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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의 격몽요결

이이, 이창성 저 | 나무의꿈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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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91168497 / 204쪽 146 x 2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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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출판사 리뷰

출판사 서평 조선시대 최고의 유학자 율곡 이이 선생이 학문을 시작하는 이들을 위해 쓴 교육 지침서! 《격몽요결(擊蒙要訣)》은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 선생이 42세 때인 선조 10년(1577) 관직을 떠나 해주에 있을 때 지은 책으로, 처음 글을 배우는 아동의 입문 교재로 쓰기 위해 지은 것이다. 이이는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정치가로, 23세 때 별시에서 장원을 한 후 벼슬길에 올라 47세 때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이이의 성리학 사상은 근대에 이르기까지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격몽요결》은 율곡이 직접 쓴 친필 원본... 조선시대 최고의 유학자 율곡 이이 선생이 학문을 시작하는 이들을 위해 쓴 교육 지침서! 《격몽요결(擊蒙要訣)》은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 선생이 42세 때인 선조 10년(1577) 관직을 떠나 해주에 있을 때 지은 책으로, 처음 글을 배우는 아동의 입문 교재로 쓰기 위해 지은 것이다. 이이는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정치가로, 23세 때 별시에서 장원을 한 후 벼슬길에 올라 47세 때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이이의 성리학 사상은 근대에 이르기까지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격몽요결》은 율곡이 직접 쓴 친필 원본으로, 한지에 행서체로 단아하게 썼으며, 내용은 제1장 입지(立志)에서부터 제10장 처세(處世)까지 10개 항목으로 나누어 구성하여 서술하였다. 《격몽요결》은 조선 중기 이후 일반에게 널리 보급되어 《동몽선습》과 함께 초학자의 입문서로 근세에까지 많이 읽혀져 왔다. 지은이 이율곡이 벼슬을 그만두고 파주 율곡리로 낙향하여 이후 한동안 관직에 부임하지 않고 본가가 있는 파주의 율곡과 처가가 있는 해주의 석담(石潭)을 오가며 교육과 교화 사업에 종사하면서 지은 책이다. 정치가로서의 지은이가 교육자로의 면모를 보임과 동시에 지은이의 교육사상이 적절하게 잘 나타나 있다. 지은이는 젊은 시절 금강산에서 불교를 공부하다가 하산한 이후, 평생을 유교적,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주자학적인 관점에서 세상을 보았다. 《격몽요결》 또한 마찬가지여서 그의 교육사상은 유교적인 인재 양성과 충효를 근간에 두고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을 성리학적 계몽서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격몽요결》은 여러 차례 목판본이나 활자본으로 출간되어왔으나, 유일한 친필본은 율곡의 이모가 시집간 권 씨 집안에 율곡의 유품과 함께 대대로 소장되어 왔으며, 이것은 율곡이 친히 쓴 친필원본으로 그 가치가 크다고 평가되어 보물 제 602호로 지정되었다. 