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수(1892∼1950)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춘원(春園) 이광수는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다. 아명은 보경(寶鏡)이고, 작가이자 문학평론가, 사상가이자 기자, 논객으로 활동하며 고주(孤舟), 외배, 올보리, 장백산인(長白山人), 춘원생, Y생 등의 필명을 썼다.
이광수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1905년 일진회(一進會) 유학생으로 도일해 일본 와세다 대학 문학과와 철학과에서 수학하면서 신학문을 접하게 된다. 홍명희·최남선 등과 교류하고 톨스토이·바이런 등의 외국 사상가의 저서를 읽으면서 세계를 향해 시야를 넓혀 가던 이 시절은 그가 한국 근대문학의 기틀을 닦는 사상적 자양분을 마음껏 흡수할 수 있던 시기였다. 이때 발표한 <문학이란 하오>는 한국 근대문학의 범주와 방향을 제시한 본격적인 근대문학론이라 할 수 있다. 이광수는 1909년 첫 작품 <사랑인가>를 발표한 이후 <어린 벗에게>, <윤광호>, <소년의 비애> 등의 소설을 통해 자유연애를 옹호하고 기성의 도덕을 부정하는 진보적 사상을 고취했다. 특히 1919년 학비 보조를 위해 ≪매일신보≫에 연재하기 시작한 ≪무정≫은 계몽주의적 자유연애론과 근대적 자아의 각성 문제를 다룸으로써 인습에 반기를 들고 신문명의 기치를 든 청년들의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 냈다.
소설뿐 아니라 시와 논설, 평론 등을 발표해 사상가로서 초석을 닦고 있던 이광수는 이미 재일 유학생 사회에서 저명인사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존재였다. 이에 따라 그는 자연스럽게 유학생 활동에 앞장서면서 1919년 ‘2·8독립선언서’의 초안을 작성하는 일을 맡게 된다. 이후 상하이로 탈출해 그곳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주간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여기서 그는 도산 안창호를 만나고 그의 사상에 깊이 감화되어 그를 ‘아비’로 칭하고 평생에 걸쳐 존경심을 표한다.
1921년 귀국한 즉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지만 춘원의 후원자인 아베 요시이에(阿部充家)의 도움을 받아 불기소처분을 받아 풀려난 뒤로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지낸다. 1921년 ≪개벽≫에 조선 민족의 민족성을 개조하자는 내용을 골조로 하는 <민족 개조론>을 연재해 조선 사회에 엄청난 반향과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춘원의 집과 개벽사가 습격당할 만큼 거센 반발이 있었지만 그의 입장에서 이 논설은 돌출되거나 변질된 사상이 아니라 그가 일관되게 주장해 온 민족 개조론과 실력 양성론을 실천적으로 구체화한 글이라 할 수 있다.
1924년 ≪동아일보≫에 발표한 소설 ≪재생≫은 문학사적 의의 외에도 이광수가 본명을 사용한 첫 소설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 작품이다. 이를 계기로 춘원은 10여 년간 가장 왕성한 문학 활동을 펼치면서 문단의 중심에 서게 되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그는 순문예지 ≪조선 문단≫의 주재로 활동했고, ≪혁명가의 아내≫, ≪사랑의 다각형≫, ≪삼봉이네 집≫에 이르는 ≪군상≫ 3부작과 역사소설 ≪단종애사≫, ≪마의태자≫ 등의 작품을 발표했을 뿐 아니라 ≪흙≫(1932), ≪유정≫(1933) 등의 대표작을 남겼다. 특히 ≪흙≫은 그가 조직한 흥사단의 국내판 수양동우회와 ≪동아일보≫ 편집국장 신분으로 전개한 ‘브나로드 운동’의 방편으로 쓰인 농촌계몽소설이다. 1938년에 발표한 전작 소설 ≪사랑≫에는 아들의 죽음, 도산의 죽음, 수감 생활로 이어지는 일련의 고통스러운 사건을 거친 후 종교적 세계에 안주하려는 춘원의 현실 초극 의식이 잘 드러나 있다.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은 이광수에게 변절의 오명을 덧씌운 결정적 계기가 되는데, 이 사건 이후 그는 “천만 동포를 천황의 독자로 만드는 데 여생을 바치겠다”는 맹세에 따라 친일 행각에 앞장섰기 때문이다. 