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톤 체호프(Антон Павлович Чехов, 1860~1904)는 러시아 남부 아조프 해에 있는 항구도시 타간로크(Таганрог)에서 태어났다. 체호프가 열여섯 되던 해인, 1876년 그의 아버지는 파산했다. 파벨은 세간을 정리하고 모스크바로 이사했다. 그러나 체호프는 타간로크 중학교를 마쳐야 했기 때문에 홀로 고향에 남았다. 아버지가 돈을 보내 주지 않자 그는 돈을 벌어 스스로 생계를 꾸리고 나아가 가정교사 생활을 하면서 가족을 도와야 했다. 소년 체호프에게 이것은 혹독한 시련이었다. 그러나 이 경험은 체호프가 인간의 특성을 파악할 수 있게 해 주었으며, 이후 이러한 특성들은 예술적 이미지, 예술적 사실(작품)로 이어졌다. 여기서 소개하고 있는 <어수룩한 사람>과 <가정교사>는 이때의 경험이 녹아들어 있는 작품이다.
체호프의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면 한눈에 보기에도 참 어려운 시기였다. 명문가와는 거리가 먼 집안 내력에 경제적 어려움까지 겹쳤다. 어린 나이에 학교 공부와 집안을 돌보는 일까지 도맡아 해야 했다. 그러한 상황은 대학에 진학하고도 별반 달라질 것이 없었다. 1879년 체호프는 모스크바로 이주해 모스크바대학 의학부에 입학했다. 동시에 생활비를 벌기 위해 당시 유행하던 유머 잡지에 글을 싣기 시작했다. 물론 체호프의 문학적 재능은 타간로크 중학교에 다니던 시기부터 나타났다. 그러나 독자들과 폭넓은 관계를 만들어 내면서 체호프가 가진 작가적 역량을 발현하는 것은 대학에 진학한 이후로 보는 것이 옳다.
1880년 3월 페테르부르크의 주간지에 <박식한 이웃에 보내는 편지(Письмо к ученому соседу)>가 게재되었다. 오만한 어투를 활용한 서간체를 빌려 시골 지주의 교양 없는 상태를 풍자한 이 짧은 작품이 체호프가 지면을 통해 발표한 최초의 작품으로 간주된다. 그 후 체호프는 여러 필명을 이용해 패러디적 성향이 짙은 작품이나 소품을 대중 잡지에 실으면서 인기 있는 유머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가장 즐겨 사용한 필명인 안토샤 체혼테(Антоша Чехонте)에 근거해 이 시기를 ‘체혼테 시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1년에 100편이 넘는 작품을 쏟아 내는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면서도 <관리의 죽음(Смерть чиновника)>(1883), <뚱뚱이와 홀쭉이(Толстой и Тонкий)>(1883), <카멜레온(Хамелеон)>(1884) 등 지금도 회자되고 즐겨 읽히는 뛰어난 작품을 양산했다.
1884년 대학을 졸업한 후 체호프는 모스크바 근교에 병원을 개업해 시골 마을이나 소도시에 왕진을 다녔다. 그러면서도 젊고 유명한 예술가들 및 문학가들과 친교를 맺었다. 그는 개업의로 열심히 일하는 와중에 계속해서 많은 작품을 집필했다. 1884년 그의 첫 단편집이, 1886년에는 그의 두 번째 단편집이 출간되었다. 이 두 작품집은 작가로서 체호프의 명성을 높여 주었다. 체호프는 의사의 길을 접고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선다. 그러나 의과대학 공부와 개업의 활동, 여기에 지칠 줄 모르는 창작 활동이 겹치면서 폐결핵의 징후를 보인다. 정신착란이 고골의 평생 지병이었고, 신장결석이 투르게네프의 평생 지병이었으며, 간질이 도스토옙스키를 평생 따라다녔다면, 폐결핵은 체호프의 평생 지병이 된다.
