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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97779758 / 292쪽 145 x 2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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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문/교양/철학 > 인문학일반
- 예술/대중문화 > 사진 > 사진이론/비평/역사
출판사 리뷰
인문학자 이광수 교수와 시인 최희철의 인문학 컬래버레이션! “사진, 시처럼 철학처럼 읽다” 아무것도 말할 수 없지만, 모든 것을 읽어낼 수 있는 것, 그것이 사진이다. 말하려 하는 사람과 읽는 사람이 서로 다른 생각을 갖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흑과 백으로 보여주는 잔혹과 야수성, 그것이 바로 사진으로 보여주려는 사진가가 갖는 세계의 총체성 개념이다. …… 사진가는 사진을 찍으면서 인문학자로서 이 세상에 대해 생각하고, 시인은 그 사진을 보고서 이 세계를 해석하는 것이다. 그리고 둘의 생각은 교유하면서 뒤섞인다. ... 인문학자 이광수 교수와 시인 최희철의 인문학 컬래버레이션! “사진, 시처럼 철학처럼 읽다” 아무것도 말할 수 없지만, 모든 것을 읽어낼 수 있는 것, 그것이 사진이다. 말하려 하는 사람과 읽는 사람이 서로 다른 생각을 갖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흑과 백으로 보여주는 잔혹과 야수성, 그것이 바로 사진으로 보여주려는 사진가가 갖는 세계의 총체성 개념이다. …… 사진가는 사진을 찍으면서 인문학자로서 이 세상에 대해 생각하고, 시인은 그 사진을 보고서 이 세계를 해석하는 것이다. 그리고 둘의 생각은 교유하면서 뒤섞인다. 이 책은 사진을 놓고 하되, 사진에 관하지 않은 세계에 대한 생각과 해석과 뒤섞음이다. ? 이광수(사진가, 인문학자) 많이 알아야 한다고 함은 자신의 내부와 외부가 열려 있어 경계가 없음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세상에는 자신과 접속할 무한하게 많은 타자(他者)들이 널려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나 자신의 것으로서 아닌 오직 ‘타자일 뿐인 타자들’ 말이다. 사진가의 사진을 만나 생각이 뒤섞이는 것도 그런 것 아닐까. 이러한 접속이 또 다른 곳으로 흩어지면서 또 다른 접속들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게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 즉 현장이고 어장이니까 말이다. 그 모든 것들은 ‘표현들’의 힘이다. ? 최희철(시인) 삶은 혼돈, 혼돈이 낳은 뒤섞임의 풍경이다! 사진을 놓고 하되, 사진에 관하지 않은 세계에 대한 생각과 해석 사진 찍는 인문학자와 철학하는 시인이 만난다면 어떤 풍경이 그려질까? 부산외국어대학교 이광수 교수와 철학하는 뱃사람 최희철 시인은 사진을 두고 자유로운 사유의 세계를 펼치는 사진 놀이를 해왔다. 그 첫 결과물이 2016년 출간된 『사진이 묻고 철학이 답하다』였다. 한 해가 지난 2017년, 둘은 다시 만나 사진과 시와 철학과 삶을 놓고 이야기를 펼쳤다. 그사이 사진가는 인도를 두 번 다녀왔고, 시인은 태평양을 두 번 횡단했다. 이번에 사진가와 시인을 묶은 이야기의 고리는 스피노자의 모두스modus(양태) 개념이다. 양태는 실체가 드러나는 방식, 실체가 변화하는 방식, 실체가 표현되는 부분을 말한다. 사진가가 찍은 사진은 정적이지만 마냥 정적이지 않다. 정지된 사진 속에 천변만화하는 세상의 풍경을 오롯이 담아내기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 화면 속에 보이는 것은 실체이고, 그 실체 뒤에 숨은 것은 양태이다. 정지된 것 같지만 그 안에는 무수한 이야기가 흐르고 있다. 시인은 그 사진 뒤에 숨은 삶의 양태를 추적한다. 이 책 『사진으로 생각하고 철학이 뒤섞다』는 모든 것을 보여주지만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는 사진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이다. 사진 찍는 인문학자와 철학하는 시인이 펼치는 사유의 향연이 강물처럼 쉬지 않고 흘러넘친다. 기억이라는 주제를 통해 존재의 조건을 살피고, 무한히 열려 있는 세상의 뒤섞임을 살핀다. 이를 통해 존재란 열려 있는 뒤섞임의 연속이라는 영원을 탐사한다. 수천만 신들이 사는 나라 인도에서 사진가의 렌즈에 비친 언어와 그 사진에서 시인이 포착한 풍경은 신성과 세속의 뒤섞임이다. 인도를 다녀온 사진가와 태평양을 떠돌다 온 시인, 사진을 펼쳐놓고 기억과 존재의 양태에 대해 이야기하다. 