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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89171254 / 536쪽 148 x 2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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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출판사 리뷰

저자 소개

이광수(1892∼1950)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춘원(春園) 이광수는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다. 아명은 보경(寶鏡)이고, 작가이자 문학평론가, 사상가이자 기자, 논객으로 활동하며 고주(孤舟), 외배, 올보리, 장백산인(長白山人), 춘원생, Y생 등의 필명을 썼다.
이광수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1905년 일진회(一進會) 유학생으로 도일해 일본 와세다 대학 문학과와 철학과에서 수학하면서 신학문을 접하게 된다. 홍명희·최남선 등과 교류하고 톨스토이·바이런 등의 외국 사상가의 저서를 읽으면서 세계를 향해 시야를 넓혀 가던 이 시절은 그가 한국 근대문학의 기틀을 닦는 사상적 자양분을 마음껏 흡수할 수 있던 시기였다. 이때 발표한 <문학이란 하오>는 한국 근대문학의 범주와 방향을 제시한 본격적인 근대문학론이라 할 수 있다. 이광수는 1909년 첫 작품 <사랑인가>를 발표한 이후 <어린 벗에게>, <윤광호>, <소년의 비애> 등의 소설을 통해 자유연애를 옹호하고 기성의 도덕을 부정하는 진보적 사상을 고취했다. 특히 1919년 학비 보조를 위해 ≪매일신보≫에 연재하기 시작한 ≪무정≫은 계몽주의적 자유연애론과 근대적 자아의 각성 문제를 다룸으로써 인습에 반기를 들고 신문명의 기치를 든 청년들의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 냈다.
소설뿐 아니라 시와 논설, 평론 등을 발표해 사상가로서 초석을 닦고 있던 이광수는 이미 재일 유학생 사회에서 저명인사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존재였다. 이에 따라 그는 자연스럽게 유학생 활동에 앞장서면서 1919년 ‘2·8독립선언서’의 초안을 작성하는 일을 맡게 된다. 이후 상하이로 탈출해 그곳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주간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여기서 그는 도산 안창호를 만나고 그의 사상에 깊이 감화되어 그를 ‘아비’로 칭하고 평생에 걸쳐 존경심을 표한다.
1921년 귀국한 즉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지만 춘원의 후원자인 아베 요시이에(阿部充家)의 도움을 받아 불기소처분을 받아 풀려난 뒤로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지낸다. 1921년 ≪개벽≫에 조선 민족의 민족성을 개조하자는 내용을 골조로 하는 <민족 개조론>을 연재해 조선 사회에 엄청난 반향과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춘원의 집과 개벽사가 습격당할 만큼 거센 반발이 있었지만 그의 입장에서 이 논설은 돌출되거나 변질된 사상이 아니라 그가 일관되게 주장해 온 민족 개조론과 실력 양성론을 실천적으로 구체화한 글이라 할 수 있다.
1924년 ≪동아일보≫에 발표한 소설 ≪재생≫은 문학사적 의의 외에도 이광수가 본명을 사용한 첫 소설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 작품이다. 이를 계기로 춘원은 10여 년간 가장 왕성한 문학 활동을 펼치면서 문단의 중심에 서게 되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그는 순문예지 ≪조선 문단≫의 주재로 활동했고, ≪혁명가의 아내≫, ≪사랑의 다각형≫, ≪삼봉이네 집≫에 이르는 ≪군상≫ 3부작과 역사소설 ≪단종애사≫, ≪마의태자≫ 등의 작품을 발표했을 뿐 아니라 ≪흙≫(1932), ≪유정≫(1933) 등의 대표작을 남겼다. 특히 ≪흙≫은 그가 조직한 흥사단의 국내판 수양동우회와 ≪동아일보≫ 편집국장 신분으로 전개한 ‘브나로드 운동’의 방편으로 쓰인 농촌계몽소설이다. 1938년에 발표한 전작 소설 ≪사랑≫에는 아들의 죽음, 도산의 죽음, 수감 생활로 이어지는 일련의 고통스러운 사건을 거친 후 종교적 세계에 안주하려는 춘원의 현실 초극 의식이 잘 드러나 있다.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은 이광수에게 변절의 오명을 덧씌운 결정적 계기가 되는데, 이 사건 이후 그는 “천만 동포를 천황의 독자로 만드는 데 여생을 바치겠다”는 맹세에 따라 친일 행각에 앞장섰기 때문이다. 