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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애사 대한민국 스토리DNA 001

시리즈 : 대한민국 스토리 DNA [18]

이광수 저 | 새움 | 2015년 0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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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기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애달픈 우리 이야기. 오늘날 모든 역사 드라마와 영화의 원형이 된 소설 -MD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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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93964950 / 552쪽 129 x 1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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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출판사 리뷰

저자 소개

이광수(1892∼1950)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춘원(春園) 이광수는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다. 아명은 보경(寶鏡)이고, 작가이자 문학평론가, 사상가이자 기자, 논객으로 활동하며 고주(孤舟), 외배, 올보리, 장백산인(長白山人), 춘원생, Y생 등의 필명을 썼다.
이광수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1905년 일진회(一進會) 유학생으로 도일해 일본 와세다 대학 문학과와 철학과에서 수학하면서 신학문을 접하게 된다. 홍명희·최남선 등과 교류하고 톨스토이·바이런 등의 외국 사상가의 저서를 읽으면서 세계를 향해 시야를 넓혀 가던 이 시절은 그가 한국 근대문학의 기틀을 닦는 사상적 자양분을 마음껏 흡수할 수 있던 시기였다. 이때 발표한 <문학이란 하오>는 한국 근대문학의 범주와 방향을 제시한 본격적인 근대문학론이라 할 수 있다. 이광수는 1909년 첫 작품 <사랑인가>를 발표한 이후 <어린 벗에게>, <윤광호>, <소년의 비애> 등의 소설을 통해 자유연애를 옹호하고 기성의 도덕을 부정하는 진보적 사상을 고취했다. 특히 1919년 학비 보조를 위해 ≪매일신보≫에 연재하기 시작한 ≪무정≫은 계몽주의적 자유연애론과 근대적 자아의 각성 문제를 다룸으로써 인습에 반기를 들고 신문명의 기치를 든 청년들의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 냈다.
소설뿐 아니라 시와 논설, 평론 등을 발표해 사상가로서 초석을 닦고 있던 이광수는 이미 재일 유학생 사회에서 저명인사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존재였다. 이에 따라 그는 자연스럽게 유학생 활동에 앞장서면서 1919년 ‘2·8독립선언서’의 초안을 작성하는 일을 맡게 된다. 이후 상하이로 탈출해 그곳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주간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여기서 그는 도산 안창호를 만나고 그의 사상에 깊이 감화되어 그를 ‘아비’로 칭하고 평생에 걸쳐 존경심을 표한다.
1921년 귀국한 즉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지만 춘원의 후원자인 아베 요시이에(阿部充家)의 도움을 받아 불기소처분을 받아 풀려난 뒤로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지낸다. 1921년 ≪개벽≫에 조선 민족의 민족성을 개조하자는 내용을 골조로 하는 <민족 개조론>을 연재해 조선 사회에 엄청난 반향과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춘원의 집과 개벽사가 습격당할 만큼 거센 반발이 있었지만 그의 입장에서 이 논설은 돌출되거나 변질된 사상이 아니라 그가 일관되게 주장해 온 민족 개조론과 실력 양성론을 실천적으로 구체화한 글이라 할 수 있다.
1924년 ≪동아일보≫에 발표한 소설 ≪재생≫은 문학사적 의의 외에도 이광수가 본명을 사용한 첫 소설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 작품이다. 이를 계기로 춘원은 10여 년간 가장 왕성한 문학 활동을 펼치면서 문단의 중심에 서게 되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그는 순문예지 ≪조선 문단≫의 주재로 활동했고, ≪혁명가의 아내≫, ≪사랑의 다각형≫, ≪삼봉이네 집≫에 이르는 ≪군상≫ 3부작과 역사소설 ≪단종애사≫, ≪마의태자≫ 등의 작품을 발표했을 뿐 아니라 ≪흙≫(1932), ≪유정≫(1933) 등의 대표작을 남겼다. 특히 ≪흙≫은 그가 조직한 흥사단의 국내판 수양동우회와 ≪동아일보≫ 편집국장 신분으로 전개한 ‘브나로드 운동’의 방편으로 쓰인 농촌계몽소설이다. 1938년에 발표한 전작 소설 ≪사랑≫에는 아들의 죽음, 도산의 죽음, 수감 생활로 이어지는 일련의 고통스러운 사건을 거친 후 종교적 세계에 안주하려는 춘원의 현실 초극 의식이 잘 드러나 있다.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은 이광수에게 변절의 오명을 덧씌운 결정적 계기가 되는데, 이 사건 이후 그는 “천만 동포를 천황의 독자로 만드는 데 여생을 바치겠다”는 맹세에 따라 친일 행각에 앞장섰기 때문이다. 그는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로 창씨개명을 하고, 황국 위문 작가단을 결성하고, 친일 단체인 조선문인협회 초대 회장으로 앞장서 내선일체 구현을 강조하는 일본어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후에 이 모든 행위가 조선 민족을 보호하기 위한 타협책이었다고 변명하기도 했으나 광복 후 반민특위에 의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러나 이때 이미 폐병과 결핵으로 온몸이 만신창이 상태였던 이광수는 아들의 탄원 덕분에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불행히도 1950년 납북된 후 그의 마지막 모습은 확인할 수 없으나, 평양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자강도 고개동에서 사망, 모처에 매장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광수의 삶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해방에 이르는 역사의 파고 가운데 민족의 운명과 더불어 부침을 겪었다. 그는 문사(文士)이자 지사(志士)로 공론의 장에 참여해 목소리를 높이면서 역사 속으로 자신의 삶을 투항했다. 비록 친일의 낙인이 찍힌 ‘흠 많은’ 우리 문학의 아버지일지언정, 이광수의 삶과 문학에는 우리 근대사의 공과가 그대로 새겨져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책 속에서

