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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론[개정판]

원제 : Traite Sur La Tolerance
시리즈 : 한길 그레이트북스 [197]

볼테르 저 | 송기형, 임미경 역 | 한길사 | 2016년 0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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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35664450 / 252쪽 160 x 2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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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출판사 리뷰

출판사 서평 『관용론』(1763)은 계몽사상가로 유명한 볼테르(Voltaire, 1694~1778)가 18세기 유럽을 휩쓸던 종교 전쟁의 광풍에 희생된 한 가장(家長)의 억울함을 호소하며 ‘관용’의 개념을 역설한 책이다. 볼테르는 이 책에서 탐사보도 성격의 글쓰기와 시각 자료의 적극적인 활용 등 오늘날 저널리즘의 표본을 보여주며 당시 막 세상에 빛을 비추던 계몽주의 사상과 자유주의 사상 등을 효과적으로 제시해 종교 전쟁의 종지부를 찍고 프랑스혁명을 앞당기는 데 공헌했다. “네가 타인에게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을 너 역시 타인에게 하지 마라”는... 『관용론』(1763)은 계몽사상가로 유명한 볼테르(Voltaire, 1694~1778)가 18세기 유럽을 휩쓸던 종교 전쟁의 광풍에 희생된 한 가장(家長)의 억울함을 호소하며 ‘관용’의 개념을 역설한 책이다. 볼테르는 이 책에서 탐사보도 성격의 글쓰기와 시각 자료의 적극적인 활용 등 오늘날 저널리즘의 표본을 보여주며 당시 막 세상에 빛을 비추던 계몽주의 사상과 자유주의 사상 등을 효과적으로 제시해 종교 전쟁의 종지부를 찍고 프랑스혁명을 앞당기는 데 공헌했다. “네가 타인에게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을 너 역시 타인에게 하지 마라”는 유명한 명제가 실린 『관용론』은 오늘날에도 주목받고 있다. 실제로 프랑스에서는 지난해 『관용론』이 처음 출간된 지 250여 년이 지나 다시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올랐을 정도다. ‘『샤를리 에브도』 테러’와 난민 문제 등을 계기로 관용과 불관용의 문제가 다시 수면으로 떠올랐기 때문인데 ‘혐오’가 일상이 된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바람을 일으킬지 주목되는 이유다. 한길사에서는 지난 2001년 처음 출간된 이 책이 우리 사회에 여전히 울림을 준다고 판단해 완전히 새로 번역해 다시 출간했다. 초판에서 오역한 부분을 바로잡음은 물론이고 특히 볼테르가 히브리어와 라틴어로 쓴 부분을 다시 손봤다. 장 칼라스 사건의 진실을 파헤친 『관용론』 어떤 이들은 자비나 관용 그리고 신앙의 자유란 가증스러운 것들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러나 진정으로 반문하건대 자비나 관용 그리고 신앙의 자유가 그와 같은 재앙을 초래한 적이 과연 있었던가? _ 48쪽 『관용론』을 통해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억압해온 옛 체제의 낡은 권위를 무너뜨리고 야만적 형벌제도에 대해 계몽의 승리를 거둔 볼테르. 성실한 신교도 칼라스는 신교와 가톨릭 사이의 광신적 대립이 지배했던 프랑스 남부의 툴루즈에서 모범적인 가장으로 평온하게 지내고 있었다. 1762년 5월 9일, 그의 큰아들 마르크 앙투안이 삶을 비관한 끝에 목을 매고 자살한다. 이 사건을 보려고 모여든 군중 가운데 누군가가 칼라스의 큰아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하려 했기 때문에 가족들이 그를 죽였다고 소리쳤다. 이런 소문은 신교도에게 적대적이었던 툴루즈 시민들 사이에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갔고 시정부는 성난 여론에 떠밀려 아무런 증거도 없이 칼라스 가족을 체포했다. 거듭되는 가혹한 심문에도 칼라스 가족은 범행을 부인했으나 맹신과 편견에 오도된 재판관들은 증거가 불충분한데도 이 가장을 수레바퀴에 매달아 사지를 찢어 죽이는 거열형에 처했다. 칼라스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볼테르는 재판절차의 부당함에 분개했고 이 사건 속에 자신이 공격하고자 하는 옛 시대의 종교적 맹신과 야만적 형벌제도의 문제점이 고스란히 담겨 있음을 절감했다. 이후 볼테르는 칼라스의 복권을 위해 『관용론』을 쓰고 각종 팸플릿을 제작해 유포하는 각종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동·서양의 역사와 『성서』 강론, 도덕론 등 각종 자료를 뒤져가며 불관용에 대한 반론의 논거를 정리한 『관용론』은 볼테르 특유의 감각과 재치 덕분인지 당시 독자들의 반응이 매우 폭발적이었다. 