그는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로 창씨개명을 하고, 황국 위문 작가단을 결성하고, 친일 단체인 조선문인협회 초대 회장으로 앞장서 내선일체 구현을 강조하는 일본어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후에 이 모든 행위가 조선 민족을 보호하기 위한 타협책이었다고 변명하기도 했으나 광복 후 반민특위에 의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러나 이때 이미 폐병과 결핵으로 온몸이 만신창이 상태였던 이광수는 아들의 탄원 덕분에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불행히도 1950년 납북된 후 그의 마지막 모습은 확인할 수 없으나, 평양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자강도 고개동에서 사망, 모처에 매장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광수의 삶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해방에 이르는 역사의 파고 가운데 민족의 운명과 더불어 부침을 겪었다. 그는 문사(文士)이자 지사(志士)로 공론의 장에 참여해 목소리를 높이면서 역사 속으로 자신의 삶을 투항했다. 비록 친일의 낙인이 찍힌 ‘흠 많은’ 우리 문학의 아버지일지언정, 이광수의 삶과 문학에는 우리 근대사의 공과가 그대로 새겨져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책 속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동시에 잃은 어린 고아는 이듬해 1903년 생애 처음으로 그 지역 동학의 두령 박대령의 집에 기거하며 동학과 관련된 일을 거든다. 하는 일은 주로 일본 헌병들의 눈을 피해 깊은 산속 깊숙이 숨어 활동하는 동학도들에게 비밀문서를 전달하는 연락병이었다고 하는데, 동학과 관련하여 이런 식으로 세상 공부를 시작한 것이 그에게는 훗날 두고두고 큰 도움이 되었다. 동학으로 인하여 처음 세상에 눈을 떴고, 동학의 품에 안주할 수 없어서 서울로 떠났고, 서울에서 천도교 장학생으로 뽑혀 일본 유학을 갔고, 일본에 가서 손병희를 만났고, 그로부터 오늘날 이광수로 성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05년 그가 정주 산골 고향을 떠나 서울로 간 것은 당시 동학에 대한 일제 헌병들의 탄압과 감시를 피해서였다. 당시 서울은 을사조약을 맺어 일본의 내침이 본격화되는가 하면, 문화적으로는 근대화의 물결이 요동치는 시기였다. 이광수의 상경은 서울의 근대화 물결에 휩쓸리는 충격 그 자체였다. 그는 마침내 머리를 깎고 양복을 입고 일본어를 배워 천도교가 주관하는 일본 유학생으로 뽑힌다.
1907년 그는 마침내 일본의 메이지 학원 보통부에 편입한다. 고아 출신인 춘원으로서는 이것이 생애 최초로 받은 정식 제도 교육이고, 신식 교육이었다. 메이지 학원은 서양 선교사들이 세운 미션 스쿨로 이광수가 이 학교에 입학한 것은 근대화의 심장부인 일본 동경에서 정식으로 기독교를 접하고, 영어와 만나고, 서양 학문에 눈을 떴다는 사실이다. 톨스토이 작품을 읽고 좋아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고, 문학에 처음 눈을 뜬 것도 이때였다고 한다.
-12~13쪽
노파와 형식이 하도 간절히 권하므로 영채도 눈물을 거두고 일어앉아 빙수를 마시고 배를 먹는다. 눈물에 붉게 된 눈과 두 뺨이 더 애처롭고 아리땁게 보인다. 형식은 얼른 선형을 생각하였다. 얼굴의 아름다움이나 그 부모의 귀여워함은 피차에 다름이 없건마는 현재 두 사람의 팔자는 왜 이다지도 다른고. 하나는 부모 갖고, 집 있고, 재산 있어 편안하게 학교에도 다니고, 명년에는 미국까지 간다 하는데, 하나는 부모도 없고, 형제도 없고, 집도 없고, 어디 의지할 곳이 없이 밤낮을 눈물로 보내는고. 만일 선형으로 하여금 이 영채의 신세를 보게 하면 단정코 자기와는 딴 나라 사람으로 알렷다. 즉, 자기는 결단코 영채와 같이 되지 못할 사람이요, 영채는 결단코 자기와 같이 되지 못할 사람으로 알렷다. 또는 자기는 특별히 하늘의 복과 은혜를 받는 사람이요, 영채는 특별히 하늘의 앙화와 형벌을 받는 사람으로 알렷다. 그러하므로 부자가 가난한 자를 압시하고 천대하여 가난한 자는 능히 자기네와 마주 서지 못할 사람으로 여기고, 길가에 굶어 떠는 거지들을 볼 때에 소위 제 것으로 사는 자들이 개나 도야지와 같이 천대하고 기롱하여 침을 뱉고 발길로 차는 것이라. 그러나 부자 조상 아니 둔 거지가 어디 있으며, 거지 조상 아니 둔 부자가 어디 있으리오. 저 부귀한 자를 보매 자기네는 천지개벽 이래로 부귀하여 천지가 없어질 때까지 부귀할 듯하나, 그네의 조상이 일찍 거지로 다른 부자의 대문에서 그 집 개로 더불어 식은 밥을 다툰 적이 있었고, 또 얼마 못 하여 그네의 자손도 장차 그리될 날이 있을 것이라. 칠팔 년 전 박 진사를 보고야 뉘라서 그의 딸이 칠팔 년 후에 이러한 신세가 될 줄을 짐작하였으랴.
다 같은 사람으로 부하면 얼마나 더 부하며, 귀하다면 얼마나 더 귀하랴. 조고마한 돌 위에 올라서서 다른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이놈들, 나는 너희보다 높은 사람이로다.’ 함과 같으니, 제가 높으면 얼마나 높으랴. 또 지금 제가 올라선 돌은 어제 다른 사람이 올라섰던 돌이요, 내일 또 다른 사람이 올라설 돌이다. 거지에게 식은 밥 한술을 줌은 후일 네 자손으로 하여금 내 자손에게 그렇게 하여 달라는 뜻이 아니며, 그와 반대로 지금 어떤 거지를 박대하고 기롱함은 후일 네 자손으로 하여금 내 자손에게 이렇게 하여 달라 함이 아닐까. 모르괘라, 얼마 후에 영채가 어떻게 부귀한 몸이 되고, 선형이가 어떻게 빈천한 몸이 될는지도. 이렇게 생각하면서 형식은 입을 열어,
“서로 떠난 후에 지내던 말을 하여 주십시오.” 하였다.
-45~46쪽


