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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의 경연일기 난세에 읽는 정치학

율곡 이이 저 | 오항녕 역 | 너머북스 | 2016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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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94606408 / 656쪽 152 x 2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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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출판사 리뷰

출판사 서평 좋은 정치를 하려는 뜻이 있습니까? 율곡의 직언, 선조의 침묵에 담긴 조선 정치의 진면목 1575년(선조 8년) 9월 경연. 북방의 후금이 심상치 않다는 상소에 대해 다소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던 선조는 말실수를 하였다. 조정에 큰소리치는 사람이 많으니 이들을 데려다 막으라 한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율곡 이이는 ‘큰소리치는 사람’이란 실력이 없는 사람일 텐데 어찌 적을 막을 수 있겠으며, 만일 유신(儒臣 유학자 신하, 즉 홍문관 관원)들을 큰소리치는 사람이라 비꼰 것이라면 양 혜왕과 제 선왕을 만나 선정을 강론한 맹자도 목... 좋은 정치를 하려는 뜻이 있습니까? 율곡의 직언, 선조의 침묵에 담긴 조선 정치의 진면목 1575년(선조 8년) 9월 경연. 북방의 후금이 심상치 않다는 상소에 대해 다소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던 선조는 말실수를 하였다. 조정에 큰소리치는 사람이 많으니 이들을 데려다 막으라 한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율곡 이이는 ‘큰소리치는 사람’이란 실력이 없는 사람일 텐데 어찌 적을 막을 수 있겠으며, 만일 유신(儒臣 유학자 신하, 즉 홍문관 관원)들을 큰소리치는 사람이라 비꼰 것이라면 양 혜왕과 제 선왕을 만나 선정을 강론한 맹자도 목소리만 큰 사람이냐고 물으며 비판한다. 나아가 임금의 잘못된 말이 가져올 결과에 대한 충언에 이르자 선조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지금 좋은 정치를 할 수 없다 말씀하시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좋은 정치를 할 수 있는 때가 따로 있습니까?’ ‘인재가 없는 시대가 있습니까?’ ‘구습을 고집하고 나은 세상으로 나아간 일이 있습니까?’ ‘동과 서로 편을 나누는 것이 나랏일과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까?’ ‘민생의 고통보다 우선한 예법이 있습니까?’ 율곡을 왜 조선 최고의 학자이자 정치가로 꼽는지 진면목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율곡의 경연일기』는 율곡의 직언과 선조의 침묵이 부딪히는 가운데 소통ㆍ화합ㆍ민생을 위한 정치란 무엇인지를 고민한 조선시대 정치의 중심이었던 ‘경연’의 현장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경연일기』는 1565년(명종 20) 7월, 문정왕후의 죽음에 대한 기록으로부터 시작하여 1581년(선조 14) 11월까지, 약 17년간 ‘경연’을 무대로 한 조선 정치의 현장에서 율곡 이이가 쓴 일기이다. 율곡이 홍문관 관원으로서 경연에 참석하고 사간원ㆍ사헌부 관원으로서 언관이자 ‘일기’를 작성하는 겸춘추(사관)의 직무에 대한 책임감에서 쓴 기록이다. 이 일기는 오늘날 우리에게 사림의 등장과 동서분당 등 향후 조선 정치의 향방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선조 시대를 생생하게 조망하게 한다. 특히 파란의 시대를 거치며 숱하게 명멸해간 100여 명에 가까운 인물들의 전기적 초상을 사건과 연관하거나 ‘졸기’의 형식으로 신랄하면서도 엄격하게 드러내는 대목들은 율곡 스스로 얼마나 치열한 삶을 살았는지 그의 인생관과 인물관, 경제관을 동시에 반증하고 있다. 율곡은 경연일기의 마지막 대목을 쓴 2년 뒤인 1583년(선조 16) 6월, 선조로부터 ‘나라 일을 그르친 소인’이라는 전교를 듣고 파주로 낙향한다. 그리고 이듬해 1월 16일 서울 대사동(탑골공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불과 49세였다. 『율곡의 경연일기』는 역사학자 오항녕 교수(전주대)의 정확하고도 쉬운 번역과 해설로, 동료 학자들과 함께 물두하고 있는『율곡전서』정본화의 첫 결실이다. 