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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백가의 숲에서 나를 힐링하라

열자, 한비자, 공자 외 저 | 정철 역 | 오늘 | 2015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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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35505210 / 328쪽 140 x 2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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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출판사 리뷰

출판사 서평 천하의 이치를 꿰뚫는 지혜의 보고(寶庫) “보이는 것에 눈을 감고, 보이지 않는 것에 눈을 떠라” 촌철살인(寸鐵殺人)이라는 말이 있다. 짧은 글 하나가 커다란 감동을 불러일으킨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생활 곳곳에서 얻게 되는 경구나 격언 또는 책 속에서 진한 감동으로 번뜩이는 한 줄의 글을 발견했을 때, 일상의 권태를 벗어던지고 순식간에 신선함으로 휘감긴 적이 종종 있을 것이다. 또 방대한 분량의 책을 끝까지 읽고 난 후에도 어딘가 미진하고 꼭 있어야 할 것이 빠진 것 같은 허전함에 당혹했던 경우도 있을 것이다. 쉽게 읽을... 천하의 이치를 꿰뚫는 지혜의 보고(寶庫) “보이는 것에 눈을 감고, 보이지 않는 것에 눈을 떠라” 촌철살인(寸鐵殺人)이라는 말이 있다. 짧은 글 하나가 커다란 감동을 불러일으킨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생활 곳곳에서 얻게 되는 경구나 격언 또는 책 속에서 진한 감동으로 번뜩이는 한 줄의 글을 발견했을 때, 일상의 권태를 벗어던지고 순식간에 신선함으로 휘감긴 적이 종종 있을 것이다. 또 방대한 분량의 책을 끝까지 읽고 난 후에도 어딘가 미진하고 꼭 있어야 할 것이 빠진 것 같은 허전함에 당혹했던 경우도 있을 것이다. 쉽게 읽을 수 있으면서 무한한 감동을 얻을 수 있다면, 또 그 감동을 고스란히 실생활에 접목시킬 수 있는 책이 있다면 그 책은 우리에게 더없이 소중하리라. 신간을 읽기에도 바쁠 뿐만 아니라 정보의 홍수 속에서 정신없이 앞으로만 치달려야 하는 오늘날에는 더더욱 그런 글들에 갈증을 느끼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만한 책을 구한다는 것은 쉽지가 않다. 나도 끝내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평생을 한문학에 바쳐온 나에게 커다란 짐이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고민의 무게는 더해갔다. 보편적인 삶의 형태가 아닌 한문학의 길을 걷는 나에게는 무리한 일인 듯싶기도 했다. 그래서 성현들의 고전에서 길을 찾아보기로 했다. 고전에 담겨진 수많은 의미, 그것을 통해 전해져 오는 잔잔한 감동의 파장은 나 개인에게만 국한된 경험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문학 연구의 길을 걸어왔던 내가 고전에서 대안을 찾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삶을 돌이켜보거나 하나하나의 사물을 깊이 관찰하는 일에서 멀어져 현상적인 면에만 치우쳐져 있는 오늘의 우리에게 고전의 역할이 지대하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쉽게 읽을 수 있으면서 무한한 감동을 부여하는 책, 그런 글을 발견했다. 바로 제자백가였다. 제자백가는 동양사상이 너무 심오해 그 뜻을 이해하기가 힘들다는 일반적인 견해를 송두리째 바꿔놓은 책으로 중국 고대 사상가들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한 페이지를 넘지 않는 짧은 문장 속에 담겨진 철학과 삶의 의미를 발견하다 보면 인생의 지표가 든든히 세워짐을 알게 된다. 역사 속에 이름을 길이 남긴 성현들의 글을, 그들의 사상을 우화를 읽듯이 읽을 수 있어서 재미와 함께 자신의 지혜로 남게 되리라 의심치 않는다. -편역자 정철