결국 ‘파리’, 즉 중앙정부가 이 사건을 인지하게 되었고 1765년 칼라스의 무죄와 복권이 선고되었다. 볼테르가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억압해온 옛 체제의 낡은 권위를 무너뜨리고 야만적 형벌제도에 대해 계몽의 승리를 거둔 것이다. 자연법에 어긋나는, 예속을 강요하는 세속적 종교권력 비판 이번 축제의 백미는 저 교수대 위에서 칼라스 일가를 바퀴에 매달아 죽이는 행사가 될 것이라고 누구나 거리낌 없이 말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 죄인들을 우리의 신성한 종교에 제물로 바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_ 33쪽 고문으로 초주검이 된 칼라스가 형장으로 향하기 전 가족들과 마지막 인사를 하고 있다. 볼테르는 삽화 전문가에게 칼라스 사건을 그림으로 그려달라고 부탁한 후 이 그림들을 선전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맹신에 빠져 칼라스를 사형장으로 내몬 대중에 대한 볼테르의 한탄 섞인 평이다. 볼테르는 이런 ‘마녀사냥식’ 처벌을 비판하며 각종 역사적 사례를 제시한다. 우선 고대 아테네에서는 사형 판결을 내리려면 의사결정에 참여한 시민 반수의 찬성에 더해서 50명이 더 찬성해야만 했다. 또한 오스만 제국의 황제는 다른 종교를 믿는 부족을 평화롭게 통치하고 있고, 콘스탄티노플에서는 20만 명에 달하는 그리스 정교도가 아무런 위험 없이 생활하며, 술탄은 그리스의 몇 개 섬을 위해 가톨릭 주교들을 임명해 파견한다. 그뿐인가. 아메리카 대륙 캐롤라이나의 법률에 따르면 어떤 종교가 법적으로 승인받기 위해서는 한 가족의 가장인 신도가 일곱 명만 있으면 된다. 이러한 종교의 자유 때문에 무질서가 초래된 적은 없었다. 이러한 사례를 통해 볼테르는 당시 툴루즈를 비롯한 프랑스 사회의 이성의 불완전함과 법률의 불충분함을 비판한다. 그렇다면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박해를 일삼는 광신도들의 수를 감소시킬 묘안은 무엇일까. 그것은 광신이라는 이 정신의 질병에 이성의 빛을 쬐는 것이다. 이성은 인간을 계몽하는 데 효과는 느리지만 실패하지 않는 처방이기 때문이고, 이성은 온화하고 인정미가 있으며 너그러움을 불러일으키고 미덕을 확고히 하며 기쁜 마음으로 법에 복종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성은 진보와 행복을 보증하는가? 아니다. 이성은 그 효율성과 합리성 외에 관용의 정신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따라서 종교가 다르다고 박해하는 일은 볼테르가 보기에 매우 어리석고 잔인한 것이다. 볼테르는 다음과 같이 비유한다. 이것은 호랑이 같은 맹수들에게나 어울릴만한 법이다. 아니 그보다 더 끔찍하다. 왜냐하면 호랑이들은 먹을 것을 다툴 때만 서로를 물어뜯지만, 우리 인간은 말 몇 마디 때문에 서로를 죽였던 것이다. _ 66쪽 관용은 가장 겸손한 형태의 인간에 대한 사랑 옮긴이는 해제에서 관용을 “소극적 인정과 방임을 넘어 다른 종류의 사고방식과 행위양식을 존중하고 자유롭게 승인하는 태도”라고 정리한다. 그렇다면 왜, 언제부터 관용은 문제시되었는가? 옮긴이는 절대적 진리를 요구하는 일신교의 정립과 함께 관용이 문제로 부각되었다고 말한다. 기독교가 국교로 승인된 후부터 종교개혁시대 이후까지 관용의 정신은 무시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볼테르에 따르면 기독교도들은 자신의 종교를 온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도 마다치 않았다. 시리아 내전을 피해 유럽으로 피란하던 중 지중해에서 배가 난파돼 익사한 알란 쿠르디(왼쪽). 혐(嫌)이주노동자 시위대. 이런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관용의 정신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러나 고대 그리스인들은 종교적 감정이 매우 강한 민족이긴 했지만 에피크로스 학파가 신과 영혼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을 기꺼이 용인했으며 로마인들 역시 그들의 번영과 제국팽창을 종교의 다양성을 인정해주는 관용정신을 바탕으로 이루어냈다. 심지어 플리니우스는 자신의 저술 첫머리에서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신이 있던 자리에 대신 태양을 놓았으며, 키케로는 지옥에 대해 “아주 어리석은 노인들조차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처럼 로마인들은 신앙의 자유를 인간의 권리 가운데서 가장 신성한 것으로 여겼다. 볼테르는 물론 네로 황제 때의 기독교 박해도 언급한다. 그러나 “네로 황제 시대에 불운한 유대교도들과 기독교도들이 당한 재앙을 종교적 불관용 탓으로 돌리는 것은 무모한 일이다.” 왜냐하면 당시의 종교적 박해가 국익에 기인한 정치적인 박해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적인 사례들과 문헌들을 섭렵해가면서 볼테르는 소위 기독교의 순교자들에 대한 신화를 낱낱이 반박한다.