차가 남대문에 닿았다. 아직 다 어둡지는 아니하였으나 사방에 반작반작 전기등이 켜졌다. 전차 소리, 인력거 소리, 이 모든 소리를 합한 ‘도회의 소리’와 넓은 플랫폼에 울리는 나막신 소리가 합하여 지금까지 고요한 자연 속에 있던 사람의 귀에는 퍽 소요하게 들린다. ‘도회의 소리!’ 그러나 그것이 ‘문명의 소리’다. 그 소리가 요란할수록에 그 나라가 잘된다. 수레바퀴 소리, 증기와 전기 기관 소리, 쇠마치 소리…… 이러한 모든 소리가 합하여서 비로소 찬란한 문명을 낳는다. 실로 현대의 문명은 소리의 문명이라. 서울도 아직 소리가 부족하다. 종로나 남대문통에 서서 서로 말소리가 아니 들리리만큼 문명의 소리가 요란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불쌍하다. 서울 장안에 사는 삼십여 만 흰옷 입은 사람들은 이 소리의 뜻을 모른다. 또 이 소리와는 상관이 없다. 그네는 이 소리를 들을 줄을 알고, 듣고 기뻐할 줄을 알고, 마침내 제 손으로 이 소리를 내도록 되어야 한다. 저 플랫폼에 분주히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 중에 몇 사람이나 이 분주한 뜻을 아는지, 왜 저 전등이 저렇게 많이 켜지며, 왜 저 전보 기계와 전화 기계가 저렇게 불분주야하고 때각거리며, 왜 저 흉물스러운 기차와 전차가 주야로 달아나는지…… 이 뜻을 아는 사람이 몇몇이나 되는가.
이렇게 북적북적하는 속에 영채는 행여나 누가 자기의 얼굴을 볼까 하여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앉았다. 병욱은 혹 자기의 동창 친구나 만날까 하고 플랫폼에 내려서 이리저리 거닐다가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도로 차실로 들어오려 할 적에 누가 어깨를 치며,
“병욱 언니 아니야요?” 한다.
병욱은 놀라 돌아서며 자기보다 이태를 떨어졌던 동창생을 보았다.
“에그, 얼마 만이어!”
“그런데 어디로 가오?”
“지금 동경으로 가는 길인데…….”
“왜, 어느새에…… 여보, 그런데 좀 만나 보고나 가는 것이 아니라 …… 그렇게 무정하오.” 하고 썩 돌아서더니, “아무려나 내립시오. 우리 집으로 갑시다.” 한다.
“아니오. 동행이 있어서…… 그런데 누구 작별 나왔소?”
“응, 아니, 언니 모르셔요?”
“무엇을?”
“에그, 저런! 저 선형이 알지요, 선형이가 오늘 미국 떠난다오.”
“선형이가 미국?” 하고 놀란다. 그 여학생은 저편 이등실 앞에 사람들이 모여 선 것을 가리키며,
“저기 탔는데…… 이번에 혼인해 가지고 양주가 미국 공부하러 간다오. 잘들 한다. 다 미국을 가느니 일본을 가느니 하는데 나 혼자 이렇게 썩는구먼!”
-412~413쪽

