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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등쓰러진길위에서

2008년 10월 29일 오늘의 책

신호등쓰러진길위에서

김수열 | 실천문학사 | 2001.01

분류 : 시/에세이/기행

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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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김수열 시인의 첫 시집 『신호등 쓰러진 길 위에서』는 일상을 끌어안으면서 동시에 세계의 바깥을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자세를 보여주는 시편들로 채워져 있다. 위태하기 그지없는 세상에서 누추하고? 쓸쓸한 삶을 이어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뛰어넘으려는 의지를 보여주는 이 시편들을 통해, 시인은 쓸쓸한 삶을 비옥하게 하는 것은 바로 '더불어 삶이고 이를 방해하는 요소들과의 싸움은 지속되어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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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실천문학사의 시들은 올곧고 정직하기로 이름나 있습니다. 그 시집들은 매문(賣文)의 유혹에 전력을 다해 맞서고 있으며, 희망과 일상의 합일을 꿈꾸며, 세속도시의 괴로움과 즐거움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쉼없이 보상도 없이 자기만의 길들을 가는 씩씩한 기록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김수열의 이 시집은 그간 실천문학사가 쌓아올린 노작들의 돌탑 위에 쌓아올린 또 하나의 빛나는 성과라 할 수 있겠습니다. 


김수열은 노래합니다; '등대가 서 있는 그 자리에 서서 등대의 눈을 가져보지 않고서는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애타는 간절함이랄까 지독한 그리움에 대해 함부로 말해선 안된다'고. 그리고 그 근거로 '등대는 언젠가 소복이 눈덮인 물살 위를 삐걱거리며 돌아올 어쩌면 영영 돌아오지 못할 늙은 옛사랑을 위해 이 밤도 졸음에 겨워 가물거리는 눈을 비비고 기다림을 배우고 있'기 때문이라고 덧붙입니다. 그의 욕망은 의지의 욕망이며, 믿음의 소망입니다. 그는 여전히 사랑을 믿으며 그 사랑에 충실하게 복무합니다. 아무도 믿지 않은 종교이더라도 그 자체로 완결되는 무엇이 사랑이며, 결국 그 사랑이 세상을 바꾸어나간다고 믿고 있는 겁니다. 그것은 가능과 불가능의 영역을 벗어난 거룩한 삶의 자세가 아닐까요. 

'길이 없어지고 가야할 곳을 잃'어버린 것 같은 90년대 후반 이후, 그의 시가 작위적인 대안에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의 진지한 반추, 스스로에서부터 시작되는 변혁에의 꿈이 이 시집에 든든히 뿌리박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김수열은 표제시에서 아주 생생하게 증명합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신호대기선 앞에서 브레이크를 밟고

신호등을 쳐다보는데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신호등이 없다

꼬라박아 자세로 엎드려 아무 말이 없다

문득 길이 없어지고

나는 가야 할 곳을 잃었다

갑자기 나는 아무 데도 없다

길 없이 길을 나설 수 없는 나는

신호등 쓰러진 길 위에서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다(후략)

-      시 <신호등 쓰러진 길 위에서> 중에서

 


우리는 누구나 길을 잃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길을 잃어놓고도, 길을 잃었다고 말할 수 없는 때가 있습니다. 더구나 그것이 희망이라면, 아주 간절히 바라던 것이라면 우리는 쉽게 거짓말의 유혹에 빠져들게 됩니다. ‘말할 수 없음’과 ‘자신마저 속임’의 사이에서 존재는 얼마나 작은 촛불일까요. 삶은 기약도 정처도 없이 일렁일 것입니다.
 

더구나 이 같은 고민은 ‘길을 잃었다’고 선언함으로서 해결되는 무엇도 아닐 것입니다. 없는 길을 찾아야 한다는 쉽지 않은 숙제가 삶에 얹히고, 길 잃은 와중에도 인생은 속절없이 계속됩니다. 혼란이 줄을 잇고, 자신 앞에 놓여진 길들은 늘 모두 가짜같거나 모두 진짜같습니다. 
 

‘사라진 길’을 그는 무엇으로 더듬어 새로 찾아낼까요. 찾아낸 길이 진짜 옳은 길이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요? 그의 시 한 편은 시인이 길잡이로 삼는 것이 ‘살아온 날들; 기억’이라는 귀띰을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주 말로는 먼낭이라 부르는 먼나무를 아시는지요.

봄이면 연자줏빛 꽃이 피고

가을이면 붉은 열매가 열리는 먼나무를 아시는지요.(중략)

그 나무가 태어난 고향집이

한라산 자락 물 좋은 어드메였다는 걸 아시는지요.

그러던 그 나무가 4.3 시절

산사람을 섬멸한 기념으로 옮겨 심어졌다는 걸 아시는지요.(중략)

해마다 봄이 되면 그 먼 나무

그리운 어머니의 산으로 꽃향기 날리는 뜻을 아시는지요.

해마다 가을이 되면 그 먼 나무

피빛 열매 붉게붉게 맺힌 채 겨울을 나는 뜻을 아시는지요.

반 백년이 넘도록 오지게 살아

아직도 죽지 않고 시퍼렇게 살아있는 그 뜻을 아시는지요.

 

아시는지요.

정말 아시는지요.

-      시 ‘서홍동 먼나무’ 중에서

 

 

김수열은 혼란과 상실 앞에서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는 변할 수 없는 것입니다. 때로는 지키는 것, 세태에 영합하지 않는 것, 바꾸지 않는 것이 진짜 진보입니다. 이 시집은 그의 진보의 기록입니다.



 

 

- 컨텐츠팀 에디터 정염(noway@bandib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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