1890년, 마차와 배를 이용해 시베리아를 통과해서 3개월간의 힘든 노정 끝에 사할린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할린 섬의 역사와 지리를 공부하고, 죄수들의 일상을 3개월여에 걸쳐 조사한 다음, 그해 10월 인도, 싱가포르, 스리랑카, 콘스탄티노플, 오데사를 거쳐 12월에 모스크바로 귀환했다. 무려 8개월간에 걸친 길고 긴 여행의 성과는 인상기 ≪시베리아 여행(Из Сибири)≫(1890)과 조사 보고서 ≪사할린 섬(Остров Сахалин)≫(1893)으로 남아 있다.
귀국 후, 1892년에 체호프는 모스크바 근교 멜리호보의 영지를 사들였다. 그곳에서 1897년까지 머문 ‘멜리호보 시대’는 건강을 회복하고 왕성한 작품 활동에 매진하던 시기였다. 1892년 6월 콜레라가 창궐하자 체호프는 톨스토이 등과 함께 구호 활동을 벌였다. 의사로서 봉사했으며 기아의 구원과 학교의 설립에 힘을 기울이는 등 사회 활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들로는 <다락방이 있는 집(Дом с мезонином)>(1895), <3년(Три года)>(1895), <나의 인생(Моя жизнь)>(1896), <농부들(Мужики)>(1897) 등을 꼽을 수 있다. 인간 생활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면서도, 등장인물의 행위와 사고를 보다 넓은 시야에서 밝히려는 자세가 두드러진다는 평가다.
체호프는 1897년 3월에 폐결핵이 악화되어 객혈을 하게 된다. 크림반도의 얄타로 거처를 옮겨 요양 생활을 시작한다. 얄타에서 고리키(М. Горьки, 1868~1936)나 부닌(И. А. Бунин, 1879~1953) 등 신진 작가들과 만남을 가졌으며, 톨스토이의 병문안을 받았다. 이러한 요양 생활의 와중에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Дама с собачкой)>(1899) 등의 소설을 내놓았다. 그러나 체호프의 말년을 대표하는 장르는 희곡이었다. ≪갈매기(Чайка)≫(1898), ≪바냐 아저씨(Дядя Ваня)≫(1900), ≪세 자매(Три сестры)≫(1900), ≪벚꽃 동산(Вишнёвый сад)≫(1903) 등이 모스크바예술극장에서 공연되어 관객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말년에 불후의 희곡 작품을 남겨 놓고, 체호프는 1904년 당시 유명한 요양지였던 독일의 바덴바덴에서 폐결핵이 악화되어 숨을 거두었다. 그의 시신은 러시아로 옮겨져 노보데비치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레오니트 니콜라예비치 안드레예프는 1871년 8월 21일, 율리우스력으로는 8월 9일에 러시아 오룔에서 태어났다. 지독히도 가난한 유년기를 보낸 안드레예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국립대학교 법학부에 입학했으나 비싼 수업료를 낼 형편이 못 되어 제적당하고 만다. 이후 모스크바국립대학교 법학부로 옮겨 가 공부를 계속했으며, 마침내는 변호사가 될 수 있었다. 그 후 안드레예프는 신문과 잡지의 법률 담당 통신원으로 일하게 되었고, 이 시절에 자신의 첫 작품을 발표하게 된다. 그 누구보다도 먼저 안드레예프의 재능을 알아본 막심 고리키는 그를 전폭적으로 지지했으며, 이로써 안드레예프는 문학그룹인 지식파(派)에 가입할 수가 있었다. 