카메라를 들고 떠나는 여행을 이광수 교수는 눈과 결별하는 일이라고 했다. 감각의 관성에 길들여진 시선이 아닌 카메라에 비친 세상은 세계를 바라보는 일에 뜻하지 않은 재미를 준다. 카메라는 분명 시각에 들어오는 세상을 포착한 것인데, 화면에 드러났을 때는 예기치 않은 세상이 펼쳐진다. 그 안에서 사진가는 세상의 숨겨진 온갖 이미지를 바라본다. 사진 속에서 생각들은 소용돌이치면서 다른 생각들을 불러온다. 그 생각들이 우연과 만나며 생각은 겹겹이 주름진 파노라마 필름이 된다. 눈과 카메라와 사진 이미지라는 세 개의 차원이 만들어내는 것은 결국 생각의 향연이다 인도를 다녀온 사진과 이광수 교수는 그곳에서 무슬림 남녀 한 쌍의 모습을 보았다. 나이든 남자는 하얀 옷을 휘감았고, 그 옆의 여자는 온몸을 새카만 부르카로 감추었다. 여자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사진가의 생각은 의복의 차별에서 시작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인간과 역사, 문명과 종교에까지 뻗어나갔다. 그에게 사진은 생각의 도구였다. 그리고 사진에서 시작되어 연쇄적으로 파생되는 생각의 고리를 철학하는 시인 최희철과 나누었다. 시인은 사진가가 찍어낸 세상에 대한 생각으로 세계를 해석했다. 시인은 사진을 보면서 생각나는 이 세계에 대한 존재론을 설파한다. 이번에는 스피노자의 모두스modus(양태)의 개념으로 풀었다. 양태는 실체의 표현 부분으로, 비록 찰나적으로 사라지지만 이미 엄청난 실체와 다른 양태들과의 내재적 관계 속에서 생성된다. 스피노자는 양태의 원인이 신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신 역시 양태를 통해 변화한다. 이는 신 역시 불변한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신이 따로 있고 양태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양태를 포함한 그 모두가 ‘신’이다. 양태와 신은 내재적 관계인 것이다. 사진가의 사진 속에서 시인은 사진들이 고체가 아니라 액체성의 세계를 느꼈다. 고체가 딱딱함이라면 액체는 작동의 극치를 보여주는 춤이다. 스피노자의 실체 역시 액체와 같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실체와 양태’의 관계 때문에 가능하다. 액체성의 세계는 고정된 형태가 없고 언제나 흘러가고 변화한다. 무수한 접힘과 펼쳐짐 속에서 무한하게 확장한다. 시인이 사진가의 사진을 만나 생각이 뒤섞이는 것도 그런 것이다. 그게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 즉 현장이고 어장이니까 말이다. 그 모든 것들은 ‘표현들’의 힘이다. 기억, 양태가 존재하는 법 인간의 기억은 완전할까? 하루 전 출근길 버스 옆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을 나는 기억할까? 혹 그 자리에 사람이 있었는지 없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 더 오래된 날들은 어떨까? 내가 기억하지 않는 것은 존재한 적이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인식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오만한 생각이라니, 그럼 내 기억이 그 수많은 존재들이 존재하는 조건이 된다는 말인가? 안타깝게도 기억은 존재의 조건이다. 기억되지 못하는 것은 그 존재성을 잃고 만다. 내가 누군가를 기억한다면, 내가 무언가를 기억한다면, 그 또는 그것은 내 기억과 함께 영원의 존재성을 획득하게 된다. 영원, 죽음이 삶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순간. 세상에 존재하느냐 마느냐와 관계없이 내 기억에 존재한다면 그것은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이 존재의 문법이고 기억이 지닌 영원성이다. 사진은 나름의 방식으로 순간을 기억한다. 시각은 다른 모든 감각들이 특수하게 표현된 방식이다. 사진은 그런 시각의 순간을 포착하여 가두어놓는다. 그것은 시인의 가슴속 옹이를 담아내기도 하고, 세상의 무수한 관계와 혼종되기도 한다. 대화의 첫 번째 자리에서, 인도를 다녀온 사진가와 태평양을 떠돌다 온 시인은 사진을 펼쳐놓고 기억과 존재의 양태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들은 각자 자신이 가진 도구로 기억 속에서 양태가 존재하는 문법을 탐구한다. 스피노자는 ‘실체와 양태’를 나누었다. 양태, 즉 실체의 표현 부분인 모두스는 찰나적으로 사라지지만, 다른 수많은 양태들과의 내재적 관계 속에서 생성되고 존재한다. ‘양태의 존재성’이라는 연약한 체계에 ‘영원’을 부여하는 방식은 각자가 가진 도구만큼이나 다르다. 사진가는 눈앞에 펼쳐진 장면을 사진에 담는다. 이때 사진은 기억의 도구가 된다. 시인은 이 사진에 포착된 모습에서 의미를 끌어낸다. 이때 사진은 존재의 도