저자 소개

중국 춘추시대 말기에 활동한 사상가이자 교육자로서 유교의 이론을 집대성한 인물이다. 유교의 개조(開祖)이며 세계 4대 성인의 한 사람으로, ‘공(孔)’은 성이며 ‘자(子)’는 ‘선생’이라는 뜻이다.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이다. 공자는 기원전 551년 노나라 창평향 추읍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공자는 불우한 집안 환경으로 인해 여러 가지 미천한 직업을 가져야 했고 일정한 스승도 없었으나, 청소년기에 학문의 길에 대해서 명확하게 주관을 정리하고 30세 무렵에는 어느 정도 완성한 것으로 짐작된다. 공자는 학문에서 많은 진전을 보이고 관리로서 지위가 오르면서 도덕정치를 주창하며 뜻을 펼치고자 하였으나 현실적인 장벽에 부딪혀 숱한 좌절을 맛보았다. 56세에 자신의 이상을 실현할 군주를 찾아 중국 천하를 떠도는 주유열국(周遊列國)의 길에 올랐지만 아무도 그를 등용하지 않았다. 이에 실망한 공자는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던 고서들로 안회, 자하, 자로 등 제자들을 가르치는 데 더욱 힘썼다. 그러나 아들인 이(鯉)가 죽고, 가장 사랑하는 제자인 안회와 자로도 잇달아 죽는 등 만년에 여러 가지 불행을 겪다가 73세가 되던 해인 기원전 479년에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공자가 세상을 떠난 후 제자들은 그가 남긴 어록을 모아서<논어>를 편찬했다. 그리하여 공자의 가르침은 유교의 경전으로서 오랜 세월에 걸쳐 전해 내려와 동아시아 문화와 사상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또 <시경(詩經)>, <서경(書痙)>, <춘추(春秋)> 같은 책을 엮고 <역경(易經)>을 끈이 세 번이나 떨어질 정도로 읽었다고 한다. 만년의 공자에게는 여러 가지 불행이 겹쳤다. 아들인 백어(白魚)가 죽고, 그 후에 가장 사랑하는 제자인 안회와 자로도 잇달아 죽었다. 공자는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은 없어졌다"고 하며 슬퍼하였다. 공자는 만년을 불행하게 지내다가 72세가 된 해인 기원전 479년에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공자가 세상을 떠난 후 제자들은 스승이 남긴 어록을 모아서 <논어>라는 책을 저술하였다. 그리하여 공자의 가르침은 유교로서 오랜 세월에 걸쳐 중국에 전해 내려와 천 수백 년에 걸쳐 중국 사회의 정치, 윤리 도덕의 규범이 되었다. 그리고 한국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조선 시대에는 정치를 비롯하여 학문, 법률, 도덕, 윤리 등 사회를 다스리는 모든 규범이 유교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마천의 『사기』 「열전」에 의하면 이름은 주(周)이며, 몽현(蒙縣) 사람으로 양혜왕(梁惠王) 및 제선왕(齊宣王)과 같은 시대 사람이다. 그의 생존 연대를 정확하게 알아내려는 노력이 많은 학자들에 의해 전개되었지만 아직까지 정론이 없다. 그런 중에도 기원전 359년에 태어나 기원전 289년 내지 기원전 279년에 죽었다는 중국의 역사학자 첸무(錢穆 : 1895~1990년)의 설이 가장 유력하다. 
이름은 가(軻)이고, 자는 자거(子車) 또는 자여(子輿)라 하나 믿을 수는 없다. 전국(戰國) 시대 추(鄒)나라 사람으로, 공자(孔子)의 고향 곡부(曲阜)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추성시(鄒城市)에서 태어났다. 3세 때 부친을 여의고, 그의 어머니가 그를 교육시켰는데, '맹모삼천(孟母三遷)'과 '맹모단기(孟母斷機)' 등의 유명한 일화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맹자는 자신의 학문을 이루고 난 후, 제(齊);송(宋);등;노(魯);위(魏)나라 등을 두루 다니며 당시 제후들에게 '인의(仁義)'와 천하 통일의 방법과 치국의 정책 등에 대해 강술(講述)하였으나, 그의 이론은 당시 제후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70세가 넘은 후에는 더 이상 유세하지 않았고 강학에 전념하였으며, 그의 제자들인 만장(萬章);공손추(公孫丑) 등과 함께 [맹자] 7편을 저술하였다. 맹자는 공자의 학설을 계승하여 후세에 아성(亞聖)이라 불려졌다. 
중국 전국시대의 명인. 성선설을 주장하였음.
사서중의 하나인 이 책은 맹자의 언행을 기록한 것으로 7편으로 나뉘어져 있다. 그는 공자의 인(仁)사상을 발전시켜 왕도국가의 실현과 인간의 본성은 착하다는 이상의 구현을 달성하고자 인의(人義)에 의한 도덕정치를 주장하였다. 