이후 작품 ≪침묵≫(1901)으로 안드레예프의 등단이 이루어지게 된다. 1901년에 출판된 첫 단편집에 실렸던 단편소설 <옛날 옛적에>가 대중들의 큰 관심을 모은 것을 시작으로 많은 작품들을 발표하게 되는데, 1902년에 발표한 <심연>, <안개 속에서>와 같은 작품들은 대담한 성(性)의 묘사로 인해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러한 사람들의 논쟁 속에서도 안드레예프는 이후 자신만의 독특하면서도 재능이 넘치는 여러 작품들을 발표하며 부와 명성을 쌓아 나가게 된다. 안드레예프가 극작가로서 이루어 낸 가장 큰 업적이라고 볼 수 있는 범심론이 그의 희곡들 속에서 발전해 나간 것은 1890년대에서 1900년대 사이의 일이다. 그러나 안드레예프가 의식적으로 자신이 정립한 문학 이론으로서의 범심론을 완성해 가고 도입했던 것은 1910년대의 일로, 이 시기에 집필된 희곡들로는 <예카테리나 이바노브나>, <스토리친 교수>, <생각>, <따귀 맞는 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범심론 완숙기의 작품이라 할 수 있는 <개의 왈츠>가 있다. 정치적 바람에 휩쓸리지 않고 자유로운 문학 활동만을 꿈꾸었던 안드레예프는 볼셰비키가 정권을 차지하게 되었을 때 고국을 등지고 핀란드로 떠나게 된다. 그리고 1919년 9월 12일 핀란드의 한 시골 마을에서 뇌출혈로 쓰러져 열정으로 가득 찼던,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리 길지는 않았던 자신의 삶을 타향에서 마감하게 된다. 1930년에 판금 작가로 분류된 이후 안드레예프의 작품은 소련에서 절판되었고, 스탈린 사후인 1956년에 들어서야 복권되고 재평가받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의 유해는 고국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고, 레닌그라드(현재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장되어 영원한 휴식을 취하게 되었다.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고골 (Николай Васильевич Гоголь)
우크라이나에 위치한 폴타바의 소로친치 마을에서 1809년 4월 1일 태어났다. 1819년 고골은 폴타바 사립 기숙학교에서 공부하다가, 1821년 네진의 김나지움에 입학해 신학, 고전문학, 독일어, 프랑스어 등을 수학했다. 학창 시절 문학과 연극에 관심을 갖고 학내 문학 서클 편집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학창 시절 고골은 푸슈킨을 너무나 존경한 나머지 ≪예브게니 오네긴≫을 포함한 그의 시를 노트에 옮겨 적기도 했고, 연극에도 관심을 갖고 부친이 썼던 우크라이나 희곡과 프랑스 희곡을 러시아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1828년 11월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바실리예프카 영지에 잠시 머문 후, 공직자가 되겠다는 야망을 품고 홀로 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한 고골은 1829년부터 내무성에서 근무하기 시작했다. 1829년 그는 김나지움 시절부터 쓰기 시작했던 낭만주의풍의 서정시 <이탈리아>와 전원시 <간츠 큐헬가르텐>을 자비로 출판했는데, 비평가들의 혹평을 두려워해 ‘V. 알로프’라는 필명으로 출판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비평가들로부터 구성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과 더불어 혹평을 받았고, 이에 실망한 고골은 1829년 8월 1일 모든 작품을 회수해 직접 소각하고, 6주간 독일의 류벡과 함부르크를 여행하고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왔다.
