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캉디드 혹은 낙관주의 -부클래식 008

시리즈 : 부북스 부클래식 [79]

볼테르 저 | 김용석 역 | 부북스 | 2010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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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93785128 / 184쪽 128 x 1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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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출판사 리뷰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는 계몽주의 시대의 철학자 볼테르가 1759년에 쓴 프랑스 풍자소설이다. 이 소설에서 캉디드라는 청년이 그의 정신적 스승인 팡글로스의 단순한 낙관주의(혹은 라이프니츠의 낙관주의)라는 독트린에 물들어 에덴 같은 성에 갇혀 살다가 갑자기 이런 삶이 단절되고 그는 그 성에서 쫓겨난다. 그는 이 세상의 고난 가득한 삶을 보고, 경험하면서 느리지만 고통스러운 각성을 해나간다. 볼테르는 《캉디드》를 통해, 만약 낙관주의를 철저하게 거부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다음과 같은 팡글로스의 라이프니츠적인 주문인 “모든 것은 있을 법한 세상 가운데 최선인 이 세상에서 최고로 있다.” 라는 불가해한 교훈을 옹호하는 대신에 “저는 우리의 밭을 또한 가꾸어야한다는 것을 압니다.” 라고 결론 맺는다.

《캉디드》는 비꼬는 말투 그리고 별나고 기이한 것으로 그리고 빠른 전개가 특징이다. 주인공의 성장을 다룬 교양 소설의 이야기와 유사하고, 많은 모험과 낭만주의의 상투성을 패러디하며, 빈정대는 소설이다. 게다가 이 소설에서 등장하는 사건들은, 예를 들어 7년 전쟁과 1755년 리스본의 지진처럼, 역사적인 사건을 직접 작품 안에 끌어드린다. 악의 문제와 관련하여 논쟁하는 볼테르 시대의 철학자들처럼 캉디드 또한 이 짧은 소설에서 훨씬 직접적이고 우습지만 그들처럼 그렇게 행동한다. 볼테르는 종교, 신학, 정부, 군대, 철학, 그리고 철학자들을 우화를 통해조롱하며, 가장 뚜렷하게는 라이프니츠와 그의 낙관주의를 맹렬히 비난한다.
볼테르가 기대한대로 《캉디드》는 커다한 성공과 커다란 물의를 함께 불러온다. 출판 후 즉각적으로 이 책은, 종교적인 모독, 정치적인 선동, 그리고 순진함 뒤에 숨어있는 지적인 적대감 때문에 폭넓게 판매금지 되지만 책의 날카로운 재치와 통찰력 있게 인간 상태의 묘사로 인하여, 후에 이 소설에 많은 작가와 예술가가 영감을 받아 이 작품을 모방하거나 채택하였다.

