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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과거

은희경 저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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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기 갓 성년이 된 여성들이 기숙사라는 낯선 공간에서 마주친 첫 ‘다름’과 ‘섞임’의 세계를 그려낸다. 기숙사 룸메이트들을 통해 다양하며 입체적인 여성 인물들을 제시하고 1970년대의 문화와 시대상을 세밀하게 서술한다-MD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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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32035635 / 344쪽 / 344g / 128 x 1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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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殷熙耕
199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소설 「이중주」가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타인에게 말 걸기』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 『상속』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 장편소설 『새의 선물』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그것은 꿈이었을까』 『마이너리그』 『비밀과 거짓말』 『소년을 위로해줘』 『태연한 인생』이 있다. 문학동네소설상, 동서문학상, 이상문학상, 한국소설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이산문학상, 동인문학상, 황순원문학상을 수상했다.

머리말

너무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러는 동안 나의 나쁜 버릇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었다. “소설을 따라가는 일기”라는 제목의 파일에는 이런 문장들이 적혀 있었다.
―그럴듯함,을 경계하자. 가장 비겁하고 천박한 것.
―자꾸 외연을 넓힌다. 힘이 덜 빠진 것이다. 힘을 잘 빼면 안 무거워지는 한편 안 가벼워진다.
―왜 집중이 안 돼? 아무 쓸모 없는 화려한 문장만 공들여 만들고 있다니. 이게 공허한 무기 자랑이 아니고 뭔가.
결국 만들어놓은 이야기를 버리는 데에 가장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너무 오랫동안 썼다.
이 책은 나의 여덟번째 장편이다. 10년 전에 실패하지 않았다면 여섯번째였을 것이다. 8년 전에 실패하지 않았다면 제목은 “번개 들판”이었겠고 내 주인공은 처음 계획대로 오십대 초반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3년 전에 실패하지 않았다면 내 어머니가 이 책을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연희문학창작촌으로 나를 찾아와 어린 시절 내가 얼마나 의젓한 아이였는지 몇 번이고 얘기해주었다. 그해 가을 잠을 설친 어느 새벽 토지문화관에서 어머니의 부음을 들었다. 다음 해 21세기문학관에서 가까스로 이 소설을 시작할 수 있었다. 모두 감사드린다.
연재를 끝낸 뒤 원고를 고치는 과정에서도 실패는 계속되었다. 왼쪽 눈의 망막에 구멍이 나기도 했지만 그보다 책의 저자가 되는 일에 의욕을 잃은 것이 더 큰 실패였다. 이렇게 마칠 수 있었다는 건 많은 도움을 받았다는 뜻이다.
글 쓸 공간을 마련해준 분들과 오래 기다려준 출판사, 나의 독점 피처링 편집자 K, 그리고 문지의 이민희 편집자와 이경진 디자이너께 감사드린다. 정세랑 작가와 신형철 평론가에게도 각별한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하나, 무조건 짧게, 빨리 쓰자. 그것이 내게는 가장 새로운 소설이다.
둘, 이해받으려고 하거나 편을 들어달라고 하는 글에는 결코 ‘발견’이 없다. 그런 나를 바라보는 신랄한 외부 시선이 동시에 있어야 한다. ‘나는 단지 조금 빠를 뿐이에요’라는 설정은 '단지 조금 느릴 뿐이에요’보다 약간은 신선하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하는 속셈은 뭐지? 결국 변명 아냐? 라고 반박하는 시선이 반대 방향의 장력으로 잡아당겨야만 이야기라는 평면이 펼쳐지고, 그래야만 누군가가 그것을 읽을 수 있다.
셋, 그 시절 우리 참 치졸하고 나이브했지. 그래도 과거의 나를 조금이나마 바꿀 수 없다면 현재의 내 삶에 어떤 새로움이 있겠어.
넷, 도대체, 이 망할 장편을 어떻게 써야 하는 걸까.
이 소설을 쓰면서 가장 많이 했던 생각이다. 하지만 아시는지? 끝난 소설은 무조건 해피엔드이다.
2019년 늦여름
은희경

