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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무의 동몽선습 주자의 동몽수지 이이의 격몽요결

원제 : 童蒙先習 童蒙須知 擊蒙要訣

박세무, 주자, 이이 저 | 이창성 역 | 나무의꿈 | 2017년 0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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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91168534 / 288쪽 150 x 2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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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출판사 리뷰

출판사 서평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누구나 지켜야 할 지침서! 과거의 어린이들은 보통 7~8세에 서당에 입학해서, 대략 15~16세까지 서당을 다녔다. 오늘날 같으면 중학교 과정까지 서당에서 마쳤다고 볼 수 있다. 어린이들이 서당에서 공부하는 것은 보통 강독(講讀)과 제술(製述)과 습자(習字)의 세 가지였다. 강독은 소리 내어 책을 읽으며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고, 제술은 글짓기와 논술이며, 습자는 글씨 쓰기였다. 강독은 『천자문(千字文)』에서 시작해서 『동몽선습(童蒙先習)』 『격몽요결(擊蒙要訣)』 『소학(小學)』 『명심보감(明心寶鑑)...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누구나 지켜야 할 지침서! 과거의 어린이들은 보통 7~8세에 서당에 입학해서, 대략 15~16세까지 서당을 다녔다. 오늘날 같으면 중학교 과정까지 서당에서 마쳤다고 볼 수 있다. 어린이들이 서당에서 공부하는 것은 보통 강독(講讀)과 제술(製述)과 습자(習字)의 세 가지였다. 강독은 소리 내어 책을 읽으며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고, 제술은 글짓기와 논술이며, 습자는 글씨 쓰기였다. 강독은 『천자문(千字文)』에서 시작해서 『동몽선습(童蒙先習)』 『격몽요결(擊蒙要訣)』 『소학(小學)』 『명심보감(明心寶鑑)』 『사서삼경(四書三經)』 『사기(史記)』 등 점차 그 수준이 높아졌다. 제술은 5언 절구나 7언 절구의 작문 등이 주를 이루었지만, 규모가 작은 서당에서는 아예 가르치지도 않았다. 처음에는 학동들에게 『천자문』의 한 글자씩을 반복적으로 소리 내어 읽어서 글자를 암기하게 했다. 그 다음에 『동몽선습』 『계몽편(啓蒙篇)』 『동몽수지(童蒙須知)』 『격몽요결』 같은 책을 같은 방식으로 읽으면서 문장의 이치를 깨닫게 했고, 마지막으로 학동 스스로 그 뜻을 깊이 깨치도록 이끌었다. 따라서 『동몽선습』 『계몽편』 『동몽수지』 『격몽요결』 등은 사실상 어린이들의 필수 교재나 다름없었다. 『동몽선습』에서는 윤리와 도덕을 배우는 오륜(五輪)의 도리와, 중국의 역사를 비롯한 우리나라의 역사를 간단명료하게 밝혔고, 『계몽편』에서는 자연현상과 인간의 도리에 대해서 설명했으며, 『동몽수지』에서는 어린아이들이 갖추어야할 몸가짐과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열거했다. 또 『격몽요결』에서는 어린이들에게 뜻을 세우고, 부모를 봉양하며, 남을 대접할 줄 알고, 몸을 닦으며, 어떻게 책을 읽을 것인가 등에 대해 역설했다. 비록 이 책의 내용이 과거에는 어린이들이 배우는 것이었지만,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누구에게나 마음의 수양서가 되는 것이므로, 부단히 읽어서 마음의 거울로 삼아도 좋을 것이다.

저자 소개

[동몽선습]의 지은이 박세무(1487∼1554)는 성종 8년에 태어난 조선시대 사림가의 후손이다. 할아버지는 신동(信童)이고, 아버지는 성균관 생원 중검(仲儉)이며, 어머니는 부사 이관식(李寬植)의 딸이다. 본관은 함양(咸陽)이고, 자는 경번(景蕃)이며, 호는 소요당(消遙堂)이다. 중종 11년(1516) 생원시에 합격한 뒤 조광조, 김정 등 신진사림들과 교유하기도 했으나 기묘사화가 있은 다음 크게 상심하고 실의하여 학문에만 전념했다.
그러다가 중종 26년(1531)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가 헌납을 거쳐 사관(史官)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곧은 성정과 직필(直筆)로 말미암아 최고의 권신이던 김안로(金安老)의 미움을 받아 중종 34년(1539)에 오늘날 경상남도 하동인 마전군수로 밀려났다가 곧바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중종 39년(1544)에 전적(典籍)·참교(參校)가 되어 다시 조정으로 돌아온 그는 조광조의 신원(伸寃)을 요청하는 상소문을 올렸으며, 그해에 [동몽선습]을 간행했다. 을사사화가 일어나던 이듬해 사복시정이 되었다가 안변부사로 나갔으며, 그 뒤에 내자시정·내섬시정·군자감정 등을 두루 거쳤다. 