오항녕 교수는 『경연일기』의 번역과 아울러, 이 텍스트가 등장한 시대의 이해를 돕기 위한 쟁점-상복논쟁, 이황과 이이의 차이의 배경, 조광조와 기묘사화, 공안 개정, 군적 정리 등-을 추출하여 ‘경연일기 깊이읽기’로 해설을 더함으로써 독자의 이해를 돕고 있다. 율곡과 선조가 겪었던 긴장에 ‘요순’이 등장하는 까닭은? 선조 초반의 정치상황은 어떠했는가? 명종의 죽음과 함께 선조가 등극했고, 윤원형으로 대표되던 외척 권신들이 몰락했다. 선조가 이황, 이항, 조식 등을 불러내면서 새로운 정치에 대한 기대 또한 높았다. 율곡은 경연에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선조에게 ‘좋은 정치’를 행할 것을 촉구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개혁 방안을 올렸다.『경연일기』의 초반, 율곡의 충언과 비전에 대해 선조는 율곡이 올리는 옳지만 싫은 소리를 억누르지 않고 침묵으로나마 인정한다. 하지만 율곡의 기대와 달리 선조의 망설임은 더해가고 번번이 옛 규례를 고치기 어렵다는 핑계를 대거나, “나는 덕이 없는 데다 다스리기도 어려운 때를 만나 큰일을 하기 어렵다”는 말을 되풀이한다. 율곡은 선조의 이런 태도를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주상께서는 ‘좋은 정치를 할 능력이 없다’고 하시나, 신은 믿지 아니합니다. 지금 전하께서 여색에 깊이 현혹되셨습니까. 음악을 좋아하십니까. 술을 즐기십니까. 말 타기와 사냥을 좋아하십니까.”라며 좋은 정치가 이뤄지지 못하는 것은 공부가 부족하고 의지가 없기 때문이라는 점을 적시하고, 스스로 능력이 부족하다면 능력 있는 신하를 기용하여 일을 맡기면 될 것이라고 선조를 다그친다. 선조가 20세가 되던 해(선조 4) 4월 율곡은 “이황이 죽고 중망이 노수신에게 쏠려 있으나, 상은 은총만 베풀 뿐 국사를 같이 다스릴 뜻은 없어, 수신의 의견을 대부분 채택하지 않았다.”고 아쉬워했다. 이듬해 8월 기대승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할 때도 “상이 중히 돌아보는 마음이 없어 고향으로 갔다”고 판단했다. 선조 8년 율곡은 “예전에 맹자가 제 선왕에게 ‘사방 국경 안이 다스려지지 않았으면 어찌 하겠습니까?’ 하고 묻자, 왕이 좌우를 돌아보고 다른 말을 하였는데 주자는 그가 큰일을 할 수 없다고 비판하였습니다.”라고 하며, “지금도 나라 안이 다스려지지 않았으니, 전하께서는 어찌하시렵니까?”라고 말했다. 제 선왕처럼 선조 역시 답하지 않았다. 선조와 사림의 갈등이 을사위훈 삭제 문제와 선조의 생부 덕흥군 추숭을 둘러싸고 깊어간다. 율곡은 덕흥군 추숭을 추진하던 임기가 사간원의 탄핵을 받았음에도 죄를 주지 않은 이유가, 선조가 사류를 싫어하였기 때문이라고 단정한다. 그리고 “주상의 마음이 이러하니, 어찌 치세를 바랄 도리가 있겠는가?”라고 실망한다. 실망은 정언지를 충청 감사에 임명할 때 또 이어졌다. 율곡은 선조가 무능한 정언지를 탁용하여 사류들이 시정의 잘잘못을 말하지 못하도록 길들이려는 처사로 보았다. 『경연일기』의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는 율곡의 ‘직간’과 선조의 ‘침묵’이란 긴장 관계를 통상적인 정치영역에서 명령과 복종이란 위계적 종속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과연 율곡이 『경연일기』를 통해 전하고자 한 사상과 경세관은 무엇인가? 이 책을 번역하고 정본화를 시도한 오항녕 교수는 『경연일기』를 읽는 관전 포인트에 대해 첫째는 상하(上下)의 관계, 즉 권력 문제이고, 둘째는 그 권력을 통해서 사회의 삶을 어떻게 조직, 경영할 것인가 즉 경세론의 측면에서 일독하기를 권한다. 그는 “율곡이 ‘임금과 신하의 교류와 소통’을 강조한 핵심은 현실 정치권력에서 나타나는 비대칭적 위계를 ‘요순’이란 성인 모델을 통해 보편적 가치를 지닌 대칭성으로 바꾸고, 이를 경세론의 구체성 속에서 실현하는 방식”으로 설명한다. 다시 말해 율곡과 사림들은 인(仁)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왕에게 요구하며 기대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떠나겠다고 협박(?)을 하고, 선조는 이를 강제적인 명령과 복종으로 억누르지 않고 침묵으로나마 지지하는 양상을 보인다는 것이다. 가칭 ‘요순담론’이라는 이 기본틀이 오항녕 교수는 이때에 만들어지고 조선 후기 사회를 이끌어간 동력의 하나라고 한다. 그리고 그 공간이 경연이었다.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당시 조정의 풍토. 텔레비전을 보면 국무위원들은 열심히 대통령의 말을 받아 적는데 막상 뉴스를 통해 확인하는 대통령의 말에는 받아 적을 만한 내용이 거의 없는 현재의 정치. 오항녕 교수는 정말 율곡 때와 대비된다며 이 대비야말로 역사학의 과제라 한다. 율곡의 경세론, 소통ㆍ화합ㆍ민생을 위한 정치란 무엇인가 율곡이 실현하고자 한 요순 방식의 ‘교류와 소통’이 어떻게 민생을 위한 경세론으로 이어지는지 『경연일기』는 펼쳐낸다. 퇴계 이황에게 삶의 화두이자 과제는 조광조 등 사화(士禍)