책 속에서


‘기숙사’
“기숙사는 출신지와 부모로부터 벗어나 서울 생활을 시작한 이십대 초반 여자 대학생들의 집단이었다. 그들은 각기 다른 지점으로부터 다른 조건을 지니고 떠나왔다. 이제 스스로가 자신의 인생을 꾸려가야 하는 만큼 의식하든 안 하든 자기라는 존재가 다름의 형태로 드러나게 되어 있었다. 같은 생활공간에서 그 다름은 더욱 두드러질 것이다. 그리고 그 개별적인 ‘다름’은 필연적으로 ‘섞임’으로 나아가게 되는데, 거기에는 비극이라고 이름 붙일 만한 서투름과 욕망의 서사가 개입될 수밖에 없었다.” (pp. 27~28)

본문에서
그녀에게는 사람을 대할 때 미묘한 권력관계를 만드는 습성이 있었다. 끊임없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관계의 자장磁場을 만들어내고 우월감과 피해 의식을 번갈아 써가며 그것을 정당화했다. 거기에는 증인이 필요했다. 결국 나로 하여금 위성처럼 그녀의 궤도를 따라 돌며 그녀라는 일방적이고 변덕스러운 광원을 반사하도록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 그녀가 만들어내는 전도되고 돌발된 상황은 마치 단조로운 여정에 가로놓인 과속방지턱처럼 내 인생에 작은 잡음을 만들며 짧게나마 그것을 변속했다. 그녀가 나의 가장 오래된 친구인 것은 어쩌면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녀가 속도를 떨어뜨릴 때의 반동으로 나는 흔들렸으며 그때마다 내가 회피해왔던 것들이 그녀에게로 가서 어떤 파국을 맞이하는지 목도하는 기분이었다. 계속해서 다음 권이 출간되는 문제집 시리즈를 풀어가듯 주어진 생을 감당하며 살아왔을 뿐이지만 어느 순간 나는 그녀에게서 나의 또 다른 생의 긴 알리바이를 보았던 것이다. (‘2017’, pp. 12~13)

여전히 나는 무력하고 방어적인 회색 지대에 갇혀 있었다. 나 자신이 실망스럽고 그러다 보니 의욕이 없어 방치하게 되고, 결국 해야 할 것을 제대로 못 해 무력감에 빠지고, 무력감은 쫓김과 불안을 낳고 그래서 자신감을 잃은 끝에 제풀에 외로워지고, 그 외로움 위에 생존 의지인 자존심이 더해지니 남들이 눈에 거슬리기 시작하고, 그러자 곧바로 소외감이 찾아오고, 그것이 또 부당하게 느껴지고, 이 모든 감정이 시간 낭비인 것 같아 회의와 비관에 빠지는 것, 그 궤도를 통과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이른바 청춘의 방황만이 아니었다.
지난 두 달 동안 나는 내 앞의 문을 열지 못하고 번번이 과거의 나로 굴러떨어지곤 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 세계의 부당한 규율에 복종했던 미성년 그대로였다. (‘1977―3월, 4월’, p. 86)

모범생들은 눈치를 본다. 문제를 낸 사람과 점수를 매기는 사람의 기준, 즉 자기를 어디에 맞춰야 할지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정답을 맞히려는 것은 문제를 내고 점수를 매기는 권력에 따르는 일인 것이다. 그렇게 그저 권력에 순종했을 뿐이면서 스스로의 의지로 올바른 길을 선택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모범생의 착각이다. 그 착각 속에서 스스로를 점점 더 완강한 틀에 맞춰가는 것이다. 다행히 나는 진짜 모범생은 아니었다.
나는 부모와 고향을 떠나는 순간 거짓 순종과 작별할 생각이었다. (‘1977―5월, 6월, 7월’, pp. 116~17)

