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5월 3일 오늘의 책
채현국, 정운현 | 비아북 | 2015.02
분류 : 시/에세이/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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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지금 채현국인가! “노인들이 저 모양이란 걸 잘 봐두어라.” 작년 1월 한 일간지에 실린 도발적인 제목의 인터뷰 기사로 채현국 선생은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그 자신도 노인이면서 책임감 없는 노인들을 봐주지 말라고 거침없이 말하는 모습에 사람들은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사실 그는 이미 알 만한 사람들 사이에선 ‘거리의 철학자’(남재희, 전 노동부장관), ‘파격의 인간(임재경, 언론인), ‘현대판 임꺽정’(이규섭, 시인) 등으로 불리며 존경...
처음엔 '채현국'을 '최현국'으로 잘못 들었다. 다시 '최'가 아닌 '채'라는 소리를 듣고 떠올린 건 "노인들이 저 모양이라는 걸 잘 봐두어라."던 그의 말이다. 2014년 1월 당시 '저런 말을 하는 노인도 있네?' 하고 놀랐던 마음이 따라 올라왔다. 물음표를 꿰었다. '여기 남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이 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그렇게 살기로 한 순간은 언제일까?'
책은 총 3부로 구성된다. 1, 2부는 채현국의 말에 정운현이 주석을 달았다고 볼 수 있고, 3부는 본인의 생애를 직접 이야기하는 자전적 형식의 글로 꾸몄다. 1, 2부는 게스트보다 진행자가 말이 더 많은 토크쇼를 보는 느낌이었다. 물음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난 3부를 먼저 살펴보기로 했다.
나의 아버지는 천부적인 사업가였다. 내 생애에서 아버지는 기댈 수 있는 언덕이기보다 오히려 짐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아버지를 제외하고 내 삶을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떤 의미로든 아버지는 나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채현국·정운현, 『쓴맛이 사는 맛』비아북, 2015, 157쪽)
왜 채현국은 아버지를 기댈 수 있는 언덕이기보다 '짐 같은 존재'라고 표현했을까? 아버지 채기엽은 천부적인 사업가 기질을 발휘하여 자꾸 사업을 벌였고, 그때마다 아들인 채현국이 뒤처리하듯 책임지고 운영했다. 게다가 채기엽은 혼외 자식들을 끊임없이 만들어냈는데, 그런 아버지에 대해 채현국은 소회를 털어놓았다.
그런데 이런 복잡한 가정사를 갖고 있다 보니 이복형제들의 호적이 문제였다. 나는 한참 동안 이 문제를 갖고 고민하다가 결국 아버지에게 말해 이복동생들은 물론 그들의 엄마조차도 모두 아버지의 호적에 올렸다. 그래서 사실 우리 집안의 호적부는 제법 복잡하다. 마찬가지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 아버지의 묘비에도 그들의 이름을 전부 새겨 넣었다.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어쩌겠나. 아버지가 만들어놓은 현실이 그러하니. 난 그저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었다.
(채현국·정운현, 『쓴맛이 사는 맛』비아북, 2015, 189쪽)
'아버지가 만들어놓은 현실이 그러하니.' 이 말에 서려 있는 건 담담함이었을까? 씁쓸함이었을까? 1970년 흥국탄광에서의 사고 이후 사업을 모두 정리한 것은 보상 외에도 아버지에게서 벗어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 아니었을까. 물론 그것은 아버지뿐만 아니라 박정희 정권과 거리를 두려는 목적도 있었다. 아래는 채현국의 인터뷰를 중심으로 엮은 『풍운아 채현국』의 내용이다.
거기 종업원도 줄 거 다 주고. 사실 (정리하기 위해) 일부러 조금씩 다 줄여온 겁니다. 왜냐면 (박정희 정권이) 위수령 내린 것 때문에 스트라이크 하려고. 그냥 나눠주는 것만 목적이 아니고... 그 때 상황에서 돈을 더 벌려고 하면 박정희하고 사실은 동업을 해야 할 판이야. 그런데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있습니까? 그래서 내가 깬 겁니다.
(채현국·김주완, 『풍운아 채현국』, 피플파워, 2015, 87쪽)
1988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채현국은 효암학원의 이사장이 되었다. 이전의 어떤 자리보다 채현국에게 어울리는 곳이었다. 1961년 중앙방송국에 취직하며 '교육의 가장 대중적인 형태가 연극'이라고 생각했던 것처럼 교육은 오래전부터 그의 관심사였고, 아버지의 부재는 자신의 삶을 더 선명하게 그려낼 기회였다.
흔히들 '대안학교'라 하면 일반 학교와 다른 교육과정을 가진 학교라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교사 채용과 관리에 있어서도 그렇게 해야만 진정한 대안학교라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부족하지만 효암학원의 학교를 그렇게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다. 무엇보다 단순히 지식만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스스로 익히고 깨치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이 모든 것은 다름 아닌 훌륭한 교사들이 주도하고 추진해나가야 할 부분이다. 좋은 학생 못지않게 좋은 교사를 길러내는 일이 중요한 이유다.