저자 소개

18세기 프랑스의 대표적 계몽 사상가이자 작가이며, 역사가이기도 하다. 1694년, 파리에서 출생하여 1778년, 파리에서 사망했다. 본명은 프랑수아 마리 아루에이지만, 정부와 교회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볼테르’라는 필명으로 저술 활동을 계속했다.
루이 14세 사후, 어린 루이 15세를 대신한 필립 오를레앙의 섭정(1715년~1723년) 시기에는 오를레앙 공에게 반대하는 세력들이 모이는 문학 살롱에 참여했다. 그러던 1716년, 오를레앙 공을 비방하는 시 〈나는 보았네〉를 썼다는 죄목으로 바스티유 감옥에 투옥되기도 했다. 
이후 프랑수아 마리 아루에는 비극이나 서사시와 같이 당대에 인정받고 있던 장르에 도전했는데, 이름을 ‘볼테르’라는 필명으로 바꾼 것도 이때이다. 그리고는 1718년 11월(24세), 옥중에서 집필한 비극 『오이디푸스』를 발표하여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 후, 어느 귀족과의 싸움으로 다시 부당하게 투옥되었다가 국외 망명을 조건으로 석방되었다. 이러한 일을 겪은 볼테르는 구체제에 환멸을 느끼고 1726년, 영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영국의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타고난 비판 정신을 더욱 키워 나갔다. 그 결과, 16세기 내내 프랑스를 분열시켰던 신교와 구교 간의 종교전쟁에 종지부를 찍은 앙리 4세를 찬양하는 서사시 『앙리아드』(1728년)를 펴낸다. 
1729년, 프랑스로 돌아온 후에는 비극 『자이르』 (1732년)를 발표하기도 했다. 1733년에는 수학과 물리학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던 샤틀레 후작부인(에밀리 뒤 샤틀레)의 애인이 되어 그녀의 영향으로 문학가에서 철학자로 변신한다. 볼테르는 『철학 편지』(1734년)를 통하여 영국의 입헌군주정을 이상화하고 프랑스의 절대 왕정을 비판함으로써, 프랑스 왕실과 종교계의 미움을 사게 된다. 문제가 되자 즉시 사죄의 글을 발표하여 파리 입성은 제한적으로 허용되었지만, 샤틀레 가문의 영지에 머물면서 10여 년간 저술과 연구 활동에 매진했다. 이 시기에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을 널리 알리기 위해 『뉴턴에 관한 편지』(1736년)와 『뉴턴 이론의 철학적 요소들』(1736년)을 출간하고 비극 『마호메트』(1741년)와 『메로프』(1743년) 등도 발표하였다. 
1744년에는 친구의 외무장관 취임을 계기로 루이 15세의 궁정에 들어가 역사 편찬관이 되었다. 이후 1746년에는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으로 뽑혀 비로소 입지를 보장받을 수 있게 된다. 
그러던 1750년, 이미 오래전부터 친분을 쌓아 둔 프로이센의 계몽 군주인 프리드리히 2세의 초청을 받아들여 베를린으로 간다. 그곳에서 역사서 『루이 14세의 세기』(1751년)를 완성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2세와 마찰이 일어나자, 1753년에는 베를린을 떠나게 된다. 
이후 프로이센의 여러 도시를 거쳐 프랑스의 국경에 도착(1754년)한 볼테르는 파리 입성이 금지된 사실을 알고 스위스 국경 인근인 페르네에 정착한다. 이곳에 머무는 20여 년간 볼테르는 계몽 사상가로서 가장 열정적으로 활동했다. 당시 볼테르는 수많은 저서 출판과 다양한 사업을 통해 부를 축적해 왔는데, 그러한 경제력을 기반으로 하여 성을 재건하고 주변을 정비하는 등, 한적한 시골 마을이었던 페르네를 활기찬 소도시로 만들었다. 그곳에서 볼테르는 반봉건·반교회 운동의 지도자로서 공격적인 글을 수없이 발표했다. 이 시기에 종교적 편견에 의한 불공정한 재판을 규탄한 『관용, 세상의 모든 칼라스를 위하여(원서 제목: 관용에 대한 개론)』(1763년)와 세계 문명사인 『풍속에 관한 에세이』(1756년), 철학 콩트인 『캉디드』(1759년), 『철학 사전』 (1764년) 등이 만년에 출간되었다. 
1778년, 드디어 파리로 입성한다. 생애 마지막 비극 작품인 『이렌』 의 상연을 위해 파리를 찾은 볼테르는 이 작품의 첫 공연을 직접 감독했다고 하는데, 당시 그의 나이 83세였다. 『이렌』을 관람하기 위해 ‘코메디 프랑세즈’를 찾은 대중들은 그를 둘러싸고 “칼라스 옹호자 만세!”라고 외치며 열렬히 환영했다고 한다. 사실 그들은 작품보다는 ‘작가’를 보러 온 것이었으며, 볼테르가 일생 동안 제안한 새로운 가치관, 즉 ‘인간에 대한 배려’와 ‘사랑을 잃지 않은 이성’에 대한 믿음과 실천에 찬사를 보낸 것이다. 1778년 5월 30일에 사망한 볼테르는 비록 1789년에 발발한 프랑스 대혁명을 보지는 못했지만, 1791년에는 국가를 위해 큰 공헌을 한 인물들만 잠들어 있는 ‘팡테옹’에 안치되었다. 