렌즈에 비친 언어
최근에 인도 정부가 자신들이 믿는 신으로서의 강인 갠지스와 야무나 그리고 산 히말라야에 대해 인격권을 부여했다. 일단은 환경 훼손을 막고 힌두 최고 성지인 강과 산을 보호해야 한다는 메시지인 것 같지만, 사실 조금만 더 깊게 들어가 보면 매우 종교적인 - 지금 정부의 뿌리는 국수주의적 힌두 근본주의다. - 정책임을 알 수 있다. 힌두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 그것은 생명체든 무(無)생명체든 관계없이 다 신으로서의 일정한 본질을 가지는 존재라고 여긴다. 그래서 모든 자연이 다 신이다. 그런데 이 모든 신과 인간은 유한한 존재일 뿐이다. 세계를 운행하는 절대 불변 무한의 이치 속에서 이 세계로, 저 세계로 태어나고 또 태어나고 또 태어나며 영겁을 살아갈 뿐이다. 이 신앙에 아주 독실한 사람들은 지금 태어나 살고 있는 이 세계를 아침 이슬과 같은 허탄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불변의 어떤 진리를 찾고, 그것을 알현하고자 저 멀리 히말라야를 찾고 어머니 갠지스의 모태를 찾는다. 신을 찾으러 가는 자리, 벅찬 감동이 올라 올 때 자신의 신심을 어떤 상으로 남긴다. 밖에 남긴 것은 허탄한 돌무지이지만, 그 돌무지 안에는 보이지 않는 뭔가 실체가 있다. 그는 그 실체를 돌무지로 남긴 것이고 나는 이미지만 보는 것이다. 그리고 난 카메라로 그 둘의 간격을 말하고자 한다. 그가 본 세계가 옳은 것인지, 내가 본 세계가 옳은 것인지 그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시가 포착한 풍경
데카르트는 실체(實體)를 ‘존재 이유가 자신의 내부에 있는 것’으로 정의했다. 그리고 그 내부가 무한한 것을 ‘무한실체’라 하였으며 신(神)은 무한실체라고 말하였다. 그런 면에선 신(실체)을 ‘자기원인’이라고 말한 스피노자와 같다.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실체 즉 신 개념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 다만 둘은 양태의 문제를 다르게 생각하였다. 데카르트가 양태들도 실체(유한실체)라고 본 반면 스피노자는 양태를 실체로 보지 않았다. 양태들을 실체라고 생각한 데카르트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 스피노자의 차이는 무엇일까? 데카르트는 신과 양태의 관계를 ‘일반과 부분’의 관계로 본 것 같다. 일반과 부분의 관계는 동일성의 관계이며 심지어 ‘명령과 복종’의 관계로 보인다. 왜냐하면 신이 양태들을 창조하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피노자가 볼 때 그것은 그들이 말한 신의 정의에 위배된다. 무한실체로서 완벽한 신이 어떻게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말인가? 무엇을 만든다함은 반드시 ‘목적’이 따른다. 목적이 결여된 상태에서 어떤 것도 만들 수가 없기 때문이다. 어떤 목적이 있다함은 그 순간 자신이 결여하고 있는 그 무엇이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신이 결여하고 있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은 신의 정의에 위배된다. 그러므로 신과 양태의 관계는 ‘일반과 부분’의 관계여서는 안 된다.
그들의 관계는 ‘전체와 개별’의 관계여야 한다. 이것은 ‘우주와 특이성’의 관계라고 할 수도 있는데 이들은 동일성의 관계가 아니다. 그러므로 특이성은 우주의 부분이 아니다. 가령 아무리 작은 특이성이라도 하나가(숫자의 개념이 아니다) 빠지면 우주라는 전체도 달라진다. 그러므로 우주 혹은 전체로서의 신이 개별자를 만들어 낼 수 없다. 다만 개별자들에게 신은 ‘깃들어’ 있을 것이다. 이게 스피노자의 신이 범신론(汎神論)의 관점으로 여겨지는 지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범신론에서 모든 존재가 신이 전변(轉變)된 것이긴 하지만 신이 전변된 존재는 결국 신이 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 어떤 존재라도 결국 신이 되려는 게 어쩔 수 없는 욕망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스피노자의 ‘실체와 양태’는 결코 그런 관계가 아니다. 오히려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양태는 절대로 신이 될 수도 없고 신과의 본성이 동일한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신과 양태는 따로따로 노는 것인가? 그것 역시 아니다. 그게 바로 ‘우주와 특이성’의 관계이고 줄기차게 이야기한 ‘실재적 구별’의 관계다.
