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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94054247 / 656쪽 160 x 2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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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서평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비평가 로저 에버트 회고록 할리우드는 그 자체만으로 존중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할리우드는 우리가 보유한 가장 중요한 문화적 목소리라 할 인물이 내놓은 재치 넘치면서도 열정적인 회상과 스크린을 공유하는 앙상블 배우다. -퍼블리셔스 위클리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비평가 로저 에버트 로저 에버트는 1967년부터 『시카고 선 타임스』에서 영화 평론을 해왔다. 퓰리처상을 수상한 최초의 영화 평론가인 그는 를 1999년 진 시스켈이 사망할 때까지 공동 진...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비평가 로저 에버트 회고록 할리우드는 그 자체만으로 존중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할리우드는 우리가 보유한 가장 중요한 문화적 목소리라 할 인물이 내놓은 재치 넘치면서도 열정적인 회상과 스크린을 공유하는 앙상블 배우다. -퍼블리셔스 위클리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비평가 로저 에버트 로저 에버트는 1967년부터 『시카고 선 타임스』에서 영화 평론을 해왔다. 퓰리처상을 수상한 최초의 영화 평론가인 그는 를 1999년 진 시스켈이 사망할 때까지 공동 진행하고, 그 후에는 2006년까지 리처드 뢰퍼와 함께 공동 진행하면서 텔레비전에 고정 출연해왔다. 그러다가 갑상선암 치료에 따른 합병증 때문에 먹고 마시고 말하는 능력을 잃었다. 그러나 에버트는 목소리를 잃으면서 오히려 더욱 많은 글을 쓰고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작가가 됐다. 그리고 이제 그는 자신의 인생과 경력에 대한 극적인 이야기를 처음으로 남김없이 털어놓는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과 상실한 것들, 집착하는 것들, 알코올 중독에서 회복된 과정, 결혼, 정치관, 영적인 믿음들을 연대기로 기록한다. 또한 그는 신문에 종사한 다채로운 친구들, 오프라 윈프리와 스터즈 터켈을 비롯한 여러 인물들과 맺은 우정, 리 마빈, 로버트 미첨, 존 웨인을 비롯한 무수히 많은 영화 스타들에 대한 통찰력, 잉그마르 베르히만과 마틴 스코시즈, 베르너 헤어초크 같은 굴곡 많은 감독들에 대한 관점도 세세하게 글로 옮긴다. 이것은 로저 에버트만이 말할 수 있는 이야기다. 그의 독자들이 오랫동안 소중하게 여겨온 것과 동일한 심오한 통찰력과 천연덕스러운 위트, 날카로운 관찰력으로 가득한 이 책은 회고록의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다. 이 책은 인생 그 자체를 바라보는 뛰어나고 따스하며 영감 넘치는 시선이다. ∠추천사 할리우드는 그 자체만으로 존중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할리우드는 우리가 보유한 가장 중요한 문화적 목소리라 할 인물이 내놓은 재치 넘치면서도 열정적인 회상과 스크린을 공유하는 앙상블 배우다. -퍼블리셔스 위클리 에버트가 밝혔듯, 그의 침묵은 그의 내면의 목소리를 더욱 선명하게 만들었고, 이 책은 그 증거물이다. 어린 시절에 대한 그의 상세한 묘사는 그가 살았던 시대의 풍부한 활력에 바치는 헌사이자, 그의 인지력과 기억력, 묘사력에 바치는 헌사다. 특히 로버트 미첨과 리 마빈, 존 웨인에 대한 스케치에서는 활력이 고동친다. -리처드 브로디, 뉴요커 에버트는 미국에서 가장 저명한 영화 평론가다. 그러나 그는 최근 몇 년 사이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한 블로그에서 더욱 개인적인 관심사를 탐구하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했고, 그 방향 전환은 이 감동적인 회고록으로 이어졌다. 에버트는 자신의 인생을 설명하고 평가하는 작업에서도 그의 갈채 받는 영화 리뷰들의 특징인 통찰력과 명쾌함을 발휘한다. -북리스트 우리 부모님은 대공황 때문에 상처를 받았다. 아버지는 당신 사업을 잃었다. 아버지보다 열 살쯤 어리고 더욱 여렸던 어머니는 농장에서, 그리고 하숙생들이 만사에 우선권을 가졌던 북적이는 하숙집에서 보낸 힘든 시절을 기억했다. 어머니를 모시고 시내를 드라이브 다니곤 했는데, 샴페인 카운티 요양원을 지날 때가 종종 있었다. 어머니는 늘 그곳을 “가난한 농장”이라고 부르면서 “저기가 내가 인생을 마칠 곳”이라고 예언했다. 나는 그렇게 되게 놔두지 않을 거라고 어머니에게 말했지만, 그럴 거라는 걱정은 어머니 마음속에 너무도 깊이 박혀 있었다. 나는 여러 정황을 바탕으로 내가 옳다는 것을 밝힐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어머니는 그러는 법을 결코 배우지 못했다. 내가 시카고로 이사한 이후로 한동안, 어머니는 친구들에게 내가 무슨 일로 생계를 꾸리는지 설명할 방법을 몰랐다. 어머니의 친구들은 어머니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로저는 아직도…… 영화 보러 다니니?” -61쪽 우리 집안은 알코올에 중독될 성향이 강했지만, 부모님은 내 청소년기에는 술을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다. 이스트 워싱턴 410번지에서 지낸 시절에 대한 내 기억은 행복과 격려로 점철돼 있다. 나는 목가적인 유년기를 보냈다. 남들은 시끌벅적하게 보내는 청소년기도 내게는 평범한 수준이었다. 내가 아는 아버지와 내가 태어나기 전에 플로리다에서 자신의 행운을 시험하려고 고향을 떠난 젊은이는 생판 다른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나는 지금은 안다. 아버지는 술을 끊은 후 가정과 일의 세계로 완전히 퇴각했다. 아버지는 친구들과 별다른 사교 생활을 하지 않았고, 음주가 예상되는 자리에는 절대로 가지 않았다. 알코올을 대하는 아버지의 입장은 본질적으로 그런 것이었다. 아버지는 내 유년기의 반석이었다. 아버지의 진짜 생각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다. 나는 부모님이 대체로 행복하게 살았고 서로를 사랑했다는 것을 안다. -67쪽 나는 10대 때 토머스 울프를 읽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내 소울 메이트를 만났다고 느꼈다. 소읍 출신인 그는 하버드에 가려고 북쪽으로 갔고, 그 다음에는 대도시 뉴욕에 갔다. 그는 격한 에너지로 가득한, 열정적인 산문을 줄줄이 쏟아낸 “작가”였다. 그의 주인공은 하버드 도서관의 서고를 여기 있는 책을 전부 읽어야겠다는 충동을 느끼며 활보하고 다녔다. 그는 북쪽으로 향하는 기차에서 밤중에 본 농장 여인들의 부드럽고 새하얀 허벅지 꿈을 꿨다. 그는 달을 향해 우는 야생 염소처럼 떠들며 캠퍼스를 걸었다. 지나가는 기차가 뿜어낸 외로운 기적소리가 창문을 통해 들렸다. 아래턱에서 난 땀이 목에 고였다. 내가 열세 살과 열네 살일 때 토머스 울프가 했던 것처럼 내 넋을 앗아간 작가는 이후로 아무도 없었다. 나는 그의 소설 전편을 논스톱으로 읽었다. 우리 모두는 나이를 먹으면서 무엇엔가 넋을 잃는 능력을 상실한다. 몇 년 전에 『천사여, 고향을 보라』를 다시 읽으면서 스타일이 지나치게 화려한데다 시대에 뒤떨어졌을 거라고 예상했었다. 그러나 소설은 여전히 썩 괜찮았다. 『시간과 강물에 관하여』를 다시 읽기 시작하면서 나는 홀딱 빠져들었다. 나는 에브리맨스 라이브러리가 재판再版한 『거미줄과 바위』와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를 아직도 갖고 있다. 그러나 그 책들은 책장에 꽂혀만 있다. -90쪽 식탁에 와서 끙끙대지 않는 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러지 않는 개가 있다면 그 개는 아마도 식탁과 관련해서 겁먹을 만한 일을 겪었을 것이다. 아무튼 개는 고양이처럼 좀도둑질은 하지 않는다. 마음에 드는 것을 낚아채서 줄행랑을 치지 않는다. 도무지 외면할 수 없는 기회가 왔을 때는 제외하고 말이다. 개는 만찬의 동반자다. 개를 옆에 두고 식사하면 식사한다는 사실이 즐겁다. 개는 자기 주인이 식사한다는 사실이 즐겁다. 이 저녁을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하면서, 주인이 먹는 음식이 주인이 마땅히 누릴 자격이 있는 맛있는 음식이기를 바란다. 우리는 개에게 맛있는 것을 주고 싶다는 강력한 심리적 충동에 사로잡힌다. 고마움을 표시하려는 발작적 충동이 일 경우에는 특히 그렇다. 개들은 당신이 그들에게 베푼 호의를 하나하나 다 기억한다. 그러고는 그 사건들을 “우리 주인이 하나님인 이유”라는 이름이 붙은 기억 은행에 저장한다. 나는 길에서 개를 만날 때마다 그 개를 쓰다듬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에 개가 당신의 손 냄새를 맡게 놔두면, 개들은 당신이 자기들을 만지게 놔두는 게 보통이다. 일부 사내들은 미인이 데리고 다니는 개에게 탄복할 것이다. 그 기회를 통해 여자에게 말을 걸 수 있기 때문이다. 내 경우는 단연코 개를 잘 알고 싶다는 생각에서 하는 행동
나는 내 인생이라는 영화 안에 태어났다. 비주얼이 내 앞에 있었고, 오디오는 나를 에워쌌으며, 플롯은 ‘반드시’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더라도 필연적으로 전개됐다. 내가 어떻게 이 영화에 출연하게 됐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영화 출연은 계속 나를 즐겁게 해줬다. 프레임들은 처음에는 쭉 이어지지 않고 툭툭 끊겼다. 베르히만의 <페르소나>에서 필름이 끊어졌다가 다시 시작되는 것처럼 말이다. -13쪽