묵자는 성이 묵(墨)이고 이름은 적(翟)이다.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역사적 기록이 많지 않아 자세한 것을 알기는 어렵다. 중국의 역사학자 첸무(錢穆)의 고증에 따르면 BC 479년경에 태어나서 BC 381년경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보인다. ≪묵자≫를 비롯한 여러 자료를 종합적으로 생각해 보면 묵자가 묵가(墨家)를 창시해 활동한 시기는 BC 450년경부터 BC 390년경까지로 춘추 말에서 전국 초에 해당한다. 묵자가 태어난 곳은 공자와 맹자가 태어난 곳과도 가까운 노(魯)나라의 등(滕)이라는 곳으로 지금의 산둥 성(山東省) 텅저우 시(滕州市) 근교에 해당한다. 묵자의 출신 계층에 대해서는 묵(墨)이라는 성과 관련해 전과자라는 설과, 그의 군사 사상과 관련해 무사라는 설 및 기술자 집단을 이끄는 공장(工匠)이라는 설 등이 있으나 모두 분명한 근거가 없는 주장들이다. 묵자는 무학, 문맹의 농부와는 달리 사각(史角)의 자손으로부터 학문을 배운 지식인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일반 서민보다는 높은 계층인 사(士)의 신분이었던 것은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일찍이 유학을 공부했으나 유가의 번잡한 예(禮)에 불만을 품고 새로운 학설을 창설했다. 묵자가 살아 있을 때는 제후들이 서로 다투어 천하가 요동치던 불안한 시대였다. 따라서 묵자는 분쟁을 제지하고 평화를 유지하는 것을 자기의 주요 임무로 삼았다. 그는 바쁘게 유세하고 자기의 이상을 선전하느라 조금도 쉴 틈이 없었다. 그러므로 “묵자의 자리는 따뜻할 날이 없다”라는 말이 전해오는 것이다. 유가의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묵자도 요·순·우·탕·문·무 등의 성왕을 숭상했으며, 특히 하(夏)나라의 우(禹)왕을 존숭해 그의 실천 정신과 희생정신을 따르려 노력했다. 맹자가 묵자를 금수(禽獸)와 같은 존재라고 욕하면서도 “머리끝에서 발뒤꿈치까지 온몸이 다 닳도록 천하를 이롭게 하기 위해 노력했다”라고 칭찬하는 걸 보더라도 묵자의 천하를 위한 희생정신이 어떠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묵자는 사상가이면서도 논리학자이고 군사 전문가였다. ≪묵경(墨經)≫이 쓰인 것은 후기 묵가에 의해서지만 이 안에 들어 있는 기본 사상은 묵자에게서 온 것이다. ‘성수(城守)’ 제편에는 묵자의 탁월한 군사적 식견이 표현되어 있다. 묵자는 또 뛰어난 과학 기술자로 군사 무기를 발명하기도 하고 기하학·광학·역학(力學) 등에 관한 창의적인 이론을 내놓았다. 묵자의 제자는 300명이라고 ≪묵자≫에 나와 있으나 이것이 전부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의 제자 중에는 각국에 나가 관리가 되거나 유세를 하고 다닌 사람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여씨춘추≫에 “공자와 묵자의 무리가 매우 많고 제자들이 매우 많아서 천하에 가득 차 있다”라고 한 것을 보면 그의 학술적인 영향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鄭澈, 1536∼1593]