저자 소개

이이(李珥, 1536∼1584)
율곡은 퇴계와 쌍벽을 이루는 조선 시대의 대학자, 어려서부터 시를 잘 지었던 문학 신동, 시험에서 아홉 번이나 수석을 차지한 천재, 10만의 군대를 양성하자고 했던 선견지명을 가진 관리, 신사임당의 아들 등으로 잘 알려져 있다. 율곡의 이름은 이이고, 자는 숙헌, 시호는 문성이다. 1536년(중종 31년)에 태어나고 49세 때인 1584년(선조 17년)에 사망했다. 아버지 이원수와 어머니 신사임당의 4남 3녀 가운데 셋째 아들이다. 율곡이 문학 신동, 대학자, 뛰어난 정치가로서 역사에 길이 남을 인물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타고난 자질이 바탕이 되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겠지만, 타고난 자질을 꽃피우지 못한 사람도 많다는 점을 고려하면 율곡을 율곡답게 만든 요인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첫째, 신사임당을 어머니로 두었다는 점이다. 율곡은 어렸을 때 문학, 예술에 조예가 깊은 신사임당으로부터 수학했다. 지금도 부모가 자식을 가르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더구나 조선 시대 여자는 한문 서적을 읽지 않는 것이 상식이다. 어머니에게서 글을 배우고 학문을 익히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글을 읽고 쓰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고, 또 그것이 남들과는 독자적인 길을 갈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둘째, 퇴계라는 뛰어난 선배가 있었다는 점이다. 율곡은 23세 때 도산서원으로 직접 퇴계를 방문했고 그 뒤로도 편지를 주고받으며 학문과 개인적 신상에 관해 의견을 나눴다.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퇴계를 극구 만류했고, 퇴계가 죽고 나서는 만시(輓詩)를 지어 애도했다. 율곡의 학문적 업적이 뛰어다나는 것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고 지금도 주목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퇴계와 함께 조선 성리학의 두 줄기를 형성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후대 학자들이 학파와 붕당의 형성에 따라 퇴계와 율곡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르는 것처럼 만들고, 그에 따라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적대적인 관계처럼 되어버렸지만, 당대에는 서로를 인정한 좋은 선후배였다. 율곡은 그런 훌륭한 선배와의 편지 교류 등을 통해 학문적 연마를 할 수 있었고, 선배가 이루어놓은 성과를 디딤돌로 해서 자신의 학문적 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셋째, 선조 시대에 활동했다는 점이다. 율곡이 관직에 진출하자마자 문정왕후가 사망하고 외척인 윤원형이 탄핵을 받았다. 사화로 얼룩졌던 시대는 지나가고 사림이 중앙의 무대에 오르는 때가 된 것이다. 개혁 의지가 강렬하고 학문적 역량이 뛰어난 율곡이 사림파가 정계의 중심이 된 때에 관직에 들어갔다는 것은 행운이었다. 율곡보다 서른다섯 살 위였던 퇴계의 경우 사림이 위축되었던 때에 관계에 있었으므로 조정에 염증을 느끼고 고향으로 물러나는 쪽으로 생각을 굳혔던 것과는 대비된다. 물론 선조의 한계, 사림의 분열 등 이후 전개되는 상황이 율곡을 괴롭혔다는 점을 간과할 순 없다. 10만 양병설 등의 건의에 대해 선조가 미온적으로 받아들였고, 또 붕당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을 견지하여 조율하려고 했으나 동·서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받는 결과를 낳아 정치적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렇더라도 율곡은 항상 중앙 정계의 한 중심에 서 있었다. 넷째, 뛰어난 친구들과 교류했다는 점이다. 평생의 친구인 성혼, 송익필, 정철 등 당대의 쟁쟁한 인사들이 주위에 있어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부족한 것을 채워주고 격려해 주어 자신의 역량을 펼칠 수 있었다. 율곡은 몸이 좋지 않거나 뜻이 좌절될 때면 선대의 고향인 파주로 물러나 학문과 교육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 결과 학문과 교육 분야에서도 많은 성과를 거둘 수 있었고 제자도 많이 양성했다. 저술로는 ≪성학집요≫, ≪소학집주≫, ≪경연일기≫, ≪만언봉사≫, ≪기자실기≫, <인심도심설>, <김시습전>이 있다. 5000원짜리 화폐에는 율곡의 초상이 들어 있고, 신사임당의 초상은 5만 원권 화폐에 쓰인다. 율곡은 지금도 우리와 무관하지 않은 소중한 인물인 셈이다. 