홍씨는 그 비상 한 봉지를 품에 품고 수측 양씨에게 먹일 기회를 엿보았다. 순빈은 그래도 사람을 죽인다니까 벌벌 떨고 겁을 내어서, 아무리 양씨가 밉더라도 목숨은 죽이지 말고 세자를 호리지만 못하게 하기를 원하였다. 홍씨는 속으로 픽 웃으면서도 네, 네, 하였다. “이애, 그 약을 먹이면 어떻게 되느냐?” 하고 순빈이 물을 때에 홍씨는 “이것을 먹으면 낯바닥과 온 몸뚱이가 푸르뎅뎅해진다고 합니다” 하고 대답했다.
“살빛이?”
“네.”
“그러면 미워지겠지?”
“낯바닥이 죽은 년의 낯바닥같이 되면 그년을 누가 거들떠보기나 하겠습니까.”
순빈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44-45쪽)

“지금 공경(公卿)으로 있는 사람 중에는 쓸 만한 사람이 없을까?”
“우의정 김종서 하나요. 하지만 김종서는 호랑이니까…… 호랑이는 길드는 법이 없소이다. 정분이 있으나 무해무익하니 말할 것 없고, 혹 인연이 있으시거든 정인지를 끌어 보시지요. 첫째, 정인지는 명나라 대관 중에 안면이 넓고 집현전에도 최항 이하로 당여(黨與, 같은 편 사람들)가 있으니 끌어 둘 만하외다.”
“정인지가 내게로 끌릴까?” 하는 수양대군의 말에 권람은 웃으며 “인지는 절개보다도 부귀를 중히 여기는 사람이외다” 하였다. 수양대군도 고개를 끄덕끄덕하였다. (96-97쪽)

그렇지만 한명회는 전혀 선악을 변별하는 양심이 없었다. 그에게는 오직 욕심과 그 욕심을 채우려는 한량없는 꾀가 있을 뿐이었다. 어느 놈의 돈을 먹으리라 하면 반드시 먹었고, 어느 계집을 내 것으로 만들리라 하면 반드시 만들었다. 그래서 정보의 서매(庶妹)가 자색이 있는 줄을 알고는 곧 정보와 친한 체하여 마침내 그 서매를 첩으로 얻었다. 그것도 석 달 안에. 그러고는 충신 정몽주의 손녀를 첩으로 삼았노라고 아는 사람들에게 제 분수에 맞지 않는 말을 지껄여 댔다. 썩은 선비들이 충신이라 떠들고 종사(宗師)라고 존중하는 정몽주의 손녀를 첩으로 삼아 그 이름을 짓밟는 것이 유쾌하였던 것이다. 누구나 도덕적 양심만 떼어 놓으면 상당히 꾀가 나오는 법이지만 한명회의 계교는 실로 무궁무진하였다. 그는 체면이라든지 선악이라든지 인정이라든지 따위를 전혀 돌아볼 줄 모르기 때문에 아무런 짓이라도 목적을 위해서는 가리지 않았다. (104-105쪽)