나는 자각하기 오래 전부터 언어의 세계에서 살았다. 외아들인 나는 글을 배우자마자 책에 빠져들었다. 내게는 글을 쓰려는 집요한 욕구뿐 아니라 출판하려는 고집스런 욕구가 있었다. 나는 초등학교 때 등사 인쇄된 신문으로 내 에세이를 출판했다. 그 경험은 젤리 상자를 이용하는 원시적인 출판 장난감인 헥토그래프로 곧장 이어졌다. 자주색 전용 잉크로 글을 쓰면 젤리가 잉크를 흡수한다. 그러면 잉크가 희미해지기 전에 열두 장쯤 되는 종이에 젤리를 눌러 인쇄할 수 있다. 나는 헥토그래프로 글을 써서 『워싱턴 스트리트 뉴스』를 발행했다. 그러고는 나하고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신문인 양 온갖 점잔을 다 빼며 몇몇 이웃집에 신문을 배달했다. 나는 별난 아이였던 게 분명하다. 고등학교와 대학교 때, 내 인생은 자연스럽게 신문 쪽으로 흘러갔다. 초기에는 라디오에서도 활동했다. 이때 겪은 경험에 대해서는 책 뒷부분에서 다시 다루겠다. 나는 내 경력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전환점은 남들에 의해 생겨났음을 깨달았다. 내 인생은 대체로 의식적인 계획 같은 것도 없이 내게 일어났다. 나는 흥미로운 과목들 이외의 다른 과목에는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학생이었다. 흥미로운 과목들은 교실 밖에서도 계속 관심을 쏟았다. 다른 과목들을 공부하는 데 써야 할 시간을 할애하면서까지 말이다. 나는 대수학 수준을 넘어서는 수학에는 성적이 시원치 않았다. 대학교 때는 프랑스어에서 네 번이나 F를 받았다. 나는 암기를 할 만한 끈기가 없었다. 하지만 내게 감응을 주는 단어들은 쉽게 기억할 수 있었다. 대학교 때 내 성적을 그린 차트는 산맥의 측면도와 닮았다. -18쪽
아버지가 당신 인생에 대해 진정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하다. 아버지는 미녀와 결혼했다. 나는 두 분이 서로를 사랑했다고 믿는다. 웨스트 팜비치에 머물 때 일어난 일은 웨스트 팜비치에 고스란히 남았다. 아버지는 30대 후반에 결혼해서, 보수가 좋은 직업을 얻었고, 길모퉁이에 집을 장만했다. 투지 넘치는 노조 지지자인 아버지는 공화당 지지자인 에버렛 외삼촌과 정치 논쟁을 벌였다. 아이젠하워가 두 번째로 스티븐슨을 꺾었을 때, 나는 아버지 때문에 수심에 잠겼다. 아버지는 단 한 번도 그렇다는 말을 안 했지만, 나는 공화당원들은 좋은 사람들이 아니라는 생각을 감지했다. 아버지는 늘 책을 읽었다. 다른 세대에 태어났다면, 아버지는 대학에 가서 책상에 다리를 올려놓고 책을 읽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내가 당신을 대신해 그렇게 해주기를 바랐다. 때때로 나는 그분을 원망했다. 눈을 뜨기 힘들 정도로 땀을 흘리면서 상록수에서 도롱이벌레를 잡고 있는데 아버지가 밑에서 계속 “할 가치가 있는 일이라면, 그 일은 올바로 할 가치가 있는 일이다”라고 소리칠 때가 그런 때였다. 아버지는 내 개 블래키를 집에 들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양탄자가 개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분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내가 그 당시에 알았었느냐고? 나는 지금은 안다. -57쪽
우리 어머니 애너벨 스텀은 일리노이 테일러빌 외곽에 있는 가족 농장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의 아버지 윌리엄은 네덜란드인으로, 어렸을 때 입양됐다. 내가 외할아버지 가족에 대해 아는 것은 이게 전부다. 어머니의 할머니 안나 글리슨은 아일랜드계 미국인 2세대로, 그분의 어머니는 배를 타고 미국으로 이민 온 분이었다. 두 집안이 어떻게 일리노이에 와서 농사를 지었는지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전혀 없다. 꼭꼭 덮어둔 주제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거론된 주제인 적도 없었다. 내가 늦둥이인데다 친척들이 나이가 꽤 됐기 때문에, 이 주제는 과거지사였다. 외할아버지는 테일러빌에서, 아니면 그보다 규모가 작은 도시인 스토닝턴에서 당구장을 운영했다. 누군가가 가족 앨범에 붙여 놓은, 1901년에 발간된 자그마한 신문 광고를 보면 그렇다. 이 광고는 그분이 익살을 부리는 재주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당구는 과로한 비즈니스맨을 위해 효과가 검증된 음식입니다. 판에 박힌 세상사들을 집중해서 살피느라 기진맥진한 신체 시스템을 위한 강장제입니다.” -60쪽
우리 부모님은 대공황 때문에 상처를 받았다. 아버지는 당신 사업을 잃었다. 아버지보다 열 살쯤 어리고 더욱 여렸던 어머니는 농장에서, 그리고 하숙생들이 만사에 우선권을 가졌던 북적이는 하숙집에서 보낸 힘든 시절을 기억했다. 어머니를 모시고 시내를 드라이브 다니곤 했는데, 샴페인 카운티 요양원을 지날 때가 종종 있었다. 어머니는 늘 그곳을 “가난한 농장”이라고 부르면서 “저기가 내가 인생을 마칠 곳”이라고 예언했다. 나는 그렇게 되게 놔두지 않을 거라고 어머니에게 말했지만, 그럴 거라는 걱정은 어머니 마음속에 너무도 깊이 박혀 있었다. 나는 여러 정황을 바탕으로 내가 옳다는 것을 밝힐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어머니는 그러는 법을 결코 배우지 못했다. 내가 시카고로 이사한 이후로 한동안, 어머니는 친구들에게 내가 무슨 일로 생계를 꾸리는지 설명할 방법을 몰랐다. 어머니의 친구들은 어머니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로저는 아직도…… 영화 보러 다니니?” -61쪽
우리 집안은 알코올에 중독될 성향이 강했지만, 부모님은 내 청소년기에는 술을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다. 이스트 워싱턴 410번지에서 지낸 시절에 대한 내 기억은 행복과 격려로 점철돼 있다. 나는 목가적인 유년기를 보냈다. 남들은 시끌벅적하게 보내는 청소년기도 내게는 평범한 수준이었다. 내가 아는 아버지와 내가 태어나기 전에 플로리다에서 자신의 행운을 시험하려고 고향을 떠난 젊은이는 생판 다른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나는 지금은 안다. 아버지는 술을 끊은 후 가정과 일의 세계로 완전히 퇴각했다. 아버지는 친구들과 별다른 사교 생활을 하지 않았고, 음주가 예상되는 자리에는 절대로 가지 않았다. 알코올을 대하는 아버지의 입장은 본질적으로 그런 것이었다. 아버지는 내 유년기의 반석이었다. 아버지의 진짜 생각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다. 나는 부모님이 대체로 행복하게 살았고 서로를 사랑했다는 것을 안다. -67쪽
나는 10대 때 토머스 울프를 읽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내 소울 메이트를 만났다고 느꼈다. 소읍 출신인 그는 하버드에 가려고 북쪽으로 갔고, 그 다음에는 대도시 뉴욕에 갔다. 그는 격한 에너지로 가득한, 열정적인 산문을 줄줄이 쏟아낸 “작가”였다. 그의 주인공은 하버드 도서관의 서고를 여기 있는 책을 전부 읽어야겠다는 충동을 느끼며 활보하고 다녔다. 그는 북쪽으로 향하는 기차에서 밤중에 본 농장 여인들의 부드럽고 새하얀 허벅지 꿈을 꿨다. 그는 달을 향해 우는 야생 염소처럼 떠들며 캠퍼스를 걸었다. 지나가는 기차가 뿜어낸 외로운 기적소리가 창문을 통해 들렸다. 아래턱에서 난 땀이 목에 고였다. 내가 열세 살과 열네 살일 때 토머스 울프가 했던 것처럼 내 넋을 앗아간 작가는 이후로 아무도 없었다. 나는 그의 소설 전편을 논스톱으로 읽었다. 우리 모두는 나이를 먹으면서 무엇엔가 넋을 잃는 능력을 상실한다. 몇 년 전에 『천사여, 고향을 보라』를 다시 읽으면서 스타일이 지나치게 화려한데다 시대에 뒤떨어졌을 거라고 예상했었다. 그러나 소설은 여전히 썩 괜찮았다. 『시간과 강물에 관하여』를 다시 읽기 시작하면서 나는 홀딱 빠져들었다. 나는 에브리맨스 라이브러리가 재판再版한 『거미줄과 바위』와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를 아직도 갖고 있다. 그러나 그 책들은 책장에 꽂혀만 있다. -90쪽
식탁에 와서 끙끙대지 않는 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러지 않는 개가 있다면 그 개는 아마도 식탁과 관련해서 겁먹을 만한 일을 겪었을 것이다. 아무튼 개는 고양이처럼 좀도둑질은 하지 않는다. 마음에 드는 것을 낚아채서 줄행랑을 치지 않는다. 도무지 외면할 수 없는 기회가 왔을 때는 제외하고 말이다. 개는 만찬의 동반자다. 개를 옆에 두고 식사하면 식사한다는 사실이 즐겁다. 개는 자기 주인이 식사한다는 사실이 즐겁다. 이 저녁을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하면서, 주인이 먹는 음식이 주인이 마땅히 누릴 자격이 있는 맛있는 음식이기를 바란다. 우리는 개에게 맛있는 것을 주고 싶다는 강력한 심리적 충동에 사로잡힌다. 고마움을 표시하려는 발작적 충동이 일 경우에는 특히 그렇다. 개들은 당신이 그들에게 베푼 호의를 하나하나 다 기억한다. 그러고는 그 사건들을 “우리 주인이 하나님인 이유”라는 이름이 붙은 기억 은행에 저장한다. 나는 길에서 개를 만날 때마다 그 개를 쓰다듬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에 개가 당신의 손 냄새를 맡게 놔두면, 개들은 당신이 자기들을 만지게 놔두는 게 보통이다. 일부 사내들은 미인이 데리고 다니는 개에게 탄복할 것이다. 그 기회를 통해 여자에게 말을 걸 수 있기 때문이다. 내 경우는 단연코 개를 잘 알고 싶다는 생각에서 하는 행동이다. 나는 개하고 좋은 시간을 보내고 나면 차분해지고 편한 기분이 든다. 『살롱』에서 이 현상을 설명한 기사를 봤다. 인간과 개가 서로 우정을 느끼면 인간과 개 모두의 혈류에 특정 화학물질이 방출된다. 이게 양쪽 다 이 우정을 그리도 좋아하는 이유다. 그 화학물질의 이름은 옥시토신이다. 당신은 이미 나보다 앞서 있다. 그렇다, 독자여, 그것이 숭고함이라고 불리는 감정과 결부된 화학물질이다. -104쪽