정철[鄭澈, 1536(중종 31)∼1593(선조 26)]은 조선 중기의 문인이자 정치가다.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이다. 서울 장의동(藏義洞, 지금의 종로구 청운동) 출생으로 돈녕부판관 유침(惟沈)의 아들이다. 어려서 인종(仁宗)의 귀인인 큰누이와, 계림군(桂林君) 유(瑠)의 부인이 된 둘째 누이로 인해 궁중에 출입해 같은 나이의 경원대군[慶源大君, 후의 명종(明宗)]과 친숙해졌다. 10세가 되던 1545년(명종 즉위 원년)의 을사사화에 계림군이 관련되자 그 일족으로서 화를 입어 맏형은 장류(杖流) 중에 죽고, 부 유침은 유배를 가게 되자, 그도 관북(關北)·정평(定平)·연일 등 유배지를 따라다녔다. 1551년에야 해배(解配)되어 조부(祖父)의 산소가 있는 전남 담양 당지산 아래로 이주해, 그곳에서 과거에 급제할 때까지 10여 년간 지냈다. 여기서 김인후, 송순, 기대승 등에게서 학문을 배우고, 임억령에게서 시를 배웠으며, 이이, 성혼, 송익필 같은 유학자들과 교유했다. 1561년(명종 16) 26세에 진사시에 1등으로, 이듬해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사헌부지평을 거쳐 좌랑·현감·전적·도사를 지내고, 31세에 정랑·직강·헌납을 거쳐 지평, 이어 함경도 암행어사가 되었다. 32세에 이이와 함께 사가독서했다. 이어 수찬·좌랑·종사관·교리·전라도 암행어사를 지내다가 40세인 1575년(선조 8) 낙향했다. 43세에 통정대부 승정원 동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관으로 승진해 출사했다. 이후 사간·집의·직제학을 거쳐 승지에 올랐으나, 진도군수 이수(李銖)의 뇌물사건으로 동인의 탄핵을 받아 다시 낙향했다. 45세 되던 1580년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으며, 이때 <관동별곡>과 <훈민가> 16수를 지어 가사와 시조문학의 대가로서의 재질을 유감없이 발휘했으며, 그 뒤 전라도 관찰사·도승지·예조참판·함경도 관찰사 등을 지내고, 48세에 예조판서로 승진, 이듬해 대사헌이 되었으나 역시 동인의 탄핵을 받아 다음 해에 사직, 고향 창평으로 돌아가 4년간 은거했다. 이때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 등의 가사와 수많은 시조·한시 등을 창작했다.
54세에 정여립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우의정으로 발탁되어 서인의 영수로, 최영경 등을 다스리고 철저히 동인을 배제하며 이듬해 좌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1591년 건저문제(建儲問題)로 진주로 유배, 이어 강계로 이배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의 부름을 받아 의주까지 호종했으며, 왜군이 아직 평양 이남을 점령하고 있을 때 경기·충청·전라 삼도체찰사(體察使)를 지내고, 다음 해 명나라에 사은(謝恩) 행차를 다녀왔다. 이 사은사 행차가 빌미가 돼 다시 동인의 모함을 받아 강화의 송정촌에 우거(寓居)하다 이듬해 포폄 많았던 일생을 마감했다.
사후 관작을 추탈(追奪)당했다가 1608년(광해군 원년) 신원되고, 1623년(인조 원년) 복원되었다. 창평의 송강서원, 연일의 오산서원 별사(別祠)에 제향되고 있으며,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정치가로서는 서인의 영수로 ‘조정의 맹호(殿上之猛虎)’였으나, 시문학은 호흡에 맞고 귀에 익은 멋 겨운 장·단가(長·短歌)가 사뭇 취선(醉仙)의 풍기(風氣)요, 정한(情恨)의 자수인 연군(戀君)의 독백은 민족 정서를 접맥해 온 비장(悲壯)이다. 따라서 그의 시문학은 국문시가의 독보임에 틀림없다.