그는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로 창씨개명을 하고, 황국 위문 작가단을 결성하고, 친일 단체인 조선문인협회 초대 회장으로 앞장서 내선일체 구현을 강조하는 일본어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후에 이 모든 행위가 조선 민족을 보호하기 위한 타협책이었다고 변명하기도 했으나 광복 후 반민특위에 의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러나 이때 이미 폐병과 결핵으로 온몸이 만신창이 상태였던 이광수는 아들의 탄원 덕분에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불행히도 1950년 납북된 후 그의 마지막 모습은 확인할 수 없으나, 평양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자강도 고개동에서 사망, 모처에 매장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광수의 삶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해방에 이르는 역사의 파고 가운데 민족의 운명과 더불어 부침을 겪었다. 그는 문사(文士)이자 지사(志士)로 공론의 장에 참여해 목소리를 높이면서 역사 속으로 자신의 삶을 투항했다. 비록 친일의 낙인이 찍힌 ‘흠 많은’ 우리 문학의 아버지일지언정, 이광수의 삶과 문학에는 우리 근대사의 공과가 그대로 새겨져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1879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났다. 자는 정옥, 속명은 유천이며, 득도 때의 계명은 봉완, 법명은 용운, 법호는 만해이다. 19세에 출가하여 강원도 인제 백담사에서 김연곡사에게서 득도했다.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을 주도했으며, 최남선이 작성한 '독립선언서'의 자구를 수정하고 공약삼장을 첨가했다.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발표했고, 그 후 「조선일보」, 「동아일보」, 「불교」지에 작품을 발표하며, 작품활동과 불교 혁신운동을 계속했다. 민족의 해방을 한 해 남긴 1944년 심우장에서 입적했다. 지은 책으로 <정선강의채근담>, <님의 침묵>, <조선불교유신론>, <십현담주해>, <불교대전>, <흑풍>, <박명> 등이 있다.
지금의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에서 신광식(申光植)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호는 일편단생(一片丹生), 단생(丹生), 단재(丹齋), 금협산인(錦頰山人), 무애생(無涯生) 등이다. 충북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그는 조부에게 한학을 배웠는데, 13세에 사서삼경을 모두 읽어 신동으로 불렸고, 19세에 성균관에 입학해서 1905년 성균관 박사가 된다. 같은 해 장지연(張志淵)이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을 쓰고 투옥되자, 그의 뒤를 이어서 논설위원으로 활동한다. 이듬해 ≪대한매일신보≫의 주필이 되었고, ≪이태리 건국 삼걸전≫을 광학서포에서 발행한다. 1907년 신채호는 비밀결사 단체 신민회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앞장선다.
1908년 신채호는 여성 계몽 잡지 ≪가정잡지≫의 발행인이 됐고, 같은 해 ≪대한매일신보≫에 5월부터 8월까지 <수군 제일 위인 이순신전>을 연재한다. 5월에는 ≪을지문덕≫을 광학서포에서 발행했고 다음해 ≪동국거걸 최도통전≫을 출간했다.
1910년 한일합방 후, 신채호는 안창호(安昌浩), 이갑(李甲) 등과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 독립사상의 전파를 위해 ≪해조신문≫을 발간한다.
1914년에 ≪조선사≫의 저술을 시작한 신채호는 만주를 여행하면서 광개토왕 왕릉 등 고구려 고적을 답사한다. 다음해 북경 도서관에서 ≪조선상고사≫의 집필을 위한 연구 자료를 수집한다. 또 박은식(朴殷植), 문일평(文一平) 등과 박달학원을 설립한다.
1919년 신채호는 임시정부 전원위원회 위원장으로, 비밀결사 대동청년단 단장으로 추대된다. 같은 해 ≪신대한≫의 주필로 독립운동에 많은 영향을 주는 글을 썼고 대한 독립청년단 단장, 신대한동맹단의 부단주가 된다. 다음해, 보합단(普合團)의 내임장으로 추대된 그는 독립군 자금을 모집한다.
1921년 북경에서 김정묵(金正默), 박봉래(朴鳳來)등과 통일책진회(統一策進會)를 만들어 <통일책진회 발기 취지서>를 발표한다. 다음해 북경에서 조선 역사를 연구해 ≪조선상고사≫, ≪조선상고문화사≫, ≪조선사연구초≫를 저술한다. 그리고 1923년 의열단(義烈團)의 요청으로 <조선혁명선언>을 만들었고, 국민대표자회의에 참석해 임시정부의 창조파로 활약한다. 다음해 관음사(觀音寺)에서 역사 연구에 몰두한다.