이이(李珥, 1536∼1584)
율곡은 퇴계와 쌍벽을 이루는 조선 시대의 대학자, 어려서부터 시를 잘 지었던 문학 신동, 시험에서 아홉 번이나 수석을 차지한 천재, 10만의 군대를 양성하자고 했던 선견지명을 가진 관리, 신사임당의 아들 등으로 잘 알려져 있다. 율곡의 이름은 이이고, 자는 숙헌, 시호는 문성이다. 1536년(중종 31년)에 태어나고 49세 때인 1584년(선조 17년)에 사망했다. 아버지 이원수와 어머니 신사임당의 4남 3녀 가운데 셋째 아들이다. 율곡이 문학 신동, 대학자, 뛰어난 정치가로서 역사에 길이 남을 인물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타고난 자질이 바탕이 되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겠지만, 타고난 자질을 꽃피우지 못한 사람도 많다는 점을 고려하면 율곡을 율곡답게 만든 요인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첫째, 신사임당을 어머니로 두었다는 점이다. 율곡은 어렸을 때 문학, 예술에 조예가 깊은 신사임당으로부터 수학했다. 지금도 부모가 자식을 가르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더구나 조선 시대 여자는 한문 서적을 읽지 않는 것이 상식이다. 어머니에게서 글을 배우고 학문을 익히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글을 읽고 쓰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고, 또 그것이 남들과는 독자적인 길을 갈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둘째, 퇴계라는 뛰어난 선배가 있었다는 점이다. 율곡은 23세 때 도산서원으로 직접 퇴계를 방문했고 그 뒤로도 편지를 주고받으며 학문과 개인적 신상에 관해 의견을 나눴다.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퇴계를 극구 만류했고, 퇴계가 죽고 나서는 만시(輓詩)를 지어 애도했다. 율곡의 학문적 업적이 뛰어다나는 것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고 지금도 주목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퇴계와 함께 조선 성리학의 두 줄기를 형성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후대 학자들이 학파와 붕당의 형성에 따라 퇴계와 율곡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르는 것처럼 만들고, 그에 따라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적대적인 관계처럼 되어버렸지만, 당대에는 서로를 인정한 좋은 선후배였다. 율곡은 그런 훌륭한 선배와의 편지 교류 등을 통해 학문적 연마를 할 수 있었고, 선배가 이루어놓은 성과를 디딤돌로 해서 자신의 학문적 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셋째, 선조 시대에 활동했다는 점이다. 율곡이 관직에 진출하자마자 문정왕후가 사망하고 외척인 윤원형이 탄핵을 받았다. 사화로 얼룩졌던 시대는 지나가고 사림이 중앙의 무대에 오르는 때가 된 것이다. 개혁 의지가 강렬하고 학문적 역량이 뛰어난 율곡이 사림파가 정계의 중심이 된 때에 관직에 들어갔다는 것은 행운이었다. 율곡보다 서른다섯 살 위였던 퇴계의 경우 사림이 위축되었던 때에 관계에 있었으므로 조정에 염증을 느끼고 고향으로 물러나는 쪽으로 생각을 굳혔던 것과는 대비된다. 물론 선조의 한계, 사림의 분열 등 이후 전개되는 상황이 율곡을 괴롭혔다는 점을 간과할 순 없다. 10만 양병설 등의 건의에 대해 선조가 미온적으로 받아들였고, 또 붕당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을 견지하여 조율하려고 했으나 동·서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받는 결과를 낳아 정치적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렇더라도 율곡은 항상 중앙 정계의 한 중심에 서 있었다. 넷째, 뛰어난 친구들과 교류했다는 점이다. 평생의 친구인 성혼, 송익필, 정철 등 당대의 쟁쟁한 인사들이 주위에 있어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부족한 것을 채워주고 격려해 주어 자신의 역량을 펼칠 수 있었다. 율곡은 몸이 좋지 않거나 뜻이 좌절될 때면 선대의 고향인 파주로 물러나 학문과 교육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 결과 학문과 교육 분야에서도 많은 성과를 거둘 수 있었고 제자도 많이 양성했다. 저술로는 ≪성학집요≫, ≪소학집주≫, ≪경연일기≫, ≪만언봉사≫, ≪기자실기≫, <인심도심설>, <김시습전>이 있다. 5000원짜리 화폐에는 율곡의 초상이 들어 있고, 신사임당의 초상은 5만 원권 화폐에 쓰인다. 율곡은 지금도 우리와 무관하지 않은 소중한 인물인 셈이다. 


 

(朱子)
중국 남송의 유학자. 이름은 희(熹), 자는 원회(元晦), 호는 회암(晦庵). 주자는 존칭이다. 신안(안휘성) 사람. 주자학을 집대성하였다. 19세에 진사에 합격하여 관계(官界)에 들어갔으며 그 전후에 도학 외에 불교, 도교도 공부하였다. 24세에 이연평(李延平)과 만나 그의 영향 하에서 정씨학(程氏學)에 몰두하고 다음에 주염계, 장횡거(張橫渠), 이정자(二程子)의 설을 종합 정리하여 주자학으로 집대성하였다.

목차

목차
머리말
동몽선습(童蒙先習)
어제동몽선습서ㅣ동몽선습ㅣ부자유친ㅣ군신유의ㅣ부부유별ㅣ장유유서
붕우유신ㅣ총론ㅣ발문ㅣ필선채응복소
계몽편(啓蒙篇)
수편ㅣ천편ㅣ지편ㅣ물편ㅣ인편
동몽수지(童蒙須知)
동몽수지 ㅣ 1.의복관구ㅣ2.언어보추ㅣ3.쇄소연결ㅣ4.독서문자ㅣ5.잡세사의
격몽요결(擊蒙要訣)
격몽요결서ㅣ1. 입지장ㅣ2. 혁구습장 ㅣ 3. 지신장 ㅣ 4. 독서장 ㅣ5. 사친장
6.상제장 ㅣ 7.제례장 ㅣ 8.거가장 ㅣ 9.접인장 ㅣ 10.처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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