저자 소개

18세기 프랑스의 대표적 계몽 사상가이자 작가이며, 역사가이기도 하다. 1694년, 파리에서 출생하여 1778년, 파리에서 사망했다. 본명은 프랑수아 마리 아루에이지만, 정부와 교회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볼테르’라는 필명으로 저술 활동을 계속했다.
루이 14세 사후, 어린 루이 15세를 대신한 필립 오를레앙의 섭정(1715년~1723년) 시기에는 오를레앙 공에게 반대하는 세력들이 모이는 문학 살롱에 참여했다. 그러던 1716년, 오를레앙 공을 비방하는 시 〈나는 보았네〉를 썼다는 죄목으로 바스티유 감옥에 투옥되기도 했다. 
이후 프랑수아 마리 아루에는 비극이나 서사시와 같이 당대에 인정받고 있던 장르에 도전했는데, 이름을 ‘볼테르’라는 필명으로 바꾼 것도 이때이다. 그리고는 1718년 11월(24세), 옥중에서 집필한 비극 『오이디푸스』를 발표하여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 후, 어느 귀족과의 싸움으로 다시 부당하게 투옥되었다가 국외 망명을 조건으로 석방되었다. 이러한 일을 겪은 볼테르는 구체제에 환멸을 느끼고 1726년, 영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영국의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타고난 비판 정신을 더욱 키워 나갔다. 그 결과, 16세기 내내 프랑스를 분열시켰던 신교와 구교 간의 종교전쟁에 종지부를 찍은 앙리 4세를 찬양하는 서사시 『앙리아드』(1728년)를 펴낸다. 
1729년, 프랑스로 돌아온 후에는 비극 『자이르』 (1732년)를 발표하기도 했다. 1733년에는 수학과 물리학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던 샤틀레 후작부인(에밀리 뒤 샤틀레)의 애인이 되어 그녀의 영향으로 문학가에서 철학자로 변신한다. 볼테르는 『철학 편지』(1734년)를 통하여 영국의 입헌군주정을 이상화하고 프랑스의 절대 왕정을 비판함으로써, 프랑스 왕실과 종교계의 미움을 사게 된다. 문제가 되자 즉시 사죄의 글을 발표하여 파리 입성은 제한적으로 허용되었지만, 샤틀레 가문의 영지에 머물면서 10여 년간 저술과 연구 활동에 매진했다. 이 시기에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을 널리 알리기 위해 『뉴턴에 관한 편지』(1736년)와 『뉴턴 이론의 철학적 요소들』(1736년)을 출간하고 비극 『마호메트』(1741년)와 『메로프』(1743년) 등도 발표하였다. 
1744년에는 친구의 외무장관 취임을 계기로 루이 15세의 궁정에 들어가 역사 편찬관이 되었다. 이후 1746년에는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으로 뽑혀 비로소 입지를 보장받을 수 있게 된다. 
그러던 1750년, 이미 오래전부터 친분을 쌓아 둔 프로이센의 계몽 군주인 프리드리히 2세의 초청을 받아들여 베를린으로 간다. 그곳에서 역사서 『루이 14세의 세기』(1751년)를 완성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2세와 마찰이 일어나자, 1753년에는 베를린을 떠나게 된다. 
이후 프로이센의 여러 도시를 거쳐 프랑스의 국경에 도착(1754년)한 볼테르는 파리 입성이 금지된 사실을 알고 스위스 국경 인근인 페르네에 정착한다. 이곳에 머무는 20여 년간 볼테르는 계몽 사상가로서 가장 열정적으로 활동했다. 당시 볼테르는 수많은 저서 출판과 다양한 사업을 통해 부를 축적해 왔는데, 그러한 경제력을 기반으로 하여 성을 재건하고 주변을 정비하는 등, 한적한 시골 마을이었던 페르네를 활기찬 소도시로 만들었다. 그곳에서 볼테르는 반봉건·반교회 운동의 지도자로서 공격적인 글을 수없이 발표했다. 이 시기에 종교적 편견에 의한 불공정한 재판을 규탄한 『관용, 세상의 모든 칼라스를 위하여(원서 제목: 관용에 대한 개론)』(1763년)와 세계 문명사인 『풍속에 관한 에세이』(1756년), 철학 콩트인 『캉디드』(1759년), 『철학 사전』 (1764년) 등이 만년에 출간되었다. 
1778년, 드디어 파리로 입성한다. 생애 마지막 비극 작품인 『이렌』 의 상연을 위해 파리를 찾은 볼테르는 이 작품의 첫 공연을 직접 감독했다고 하는데, 당시 그의 나이 83세였다. 『이렌』을 관람하기 위해 ‘코메디 프랑세즈’를 찾은 대중들은 그를 둘러싸고 “칼라스 옹호자 만세!”라고 외치며 열렬히 환영했다고 한다. 사실 그들은 작품보다는 ‘작가’를 보러 온 것이었으며, 볼테르가 일생 동안 제안한 새로운 가치관, 즉 ‘인간에 대한 배려’와 ‘사랑을 잃지 않은 이성’에 대한 믿음과 실천에 찬사를 보낸 것이다. 1778년 5월 30일에 사망한 볼테르는 비록 1789년에 발발한 프랑스 대혁명을 보지는 못했지만, 1791년에는 국가를 위해 큰 공헌을 한 인물들만 잠들어 있는 ‘팡테옹’에 안치되었다. 

 

역자 소개

  • 역자 : 김용석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과와 대학원을 졸업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강의를 하며, 20세기 프랑스의 대표적 작가인 조르주 페렉의 작품을 중심으로 박사학위논문을 준비 중이다. 프랑스인문학연구모임 ‘시지프(Sisyphe)’의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알파벳의 신비』(공역, 살림), 『수사학 3: 아리스토텔레스』(공역, 리젬), 『예고된 공황』(공역, 바다), 『그리스도 철학자』(공역, 연암서가), 『값싼 석유의 종말, 그리고 우리의 미래』(현실문화), 『잘난 척하는 철학자를 구워삶는 29가지 방법』(공역, 살림), 『현자에게는 고정관념이 없다 - 철학의 타자』(공역, 한울), 『카뮈와 사르트르』(공역, 살림, 근간) 등이 있다.

목차

제1장 - 제3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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