1925년에는 1월부터 10월까지 ≪동아일보≫에 ≪조선사연구초≫를 연재하면서, 무정부주의에 관심을 갖게 된 그는 미발표 작품인 <전후 삼한고>를 쓴다.
1928년 대만의 무정부주의 비밀결사 사건에 연루된 신채호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0년 형을 받아 뤼순 감옥에서 복역한다. 다음해 ≪조선사연구초≫가 동지들에 의해 서울에서 출판된다.
1931년에 그는 ≪조선일보≫에 6월부터 10월까지 <조선사>를 연재했고, 10월부터 12월까지 <조선상고문화사>를 연재한다.
1936년 2월, 신채호의 나이 57세, 뤼순 감옥에서 뇌일혈로 의식을 잃은 후, 유언도 남기지 못하고 타국 땅에서 옥사한다.
1945년에는 신채호학사가 설립되었고, 다음해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던 <조선사>의 서문을 ≪조선사론≫으로 표제하여 광한서림에서 출판한다. 1948년 ≪조선상고사≫를 종로서원에서 발행했고, 1955년 단재유고출판회에서 ≪을지문덕≫을 순 한글로 번역 출판한다.
1962년 신채호에게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이 수여되었다. 그리고 2007년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 ≪단재 신채호 전집≫이 발행되었다.
조선 말기의 정치가. 개화파의 수장으로 갑신정변을 주도했다. 정변이 실패하자일본에 망명 후 청나라로 건너갔다가 자객 홍종우에게 암살됐다.
저서 : <원문 사료로 읽는 한국 근대사>, <갑신정변 회고록>, <아침기도> 등
*1875년 황해도에서 출생
*1896년 협성회,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등 민족운동 참여
*1898년 매일신문, 제국신문 등을 통한 국민계몽운동 전개
*1899년 고종 폐위음모로 체포되어 수감
*1904년 특별사면으로 출옥하여 미국 행
*1905년 조지워싱턴대학, 하버드대학, 프린스턴대학에서 수학
*1919년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에서 임시 대통령 피선
*1933년 한국대표로 제네바 군축회의에 참석
*1941년 <Japan Inside Out> 집필
*1944년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임정승인 요청
*1948년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
*1965년 소천, 국립묘지 안장
본관은 대구이며, 호는 송재松齋이다.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이라는 미국 이름을 가지고 있는 서재필은 1882년 과거에 합격한 뒤 개화당 인사들과 교류하여, 1884년 갑신정변에 가담하였다가 실패하자 일본을 거쳐 1885년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펜실베니아주 해리 힐맨 아카데미를 마치고 1893년 컬럼비아 의과대학(현 조지 워싱턴 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여 의사가 되었다. 1890년 미국 시민권을 얻었으며, 1894년 뮤리엘 암스트롱Muriel Amstrong과 결혼하였다. 1895년 말 귀국하여, 1896년 <독립신문>을 창간하였고, 독립협회의 결성과 독립문의 건립을 주도하였으며, 배재학당의 협성회를 지도하였다. 1898년 미국으로 돌아간 뒤 인쇄 및 문구사업에 종사하다가 3ㆍ1운동 이후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필라델피아에 한국통신부를 설립하고 Korea Review를 발간하였으며, 한국친우회를 결성하였다. 1921년에는 구미위원부 임시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22년부터 국내와 미주의 한국언론에 논설을 기고하였으며, 병원을 개업하기도 하였다. 1947년 7월 미군정의 초청으로 귀국하여 미군정 최고고문 및 남조선 과도정부 특별의정관으로 활동하였고, 정부 수립 후 미국으로 돌아가 여생을 마쳤다. 1977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고, 1994년 유해가 봉환되어 서울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한국의 개화와 독립, 정부수립에 기여하였다.
호는 인경려주인人境廬主人이며, 광동廣東 출신. 초대 주일공사 하여장을 수행하여 일본에서 활동. 당시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대한 대책으로는 한 ·중 ·일 3국이 협력하여 미국과 연합세력을 구축하는 것이 최선책이라고 주장했으며, 조선 통신사 김홍집과 만나 국제관계에 대한 의견을 교환한 뒤, 《조선책략朝鮮策略》을 제공함. 총 11권에 1천여 편의 시를 수록한 《인경려시초(人境廬詩草)》를 남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