『사씨남정기』 · 『치악산』 · 『무정』

그렇다면 ‘이형식 ─ 박영채 ═ 박진사’의 관계는 어떠한가.
다시 도표를 보면, 이형식은 앞서 김선형에게 열세이던 것과 대조적으로 박영채 앞에서는 심리적으로 우월하다. 그러나 앞서 ‘이형식 ― 김선형’ 사이의 우열이 그들의 현 위상에 비추어 생긴 것과 달리, ‘이형식 ― 박영채’ 사이의 우열은 그들의 과거 위상에 비추어 생긴 결과였다.
지난날 어린 시절 이형식은 박영채 앞에서 심리적으로 대등하거나 우월했었다. 최소한 두 사람이 구두로나마 결혼을 약속할 때까지는 그랬다. 그런데 미래를 선택해야 할 현 시점에서는 입장이 달라졌다. 현 시점에서 볼 때 ‘이형식 ― 김선형’이 미래 지향적이라면 ‘이형식 ― 박영채’는 과거 회고적인 관계가 되고 말았다.
이형식이 미래 지향적이냐, 과거 회고적이냐는 전적으로 이 소설의 태도를 결정하는 중대한 문제였다. 그것은 결국 박영채와의 민족 동질성이냐, 김선형과의 문화 이질성이냐, 그 가운데 어느 쪽이 우선인지를 선택하는 문제로써, 말하자면 과거의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미래의 서구식 개화를 열어 가자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큰 제목 ‘무정’이 무엇에 대한 ‘무정함’인가를 물었을 때 그것은 박영채에 대한 이형식의 무정함이 확실하다. 과거의 동질성을 청산하고, 이질적이나마 다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선택하고자 할 때 냉정할 수밖에 없지만, 동시에 옛것에 대한 향수와 동정도 뿌리칠 수는 없었다. 무정하게도 박영채에 대한 향수와 동정을 뿌리치지 않을 수 없다는 의미이다.
박영채는 그러고 보면 이형식의 결혼 상대로서는 처음부터 버려질 운명임에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버림받은 이 운명의 카드를 『무정』은 어떻게 활용하였는가. 그것이 ‘이형식 ― 박영채 ═ 박 진사’의 관계를 검토하려는 이유이다.
-516~517쪽

목차

책머리에 \t
춘원 이광수

무정

작품 해설
줄거리
『무정』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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