그해 11월 법무성으로 옮겨 근무하면서 고골은 1830년 <바사브류크 , 혹은 이반 쿠팔라 전야>, <게트만>의 첫 장, 그리고 단편 <여자>를 시인 델비그가 주관하고 있던 ≪문학 신문≫에 기고했다. 이 작품들은 호평을 받았고, 그 결과 고골은 주콥스키와 푸슈킨과 돈독한 친분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는 1831년 관리 생활을 완전히 청산하고 주콥스키의 추천으로 여자 기숙학교 역사 교사로 근무하면서 그해 9월 ≪지칸카 근교 농가의 야회≫ 1부를, 그리고 이듬해 3월에는 2부를 각각 발표했다. 이 작품들은 푸슈킨을 포함한 일부 비평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았고, 이로 인해 고골은 작가로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 작품집의 출간으로 문학적 명성을 획득한 고골은 1834년에 여자 기숙학교의 역사 교사직을 사임하고, 페테르부르크 대학의 역사학과 조교수로 근무했다. (당시 페테르부르크 대학생이었던 투르게네프는 고골의 세계사 강의를 수강했다. 그는 자서전에서 고골의 강의가 형편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듬해 고골은 ≪지칸카 근교 농가의 야회≫의 3부라고도 불리는 ≪미르고로드≫와 ≪아라베스키≫를 발표했다. 전자는 1832년부터 2년에 걸쳐 집필한 작품집인데 <옛 기질의 지주>, <타라스 불바>, <비이>, 그리고 <이반 이바노비치와 이반 니키포로비치가 어떻게 싸웠는가에 관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고골은 ≪미르고로드≫의 제목 밑에 ‘≪지칸카 근교 농가의 야회≫의 속편’이라는 문구를 기입함으로써 네 작품의 주제가 ≪지칸카 근교 농가의 야회≫와 연관성이 있으며, 우크라이나를 근거로 한 낭만성과 환상성을 내포한 작품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아라베스키≫에는 13편의 에세이와 3편의 단편 등 총 16편의 작품이 실려 있다. <조각, 미술과 음악>, <중세 시대에 관해>, <세계사에 관해>, <초상화>, <소러시아의 구성에 대해>, <푸슈킨에 대한 몇 마디>, <오늘 날 건축에 대해>, <알-마문>, <인생>, <쉴로저, 뮬러, 그리고 헤르더>, <네프스키 거리>, <우크라이나의 노래>, <지리에 관한 생각>, <폼페이의 최후>, <5세기 말 인류의 이동에 대해>, <광인 일기> 등이다.
1835년 후반부터 고골은 상상을 초월한 악몽을 다룬 단편 <코>, 주인공의 속물성 자체를 서술 전개 방식으로 사용한 단편 <마차>, 약혼녀와 결혼식을 거행하기로 작정하고 연미복을 주문한 주인공이 결혼을 망설이다가 마지막 순간 창문을 뚫고 탈출하는 희곡 <결혼>(마치 평생을 미혼으로 지낸 고골의 내면세계를 보여 주는 듯한 작품), 그리고 가짜 검찰관의 소동을 다룬 희곡 <검찰관>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1835년 12월 18일 페테르부르크 대학교수직을 사임하고 원고 집필에 매달린 고골은 이듬해 1월 30일 주콥스키의 저택에서 개최된 파티 석상에서 <검찰관> 대본을 낭독했고, 마침내 3월 초고를 완성했다. <검찰관>은 1836년 4월 19일 페테르부르크의 알렉산드르 극장에서 초연됐다.
공연 직후 보수와 진보 진영에서 상반된 견해가 도출되었다. 전자는 분노하며 ‘중상모략을 담고 있는 5막 연극’이라고 혹평했고, 고골을 ‘파렴치함과 냉소가 넘치는 풋내기 러시아인’이라고 폄하했다. 반면에 후자는 이 작품을 러시아 사회와 관료들에 대한 신랄한 풍자로 규정하고, 고골을 혁신적인 작가로 떠받들며 극찬했다. 그리고 1836년 5월 모스크바의 말르이 극장에서 두 번째 상연되었을 때도 대다수 관객들도 폭소를 터뜨리며 갈채를 보냈다.
그러나 작가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단지 고위 관리에 대한 풍자 작품으로 인식하고 웃음으로 일관하는 관객들의 반응에 실망한 고골은 6월 6일 친구 다닐레프스키와 유럽 여행을 떠난다. 그 후 12년(1836~1848) 동안 고골은 외국에서 집필 활동을 하게 된다.