초등학생 때 책벌레였던 나는 일찍부터 믿음의 논리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나는 단순히 믿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내게는 정통하게 아는 것이 필요했다. 말이 안 되는 것들이 있었다. 나는 추론했다. 하나님이 완벽한 존재라면, 그분은 어떻게 당신의 창조와 모순되는 존재를 창조하실 수 있었을까? 초등학생 때 도출한 이 물음에 대한 결론은 훗날 나를 진화론이라는 놀라운 세계로 득달같이 이끌었다. 초등학교에서는 창조론을 가르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교회가 다윈과 어울리는 것을 꽤나 흡족해한다고 배웠다. 나를 괴롭힌 의문들은 과학과 관련이 있는 게 아니라 공정함과 관계가 있었다. 당신이 대죄를 저질렀다면 당신이 숨을 거두기 전에 고해할 기회를 가지느냐 여부가 중요해질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어째서 당신의 창조물들을 위해 이토록 무자비한 도덕적 메커니즘을 고안해내신 것일까? 그분은 낙원을 창조하셨다. 얼마 안 가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이브는 내가 완벽히 합리적이었다고 느끼는 일을 했다. 나라면 스스로 직접 사과를 따먹었을 것이다. 이제 인류는 지옥에 떨어질 가능성이라는 운명을 영원토록 짊어지게 됐다. 지옥은 사람들이 그곳을 차지하기 전에도 존재했을까? 타락 천사들만 거기에 살았다면, 하나님께서는 어째서 우리의 갱생을 독려할 수 있는 가까운 곳에 우리를 데려다놓는 가없는 자비를 베풀지 않으신 걸까? 감옥 석방 카드라는 불편한 존재를 떠올리게 만드는 속죄 시스템을, 심지어 전대사全大赦 시스템을 꿈꿨던 이는 누구인가? 교회는 카드로 쌓은 집과 닮아가기 시작했다. 카드 한 장을 제거하면 벽들은 허물어진다. -114쪽
저녁을 다 먹으면 편집국으로 돌아갔다. 에드 보먼은 슈멜즐로부터 지방 섹션 편집권을 넘겨받고는 했다. 그는 헤드라인을 쓰고 교정보는 일을 맡은 은퇴한 체육부장 T. O. 화이트를 감독했다. 교통사고와 화재 같은 지역 기사 몇 가지가 더 들어올 때도 있었다. 나는 기삿거리가 될 만한 사건들이 있는지 경찰 사건 기록부를 살피러 샴페인 경찰서로 가고는 했다. 보먼은 라이노타이프로 인쇄한 신문을 들고 돌아와 돋을새김으로 인쇄한 활자와 사진들이 담긴 터틀 위로 몸을 기울이고는 거꾸로 읽어나갔다. 인쇄용지가 인쇄기에 걸리고, 인쇄기가 돌고, 건물이 요동쳤다. 우리 모두는 사회부 주위에 모였다. 그러면 보먼은 발행인 사무실에 있는 냉장고에서 올드 스타일 맥주 식스 팩들을 꺼내오고는 했다. 그해 가을, 그는 맥주 캔을 책상에 올려놓고 나한테로 밀었다. 내 생애 첫 맥주였다. 인쇄실 실장이 신문을 갖고 오면 우리는 신문을 읽었다. 어머니가 예언했듯, 나는 신문쟁이였다. 수입이 변변치 않고 술을 마시는. -124쪽
나는 과학이나 수학은 변변치 않았지만, 자연인류학에는 매료됐다. 그 결과 진화론의 완벽함에 대한 내 평생토록 이어진 매혹이 시작됐다. 윌리엄 포크너와 윌라 캐더에 대한 수업을 들었다. 그러면서 캐더의 소설들이 가진 위력과 그녀의 산문이 보여주는 흐르는 물처럼 맑은 청명함을 알게 됐다. 그레고리 홀 지하에서 글렌 핸슨과 함께 활판 인쇄 수업을 들었다. 이 수업에서 활자와 페이지 디자인, 인쇄의 역사에 대해 배웠다. 우리는 전면 광고나 브로드사이드를 조판하고 활판으로 만든 다음, 조판을 인쇄기에 쐐기로 걸고는 구형 수평식 인쇄기로 인쇄했다. 수업을 같이 들은 급우 중에는 질 와인 휠러가 있었는데, 그녀는 나중에 워터게이트 검사 중 한 명이 됐다. 미국의 저명한 학자인 셔먼 폴 교수님에게서 “미국의 유기적 전통”을 배웠다. 교수님은 소로와 에머슨, 루이스 설리번, 베블렌, 랜돌프 본, 그리고 유럽과는 확실히 구별되는 미국적인 목소리를 드높인 다른 인물들을 한데 엮었다. 교수님은 연설에는 좀처럼 담기 힘든 지적인 인상을 청중에게 깊이 심어 주는 꼼꼼한 강연자이자 웅변가였다. 교수님이 소개한 인물들 중에 근대의 학술적 이론에만 우둔하게 매몰된 인물은 아무도 없었다. 교수님은 텍스트를 공부하려면 그 텍스트를 반드시 낭독해야 한다는 낭만적인 견해를 견지했다. -149쪽
1966년 가을에 대학과 의식적인 작별을 고했다. 내 많은 친구들이 대학을 떠났다. 영문과 대학원 과정은 다시금 중대한 문제를 제기했고, 더 이상은 실제적인 공부 없이 술책으로 과정을 밟아갈 수가 없었다. 나는 전설적인 셰익스피어 학자인 G. 블레이크모어 에번스 교수님이 가르치는 셰익스피어의 비극에 대한 수업에 등록하는 행운을 얻었다. 그러면서 셰익스피어는 나를 사로잡았고, 셰익스피어는 인간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목소리에 우리를 가장 가깝게 데려간 인물이었다는 사실이 명확해졌다. 웨이슨 교수님에게 내가 셰익스피어를 거의 읽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그러자 교수님은 셰익스피어의 희곡들이 끔찍하게 길지는 않다고, 일요일 아침마다 한 편씩 읽으면 38주면 다 읽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읽기 시작했다. 케이프타운에 간 후로 나는 깊이 몰입했다. 내게 셰익스피어를 읽는 것은 기도의 일종이었다. 그해 가을은 유난히 길었고, 단풍은 몹시도 선명했다. 차를 몰고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생각했다. 나는 지금 이 모든 것에 작별 인사를 하고 있다고. 앞으로 닥칠 일이 무엇이건, 어배나에서 일어날 일은 아닐 거라고. -152쪽
편집장으로서 나는 캠퍼스의 걸물들을 취재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중 한 명은 우리가 잘 아는 사람이었다. 납을 다시 녹여 라이노타이프를 위한 납덩이로 만드는 작은 방에 스스로 침실을 꾸린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리처드 맥뮬렌이라는 착실한 청년이었다. 그는 신문 배포를 도왔는데, 자기는 빈털터리나 다름없는 신세라 물에 녹인 젤라틴을 먹고 이따금 먹는 사과로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유대인들을 위한 희소식”이라고 적힌 게시판을 들고 캠퍼스를 돌아다니던 그는 대학 도서관 앞에서 성경을 나눠 주다가 학내 경찰에 체포됐다. 『데일리 일리니』는 이 사건을 언론의 자유를 침해한 것으로 봤고, 나는 오디토리움 계단에서 열린 집회에서 배터리로 작동되는 확성기로 연설을 했다. 활동가에서 저널리스트로 수월하게 변신한 나는 『시카고 선 타임스』에 기사를 보냈고, 그 신문 1면에 내 첫 바이라인이 실렸다. -160쪽
케이프타운에 도착한 지 며칠 안 됐을 때였다. 영화 광고를 보고는 <007 위기일발>을 보기로 마음먹었다. 지도를 이용해 기차를 타고는 매표소에 당도했다. 나는 매표소 직원이 매니저를 부를 때까지는 어디에서도 “유색인종”이라는 표지판을 보지 못했다. 매니저는 나를 입장시키는 것은 불법이라고 말했다. “여기는 백인을 위한 극장이 아닙니다.” 내가 사과하자 그는 내 억양을 듣더니 환한 웃음을 지었다. “미국인이군요!” 그가 말했다. “잘 모르시는 게 당연하죠.” 그는 나를 극장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불이 아직도 켜져 있었다. 그는 나를 자리로 안내했다. 관객들이 나를 응시했다. 관객들이 나를 공안부 요원으로 보는 게 분명했다. 그러다가 매니저가 아프리카어로 상황을 설명하자 모두들 깔깔거렸고 심지어 박수까지 쳤다. 미국인인 나는 내가 어떤 상황에 들어가게 된 건지 알지도 못할 정도로 무지했다. 기숙사 친구들은 그런 식으로 지도에서 벗어나 어슬렁거리다가는 목을 베이는 일을 당할 수도 있다고 장담했다. 나는 한순간도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다. 영화가 끝나자 흑인 경찰관이 나타나 버스 정거장까지 나와 동행했다. -171쪽
완벽한 산책은 긴 하루 동안 진행됐고, 몹시 쌀쌀한 황혼에 버스들의 지원을 받으며 끝났다. 이 위대한 도시의 이루 셀 수 없이 많은 구석박이와 후미진 곳들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당신 몫으로 남겨두겠다. 댄 교수님은 내게 런던을 배회하는 평생 가는 습관을 들여 줬다. 1966년부터 2006년까지, 나는 1년에 최소 세 번은 런던을 방문했다. 보통은 회수가 그보다 더 많았다. 도시 산책은 내 교육의 일부가 됐다. 나는 이런 식으로 건축과 영국 수채화, 음악, 극장,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사람들에 대해 조금이나마 배웠다. 나는 다른 어느 곳에서도 느껴본 적이 없는 자유를 런던에서 느낀다. 나는 영원한 친구들을 사귀었다. 런던은 산책에 적합한 도시였다. 대단히 흥분되는 광경들을 눈높이에서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잔인한 기업들에 의해 한 블록 한 블록씩 산채로 뜯어 먹히고 있다. -178쪽
오래 전에 런던에 있을 때, 호텔방이 너무 좁아서 빈 가방을 호텔 안 다른 곳에 보관해야 했다. 침대에 앉아서 이마를 맞은편 벽에 갖다 댈 수 있었다. 짜증이 난 나는 어느 화창한 일요일 아침에 더 나은, 그러면서도 비용은 비슷한 호텔을 찾아 나섰다. 나는 향수에 젖어 러셀 스퀘어로 돌아갔다. 내가 이 위대한 도시를 처음 방문한 1961년에 『하루에 5달러로 즐기는 유럽』의 안내로 찾아간 곳이었다. 나는 첫 여행 때 하룻밤에 2.50파운드로 객실과 영국식 조찬을 주는 곳을 찾아냈다. 남들은 그곳을 다 쓰러져가는 오두막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넋을 잃을 정도로 행복했다. 나는 홀딱 반한 아일랜드 소설가 에드나 오브라이언에게 편지를 쓰면서 밤의 절반 정도를 보냈다. “저는 러셀 스퀘어 근처의 싸구려 호텔에 있습니다. 한밤중에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 단어들만으로도 그녀는 내 낭만적인 천재성을 납득했었다. 아아, 그 유서 깊은 호텔이 있던 자리에는 기괴한 건물이 서 있었다. 다음에 어디를 찾아봐야 할지 알 길이 없는 난처한 심정으로 광장 주변을 웅크리고 돌아다니다가 시카고에서 사귄 친구인 수잔느 크레이그가 언젠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런던이 정말로 마음에 든다면 저민 스트리트에 있는 이리 맨션에 묵어봐야 해.” -183쪽