그러므로 특정 양태에게 있어서 신은 오직 단 한 번만 존재한다. 가령 이 순간은 우주적 시간으로도 지금 이 순간 단 한 번뿐이다. 두 번 있을 수 없다. 그게 바로 사진이 보여 주는 이미지와 같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사진은 그 단 한 번의 찰나를 포착해내는 작업이다. 언제든지 마음 내킬 때 누를 수 있는 셔터 같지만 그 순간은 우주에서 단 한 번 밖에 있을 수 없는 ‘특이성’으로서의 셔터라는 말이다. 그때 우린 그 순간의 소중함과 긴급함을 알아야겠지만 반드시 그게 우리가 정한 어떤 ‘대단함’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들에게 어떠한 이름을 붙이더라도 그런 순간은 늘 다시 오기 때문이다. 단 한 번은 대단함보다는 늘 사소함으로 존재한다. 그리곤 다시 차이로 돌아온다. 그게 바로 니체가 말한 ‘영원회귀’다.
그러므로 진정한 범신론을 말해 보면 신과 다른 존재들의 관계가 ‘우주와 특이성’의 관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여 모든 존재들은 운동하고 있지만 그 운동성의 방향이 신 쪽으로 되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반드시 신을 머금고 있어야 한다. 사진에서 보이는 바람과 하늘 그리고 땅과 물을 보라. 그들은 모두 신을 머금고 있지만 결코 신이 되려 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그들이 되어야 할 신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범신론’이라는 이름에서 풍기는 신의 범람이 모든 존재들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분명 맞지만 양태로서의 모든 존재들은 결코 신이 되려 하지 않는 게 중요한 것 같다. 결국 신은 양태가 아니면서 양태이고 양태 또한 신이 아니면서 신인 것이다. 그게 바로 ‘범신론’으로서의 자연이 아닐까?
(3장 신, 강에는 영원이 흐른다, 218~223쪽)
들어가는 말 _ 사진, 아무것도 말할 수 없지만 모든 것을 읽어낼 수 있는(이광수)
제1부 기억, 존재의 문법
1 기억, 존재가 영원을 얻는 방식
2 재현은 그저 재현으로
3 끈으로 연결된 세계
4 거짓은 존재의 조건
5 편견이라는 이름의 고통
6 사진은 시의 옹이를 담아낼 수 있을까?
7 사진과 관계와 잡종
8 존재의 문법을 묻다
9 내재적 관계의 평등
10 인간은 궁둥이로 선다
11 진실을 모사하는 기억
12 진화와 변화 그리고 삶의 평형
13 발칙한 혀
14 양적 사소함은 기억을 공격한다
15 자연과 양태가 뒤엉키는 세계 혹은 찰나
제2부 뒤섞임, 혼돈의 풍경
16 엄마와 딸은 동시에 태어난다
17 정도의 세계와 강도의 세계
18 하찮은 희생물에 누가 신성을 부여하는가
19 우주, ‘좋아요’ 속에서 차고 넘치는 세계
20 텅 빈 타자성의 의미
21 중도, 치우치지 않는 실재적 구별의 길
22 무한히 열린 세계 연기緣起
23 섹스라는 이데올로기의 찌꺼기
24 여자는 보되 사람은 보지 않는다
25 반성은 누구의 몫인가
26 예리함은 칼, 풀잎, 종이에도 있다
27 ‘떡’ 치는 풍경
28 귀신이 아니라 내가 중요하다
29 내 안의 동물을 만나러 가는 길
30 소망, 기원, 그리고 욕망
제3부 신, 강에는 영원이 흐른다
31 평등, 신의 조건
32 신과 인간, 실체와 양태
33 실재적 구별의 실재, 양태적 차원의 실재
34 국가는 어떻게 생명을 도륙하는가
35 신, 양태가 아니면서 양태인
36 양태는 실체에서 나온다
37 잡다의 세계에서 하나의 세계로
38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39 인간과 자연은 둘이 아닌데
40 평정한 바다는 없다
41 현실정치와 현상계
42 차이가 바글바글하는 세상
43 지금 현재를 만드는 질서
44 꼬뮨적 삶의 가능성
45 강에는 영원이 흐른다
나가는 글 _ 실체와 양태, 그 액체성의 변주(최희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