그녀에게는 그 시절 내가 겪어야 했던 방식과는 전혀 다른 ‘다름’과 ‘섞임’의 세계가 있었다.
그 시 절 우리에게는 수많은 벽이 있었다. 그 벽에 드리워지는 빛과 그림자의 명암도 뚜렷했다. 하지만 각기 다른 바위에 부딪쳐 다른 지점에서 구부러지는 계곡물처럼 모두의 시간은 여울을 이루며 함께 흘러갔다. 어딘가에 도달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때 우리 모두는 막연하나마 앞으로 다가올 시대는 지금과 다를 거라고 믿었다. (‘2017’, p. 193)

고향 친구들은 만나고 싶지 않았다. 만나면 으레 듣게 되는 변했다거나 변하지 않았다는 말, 둘 다 싫었다. 예전에 알았던 익숙한 풍경 모두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저만치 멀어져 있는 것 같았다. 아니 내가 그곳으로부터 밀려났거나 겉도는 느낌이었다. 고향도 아니고 고향이 아닌 것도 아니었으며 집도 아니면서 집이 아닌 것도 아니었다. […]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불현듯 깨달았다. 첫사랑의 죽음에는 애도 기간이 필요 없다. 나에게 그 여름은 주인공이 죽어버려서 더 이상 뒷얘기가 중요하지 않게 된 비극의 에필로그 같은 것이었다. 아니 주인공의 죽음과 상관없이 비극에는 에필로그가 필요 없다. 잊는 것만이 완전한 애도이다. 스무 살 나의 여름과 함께. (‘1977―9월, 10월, 11월’, pp. 233~34)

비관은 가장 손쉬운 선택이다. 나쁘게 돌아가는 세상을 저항 없이 받아들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에너지가 적게 소모되므로 심신이 약한 사람일수록 쉽게 빠져든다. 신체의 운동이 중력을 거스르는 일인 것처럼, 낙관적이고 능동적인 생각에도 힘이 필요하다. 힘내라고 할 때 그 말은 낙관적이 되라는 뜻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낙관과 비관의 차이는 쉽게 힘을 낼 수 있는지 아닌지의 차이인지도 모른다. 역설적인 점은 비관이 더 많은 희망의 증거를 요구한다는 사실이다. 어둡고 무기력하게 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비관을 일삼는 사람이야말로 그것이 깨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래서 자신 같은 비관론자도 설득될 만큼 강력한 긍정과 인내심을 요구하게 되고, 결국 유일하게 그 희망을 줄 수 있는 사랑하는 사람을 괴롭히게 된다. (‘1997~2017’, pp. 320~21)

종종 내가 왜 이처럼 비관적인가 생각해볼 때가 있다. 어떤 일이든 내가 주도하기를 피해 비껴서 있다 보니 누군가의 처분을 기대하는 입장이 되게 마련이다. 그런데 그 누군가를 미리부터 불신하거나 혹은 내게 호의적이지 않을 거라고 단정해버리는 건 또 왜 그럴까. 혹시 지금까지 나를 왜곡시킨 힘들을 폭력이라고 생각하기보다 피할 수 없는 부당함이라고 받아들여버리는 비겁함이 세상에 대한 비관으로 나타나는 것인가.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수동성이야말로 비관보다는 낙관의 도움을 바라는 태도일 텐데 말이다. (‘1997~2017’, p. 329)

어차피 우리는 같은 시간 안에서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는 사람들이었고 우리에게 유성우의 밤은 같은 풍경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 책에서 말하듯 과거의 진실이 현재를 움직일 수도 있다. 과거의 내가 나 자신이 알고 있던 그 사람이 아니라면 현재의 나도 다른 사람일 수밖에 없다. (‘1997~2017’, p. 335)

목차

2017 1977―3월, 4월 1977―5월, 6월, 7월 2017 1977―9월, 10월, 11월 1977~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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