1836년 10월 스위스 베베이에서 고골은 <죽은 혼> 1부를 집필하기 시작했고, 1837년 겨울 프랑스 파리에서 <죽은 혼> 1부의 대부분을 완성했다. 1839년 겨울에 잠시 러시아로 귀환한 고골은 러시아 문단의 친구들 앞에서 <죽은 혼> 1부의 1장을 낭독했다. 1840년 4월에 고골은 ≪모스크바 신문≫에 “자기 마차가 없는 사람들 가운데 나와 함께 빈으로 여행하고자 하는 사람은 연락 바람. 여행 비용 공동 부담”이라는 광고를 싣기도 했다. 스위스를 거쳐 1840년 10월에 로마로 돌아온 고골은 러시아 화가들과 사귀면서 창작 활동을 지속했고, <타라스 불바> 개정판과 단편 <외투>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1841년 <검찰관> 개정판과 <죽은 혼> 1부를 완성했고, 1841년 겨울에는 잠시 러시아를 방문해 <초상화> 개정판을 ≪동시대인≫에 발표했으며, 1842년에는 <결혼>, <도박꾼들>, <검찰관> 개정판, <타라스 불바> 개정판, <외투>, 그리고 <죽은 혼> 1부를 발표했다.
고골은 1843년 초부터 <죽은 혼> 2부를 집필하기 시작했으나 육체뿐 아니라 정신 건강도 악화되어 5월에 치료 목적으로 독일을 방문했고, 이후 유럽 각지를 돌아다녔다.
1845년부터 ‘선과 악’의 문제, 그리고 ‘종교와 윤리’의 문제가 고골을 심리적으로 압박하며 괴롭히기 시작했다. 우울증을 앓기 시작한 고골은 그동안 집필했던 <죽은 혼> 2부를 1845년 7월에 소각했다. 1846년 병세가 심각해지면서 고골은 창작 활동을 거의 중단하게 된다. 이런 와중에 그는 ≪친구들과의 왕복 서한≫이라는 에세이집을 1847년 1월 발표했다.
고골은 1848년 3월 팔레스타인 성지순례를 하고 4월에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그리고 오데사, 바실리예프카 영지, 그리고 수도원 등을 방문하고 10월부터 모스크바에서 <죽은 혼> 2부 집필을 재개했다. 1850년 12월 고골은 주콥스키에게 <죽은 혼> 2부가 거의 완성되었다고 통보했다. 그리고 <죽은 혼> 2부를 계속해서 수정 보완하고 있던 고골은, 1852년 2월 이 작품에 등장하는 긍정적 인물에 대한 묘사에 큰 결함이 있다고 판단하고 이 결함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했다.
1852년 2월 11일 밤 <죽은 혼> 2부를 소각하고 금식에 들어간 고골은 3월 4일 아침 모스크바 자택에서 사망했다. 고골은 <죽은 혼> 1부를 완성한 직후부터 집필했던 2부를 1843년, 1845년, 그리고 1852년 2월 각각 세 차례에 걸쳐 자신의 손으로 직접 소각했던 것이다. 고골이 사망하고 소각되지 않은 2부는 초고 1장뿐이다. 문단의 지인들은 고골의 제작 노트에 있는 2부의 단편을 보정해 2장, 3장 그리고 4장을 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고골이 사망하고 3년이 지난 1855년에 <죽은 혼> 2부 1~4장을 출간했다.
이반 알렉세예비치 부닌은 1870년 10월 23일 러시아 중부 돈 강 유역의 보로네슈 시에서 태어났다. 4살 무렵 아룔 시로 옮겨 간 후 아름다운 꽃들과 밀밭으로 가득한 곳에서 러시아의 대자연을 만끽하면서 미래의 예술가로서의 감성을 키우며 자랐다. 그의 어린 시절 기억은 후일 작품 속에서 삶과 자연, 사랑에 대한 느낌을 가장 섬세하고 아련하게 전달하는 토대가 된다.
