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7월 23일 오늘의 책
노동효 | 나무발전소 | 2009.06
분류 : 시/에세이/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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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지도가 필요 없는 대한민국 샛길 여행 보고서 첫 저서였던 『길 위의 칸타빌레』로 지금 당장, 계획 없이 떠나는 여행 예찬론을 펼쳤던 여행 작가 노동효가, 이번에는 ‘로드 페로몬’을 쫓?는 두 번째 샛길 방랑기를 펴냈다. 저자가 만들어낸 독특한 개념인 ‘로드 페로몬’은 알려지지 않은 채 은둔하는 우리나라의 숨은 절경들이 뿜어내는 참을 수 없는 매혹의 체취다. 자칭 ‘트래블 레지스탕스’인 저자는 이번에도 정해놓은 목...
R에게 여행은 영화다. 차를 여는 순간 ‘세상 극장’의 문은 열리고, 키를 돌리면 ‘부르릉’ 필름이 돌아간다. R은 길에서 잠을 자지 않는다. “비싼 기름으로 영사기를 돌리고 있는데, 그는 이 아름다운 영상들을 보지 않은 채 엔딩 타이틀만 볼 셈인가?”(p 135) 길에서 만난 풍경, 사람, 그리고 상념들까지 모든 것이 소중하다. R은 길에서 잠을 잔다. 핸들 꺾이는 대로 유영하는 그의 여행에 정해진 잠자리는 어울리지 않는다. 침낭을 펼쳐놓고 쏟아지는 별빛을 마주하고, 대지의 숨소리를 자장가 삼아 자면 그만이다. 이렇듯 R에게 길은 전부다.
R은 자신이 본 여행을 ‘그대’와 나누고자 한다. 재밌는 영화를 본 사람들의 입소문을 내듯. R이 3가지 방법으로 길로의 여행을 ‘충동질’을 한다. 첫 번째 방법은 감언이설. “그대는 아는가, 길들 역시 꿈을 꾼다는 것을, 그대의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귀갓길 담벼락에 기대어 올려다본 별들의 반짝임이란 당신이 오래 전 사랑했던 어느 길이 보낸 그리움의 신호였음을.”(p 26) 왕년에 하늘 한 번 본 사람이면 이 말에 마음이 동할 거다. 두 번째 방법은 자기자랑. R은 네비게이션에 잡히지 않는, 차 한 대 다니지 않는 구 46번 국도에서 자유를 만끽한다. “차도 한 가운데 엎드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는다는 건 정말 최상의 행복이었다.”(p 67) 그냥 부럽다.

(사진 제공 R-노동효)
R은 마음은 동하나 망설이는 그대에게, 최후의 방법으로, 충격요법을 쓴다. 그는 L형의 출근길 이야기를 잠시 하는데, 섬뜩하다. “그는 사람들을 밀치고 나가 버스에서 내리려고 했으나, 문 앞에 머리가 희끗희끗한 아주머니 한 분이 버티고 서 있었다. 그는 아주머니를 향해 짜증과 역정이 뒤섞인 말을 내뱉으며 아주머니를 ‘확’ 밀치고 버스에서 내렸고, 헐레벌떡 달려가 간신히 출근카드를 찍을 수 있었다. 그 때,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라는 자기모멸감이 양심을 찔렀다. (…) 대체 내가 지금 무엇 때문에, 무슨 생각으로, 무슨 짓을 하며 살고 있는 건가”(p 65)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우리는 그토록 아등바등 살까. 이제 길을 떠난다.
길이 알려준 자유와 배려
R의 여행은 유쾌하다. 대화를 나눌 수 있는 L형이 있고, 함께 노래하는 비틀즈가 있고, 무엇보다 길이 있는데 유쾌하지 않을 이유 무엇인가. 수영복만 입고 포항 시내를 누비며 마주친 낯선 시선쯤에는 개의치 않는다. 상수도가 망가져 물을 떠다 드시는 할머니를 도와 물을 길어드리고, 하룻밤 얻어 자는 재미는 자유로운 여행이 아니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또 불국사 주차장 화장실에서 샤워를 하다 (화장실에서 개인 목욕탕으로 변신하는) ‘토종 트랜스포머’의 변심으로 두 남녀에게 나체를 시원하게 공개하고, 식당 할머니에게 사각팬티를 수영복이라고 우기다가 결국 백기를 든 R의 에피소드는 상상하는 재미가 있다.
R의 여행이 이토록 유쾌하고 자유로운 것은 ‘해야 한다’, ‘하지 말아야 한다’는 강박에서 자유롭기 때문이다. 남들은 ‘그래도 될까?’하는 순간 R은 벌써 움직인다. 산 깊숙한 절에 하룻밤 잠을 청해보기도 하고, 강변에 묶여 있던 배를 풀어 뱃놀이를 즐기기도 한다. 누가 뭐라 하면? 안 하면 그만! “‘Hey, My Good Fellas! Have a nice trip!’을 외쳐야하는 그 순간, 이생에서 이루지 못한 욕망이 있거나 이루지 못했던 욕망으로 인한 미련이 나에게 남아 있지 않기를! 만약 내생이 있다면 단 한 달의 수명이라도 좋으니 나비로서의 한 생을 사는 것도 좋을 듯했다.”(p 218)

(사진 제공 R-노동효)
R은 신비를 품고 있는 샛길을 다니며 무슨 생각을 할까. 그가 아이 교육문제로 고심하고 있는 누이에게 하는 말을 잠시 들어보자. “명심해. 어려서부터 가난하거나 힘든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을 갖게 하고, 그 마음을 행동으로 옮기는 게 습관이 되도록 가르쳐라. 그러면 그 아이는 자라면서 절대로 세상에 주눅 들거나 비뚤어지지 않는다.”(p 36) 이 말은 그의 여행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R은 길 위에서 주검이 된 다람쥐를 그냥 지나치지 않으며, 젖을 먹이고 있는 강아지 어미를 일으켜 새울까봐 방 밖으로도 잘 나가지를 않았다. 이는 그가 길에게 받은 게 많아서일 거다. 그것을 혼자 누리는 것은 ‘탐욕’이며, R의 길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R의 여행은, 짐작했겠지만, 블록버스터가 아니다. 그의 여정에는 속도만이 남아 있는 거대한 도로도, 관광 책자에 소개된 유명 여행지도 없다. 그와 비슷한 것을 볼 때면 자연을 크고 화려하게 만들려는 인간의 헛된 욕망에 대한 안타까움이 더 크다. 대신 R의 여정에는 길을 나서기 전의 설렘,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 길의 끝에서 만난 가슴 저린 풍경이 있다. 보고 사라지는 여행이 아닌 두고두고 꺼내볼 수 있는 은밀한 체험이다. ‘내 인생의 길’을 만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R은 말한다. 길을 배려하고, 길이 내뿜는 ‘로드 페로몬’(Road Pheromone)을 만끽할 수 있는 여유로운 마음이면 된다고.
-컨텐츠팀 에디터 안늘(ak20@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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