베니스에는 운하 지천 위로 이어지는 작은 다리가 있다. 이 다리와 교차하는 계단의 중간쯤에 계단참이 있고, 거기에 조그만 카페 하나가 자리 잡고 있다. 카페 앞에는 테이블 하나와 의자 두 개가 있다. 카페를 등진 의자를 택하면 조금 전에 올라온 계단을, 그리고 그 앞에 놓인 운하 길에서 당신 쪽으로 이어지는 계단들을 내려다볼 수 있다. 눈에 쉽게 띄지 않는 동네 샛길들로, 카푸치노 잔과 피아자 산마르코의 신문 판매대에서 사온 신문을 앞에 놓고 앉아 있기에 좋은 곳이다. 물론 신문과 책, 스케치북을–몰입할 만한 것은 무엇이건–반드시 지참해야 한다. 아무것도 없이 그냥 앉아만 있으면 당신은 외로운 사람처럼 보일 것이고, 사람들은 당신에게서 눈길을 돌릴 것이다. 당신이 무엇인가에 열중한 것처럼 보이면, 당신은 사람들을 더 가까이서 관찰할 수 있다. 어찌 됐건 나는 사람들을 지켜보려는 의도로 거기에 앉지는 않는다. 나는 어느 누구도 내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고 어느 누구도 나를 찾아낼 곳이 어디인지 모르는 도시에서 나 자신이 되기 시간을 즐기고 있다. 나는 많은 도시에 그런 곳을 갖고 있다. 런던은 물론이고, 파리, 로마, 스톡홀름, 에든버러, 케이프타운, 칸. -200쪽
시간이 흐르면서 내 강렬한 감정은 서서히 지나갔다. 나는 털끝 하나 움직이지 않고 테이블에 가만히 앉아 멍한 눈으로 내 앞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을 바라봤다. 내 인생이 이런 삶으로 이어질 법도 하겠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타지에 온 이방인의 삶으로, 카페에 앉아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스케치북에 스케치를 하고, 이따금 다른 곳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내가 쓰는 언어로 들려주는 신문 한 부를 사는 삶으로. 나는 제3자의 시선으로, 나무들 아래서 나를 지나쳐간 저 멀리 떨어진 이름 모를 인물의 시선으로 나 자신을 바라봤다. 대부분의 시간 동안 나는 너무 바빠서 그런 판타지들을 즐기지 못한다. 내 인생을 너무 가득 채워놓은 탓에 내가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해볼 시간이 전혀 없는 날들이 많다. 그러나 이 고요한 순간들은, 낯선 도시에서 맞이하는 게 보통인 이 순간들은 이 모든 것이 지나가는 것을 눈여겨보면서 어딘가의 테이블에 조용히 앉아 있는 사람이 어떤 의미에서는 진짜 나라는 환상을 내게 안겨준다. -204쪽
내가 일종의 강박적인 반복 증후군에 시달리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런 제식들이 내게는 중요하다. 내게는 앉아서 “나는 여기에 있었고, 지금 여기에 있고, 다시 여기에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할 곳이 많다. 때때로 몽상에 잠긴 나는 1962년 아니면 1983년에, 아니면 다른 많은 시기에 똑같은 초원을 가로지르는 또는 똑같은 발자취를 밟아가는 나 자신의 모습을 기억한다. 때때로 채즈가 내 제식에 동행하지만, 나 홀로 가는 경우가 많다. 때때로 채즈는 자기는 쇼핑을 가겠다고, 또는 친구를 방문하겠다고, 그도 아니면 방에 머물면서 침대에서 책을 읽겠다고 말하고는 한다. “혼자 가서 당신 베이스들을 찍도록 해요.” 그녀는 내게 권할 것이다. 나는 그녀가 내게 공감한다는 것을 안다. 내게 있어 이 비밀 방문들은 시간의 바퀴가 굴러간 거리와 인생을 통해 지나온 내 경로를 측정하는 방법이다. 인생을 통과하는 이 항해에서, 우리는 때때로 갑판에 앉아 넘실거리는 물결을 묵묵히 지켜볼 필요가 있다. -206쪽
서른다섯 살인 료코는 이미 시카고에서 가장 유명한 신문기자였다. 꾸밈없는 문장들로 구성된 짧은 문단으로 복잡다단한 감정들을 불러일으키는 그의 글은 정평이 나 있었다. 술집 주인의 아들로 자란 그는 밑바닥 수준에서 도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잘 알았다. 그는 시청을 취재하면서 처음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나보다 열 살 많은 그는 경찰서와 소방서 일선에서 일어나는 기삿거리의 취재를 위해 모든 일간지들이 공동으로 지원한 지역 뉴스 지국의 창설을 이끈 인물이었다. 박봉에다 과로까지 하는 풋내기들이 지국장 아놀드 돈펠드 밑에서 일했는데, 돈펠드의 의자 위에는 이런 표지판이 붙어 있었다. 네 어머니가 너한테 사랑한다고 말하면, 그게 사실인지 검증해봐. -212쪽
나는 취직 첫해 동안 시카고 대학 박사 과정 학생이기도 했다. 늘 그랬듯 나는 여기서도 프랑스어에서 낙제했다. 그러나 조지 윌리엄슨 교수가 가르치는 밀턴 수업에 점차 빠져들었다. 『실낙원』을 실제 일어났던 역사적 사실처럼 대했던 윌리엄슨 교수는 언젠가 이런 말도 했다. “그렇지만 사탄은 확실히 못됐어. 왜냐하면 다음 페이지를 보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1967년 4월 1일, 특집부장 로버트 종카가 내가 우리 신문의 영화 평론가가 될 거라고 내게 말했다. 내가 영화에 대한 기사를 몇 편 쓰기는 했다지만, 느닷없이 나온 얘기였다. 나는 영화 평론가인 동시에 대학원생일 수가 없었다. 게다가 나는 다음 가을에 시카고로 돌아올 생각이 없었다.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영문학을 공부하는 삶을 사랑했지만, 대단한 학술적 성취를 이뤄내지는 못할 게 분명했다. -214쪽
1967년 3월 어느 날, 밥 종카가 회의실로 오라고 전화를 걸었다. 그는 내가 우리 신문의 영화 평론가로 임명됐다고 말했다. 난생 처음 듣는 얘기였다. 그는 현재 평론가인 엘리너 킨이 조기 은퇴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편집실로 돌아가자 엘리너가 그녀의 책상에서 나를 보며 빙긋이 웃고 있었다. 그녀는 요즘에 볼만한 영화가 뭐냐는 질문을 하루에도 대여섯 번씩 받는 일을 드디어 면하게 됐다고 말했다. 실제로, 사람들이 나한테 가장 많이 묻는 질문이 “1주일에 영화를 몇 편이나 보나요?”다. 사람들은 자기가 생각하기 이전에는 그런 질문을 떠올린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양 그런 질문을 던진다. 진 시스켈은 “열 편”이라고 대답하는 실험을 해본 적이 있노라고 말했었다. 그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고맙다”는 말만 한다고 했다. -226쪽
체계적인 영화 교육을 받지 못한 나는 온-더-잡 트레이닝이 어쩌면 더 유용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내가 인터뷰한 모든 감독들이 내게 무엇인가를 가르쳐줬다. 그들을 칭찬하려는 상투적인 얘기가 아니다. 내가 물으면, 그들은 종이에다가 스케치를 해가면서 그들이 하려고 애썼던 것이 무엇인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를 열심히 설명해줬다. 노먼 주이슨과 리처드 브룩스, 피터 콜린슨, 스탠리 크레이머, 오토 프레밍거가 내 스승님들 중 일부다. 그들은 교육자로서 본능을 가진 듯 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가르침에 흠뻑 빠져들었다. 더 직접적인 접촉도 있었다. 당시 스타들은 요즘보다는 덜 보호받고 격리당했다. 촬영장도 덜 폐쇄적이었다. 나는 <카멜롯>과 <내일을 향해 쏴라> 같은 영화들의 촬영장에서 몇 날을 죽치고 지내면서 어떤 신을 마스터 숏으로 찍은 다음에 더 가까이에서, 또는 다른 앵글들에서 찍은 숏들로 분할해서 찍는 모습을 지켜봤다. 나는 조명과 음향에 대해 논의하는 얘기를 들었다. 내가 듣는 얘기를 항상 이해한 것은 아니었지만 전반적인 아이디어는 알아들었다. 나는 내러티브에 휩쓸려 영화를 보는 대신, 개별 숏들의 관점에서 영화를 보는 법을 터득했다. 『에스콰이어』에 실린 드와이트 맥도널드의 영화 칼럼들을 고등학생 때 읽기 시작한 나는 이제는 그의 저서 『영화론』을 공부했다. 그는 리뷰를 쓰기 시작할 때 좋은 영화가 마땅히 가져야 할 요소들을 모은 체크리스트를 만들었었다고 머리말에 썼다. 그런데 그는 그런 요소를 담지 않은 좋은 영화들이 나타나면서 체크리스트가 점점 더 짧아진다는 것을 알게 됐다. 결국 그는 언젠가 폴린 카엘이 자기는 이렇게 한다고 내게 말해줬던 바로 그 일을 하게 됐다. “나는 영화를 보러 가서 영화를 주의 깊게 감상해. 그러고는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나 자신에게 물어봐.” 그 방법은 유용했다. 그리고 나는 다른 평론가에게서 부적을 찾아냈다. 종카가 평론가 일을 맡긴 이튿날, 나는 로버트 워쇼가 쓴 『직접 경험』을 읽었다. 그는 이렇게 썼다. “한 사람이 영화를 본다. 그러면 평론가는 그가 바로 그 사람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가 이 글에서 뜻하는 바는 평론가는 이론이나 이데올로기, 정치적 성향은 제쳐두고 자신을 영화에 활짝 열어놓아야 한다―즉, 영화를 직접 경험해야 한다―는 뜻이다. 초짜 평론가 시절에 내가 이해하지 못한 영화에 대한 글을 쓸 때, 그의 글은 내가 적절한 접근법을 찾게끔 해줬다. 베르히만의 <페르소나>를 처음 봤을 때가 그런 때였다. 나는 내게 일어난 일에 대해 썼다. -230쪽