부닌의 초기 작품에는 그가 체험한 아름다운 시골의 자연과 농민들의 삶이 자주 등장하는데, 1900년 발표한 <안토노프 사과>는 문단의 큰 관심을 끌게 된다. “따스한 아침햇살을 받으며 말을 타고 마을을 지날 때면 벼를 베고, 축일이면 해가 뜸과 동시에 마을에서 들려오는 교회 종소리를 들으며” 살고자 한 행복한 삶은 그의 소망이었다.
그의 생애에서 창조적인 창작 시기로 평가받는 1910년대에는 ≪마을≫(1910), ≪수호돌≫(1911)과 같은 작품들이 발표된다. 이 두 작품은 당시 농촌 생활의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 주면서 그 속에서 살아가는 민중의 모습을 사실대로 세밀하게 묘사한 걸작이다.
부닌은 실론(현 스리랑카)을 여행하며 동양 종교 특히 불교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다. 심오한 동양 문화와 철학 그리고 불교적 정서에 심취하면서 그 핵심 교리인 인과관계, 열반 및 회귀의 도를 깨닫는다. 그리고 이러한 기억은 <형제들>에 고스란히 담긴다.
1917년 사회주의혁명에 반대하며 아내 무롬체바와 함께 오데사 등 여러 곳을 방랑하다 결국 1920년 프랑스로 망명한다. 그의 망명 생활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심리적, 경제적으로 고통을 받으면서도 조국 러시아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은 변치 않는다. “고향의 적막은 내 가슴을 아프게 하고, 고향 보금자리의 황폐함은 내 가슴을 고통스럽게 한다.”고 말했다.
망명 후 자전적인 소설 ≪아르세니예프의 생≫을 발표하고, 같은 해 1933년 러시아 작가로는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다. 1937년에는 톨스토이의 삶과 철학, 세계관 등을 조명한 회고집 ≪톨스토이의 해방≫을 출간한다. 그 후 부닌의 관심은 사랑과 고독을 주제로 하는 작품들로 옮겨 간다. 그리고 ≪어두운 가로수 길≫을 발표한다. 작가가 추구해야 할 올바른 길과 진리에 대해 고민하던 부닌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조국으로 돌아가려는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부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1953년 83세를 일기로 파리에서 삶을 마감한다.
러시아 시인. 모스크바 출생. 러시아 국민문학의 창시자이다. 유서깊은 명문 귀족집안에서 태어나 1811년 차르스코에셀로(지금의 푸슈킨시)에 개설된 귀족학교 리체이에 입학, 자유주의적 교풍 속에서 1814년 <나의 친구, 시인에게>를 발표하여 문학계에 첫발을 들여놓았다.
처음엔 선배이자 낭만주의 시인인 K.N.바튜슈코프, V.A.주코프스키 등 17.18세기 프랑스 시인들의 시풍을 따랐다. 1817년 리체이를 졸업하고 외무성에 근무하며 수도 페테르부르크에서 혁명적 사상가 P.Y.차다예프와 사귀고, 러시아 전제정치를 타도하려 한 무장봉기단체 데카브리스트의 그룹에 참여하는 등, 농노제 타도 정치사상이 확고해졌다. 데카브리스트의 사상에 공명하여 자유를 사랑하는 내용의 송시 <자유>(1817), 농노제 붕괴를 예언한 <농촌>(1819) 등 일련의 과격한 정치적 시를 써서 남러시아로 추방되었다.
G.G.바이런의 영향을 받고, 그곳에서 <카프카스의 포로>(1822), <도둑 형제>(1821∼22), <바흐치사라이의 샘>(1821∼23) 등의 작품 소재를 얻었다. 1820년 러시아 민간전승에서 취재한 동화풍 담시 <루슬란과 류드밀라>를 발표하여 젊은 세대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었다.
러시아 문학사상 최초의 리얼리즘 작품인 <예프게니 오네긴>을 쓰기 시작한 1823년 무렵에는 낭만주의 한계를 의식하게 되었으며, <집시>(1824)에서 바이런적 주인공에 대한 비판의 눈길로 개인과 사회, 자유와 운명의 문제를 제기하였다.