이이는 성리학을 체질화한 사림파가 정권을 잡고 그들의 이념을 국정 전반에 본격적으로 적용해 나가던 선조 초년의 정치와 사상을 주도하던 인물로서, 이 책도 단순히 아동을 교육하기 위한 개인저술이 아니라 학문을 통해 사림파의 이념을 사회 저변에 확산하기 위한 근본적인 노력의 일환이었으며, 초기 사림 이래의 《소학》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결실을 맺은 저술이다. 1635년 이이를 문묘에 종사할 것을 건의 한 유생들이 이 책을 《성학집요》와 함께 그의 대표적인 저술로 꼽고 학자 일반의 일상생활에 극히 절실한 책이라고 높인 것은 위와 같은 까닭에서였다. 정조(正祖) 때에 이 책을 임금이 친히 열람하고 제사(題辭)를 지어, 문신(文臣) 이병모(李秉模)에게 명하여 이를 책머리에 붙였다. 앞머리에 저자의 서문이 있고, 10개 장으로 구성되었으며, 각 장마다 여러 항목이 나열되어 있다. 학문이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하여 일상생활을 마땅하게 해나가는 것일 따름이라는 입장에서 저술되었다. 물론, 이때의 일상생활은 아버지는 자애롭고, 자식은 효성스러워야 하며, 신하는 충성되고, 부부는 유별해야하고, 형제간에는 우애가 있고, 어린 자는 나이가 많은 자를공경해야 하고, 붕우(朋友)된 자는 신의가 있어야 한다는 유교이념을 구현하는 것이었다. 그 방법은 글을 읽어 이치를 연구하여[讀書窮理] 마땅히 행하여야 할 길을 밝힌 다음에, 깊은 경지로 들어가 올바름을 얻고 밟아 실천하여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 중도(中道)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이 책의 목적은 학도에게 뜻을 세우고 몸을 삼가며 부모를 모시고 남을 대하는 방법을 가르쳐, 바로 마음을 닦고 도를 향하는 기초를 세우도록 노력하게 만든다는 데 있으며, 동시에 저자로서도 스스로를 경계하고 반성하는 자료로 삼고자 하였다. 이이는 성리학을 체질화한 사림파가 정권을 잡고 그들의 이념을 국정 전반에 본격적으로 적용해 나가던 선조 초년의 정치와 사상을 주도하던 인물로서, 이 책도 단순히 아동을 교육하기 위한 개인저술이 아니라 학문을 통해 사림파의 이념을 사회 저변에 확산하기 위한 근본적인 노력의 일환이었으며, 초기 사림 이래의 《소학》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결실을 맺은 저술이다. 1635년 이이를 문묘에 종사할 것을 건의한 유생들이 이 책을 《성학집요》와 함께 그의 대표적인 저술로 꼽고 학자 일반의 일상생활에 극히 절실한 책이라고 높인 것은 위와 같은 까닭에서였다. 제1장 입지(立志)에서는 학문에 뜻을 둔 모든 사람이 성인(聖人)이 되기를 목표로 하여 물러서지 말고 나아가라고 하였다. 제2장 혁구습(革舊習)에서는 학문 성취를 향해 용감히 나아가기 위해 ‘마음과 뜻을 게을리하여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을 모방할 뿐 안일한 것을 생각하고 얽매임에 깊이 물들어 있는 것’ 등 구체적 조항 8개를 떨쳐버려야 한다고 하였다. 제3장 지신(持身)에서는 충신(忠信) 등 몸을 지키는 방도를 제시하여 뜻을 어지럽히지 말고 학문의 기초를 마련하도록 하였다. 제4장 독서는 독서가 도에 들어가기 위한 궁리의 전제가 되며, 단정한 자세로 깊이 정독할 것을 가르치고 독서의 순서를 제시하였다. 제5장 사친(事親)에는 평상시의 부모 섬기기를 비롯하여 부모의 뜻이 의리에 어긋날 때 자식이 부드럽게 아뢰어 뜻을 바꾸게 하라는 것 등의 내용이, 제6장 상제(喪祭)와 제7장 제례(祭禮)에는 그것들을 주희의 《가례》에 따라서 할 것과 반드시 사당을 갖추라는 내용 등이 실려 있다. 제8장 거가(居家)에는 부부간의 예를 비롯하여 집안을 다스리고 가산을 관리하는 방법이, 제9장 접인(接人)에는 사회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교양이, 제10장 처세(處世)에는 과거를 거쳐 벼슬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자세가 실려있다. 이러한 구성과 내용은 학문에 뜻을 두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자기 몸을 바로 세우고 사회에 나가 활동하도록 하는 성리학의 근본이념을 일상생활에 구체적으로 적용한 것이다. 자연과 사회를 파악하는 데 이기철학이 바탕이 되며, 부모자식 간의 효가 사회질서의 근본이념을 이루고, 향촌 지주로서의 경제적 기반을 바탕으로 한 사족(士族)들이 사회를 주도하던 조선시대에는 가장 기본적인 교과서였다. 그러나 사회운영의 철학과 질서가 크게 바뀐 현대에는 그 내용들을 그대로 학문과 사회생활에 적용하기 어렵다.