내가 『선 타임스』를 위해 처음으로 쓴 영화 리뷰는 프랑스 영화 <갈리아>였다. 나는 월드 플레이하우스의 가운데 자리에 앉아 영화를 보면서 내가 이 영화를 리뷰하고 있다는 인식에 충만해 있었다. 그런 후 사무실로 돌아가 이 영화는 해안으로 떠밀려오는 프랑스 누벨바그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내쉰 헐떡거림이라고 썼다. 지금 보니 그 시절에 내가 느꼈던 것보다 훨씬 더 통찰력 있는 글처럼 보인다. 그 시절의 나는 지금의 나보다 더 지쳐 있었다. 당시 나는 영화판을 얼쩡거리는 시간은 5년이면 충분할 거라고 판단했다. 내 마스터플랜은 신문에 이름을 내건 기명 칼럼니스트가 되는 거였고, 그 다음에는 당연하게도 위대하고 존경 받는 소설가가 되는 거였다. 이런 내 몽상은 숲속 깊은 곳에 있는 오두막집에서 불가에 가까이 놓은 안락의자에 깊이 파묻히는 것으로, 커다란 개가 코를 고는 동안 내가 디킨스에 몰입해 있는 모습으로 마무리됐다.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은…… 뭔가 부자연스러운 일로 여겨진다. 인간은 특정한 시간 감각을 터득하기 위해 수십만 년 동안 리허설 해왔다. 인간은 아침에 일어난다. 시간의 수레바퀴가 태곳적에 정해진 질서에 맞춰 하늘을 가로질러 사위가 어두워지면 인간은 잠자리로 향한다. 영화 평론가는 아침에 일어났다가 두 시간 동안 다시 어둠에 들어간다. 그러면서 시간의 여로는 편집과 디졸브와 플래시백과 점프 컷에 의해 혼란스러워진다. 영화는 말한다, “살아 숨 쉬어라.” 때때로 영화 평론가들은 자신들이 다른 모든 이들의 감정을 손아귀에 넣은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시스켈은 자기 직업을 “전 국민이 꾸는 몽상의 활동 영역을 커버하는 일”이라고 묘사했다. 당신이 영화들에 관심을 기울이면 영화들이 당신에게 사람들이 욕망하는 것과 두려워하는 것을 말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가 다루는 주제가 그것이 다루는 것처럼 보이는 주제와 일치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많은 이들이 사랑하는 영화를 보라. 그러면 그 영화가 얼마나 멍청해 보이는가 하고는 무관하게, 심오한 무엇인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후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영화를 봤고, 그중 대부분을 잊었다. 그러나 나는 기억할 값어치가 있는 영화들은 기억한다. 그리고 그 영화들은 내 마음속의 선반에 모두 보관돼 있다. 옛날 영화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옛날 영화는 시간에서 자유로이 해방된 영화들이라는 관념이 있다. 나는 때때로 무성영화를 보는데, 그럴 때면 내가 흘러간 옛 시절의 영화들을 보고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나는 포착된 현재를 보고 있다고 느낀다. 병에 담긴 시간. 내가 처음 무성영화를 봤을 때, 연기자들은 시대에 뒤떨어진 진기한 존재처럼 보였다. 그런데 지금은 상당히 현대적인 존재로 보인다. 나온 지 10년 된 영화의 중요한 잘못된 점은 30년 된 영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헤어스타일과 의상이 유행에 뒤떨어진 존재가 되는 것을 멈추고 역사가 되기 시작한 후, 그제야 우리는 그 영화가 시간을 초월한 영화인지 아닌지 여부를 알 수 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는 어떤 종류의 영화일까? 굳이 일반화를 해야 한다면, 내가 좋아하는 영화들 중 많은 영화는 착한 사람을 다룬다고 말하겠다. 영화가 행복하게 끝나느냐 슬프게 끝나느냐는 중요치 않다. 캐릭터들이 이기느냐 지느냐도 중요치 않다. 유일하게 참된 엔딩은 죽음이다. 그것 이외의 다른 엔딩은 자의적인 엔딩이다. 영화가 키스로 끝난다면 우리는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키스하는 커플 위로 피아노가 떨어진다면, 또는 택시가 그들을 깔아버린다면, 우리는 슬프다고 생각한다. 둘은 어떤 차이를 만드는가? 빼어난 영화들은 캐릭터들에게 벌어진 사건을 다루지 않는다. 그런 영화들은 캐릭터들이 세운 선례를 다룬다. <카사블랑카>는 옳은 일을 하는 사람들을 다룬다. <제3의 사나이>는 옳은 일을 하지만 그 결과로 서로에게 한 마디도 할 수 없는 두 사람을 다룬다. <양들의 침묵>의 비밀은 너무도 깊이 파묻혀 있어서 비밀을 파악하려면 한참을 생각해야 할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 영화의 비밀은 한니발 렉터는 착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는 그 자신의 형언할 수 없는 악행들의 무력한 희생자다. 사실이다. 그는 자신의 악한 마음과 별개로 행동할 수 있는 제한된 정도로나마 옳은 일을 하려고 노력한다. 훌륭한 영화가 하나같이 착한 사람만을 다루는 것은 아니다. 나는 유머 감각이 있는 못된 사람을 다룬 영화들도 좋아한다. <제3의 사나이>에서 착한 사람을 연기하지 않는 오손 웰스는 대단한 매력을 발산하고 너무도 재치 있는 대사를 들려주기에, 우리는 한두 신에서 그의 죄악을 거의 용서하게 된다. <좋은 친구들>의 주인공 헨리 힐은 좋은 친구가 아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자신이 못된 사람이 된 것을 즐긴 이유에 대해 우리에게 솔직하게 털어놓는 능력이 있다. 그는 위선자가 아니다. <마리아 브라운의 결혼>의 여주인공은 끔찍한 짓을 몇 가지 자행한다. 그러나 그녀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게끔 만든 원동력이 무엇인지를 아는 우리는 그녀를 이해할 뿐 아니라 조금이나마 그녀의 기지를 감탄하게 된다. 내가 사랑하는 다른 영화들 중 일부는 단순히 육체적인 움직임이 주는 환희만을 다룬다. 진 켈리가 <사랑은 비를 타고> 내내 철벅철벅 소리를 내며 몸을 놀릴 때, 주디 갤런드가 노란 벽돌 길을 따라갈 때, 프레드 아스테어가 천장에서 춤출 때, 존 웨인이 이빨로 고삐를 물고 초원을 가로질러 말을 달릴 때, 거기에는 도저히 저항할 수 없는 순수함과 환희가 있다. 거장 오즈 야스지로의 일본 영화 <피안화>에는 다음의 일련의 숏들로 구성된 시퀀스가 있다. 빨간 찻주전자가 전경前景에 놓인 방. 그 방을 잡은 다른 화면. 어머니가 옷을 개킨다. 어머니가 복도를 가로지르는 숏, 그런 후에 딸이 뒤에서 복도를 가로지르는 모습. 귀가한 아버지를 모녀가 맞이하는 현관에서 찍은 리버스 숏. 아버지가 프레임을 떠나고, 그 다음에는 어머니가, 그 다음에는 딸이 떠나는 숏. 어머니와 아버지가 방에 들어오고, 후경後景에서 딸이 빨간 찻주전자를 들고 프레임을 떠나는 숏. 타이밍이 딱딱 맞아떨어지는 움직임과 커팅으로 구성된 이 시퀀스는 인간이 창작해낸 그 어떤 음악과 춤, 시만큼이나 완벽하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깜짝깜짝 놀라는 것도 즐긴다. 그러나 영화가 관객을 놀라게 하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그러니까 시끄러운 소음을 들려주거나 예상하지 못한 무엇인가가 프레임 밖에서 펄쩍 뛰어 들어오는 등의 방식은 따분하다. 그런 수법은 너무 낡았기 때문에 그런 수법을 쓰는 감독은 후안무치한 사람인 게 분명하다. 알프레드 히치콕은 여러 사람이 카드를 치고 있는데 그 방의 테이블 아래에 있던 폭탄이 터진다면 그것은 공포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그 방식 대신, 테이블 아래에 폭탄을 두고 관객들이 그것이 터질 때까지 기다리게끔 만드는 식으로 신을 구성하는 쪽을 택했다. 그것은 서스펜스다. 내가 즐기는 것은 그런 종류의 서스펜스다. 사랑? 로맨스? 확신이 서지 않는다. 나는 영화에 담긴 애정 행각에만 지나치게 진지한 영화들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배우들이 그걸 너무도 엄숙하게 받아들여서 우스꽝스러운 결말이 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이 단순한 방식으로 캐릭터들을 대단히 행복하게 만들 때를 훨씬 좋아한다. <마음은 청춘>에서 도리스 데이가 프랭크 시내트라에게 처음 빠졌을 때, 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하룻밤>에서 릴리 테일러가 리버 피닉스가 자기를 정말로 좋아한다고 생각할 때처럼 말이다. 영화 역사에 존재하는 위대한 감독들 중 상당수는 내가 평론가 생활을 시작한 1967년에 이미 세상에 잘 알려져 있었다. 젊은이들이 최고의 감독들이 연출한 최고의 작품들을 열심히 감상하는 일에 매진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영화 동아리와 레퍼토리 영화관의 죽음은 거기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래서 오늘날 젊은 영화팬들에게 다음 이름들은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브뉘엘, 펠리니, 베르히만, 포드, 구로사와, 레이, 르누아르, 린, 브레송, 와일더, 웰스. 대부분의 사람들은 히치콕이 누구인지는 여전히 알 거라고 짐작한다. 과거의 위대한 무비스타들과 비교해보면 요즘 배우들은 그들이 출연한 영화가 컬러로 촬영된다는 사실 때문에 불리한 입장에 있다. 장기적으로 보면, 컬러영화는 흑백영화 시대에는 조연급 스타들조차도 획득했던 불멸성의 대부분을 스타들에게서 앗아간다. 피터 로레와 시드니 그린스트리트는 수백만 달러의 출연료를 받는 오늘날의 슈퍼스타들 대부분보다 뇌리에 더 오래 남아 있고, 앞으로도 남을 것이다. 컬러는 때때로 지나치게 리얼리스틱해서 관객을 산만하게 만든다. 컬러는 과잉된 정서적 자극을 투사한다. 컬러는 연기자들을 평범한 세계의 거주자들로 격하시킨다. 흑백은 (더 정확히 말해 은색과 흰색은) 미스터리한 몽환적인 상태를, 형태와 제스처로 이뤄진 세계를 창조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하고는 생각이 다르다. 그들은 컬러를 좋아하고 흑백영화는 뭔가를 놓치고 있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다음을 시도해보라. 당신의 부모님과 조부모님 결혼사진이 있다면, 부모님 사진은 컬러이고 조부모님 사진은 흑백일 가능성이 크다. 두 사진을 나란히 놓고 솔직하게 살펴보라. 조부모님은 시대를 초월한 것처럼 보이고, 부모님은 별나게 보인다. 햇빛이 퍼지는 땅거미가 질 무렵에 밖에 나가보라. 저녁놀을 피해 집 옆에 서라. 자연광 아래 친구를 세워놓고 흑백사진을 찍어보라. 당신이 여태껏 찍어준 컬러사진 속에서 늘 평범하게 보였던 이 친구가 흑백사진 속에서 미스터리한 아우라를 띠고 있지 않은지 자문自問해보라. 같은 일이 영화에서도 벌어진다. -234쪽