24년 무신론을 긍정한 편지가 압수되면서 미하일로프스코에 마을에 연금된 동안, 비극시 <보리스 고두노프>(1825), 풍자적 서사시 <누손백작>(1825) 등을 완성하였다. 고독하고 불우한 유폐생활을 통해서 사상적.예술적 성장을 하게 되고 러시아 국민시인으로 성숙하는 계기를 맞게 되었다.
26년 황제 니콜라이 1세의 특사로 자유의 몸이 되었으나, 그뒤 만년까지 관헌의 엄중한 감시와 검열을 받았다. 아버지가 물려준 땅 니제고르드주에 갔을 때 콜레라로 발이 묶인 3개월이 창작의 정점을 이루는 시기가 되었는데, 단편소설집 <벨킨 이야기>, 4편의 작은 비극 <돌의 손님>, <인색한 기사>,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질병 때의 주연(酒宴)> 등 50편의 작품을 썼으며, <예프게니 오네긴>의 기본적 부분도 이때 완성되었다.
나탈리야와의 결혼은 비극의 시작이 되었다. 궁정행사에 그녀가 참석하기를 바라는 황제에 의하여 푸슈킨은 시종보로 임명되었다. 이는 창작하는 시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으나, 세속권력과의 충돌 속에서 역사적 시야를 확대해 가며, 표트르대제의 공적을 기리면서 그 희생이 된 페테르부르크 소시민의 비극을 묘사한 서사시 <청동의 기사>(1833), 소설 <스페이드 여왕>(1834), 역사소설 <대위의 딸>등을 발표했다. 1837년에 자신의 아내와 염문을 일으킨 프랑스인과의 결투 도중에 치명상을 입고 사망했다.
본명은 안드레이 플라토노비치 클리멘토프이다. 1899년 러시아 남부 보로네시의 외곽 마을에서 태어났다.
가난에 허덕이는 가계를 돕기 위해 열다섯 살 때부터 기관사 조수, 수리공 등 여러 가지 일을 했고, 1918년 보로네시 철도대학에 입학하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공산주의 신문과 잡지에 꾸준히 시, 소설 등을 발표하고 지역 문단에서 활동했으며, 1922년 시집 『하늘색 심연』을 출간했다. 1929년 첫 장편소설 『체벤구르』를 완성하고 이 작품의 출간을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그에게 비판적이던 문단의 분위기 때문에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중편 「저장용으로」를 발표한 후에는 반혁명주의자라는 비판에 직면했고, 1930년 완성한 대표작 『코틀로반』 역시 작가 생전에 출간되지 못하고 1987년에 이르러서야 문학잡지 『신세계』에 발표되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종군기자로 전선에 파견되어 전쟁의 참상을 전하는 글을 썼으며, 1946년 발표한 「이바노프의 가족」으로 다시 비평가들의 표적이 되어 작품 활동을 금지당했다. 1951년 52세의 나이에 폐결핵으로 생을 마감했다.
1905년에 러시아 돈강 인근인 카자크마을에서 태어났다. 1923년 모스크바로 가서 석공·하역인부 등 다양한 일을 하다가 교사가 되었다. 이후 문학으로 관심을 돌려 1924년 《점》이란 작품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대표작인 대하소설 《고요한 돈강》은 러시아 문학의 최고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열려진 처녀지》나 《그들은 조국을 위하여 싸웠다》같은 작품도 유명하다. 1965년에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러시아 소설가. 모스크바 출생. 모스크바 국립대학 재학 시절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위생병으로 참전했으며, 내전 기간 중에는 키예프, 오뎃사, 카프카즈, 모스크바 등지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했다.