 

역자 소개

전주대학교 역사문화콘텐츠학과 교수. ①자료조사・정리 및 번역 ②연구가 덜 된 관심분야에 대한 탐구 ③기존 연구를 비판하는 논설. 이 세 가지가 역사학도가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지금 이 시간에도 조선 문명을 주제로 이 셋 중 한 가지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아니면 시민, 학생들과 세미나를 하고 있든지.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를 졸업했고, 지곡서당(태동고전연구소)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한국사상사연구소・국가기록원에 재직했고, 현재 동아시아기록위원회 이사이다. 
지은 책으로 『조선의 힘』 『기록한다는 것』 『광해군—그 위험한 거울』 『밀양 인디언, 역사가 말할 때』 『유성룡인가 정철인가』 『조선 역사학의 저력』 『경연—평화로운 나라로 가는 길』등이 있고, 『사통』 『율곡의 경연일기』 『문곡집文谷集』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머리말

옮긴이의 말
율곡이 선조에게 바랐던 것은 사류와의 소통이었다. 『경연일기』의 함축적 키워드는 태泰와 신信이었다. 우주적 질서에서 태의 성취, 사회적 삶에서의 신의 구현이라는 두 축에서 조선 후기를 이끌어간 율곡 사상의 핵심을 간취할 수 있다. 신뢰는 국왕에 대한 사류의 신뢰만을 의미하지도, 사류에 대한 국왕의 신뢰만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조정을 신뢰할 수 있는 권력’으로 만들어야 했으며, ‘백성이 신뢰할 수 있는 조정이 되어야’ 했다. _ 옮긴이 해제 중에서