홈비디오는 내가 평론가가 된 이후로 영화판에서 일어난 최고의 사건인 동시에 최악의 사건이다. 홈비디오가 좋은 것은 보고 싶은 영화를 보고 싶을 때 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홈비디오는 옛날 영화들의 프린트를 보존하고 복원하려는 경제적 인센티브를 제공한다. 좋은 영화를 찾는 사람들에게 그런 영화들을 안겨준다. 비디오 감상은 영화를 위해 바쳐진 작은 신전이던 캠퍼스 영화 동아리들을 박살냈다. 영화 동아리가 구로사와의 <이키루>를 입장료 1달러를 받고 상영하면, 그리고 개봉관 입장료를 내고 봐야 하는 신작 영화 외에 다른 볼만한 영화가 없으면, 사람들은 <이키루>를 보러 갔고 그 위대한 영화는 그 사람의 내면에 영원히 자리를 잡았다. 오늘날, 학생들은 비디오를 빌리거나 영화를 스트리밍해서 보거나 TV로 본다. 위대한 영화를 보더라도 혼자서 보거나 친구 두어 명하고만 같이 본다. 여기에는 관객이라는 개념이 없다. 영화에 대한 감식안을 터득하는 데 중요한 요소는 영화에 대한 안식이 높은 관객들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한편, 오늘날 중간 규모의 도시는 하나같이 영화제를 갖고 있다. 운이 좋으면 이런 영화제에서 예전에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던 경이로운 영화를 볼 수 있다. 그리고 많은 박물관이 훌륭한 필름 센터들을 갖추고 있다.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경이로움이다. -240쪽
의지력을 활용하는 데 따르는 문제점은 그 의지력이라는 게 내 의지가 한 잔 더 마실 수 있다고 나 자신을 설득하는 데 성공할 때까지만 지속됐다는 것이다. 그 즈음 나는 M. F. K. 피셔가 쓴 『음식 예술』을 읽고 있었다. 책에는 이런 글귀가 있었다. “마티니 한 잔은 딱 적당하다. 마티니 두 잔은 너무 많다. 마티니 세 잔은 절대 양에 차지 않는다.” 결심을 다지는 데 따르는 문제점은 첫 잔을 마실 때는 정신이 말똥말똥하고, 둘째 잔을 마실 때는 이미 술을 한 잔 마신 상태라는 식으로 계속 진행된다는 것이다. 일단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 한두 잔쯤 후에 그만 두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할 수만 있다면, 나는 내가 끝장이 났다고 결정할 때까지 계속 마셨을 것이다. 이튿날에는 숙취라는 대가를 치렀다. 나는 숙취에 시달린 적은 한 번도 없다고 주장하는 술고래 커플을 알았다. 나는 그들을 믿지 않았다. 나는 숙취가 없었다면 지금도 여전히 술을 마시고 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직장도 없고 가정도 없는 사람이 됐을 것이다. 저세상 사람이 됐을 수도 있다. 알코올 중독자 대부분은 할 수 있을 때까지 오랫동안 계속 술을 마신다. 대부분의 마약과는 달리, 알코올은 사람들이 자기 인생의 남은 부분을 계속 영위할 수 있게 해준다. 술 때문에 빚어지는 사고만 없다면 말이다. 운 좋은 이들은 자신들이 도달할 막장을 앞서 발견하고는 술을 끊는다. -288쪽
채즈와 나는 시카고의 널찍한 타운하우스에서 20년째 살고 있다. 집은 휑하지 않다. 채즈와 나는 3,000권 아니면 4,000권의 책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영화와 앨범, 다량의 미술품, 몇 십 줄의 사진, 안락한 가구로 가득한 방들, 태국에서 만든 불상佛像, 운동 기구, 인도에서 만든 코끼리 조각, 아프리카 의자와 입상立像들, 그 외의 정체를 알기 힘든 물건들을 이 집에 들여왔다. 물론 나는 이 소장품 중에 단 하나만 없어도 살아갈 수 없다. 거기에는 『허클베리 핀』부터 시작해서 일곱 살 때부터 보유해 온 모든 책도 포함된다. 나는 지금도 펜로드 시리즈를 전부 갖고 있다. 그 책들을 볼 때마다 부스 타킹턴이 펜로드의 바지 주머니에 든 물건들을 정리해 놓은 목록이 떠오른다. 어렸을 때 그걸 세 번 읽은 다음에 주머니칼과 요요, 구슬, 나침반, 스테이플러, 괴상하게 생긴 돌멩이, 야구공, 고무공, 조브레이커 세 개를 내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해리 러스크의 잡화점 카운터에서 5센트 동전을 찾느라 주머니를 뒤지면서 이것들을 꺼내놓았고, 이를 통해 해리 러스크는 내가 “진짜 소년”임을 알 수 있었다. -301쪽
인터뷰어로서 내 비법은 내가 인터뷰하는 사람들로부터 실제로 깊은 인상을 받았다는 거였다. 빌 클린턴이나 존 웨인, 소피아 로렌 같은 거물뿐 아니라, 산드라 디, 스텔라 스티븐스, 조지 페퍼드 같은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 무엇보다도 나는 그들의 팬이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이 모드를 유지했다. 나는 연기를 하는 위험을 감수하는 사람들에게 외경심을 품고 있다. 나는 그들의 지지자가 되고 나도 모르게 그들과 공감한다. 나는 형편없는 영화에 대한 글을 쓸 때는 초토화 전략을 채택하기도 하지만, 배우들에게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는 글은 거의 쓰지 않는다. 그들이 영화에서 좋은 연기를 보였다면, 그들이 뭔가를 제대로 해낸 게 분명하다. 그들이 별로였다면, 그건 촬영 환경이나 편집 선택의 문제 때문일 수도 있다. 그냥 연기를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들에게 상처 주는 식으로 글을 쓰는 게 내키지 않는다. 항상 그렇지는 않지만 보통은 그렇다. 나는 배우들의 외모를 공격하는 것을 주특기로 삼는 평론가 존 사이먼이 싫다. 그들의 외모는 그들도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다. 존 사이먼이 쥐처럼 생긴 자기 외모에 어쩔 도리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327쪽
1969년 가을에 아일랜드 딩글 반도의 석조 오두막에서 미첨을 처음 만났다. 그는 거기서 데이비드 린 감독의 <라이언의 딸>을 촬영 중이었다. 어느 날 오후 존 맥휴와 존의 동생 유진과 함께 오두막으로 올라갔다. 미첨은 천하태평이었다. 그는 특유의 유명한 저음으로 짧은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그의 두 눈은 반쯤 내리깔렸고, 태도는 나른했다. 그날은 그의 촬영이 없는 날이었다. 그는 커피테이블 아래로 두 다리를 쭉 펴고는, 잔에 든 얼음조각을 빙빙 돌리며 “내 마음은 기러기가 아는 것을 알아요”를 휘파람으로 불었다. 미첨은 판에 박힌 질문들은 못견뎌 할 거라는 것을 나는 감지했다. 그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대로를 물 흐르듯 줄줄 쏟아냈다. 내가 그의 말을 인용하는 것은 그래서다. 그날 오후와 저녁에 그는, 리 마빈이 그랬듯, 내가 미래에 인터뷰 기사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가르쳐줬다. 나는 격식을 갖춘 질문들을 묻고 그에 대한 대답을 적는 일은 하지 않을 터였다. 상황의 흐름에 떠밀려 다니면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관찰할 터였다. 내가 미첨과 한 일이 그거였기 때문에, 나는 그가 나를 관대하게 대해줬다고 생각한다. 그는 내가 주위에서 얼쩡거려도 개의치 않았다. 심지어는 반도를 가로지르거나 로케이션 현장을 찾아 오하이오 일부 지역을 헤매는 차 안에서 마리화나를 피울 때처럼 연출이 개입할 수 없는 자연스러운 상황일 때도 그랬다. 그런 날에도, 그는 내가 그가 한 말을 곧이곧대로 지면에 옮기거나 마리화나에 대해 언급해서는 안 된다는 식의 얘기나 눈치를 눈곱만치도 주지 않았다. 그는 개의치 않았다. -347쪽
그는 연기 이론하고는 하등의 관련도 없는 배우다. 그는 연기를 공부한 적이 결코 없다. 그가 연기를 잘하게 된 것은 존 포드와 함께 모뉴먼트 밸리에 엄청나게 자주 갔기 때문이고, 그들이 그들의 저녁 시간을 차지한 위스키와 포커 게임과 캠프파이어보다 훨씬 더 많은 생각을 부여하는 일 없이 가장 위대한 미국 영화들 중 일부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할리우드, 그리고 그곳의 에이전트들과 거물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사막에서 파피(존 포드의 애칭-옮긴이)와 그의 포장마차 대열이 캠핑하면서 그들이 카우보이 영화라고 부르곤 하던 영화들을 만들던 그 시절이 웨인의 전성기였다. 스크린 위에서 엄청난 권위를 보여주는 웨인이기에 자신의 연기론을 설명하는 그의 모습은 아이러니컬하게 보이지 않았다. “액트act하지 마라. 리액트react하라.” 존 웨인은 리액트할 수 있었다. 다른 배우들은 그와 스크린을 공유하기 위해 자신들이 가진 역량의 한계를 한껏 확장시켜야 했다. 배우가 어떤 장면에서 잠깐 동안 그저 서 있기만 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는 테스트가 있다. 그는 거기 그냥 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가? 아니면, 존 웨인이 그랬던 것처럼, 상황을 언제, 왜, 어떻게 자기 손아귀에 넣고 좌지우지할지 결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가? 그의 마지막 영화는 1976년작 <마지막 총잡이>였다. 그는 평생 동안 서부를 돌아다니며 싸워오다가 결국 작은 고을에 도착해서 죽음에 대한 공포에 시달리는 늙은 총잡이를 연기했다. 제임스 스튜어트가 연기하는 의사를 찾아갔다가 몇 주밖에 못 산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그 기간 동안 강인하고 위엄 있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애쓴다. 언젠가 그가 만들고 싶다고 말했던 영화가, 그러나 결국 만들지 못한 영화가 있다. 그 영화에는 제목이 없었는데, 적어도 웨인의 마음속에서 제목은 필요치 않았다. 그 영화는 단순히 존 포드가 연출하는 마지막 영화면 됐다. 포드는 웨인이 임종을 지키는 가운데 1973년에 숨을 거뒀다. -378쪽