“가자, 활시위를 떠난 살이 다시 돌아오는 법은 없다” 하고 수양대군은 소리쳤다.
“나으리, 아니 됩니다. 이러시다가는 대사는 안 되고 봉변만 당할 것입니다” 하고 송석손, 유형, 민발이 수양대군의 소매를 붙들어 만류하였다.
수양대군은 마침내 흥분이 극도에 달하였다. 평소에 저마다 앞장설 듯이 큰소리치던 자들이 정작 일을 시작할 때가 되자 모두 겁들이 나서 슬슬 꽁무니를 빼는 것이 심히 밉고 분하였다.
“비켜라! 너희들일랑 가서 관사(官司)에 일러바쳐라. 내가 억지로 너희들더러 따르라는 것은 아니어. 나를 따르기 싫은 놈들은 가. 대장부가 죽으면 나라를 위하여 죽는 것이야. 나 혼자 갈 테니, 놓아라 놓아!” 하고 수양대군은 벽에 걸린 활을 떼어 어깨에 메고 칼자루에 손을 대며 “어느 놈이나 고집만 세어 갈팡질팡하다 기회를 놓치게 하는 놈이 있으면 우선 참할 터이니 그리 알아라” 하고, 옷을 붙드는 송석손・유형・민발 등을 발길로 걷어차고 노기가 등등하여 중문으로 뛰어 나섰다.
이때에 부인 윤씨는 조금도 겁냄이 없을뿐더러 도리어 가기를 권하는 듯이 손수 갑옷을 내어다가 입혀 주었다. (153-154쪽)

“좌상이 지금 나더러 왕위에서 물러나라 그 말이야” 하고 왕은 옥좌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더러 부왕께서 전하여 주신 왕위를 버리란 말이야? 그것이 대신이 할 말이야? 그것이 어느 성경현전에 있는 신하의 도리야? 정인지의 목에는 칼이 들어갈 줄을 몰라?”
왕은 용안이 주홍빛이 되고 발을 굴렀다.
“숙부가 이제 정인지를 시켜 이런 말을 하게 한단 말이냐? 누구 없느냐? 이리 오너라! 역신 정인지를 금부로 내려 가두고 전교를 기다리라 하여라! 난신적자를 하룬들 살려 둔단 말이냐. 요망한 늙은것이 오늘따라 가장 충성이 있는 듯하기로 무슨 소리를 하는고 하였더니, 언감생심 그런 소리를 한단 말이냐. 이놈! 네가 선조의 녹을 먹고 고명하심을 받았거든 이제 이심을 품으니 천의가 없으리란 말이냐! 누구 없느냐? 이 역신을 끌어내는 놈이 없단 말이냐!” 하는 왕의 두 눈에서는 원통한 눈물이 흘렀다. (368-369쪽)

슬픈 일, 괴로운 일이 끊일 새 없이 뒤대어 오는 이 인생에서는 한 가지 슬픔이나 분함을 오래 가지고 가기도 어려운 일이다. 새로운 슬픔과 분함이 들어와서는 낡은 그것들을 아주 잊어버리게 할 지경은 아니라 하더라도 기운이 약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그렇지만 한번 민심에 깊이 박혔던 슬픔이나 분함은 결코 영영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니다. 언제까지라도, 마치 생나무에 난 생채기와 같이 세월이 갈수록 껍질은 비록 성한 것처럼 되더라도 속으로는 더욱 언저리가 커가고 깊어 가는 것이다. (519쪽)


목차

편저자의 말
작가의 말

세종대왕, 문종대왕의 유언
나라를 잃다
충신들의 죽음
단종대왕, 죽음으로 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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