그에게 최초의 문학적 성공을 가져다준 중편소설 『까라 부가즈』(1932년)에서는 사회주의 건설의 주제를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저널리즘적이고 서정적인 문체로 기술하고 있다. 이후 30년대에 연이어 발표한 『콜키스』(1934), 『흑해』(1936), 『북쪽지방 이야기』(1938), 『여름날』(1937), 『메쇼라 지역』(1939), 『이삭 레비땅』(1937) 등의 중편소설들에서는 자연의 아름다움, 역사와 인간, 예술가의 생애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낭만주의적 정조 속에 인간의 내밀한 심리를 시적 언어로 그려내는 그의 독특함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파우스토프스키의 작품 세계는 당시 소비에트 문단의 지배적인 경향과는 거리가 있는 독자적인 세계였다. 2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시기에도 파우스토프스키는 자신의 이러한 입장을 고수하며 「하얀 무지개」,「비오는 새벽」(1945),「10월의 밤」(1946)과 같은 서정적 단편들 속에서는 전후(戰後)에, 삶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회복해 가는 주인공들의 모습을 잔잔히 그려내고 있다.「눈」(1944) 역시 이러한 작가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전후에 파우스토프스키는 자신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인생에 대하여』(1945-63)의 집필을 시작한다. 『머나먼 시절』(1945),『불안한 청춘』(1955),『불확실한 시대의 시작』(1957),『큰 기다림의 시간』(1959), 『남(南)으로의 질주』(1960), 『방랑의 책』(1963) 등 6부작으로 이루어진 ‘대서사시’를 통해 작가는 혁명 이후 격동의 소비에트 시대를 인간의 가치와 도덕적 신념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자전적 소설의 형식으로 그려내고 있다.
러시아의 작가. 러시아 남부 펜자 출신. 가난한 관리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10년의 군사학교 교육을 받고, 4년간 보병 연대에 근무하다 전역한 쿠프린은 러시아 각지, 특히 남부 러시아의 여러 지역을 전전하며 여러 직업에 종사했다. 1900년을 전후로 그는 체호프, 고리키 등과 친교를 맺는데, 특히 고리키의 소개로 문학단체인‘즈나니예(지식)’그룹의 일원이 된다. 작가로서 그는 1905년 장편소설 『결투』를 발표하여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혁명이 일어나자, 1919년에 해외로 망명한 그는 주로 파리에서 생활하며 17년간을 외국에서 보내고, 1937년 병든 몸으로 러시아로 귀국한다.
그가 작가로서 가장 정력적으로 활동한 시기는 1905년에서 1907년까지, 즉 1차 러시아혁명이 발발한 후, 러시아 사회가 변화에 대한 희망으로 한껏 부풀어 있던 시기였다. 반면 망명 이후에는 작품 활동이 저조해졌고, 몇몇 작품 외에는 특별한 작품을 발표하지 못했다. 한마디로 그는 러시아 비판적 리얼리즘의 계열에 속하는 작가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작품들 대부분은 작가 살았던 당대의 사회적인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몰로호」는 부르주아적‘진보’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고,「결투」는 제정시대 군대에 대한 폭로이며,「구덩이」는 매춘의 문제를 드러내기 위해 쓰인 작품이다.
그의 작품들에서는 체호프와 고리키, 특히 톨스토이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는 삶의 현상을 아주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묘사한 작가로, 자기가 직접 체험한 것만을 작품에 옮겼다. 그의 독자들은 민주주의적 성향의 광범위한 대중들이었다. 그의 작품에는 러시아의 평범한 지식인들, 즉 가슴이 따뜻하고 양심적이며 삶의 모순으로 인해 쉽게 상처를 받는 사람들과 다채로운 형상의 평범한 시민들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그는 반복적으로 발견되는 어떤 집단 심리와 직업 심리를 묘사하고자 노력했던 작가이다. 그의 창작이 보여주는 삶에 대한 낙관주의와 인도주의, 뛰어난 묘사력, 풍부한 문체는 그를 오늘날에도 러시아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작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만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