병원을 영원히 퇴원해서 집으로 돌아온 나는 노먼 커슨스가 어떻게 마르크스 형제의 영화들을 보고 웃는 것으로 병을 치료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밝힌 유명한 발언을 떠올렸다. 나는 잉그마르 베르히만의 실존적 불안을 보며 원기를 북돋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나는 어깨를 너무 심하게 다친 탓에 데스크톱 앞에 앉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채즈는 나를 위해 몇 시간 동안 힘들지 않게 앉아 있을 수 있는 “무중력” 의자를 찾아줬다. 나는 얇은 목제 랩 데스크에 두 팔을 올렸다. 그곳은 내 작업장이 됐고 지금도 그렇다. 나는 베르히만 영화들을 보기 시작했다. <신의 죽음> 삼부작(<거울을 통해 어렴풋이>, <침묵>, <겨울빛>)으로 시작해서 <안나의 수난>과 <늑대의 시간>으로 나아갔다. 이 영화들은 크라이테리언 컬렉션에서 나온 DVD로, HD 텔레비전으로 재생했다. 최소한 두세 번은 본 영화들이었음에도, 나는 그토록 선명한 화면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줄거리가 어떻게 되고 어떻게 전개되는지는 잘 알았다. 그러나 놀랍도록 선명한 흑백 이미지 때문에 베르히만의 오랜 협력자인 스벤 니크비스트의 촬영을 그 어느 때보다도 찬탄하게 됐다. 나는 프레임을 멈췄다가 천천히 진행시키면서 그가 인간의 얼굴에 비친 빛을 몇 분의 1인치의 정확성으로 컨트롤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삼부작은 그 무엇보다도 아름다움으로 점철된 작품들이었다. 그 영화들을 컬러로 본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베르히만은 나중에 많은 컬러영화를 만들었지만, 나는 베르히만이 그렇게 경력을 시작했더라도 세상이 그를 대가로 인식했을지 의문이다. 펠리니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의 감독들은 흑백이라는 선택 대안을 잃으면서 팔레트의 절반을 어쩔 수 없이 잃어야 했다. 나는 베르히만에게 친근감을 느낀다. 나는 근본적인 질문들을 물으려는 그의 강박관념에서 내가 유년기에 가톨릭 신앙을 심사숙고하며 벌인 투쟁의 강렬함을 감지했다. 그의 아버지는 루터파 목사였다. 그의 유년기는 제약이 심하고 험난했으며 그가 느끼는 죄책감은 깊었다. 성인이 된 그는 여성들을 통해 완성을 추구했지만, 여성들과 오랫동안 충실한 관계를 유지하지는 못했다. 여성들은 그가 죄의식에 빠져 있는 동안 향할 성사聖事와 비슷했다. -397쪽
스코시즈와 나는 1942년에 다섯 달 차이로 태어났다. 우리 각자가 태어난 세계는 이보다 더 다를 수가 없는 곳이었지만, 우리는 중요한 방식으로 비슷한 유년기를 보냈다. 우리는 자신들의 민족적 혈통을 잘 인지하는 노동 계급 부모의 아이들이었다. 우리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리기 이전 시기에 로마 가톨릭 학교와 성당에 다녔다. 우리가 다닌 학교와 성당은 근본적으로 비슷한 곳이었다. 우리는 미사에 사용되는 라틴어를 암기했고, 대죄와 소죄, 축성의 은총, 지옥 불에 대한 지식을 반복적으로 주입받았다. 우리는 볼티모어 교리문답을 엄청나게 암기했다. 우리는 영겁이라는 개념 때문에 당황스러웠고, 하나님께서는 어째서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실 수 있느냐고 물었다. 우리는 운동에는 재능이 없는 실내의 아이들이었다. “쟤는 늘 책에 코를 파묻고 있어.” 우리는 늘 영화를 보러 다녔다. 내 경우에는 텔레비전이 우리 고향에 이상할 정도로 늦게 당도해서였고, 스코시즈의 경우에는 그의 아버지가 그를 데려간 것으로 시작해서 이후로는 그가 혼자서 다니게 되어서였다. 그는 때로는 날마다 영화를 봤는데, 무슨 영화건 가리지 않고 보면서 거기서 무엇인가를 배웠다. 그는 1주일 내내 반복해서 방송되는 WOR-TV의 이 주의 영화를 매주 빼놓지 않고 시청했다. 그는 디테일한 것들에 매료됐다. 언젠가 그는 마이클 파웰과 에머릭 프레스버거 감독의 <흑수선>에서 데보라 커를 찍은, 그의 시선을 사로잡은 단일 숏에 대해 내게 얘기했다. 커의 클로즈업 장면이었는데, 신비하게도 그 장면에는 단순한 클로즈업을 넘어서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화면에 무슨 일인가가 벌어졌는데, 그는 그게 무엇이었는지, 어떻게 그런 화면이 탄생한 것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지만, 그렇다는 것만큼은 감지할 수 있었다. 세월이 흘러, 그는 마이클 파웰을 컨설턴트로 모시고서야 그 의문에 대한 답을 찾아낼 수 있었다. 파웰은 커에게 자리에서 일어나 숏으로 들어오라고 지시한 다음 그녀가 숏에 들어오기 한 프레임 전부터 편집했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그녀가 등장하는 화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급박함이 감돌았던 것이다. 아무튼 이걸 계기로 파웰과 텔마 슌메이커는 서로를 만나게 됐고, 두 사람은 많은 이들의 기쁨 속에 행복한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모든 게 다락에서 맞은 그 밤 이후로 일어난 일이었다. -412쪽
우디 앨런은 가장 개방적이고 논리 정연한 감독이다. 그러나 그와 하는 인터뷰에는 몇 가지 조건이 붙는다. 그의 인터뷰에는 인터뷰 기사는 뉴욕에는 엠바고라는 조건이 항상 붙는다. 내 글은 1980년대와 1990년대 일부 기간 동안 『뉴욕 데일리 뉴스』나 『뉴욕 포스트』에 신디케이트로 실렸었다. 그래서 그 조건은 그 신문들이 그를 인터뷰하고 쓴 내 글을 게재하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그럴듯한 이유는 그가 『뉴욕 타임스』에만 독점권을 주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와 얘기하는 게 늘 즐거웠다. 우리의 대화가 영화에서 멀어져 삶과 죽음, 세상 모든 것의 의미 같은 더 넓은 영역으로 들어가는 듯 보이는 것 같아 특히 즐거웠다. “내 평생의 위업에 대해서는 단 1초도 신경 쓰지 않아요.” 언젠가 그가 내게 한 말이다. “내가 죽고 난 다음에 사람들이 내 작품들로 무슨 일을 할 것인지도 신경 쓰지 않아요. 그것들을 변기에 넣고 물을 내려도 괜찮아요. 사람들은 자기가 실존하지 않는 존재가 됐을 때에도 그것들이 자기한테 뭔가 의미를 가질 거라고 착각하고는 해요. 하지만 거기에 의식의 흔적은 존재하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자기가 죽은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 하는 것은 완전히 부적절한 게 돼요. 전부요. 그건 별 의미가 없어요.” -428쪽
헤어초크는 쉬운 영화를 만드는 능력은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는 위험하고 험난한 로케이션을 추구하나? 그의 촬영 기간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다. 그는 언젠가 “로케이션의 마술”에 대해 언급했다. 그의 영화들은 만년설 아래로 돌진했고 눈물처럼 생긴 풍선을 타고 열대우림 위를 떠다녔다. 그는 세 대륙의 정글과 네 대륙의 사막, 다섯 대륙의 산을 필름에 담았다. 이상하게도, 이런 점에서 그를 보면 떠오르는 감독이 러스 메이어다. 두 사람에 대해 내가 이해하는 것은 영화 연출이라는 작업을 향한 외골수 같은 집중력이다. 메이어에게 새 영화 제작은 통신대에 복무했던 그의 10대 시절을 환기시켜주는 군사적 임무와 비슷했다. 헤어초크에게 그것은 더 복잡하다. 파멸의 가능성이 있는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도전. 그가 숨을 거두는 곳은 그의 침대가 아닐 거라고 나는 예상한다. 그 장소는 활화산 속으로 돌진하는 실험용 비행기 안일 것이다. 나는 영화 평론가가 그의 집필 대상이 되는 사람들과 친해지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일이라고 믿는다. 나는 가급적 거리를 두고 영화를 보는 내 고유의 능력을 활용해서 “이해의 충돌”이 될 관계에서 벗어난다. 나는 시나리오를 읽고 싶지 않다. 러프 컷을 보고 싶지 않다. 깊은 관계에 휘말리고 싶지 않다. 그것이 폴린 카엘의 결점이었다. 그녀는 그녀가 입양한 감독들에게 지령서를 발행했다. 어쩌면 그것은 결점이라기보다는 반드시 고려해야 할 사실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분명 자신의 당파성을 숨기지 않았다. 작가주의 평론가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작가는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세상에 접근한다. 그러나 나는 친구들을 사귀었다. 이런 우정들은 의도적으로 맺은 것이 아니라, 저절로 피어난 것들이다. 러스 메이어는 평생지기가 됐다. 그레고리 나바와 안나 토머스는 1970년대에 시카고영화제에서 만난 후로 좋은 친구가 됐다. 마틴 스코시즈와 폴 콕스, 로버트 앨트먼, 라민 바흐라니, 에롤 모리스, 노먼 주이슨, 아톰 에고이안 같은 다른 감독들의 경우, 나는 우리는 오랫동안 친한 사이이지만 개인적인 의미에서 가까운 사이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헤어초크가 있다. 나는 그에게 유대감을 느낀다. 그것을 “영적” 유대감이라고 부르겠다. 그런데 그 단어에는 혼란스러운 신학적 분위기가 내포돼 있다. 나는 그가 세상을 보는 방식에서 배우고, 그가 자기 삶을 이끌어가는 방법에 감탄한다. 나는 자기 영화의 주제들을 대하는 그의 방식에 본능적으로 공감한다. 그의 육체적이고 도덕적인 용기는 나를 자극하고 격려한다. 나는 그의 작품을 보면 우리가 그걸 함께 걸어서 통과하고 있다고 느낀다. -441쪽