(韓非, ?∼기원전 233년)


중국 전국시대 말기 한(韓)나라의 왕족 출신.
형명(刑名)과 법술(法術)을 익히고 황로학(黃老學)을 받아들여 법가의 학문을 집대성하여 『한비자(韓非子)』를 남겼다. 그러나 뛰어난 저술을 남긴 것과 달리, 심한 말더듬이였다고 한다. 이사(李斯)와 함께 순자(荀子) 밑에서 학문을 익힌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유가의 학문을 줄곧 비판했음에도 그의 저술 속에 유가적 요소도 배어 있는 까닭도 그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한비는 자신의 학문을 조국인 한나라에서 정치를 통해 펴려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매우 낙담했다. 그러다 기원전 233년에 진(秦)나라가 한나라를 공격하자 한나라 왕의 요청에 따라 진나라에 사신으로 갔는데, 조국의 멸망을 막지 못하고 도리어 음모에 걸려 독약을 먹고 자살해야 했다.

성이 열(列)이고 이름은 어구이다. B.C 400년 경 정(鄭)나라에서 태어났다고 알려져 있으나 생애가 분명치 않고 대략 노자의 제자이며 장자의 선배로서 공자와 맹자 중간에 생존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책 속에서

 

위(魏)나라에 동문오(東門吳)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아들이 죽었는데도 조금도 슬픈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보다 못해 그의 아내가 물었다.
“당신은 끔찍이도 자식을 사랑하더니만 그 자식이 죽었는데 조금도 슬퍼하는 기색이 없으니 어떻게 된 노릇입니까?”
그러자 동문오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동안에도 내게 자식이 없지 않았는가. 자식이 없었을 때 별로 자식 없는 것이 슬픈 줄을 모르고 지내왔지. 지금도 그때와 다를 것이 없지 않은가. 다시 원래대로 된 것뿐이니 슬퍼할 것까지야 없지 않은가?” -P. 64

송(宋)나라의 시골 사람 하나가 박옥(璞玉)을 얻어 대신인 자한(子罕)에게 바치려 했으나 자한이 받지 않았다. 그래서 그 사람은 자기의 뜻을 말했다.
“이것은 보물이옵니다. 상공과 같은 높으신 분이 가지실 물건으로, 저같이 천한 사람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자 자한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대는 그것을 보물로 알고 있지만, 나는 그대가 주는 박옥을 받지 않는 것을 보물로 생각한다네.”
말하자면 이 시골 사람은 박옥은 누구나 갖고 싶어 하는 줄로 생각했지만, 자한은 그렇게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노자는 ‘재물을 바라지 않기를 바라고, 얻기 힘든 물건을 귀하게 여기지 말라’고 했다. -P. 101

제(齊)나라의 대부인 습사미가 당시 실권자인 전성자를 만나러 갔었다. 전성자는 그와 함께 높은 대(臺)로 올라가서 사방을 구경했다. 삼면은 한없이 멀리까지 보이는데, 남쪽만은 습사미의 집 나무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전성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습사미는 집으로 돌아오자, 곧 나무를 베게 했는데 도끼로 몇 번 찍다가는 다시 그만두게 했다. 그래서 청지기가 물었다.
“갑자기 생각이 달라지셨습니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속담에 ‘깊은 물속의 고기를 헤아리는 재주를 가진 사람은 상서롭지 못하다’고 하지 않았느냐. 남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은 화를 입게 된다는 뜻이다. 지금 전성자는 큰일을 꾸미려 하고 있다. 그로 하여금, 내가 남의 속마음까지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만들면 내 몸이 위태롭다. 나무를 베지 않았다고 해서 죄가 될 리는 없다. 그러나 남의 속을 들여다본 죄는 실상 큰 것이다.” -P. 111

목차

목차
머리글
列子篇
韓非子篇
莊子篇
孔子篇
孟子篇
墨子篇
荀子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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