저자 소개

이이(李珥, 1536∼1584)
율곡은 퇴계와 쌍벽을 이루는 조선 시대의 대학자, 어려서부터 시를 잘 지었던 문학 신동, 시험에서 아홉 번이나 수석을 차지한 천재, 10만의 군대를 양성하자고 했던 선견지명을 가진 관리, 신사임당의 아들 등으로 잘 알려져 있다. 율곡의 이름은 이이고, 자는 숙헌, 시호는 문성이다. 1536년(중종 31년)에 태어나고 49세 때인 1584년(선조 17년)에 사망했다. 아버지 이원수와 어머니 신사임당의 4남 3녀 가운데 셋째 아들이다. 율곡이 문학 신동, 대학자, 뛰어난 정치가로서 역사에 길이 남을 인물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타고난 자질이 바탕이 되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겠지만, 타고난 자질을 꽃피우지 못한 사람도 많다는 점을 고려하면 율곡을 율곡답게 만든 요인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첫째, 신사임당을 어머니로 두었다는 점이다. 율곡은 어렸을 때 문학, 예술에 조예가 깊은 신사임당으로부터 수학했다. 지금도 부모가 자식을 가르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더구나 조선 시대 여자는 한문 서적을 읽지 않는 것이 상식이다. 어머니에게서 글을 배우고 학문을 익히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글을 읽고 쓰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고, 또 그것이 남들과는 독자적인 길을 갈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둘째, 퇴계라는 뛰어난 선배가 있었다는 점이다. 율곡은 23세 때 도산서원으로 직접 퇴계를 방문했고 그 뒤로도 편지를 주고받으며 학문과 개인적 신상에 관해 의견을 나눴다.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퇴계를 극구 만류했고, 퇴계가 죽고 나서는 만시(輓詩)를 지어 애도했다. 율곡의 학문적 업적이 뛰어다나는 것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고 지금도 주목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퇴계와 함께 조선 성리학의 두 줄기를 형성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후대 학자들이 학파와 붕당의 형성에 따라 퇴계와 율곡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르는 것처럼 만들고, 그에 따라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적대적인 관계처럼 되어버렸지만, 당대에는 서로를 인정한 좋은 선후배였다. 율곡은 그런 훌륭한 선배와의 편지 교류 등을 통해 학문적 연마를 할 수 있었고, 선배가 이루어놓은 성과를 디딤돌로 해서 자신의 학문적 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셋째, 선조 시대에 활동했다는 점이다. 율곡이 관직에 진출하자마자 문정왕후가 사망하고 외척인 윤원형이 탄핵을 받았다. 사화로 얼룩졌던 시대는 지나가고 사림이 중앙의 무대에 오르는 때가 된 것이다. 개혁 의지가 강렬하고 학문적 역량이 뛰어난 율곡이 사림파가 정계의 중심이 된 때에 관직에 들어갔다는 것은 행운이었다. 율곡보다 서른다섯 살 위였던 퇴계의 경우 사림이 위축되었던 때에 관계에 있었으므로 조정에 염증을 느끼고 고향으로 물러나는 쪽으로 생각을 굳혔던 것과는 대비된다. 물론 선조의 한계, 사림의 분열 등 이후 전개되는 상황이 율곡을 괴롭혔다는 점을 간과할 순 없다. 10만 양병설 등의 건의에 대해 선조가 미온적으로 받아들였고, 또 붕당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을 견지하여 조율하려고 했으나 동·서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받는 결과를 낳아 정치적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렇더라도 율곡은 항상 중앙 정계의 한 중심에 서 있었다. 넷째, 뛰어난 친구들과 교류했다는 점이다. 평생의 친구인 성혼, 송익필, 정철 등 당대의 쟁쟁한 인사들이 주위에 있어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부족한 것을 채워주고 격려해 주어 자신의 역량을 펼칠 수 있었다. 율곡은 몸이 좋지 않거나 뜻이 좌절될 때면 선대의 고향인 파주로 물러나 학문과 교육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 결과 학문과 교육 분야에서도 많은 성과를 거둘 수 있었고 제자도 많이 양성했다. 저술로는 ≪성학집요≫, ≪소학집주≫, ≪경연일기≫, ≪만언봉사≫, ≪기자실기≫, <인심도심설>, <김시습전>이 있다. 5000원짜리 화폐에는 율곡의 초상이 들어 있고, 신사임당의 초상은 5만 원권 화폐에 쓰인다. 율곡은 지금도 우리와 무관하지 않은 소중한 인물인 셈이다. 


 

충남 홍성
32년 공직생활을 했다. 
그동안 관심을 두고 있었던 동양고전을 공부하면서 
은퇴 후 한 번 더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로 삼고 있다.
고전의 대한 배움을 꾸준히 이어나갈 계획이다.

목차

목차
머리말
격몽요결서(擊蒙要訣序)
1. 입지장(立志章)
2. 혁구습장(革舊習章)
3. 지신장(持身章)
4. 독서장(讀書章)
5. 사친장(事親章)
6. 상제장(喪制章)
7. 제례장(祭禮章)
8. 거가장(居家章)
9. 접인장(接人章)
10. 처세장(處世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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