 

역자 소개

mee6395@naver.com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불문과 및 대학원 졸업
건국대학교 문과대학 불문과 교수 역임
현재 건국대학교 예술디자인대학 영화․애니메이션과 교수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통번역대학원에서 강의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스탕달의 《적과 흑》, 《아르망스》, 래티샤 콜롱바니의 《세 갈래 길》, 조엘 디케르의 《볼티모어의 서》, 르 클레지오의 《열병》, 콜레트의 《암고양이》, 마리 다리외세크의 《남자를 사랑해야 한다》, 그웨나엘 오브리의 《페르소나》, 다비드 포앙키노스의 《시작은 키스》, 질 르루아의 《앨라배마 송》, 곰브로비치의 《포르노그라피아》, 크리스티앙 자크의 《오시리스의 신비》, 줄리아 크리스테바&카트린 클레망의 《여성과 성스러움》, 피귀르미틱총서 《롤리타》 외 다수가 있다. 

목차

목차
인간정신의 자유에 대한 옹호ㅣ송기형·임미경
1. 장 칼라스 사건의 개관
2. 장 칼라스의 처형에서 얻은 각성
3. 16세기 종교개혁에 대한 이해
4. 종교의 자유는위험한 것인가
5. 관용의 허용
6. 불관용은 자연법인가
7. 고대 그리스에도 종교적 박해가 있었을까
8. 로마인들도 인정한 종교의 자유
9. 순교자들
10. 거짓 성인전설과 박해의 위험성에 대해
11. 종교적 불관용의 불행한 결과들
12. 유대교에서 불관용은 신의 율법인가
13. 유대인들의 크나큰 관용
14.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친 관용
15. 불관용 또는 종교적 박해에 대한 반론들
(중략)
20. 사람들을 맹신에 묶어두는 것이 유익한가
21. 미덕은 앎보다 더 소중하다
22. 관용은 보편적이라는 점에 대해
23. 신에게 올리는 기도
24. 후기
25. 칼라스 사건의 귀결
보유: 최종 판결의 의의
볼테르의 주석
칼라스 사건 일지
볼테르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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