일보통학교를 거쳐 1943년에 목포공립상업학교를 졸업했다. 1961년 치러진 제5대 민의원 보궐선거에서 국회의원으로 처음 당선되었으나 5.16쿠데타로 인해 의원 선서조차 하지 못했다. 1963년 민주당 소속으로 목포에서 제6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이후 7.8.13.14대 국회의원으로 활발한 의정활동을 펼쳤다. 

1970년에는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어,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90만 표 차로 낙선했고, 이후 미국과 일본 등지에서 유신반대 민주화운동을 전개했다. 1973년 8월에는 일본에서 중앙정보부 요원에게 납치당해 수장당할 뻔 했으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으며, 1980년에는 내란음모사건 혐의로 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세계 각국에서 구명운동이 전개되어 감형되었다. 
1982년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1985년 귀국했지만 가택연금이 반복되었다. 1987년 ‘평화민주당’을 창당해 그해 12월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92년 민주당 제14대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어 출마한 대통령 선거에서도 또다시 낙선했고 이후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1993년 7월 영국에서 귀국하여 ‘아태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에 취임했다. 1995년 정계복귀를 선언하고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한 후 1997년 12월 18일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1998년 2월 25일 제15대 대통령에 취임한 그는 IMF 외환위기를 조기에 극복하고, 2000년 6월에는 남북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하여 ‘6.15공동선언’을 발표했으며, 대북포용을 핵심으로 하는 ‘햇볕정책’을 펼쳐 남북관계의 진전에 큰 성과를 가져왔다. 2000년에는 남북관계 진전 및 민주주의와 인권신장에 헌신한 공로로 한국인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무궁화 대훈장을 받았으며 모스크바 외교대학원 정치학 박사 등 국내외 20여개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2009년 파란만장했던 생애를 뒤로 하고 급성호흡부전증후군으로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 중 8월 18일 끝내 서거했다. 

지은 책으로는 <김대중 옥중서신> <대중경제론> <3단계 통일론> 등 20여 권이 있다.

목차

감사하는 말 / 1. 시골의 어린 시절 / 2. 요하네스버그 / 3. 자유투사의 탄생 / 4. 투쟁은 나의 삶 / 5. 반역죄 / 6. 검은 별봄맞이꽃 / 7. 리보니아 / 8. 로벤 섬: 암흑의 나날들 / 9. 로벤 섬: 희망의 시작 / 10. 적과의 대화 / 11. 자유 / 부록: 그 후의 이야기들 / 옮긴이의 말 / 찾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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