책 속에서

상이 사정전에서 조강에 임하였다. 그때에 상이 아직도 권도를 좇지 아니하니 영상 홍섬 이하가 다 권도를 따르시라고 반복하여 아뢰었으나 상이 모두 답하지 아니하였다. 집의 신점이 아뢰기를,
“북병사 박민헌이 늙고 재략이 없으니 불가불 체직시켜야 하겠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북방이 텅 비어 오랑캐 기병이 쳐들어온다면 막아낼 계책이 없으니 미리 장수를 선택하여 기르십시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정에 큰소리치는 사람이 많으니 오랑캐 기병이 오거든 큰소리치는 사람을 시켜 막을 것이다.”
하였다. 이이가 나아가서 아뢰기를,
“주상께서 말씀하신 ‘큰소리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을 지목하신 것입니까. 만일 큰소리만 하고 실속이 없는 자를 쓰면 반드시 일을 그르칠 것인데, 어찌 그 사람을 시켜 적을 막게 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옛것을 좋아하고 성인을 사모하는 사람을 큰소리치는 사람이라고 하셨다면 주상의 말씀이 극히 온당치 못합니다. 예전에 맹자가 양 혜왕과 제 선왕을 만나서도 오히려 요순을 목표 삼았는데, 이것이 어찌 큰소리를 좋아하는 것이었겠습니까.
지금 유학자의 말은 털끝만큼도 채택하지 않으면서 한갓 큰소리라고 지목하시어 그들로 하여금 북쪽 오랑캐를 막도록 하시겠다는 것은 마땅치 아니한 듯합니다. 임금의 말이 한번 나오면 사방으로 전파되어 옳지 못한 일이라면 천 리 밖에서도 왕명을 거역하는 법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유학자를 큰소리나 치는 사람이라고 지목하여 북쪽으로 보내려고 하시면, 어진 사람은 기운이 꺾이고 불초한 자는 갓을 털며 좋아할 것입니다. 임금의 발언이 선행하는 사람을 좌절시키고 악행을 저지르는 자를 기쁘게 해 준다면 어찌 그릇된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상이 아무 말이 없었다. 이이가 이어서 아뢰기를,
“전에 주상께서 착한 말을 즐겨 들으시며 유신에게 마음을 기울이시어 온 나라가 다 기뻐하였는데, 요즘 주상의 마음이 돌연 변하시어 유신을 소외하시니 전하께서 무슨 까닭으로 이러십니까. 마음을 돌리시어 어진 이를 가까이하고 선을 좋아하시어 사림으로 하여금 흥기하도록 하시면 더할 나위 없이 다행일 것입니다.”
-본문 357~359쪽



목차

목차
치세로 가는 길 _ 머리말
외척의 몰락 _ 명종 20년(1565, 을축년)
사림의 정치 바로잡기 _ 명종 21년(1566, 병인년)
다음 임금은 누구입니까 _ 명종 22년(1567, 정묘년)
선조의 시대가 열리다 _ 선조 즉위년(1567, 정묘년)
인순왕후 수렴청정을 거두다 _ 선조 1년(1568, 무진년)
정치를 하려면 때를 알아야 합니다 _ 선조 2년(1569, 기사년)
을사사화를 바로잡다 _ 선조 3년(1570, 경오년)
한심한 재상 위태로운 나라 _ 선조 4년(1571, 신미년)
대신은 바른말을 하지 않고 나라의 기강은 해이해지니 _ 선조 5년(1572, 임신년)
정치를 잘하려는 뜻이 있습니까 _ 선조 6년(1573, 계유년)
좋은 정치를 하려거든 공부해야 합니다 _ 선조 7년(1574, 갑술년)
김효원 편 심의겸 편 _ 선조 8년(1575, 을해년)
사림 끝내 갈라서다 _ 선조 9년(1576, 병자년)
을사위훈을 삭제하다 _ 선조 10년(1577, 정축년)
동인과 서인으로 나누어지다 _ 선조 11년(1578, 무인년)
누가 쓴 상소인가 _ 선조 12년(1579, 기묘년)
묵은 폐단을 버려야만 나아갈 수 있습니다 _ 선조 13년(1580, 경진년)
인재가 없는 시대는 없습니다 _ 선조 14년(1581, 신사년)
≪경연일기 깊이 읽기≫
ㆍ 상복논쟁: 흰 갓 검은 갓이 왜 그리 중요한가
ㆍ 노수신과 숙흥야매잠
ㆍ 퇴계 이황의 독서당 동창생들
ㆍ 사림과 유속의 구분
ㆍ 세대차이로 본 성리학 이황과 이이
ㆍ 조광조, 그리고 기묘사화의 조짐
ㆍ 율곡의 만언소: 만언봉사
ㆍ 공안 개정이 필요했던 이유
ㆍ 황랍사건이 내포한 시대상
ㆍ 가슴속에 맹자를 담은 사람들
ㆍ 군적정리
옮긴이 해제
부록 선조?이이의 세계도|이이가 쓴 인물 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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