(채현국·정운현, 『쓴맛이 사는 맛』, 비아북, 2015, 183쪽)
어른으로 상징되는 기존 질서에 순응하지 않고 스스로 무엇인가를 하려는 사람, 채현국은 그런 사람을 사랑했고, 삶의 동료로 여겼다. 해직기자들에게 집 한 채씩을 사줬다거나, 흥국탄광에서 민주화 인사들을 숨겨줬다거나, 학원의 이사장으로서 전교조 선생님들을 비호했던 것 등의 일화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을 좋아했던 그의 마음이 표출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학생이 스스로 익히고 깨우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언제 어떻게 그의 여정이 시작되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풍운아 채현국』에서 찾을 수 있었다.
이사장님도 아예 어릴 때는 일본이 조국이 아니라는 것도 몰랐다고요?
전혀 몰랐어. 그걸 아는 놈은 아주 뛰어난 상류층 지식인 집안이거나 아니면 지식 있는 중상류층에서 아이가 가서 말하지 않을 확신이 있었던 집에서만 일본이 우리나라 아니라는 말을 해줄 수 있었지, 어디서도 일본이 우리나라 아니란 말은 못했습니다. 묻기만 해도 쓸데없는 소리 한다고 야단치고, (...) 일본사람들 보면 잘난 체하는 사람으로만 알았지 도대체 딴 나라라는 생각은 못 했어.
그걸 자각한 게 언제쯤이었습니까?
해방되자마자였죠. 놀랐죠. 이 놀라움이라는 것은 세상이 옳다고 가르쳐준 게 전부 거짓말인 거야. (...) 아, 어른들이 옳다 하던 건 전부 거짓말이라고 하는 것을 그때 알았어요. 내가 신이 없다는 건 모르지만 있지 않다는 건 안다고 하는 것도 그런 영향일 겁니다.
가치관이 한순간에 전도되어버린 거네요.
가치관 정도가 아니라 모든 생각이지. 이건 뭐, 듣는 소리 아는 소리 전부 믿을 건 하나도 없어. 아이들에 따라서 별생각 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지만, 나는 그걸 생각 안 할 도리가 없어. 이게 철학과 갈 밑천이었나 봐. 딴 놈들도 나하고 똑같이 겪었는데 이 새끼들은 왜 그게 아무 문제가 안 돼? 그래서 오죽하면 해방된 지 한 2년이 지났을 무렵 엄마한테 '엄마는 남자도 아닌데 왜 일본이 우리나라 아니라고 말 안 했노?'라고 물었어. 그랬더니 '야, 이자슥아. 쓸데없는 소리 마라. 그런 걸 알아서 뭐 하노. 그런 말은 입에도 담지 마'라고 해. 지금도 겁이 나가지고. (...)
(채현국·김주완, 『풍운아 채현국』, 피플파워, 2015, 169~171쪽)
해방 이후,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놀라움은 외부 세계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고, 삶의 중심을 외부가 아닌 자기 내부에서 찾도록 이끌었을 것이다. 또한 좌익에 몸을 담았던 배다른 형님이 휴전에 비관하여 자살하는 것을 목격했던 그였기에 '살아 있음'이라는 가치를 발견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바로 '살아 있음'이다. 내가 살아 존재하고 있음이다. 그 무엇도 이에 앞서는 것이 없다. 사람들은 그걸 잘 모르고 산다. 내가 살아 있지 않고서야 무에 소용 있나. 그다음은 내가 어떻게 살아 있느냐다. 삶이란 목표를 정해 긍정적으로 여기고 살아갈 때 그 존재 가치가 있는 법이다.
(채현국·정운현, 『쓴맛이 사는 맛』, 비아북, 2015, 102쪽)
돈, 권력, 지식으로 얻는 사회적 지위를 삶의 우선순위에 놓고 추구하는 사람은 불만과 불안을 떼어내기 힘들다.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더 많은 것을 탐하지만, 절대 완전히 충족될 수 없기 때문이다. 지위를 견고히 하기에 오늘날의 사회는 변화가 너무 잦다. 그러나 나의 '살아 있음'에서 의미를 찾는 사람은 언제나 여유로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는 지금 살아 있고, 그것을 인식하면서 즉각적이고 완전한 충족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변하는 사회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어떤 것을 가진 그에게 삶은 하나의 산책이다.
세속적 욕망을 이룬 사람들은 실제로는 허망한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이 그걸 알까 모르겠다. 그것도 모른다면 불쌍한 사람들이다. 돈이나 권력, 지식을 추구해 성취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것에 지배당한 사실을 꾸미고 감추기 바쁘다. 그들에게는 이기심이 삶의 에너지다. 강한 에고이즘은 늙지 않는다. 늙어서도 그 욕심을 버리지 않다가 결국 자기 파멸, 즉 죽음에 이른다. 더 불행한 일이 없기를 바라며 오직 잘 죽기만을 바랄 뿐이다. 지난 삶이 위선이 아니길 바라는 마음은 공포에서 나오며 동시에 늙으면 갖게 되는 마음이다.
(채현국·정운현, 『쓴맛이 사는 맛』, 비아북, 2015, 138쪽)
삶이라는 흔들리는 물결 속에 던져진 채 불안에 떨고, 의지할 것을 찾아 붙잡는다. 끝내 그것을 놓지 못한다. 하지만 누군가는 힘을 빼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면 몸이 자연스럽게 뜬다는 것을 안다. 그는 자유롭게 헤엄친다.
물에 빠진 것과 수영을 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헷갈리지 마라.
(채현국·정운현, 『쓴맛이 사는 맛』, 비아북, 2015, 136쪽)
내가 책을 통해 작가를 느끼는 것처럼 다른 이들도 내 글에서 나를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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