내 안에서 격렬한 즐거움이 솟구쳤다. 그건 내가 살면서 성취한 것들하고는 하등 상관이 없었다. 그걸 부채질하는 것은 순전히 내가 모는 차였다. 이것은 자신들이 타는 차를 제외하고는 남을 부러워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개조 자동차의 황금기를 경험한 십대 소년들이 알고 있는 순수한 기쁨이다. 주 대표 미식축구 선수라고 하더라도, 아버지의 1940년형 올즈를 몰고 다닌다면 그 아이의 운동 실력은 그다지 의미가 없었다. 호크가 안겨주는 쾌감이란. 나는 디트로이트로 이어지는 오래된 도로인 레드 애로 하이웨이 옆에 있는 미시간의 우리 여름 별장에 그 차를 보관했다. 1920년대에 놓인 그 도로는 복고풍으로 보였다. 카포네가 이용했던, 지하에 비밀 도박장이 있는 숙박시설이 있었다. 벽돌로 지은 고전적인 셸 주유소. 과일 노점들. 연례행사인 밀크 보틀 쇼를 알리는 표지판.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분위기의 모텔. 독자여, 레드 애로에서 나는 숱한 이들의 질시를 받았노라. 나는 브리지먼에 있는 마이키스를 자주 찾았다. 그 드라이브인 식당에는 차로 음식을 갖다주는 종업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버거와 셰이크가 담긴 트레이를 받으려고 창문을 내렸고, 채즈 역시 별도의 트레이를 받으려고 창문을 내렸다. 인생은 좋았다. -456쪽
진 시스켈과 나는 소리굽쇠와 비슷했다. 한 쪽을 치면, 다른 쪽이 동일한 횟수로 진동했다. 한 그룹으로서 우리는 늘 서로를 강하게 의식했다. 그 의식은 때로는 동지애의 형태를 취했고, 때로는 상호 응원의 형태를, 때로는 적개심의 형태를 취했다. 우리는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는 상황에서 우리 둘 다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무슨 일인가가 벌어지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눈을 잡아끄는 방식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도왔다. 우리는 보통 똑같은 일들을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그게 지적인 교감을 보여주는 표식일 것이다. 진은 1999년 12월 20일에 세상을 떠났다. 이후로 그는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내 마음에 존재한다. 친구였던 그는 시간이 흐르면서 형제 같은 존재가 됐다. 1977년에 우리는 한때 메리 픽포드의 남편이었던 버디 로저스의 토크쇼에 출연했었다. 그때 로저스가 말했다. “당신들은 라이벌 관계에 있는 형제지간이야. 문제는 둘 다 자기가 형이라고 생각한다는 거야.” 끝없이 반목하는 사람들이라는 게 우리 이미지다. 하지만 우리의 감정은 이미지하고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우리는 서로를 화나게 만드는 방법을 잘 알았다. 우리 둘 다 자신의 감정을, 따스한 감정이건 쌀쌀맞은 감정이건, 숨기려는 노력을 거의 기울이지 않았다. -461쪽
진 시스켈이 그리운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우리 곁에서 내 현재 상황에 대해 농담을 해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지금쯤 되면 내가 엉망이 된 내 몰골을 차차 받아들이고는 마음을 편히 먹으면서 더 이상은 그 주제에 대해 민감해하지 않을 것임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는 지나치게 빠른 시점에 농담을 던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의 농담들은 정말로 웃긴다는 장점이 있었다. 다음은 그가 던졌을 게 분명하다고 확신하는 농담이다. “흐음, 로저의 수술에는 좋은 점이 한 가지 있어. 최소한 그가 자기 턱을 찾으려고 북마크를 할 필요가 더 이상은 없잖아.” 어쨌든 나는 과거에도 내 모습에 대해 지나치게 많은 신경은 쓰지 않았었다. 나는 미셸린 맨으로 보낸 세월 동안 내 외모에 태연해지려는 연습을 많이 했다. 내 현재 문제점들을 얻기 전, 나는 단순히 뚱뚱한 사람이 아니라 “뚱보”로 알려져 있었다. 진 시스켈을 지칭하는 “말라깽이”와 구별하기 위해서였다. 시스켈은 실제로는 전혀 마르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늘 그를 그렇게 부르려고 애썼다. 녹화 중간의 휴식시간에 우리는 지금 리뷰하고 있는 영화들에 대해서는 절대로 논의하지 말자는 원칙을 지켰다. 그래서 우리는 짧은 농담으로 상대를 공격했다. 무대감독 버즈 해넌은 우리의 조역이었고, 카메라맨들은 청중 역할을 맡았다. -480쪽
나는 오프라가 그렇게 뚱뚱하다고는 절대로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섹시하다고 생각했다. 다른 기회에 그녀에게 같이 데이트하지 않겠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카운트 베이시 오케스트라가 파크 웨스트에 왔을 때였다. 그러나 그건 엄밀히 말해 데이트는 아니었다. 그녀는 새벽이 되기 전에 일찌감치 일하러 가야 했다. 그녀는 자기 차를 타고 떠났다. 나는 마음속에 절반쯤 형성된 로맨틱한 기분을 품고 있었던 걸까? 내가 속으로 어떤 생각을 품었건, 오프라는 교묘하고 요령 좋게 커뮤니케이션했다. 그래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중요한 것은, 내 생각에는, 그녀가 내가 말하지 않고 생각만 하던 것을 감지했던 게 분명하다는 점이다. 우리는 우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그녀는 나를 좋아했다. 그러나 그 감정은 연애 감정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채즈와 내가 결혼했을 때, 그녀는 하객으로 결혼식에 와줬다. 나는 우리를 보며 정말로 행복해하는 그녀의 모습에 감동했다. -494쪽
시간이 조금 지나자 자니 카슨 본인이 우리를 초대했다. 이 무렵에는 우리도 TV 경력이 좀 돼 있었는데도 우리 둘 다 겁에 질렸다. 나는 자니의 프로그램이 방송된 첫 밤부터 그를 시청해왔다. 그는 아이돌이었다. 진과 나는 각자 분장실을 배정받았지만, 우리는 서로를 정신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같은 방에 앉았다. 문이 열리더니…… 자니 카슨이 들어왔다. 살아 숨 쉬는 실물 자니 카슨이. 우리랑 같은 방에. 우리는 무심코 벌떡 일어났다. 그는 쇼에 출연하러 온 우리를 환영하고 싶어 했다. 그가 모습을 감췄다. TV 모니터를 보니 닥 세베린센 오케스트라가 유명한 <투나잇 쇼> 테마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로저,” 진이 말했다. “자네하고 나는 이 세계 사람이 아냐. 우리는 이걸 TV로 시청하고 있는 시카고 집에 속한 사람들이야.” 문이 열렸다. 자니의 작가였다. “자니가 올해에 나온 영화들 중에서 당신들이 좋아하는 영화가 무엇 무엇이냐고 물어볼 거예요.” 작가는 그걸 묻고는 떠났다. 진과 나는 서로를 멍하니 쳐다봤다. 입 밖에 내지 않은 사실이 우리 사이 허공에 매달려 있었다. 우리 마음은 백짓장이 됐다. “자네가 좋아하는 영화 제목 좀 대봐.” 진이 말했다. 나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고 대답했다. -495쪽
사람들이 레터맨에게 왜 인터뷰 의자를 두 개 준비하는 거냐고 물으면, 그가 흔히 하는 대답은 “시스켈과 에버트”였다. 1999년에 진이 타계한 후, 그는 나를 한 번 더 게스트로 초대했다. 내 책 『위대한 영화』 1편을 홍보하는 자리였다. 그러고는 다시는 나를 초대하지 않았다. 그는 나한테 열광하거나 하지 않았다. 진과 나는 콤비였다. 조 안텔로가 오래 전에 우리에게 확신시켰듯, “당신들은 흩어지면 허깨비에요. 뭉치면 스타고요.” 레노는 계속 나를 초대했다. 리처드 뢰퍼가 나와 함께 진행을 맡게 됐을 때, 그 역시 초대됐다. 그리고 지금도 정기적으로 게스트로 나간다. 레노는 영화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레터맨이 두 번째 의자를 필요로 하는 경우는 그리 자주 보지 못한다. 나는 그게 진의 의자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진은 그것을 내 의자라고 생각했었다. 좀스러운 우리는 다음번에 데이브의 옆자리에 앉을 사람이 누구인지를 일일이 기록하고 있었다. -503쪽
내가 채즈에게 청혼했을 때, 거기에는 가장 그럴 듯한 이유가 있었다. 나는 그녀와 결혼하고 싶었다. 하워드 스턴은 언젠가 라디오에 출연한 나한테 물었다. 채즈를 볼 때마다 그녀를 흑인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나는 그 질문이 불쾌하지 않았다. 하워드 스턴의 재능은 개인적인 질문들을 서슴없이 묻는 배짱이다.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나는 그녀를 볼 때 채즈를 본다고. 채즈를. 명명백백한 존재. 내게 엄청나게 중요한 사람. 채즈. 역사. 추억. 사랑. 열정. 웃음. 그녀의 채즈다움은 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맞다, 나는 그녀가 흑인이라는 것을 본다. 그녀는 내가 백인이라는 것을 본다. 그런데 우리 관계에서 피부색이 가장 중요한 사항이라면 그 얼마나 서글픈 일이겠는가. 내 친가 가족의 상당수가 세상을 떠난 지금, 그녀의 가족은 내게 가족을, 내게 필요한 정서적 가정을 제공했다. 우리가 시카고 밖으로 첫 여행을 떠나기 전에 그녀는 어머니께 인사시키려고 나를 집에 데려갔다. 나는 건전한 사람의 성장 과정의 어느 시점에는 본능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시기가 반드시 찾아온다고 믿는다. 우리는 성공하지 못할 수도 있다. 오늘날 이 세계에는 내게 수수께끼 같은 존재로 남아 있는 사람들이 많다. 일부 사람들은 불쾌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건 그들의 인종 때문에 그런 게 아니다. 그들이 믿는 신념 때문인 게 일반적이다. -509쪽
채즈에 대한 글을 어떻게 시작할 수 있을까? 그녀는 내 지평선을 채워준다. 그녀는 내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사실이고, 그녀는 내 평생의 사랑이다. 홀로 인생을 살아야 하는 운명에서, 내가 그리로 향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종착지에서 그녀는 나를 구해줬다. 만약 실제로 그랬듯이 암이 나를 찾아왔는데 채즈가 나와 함께 거기 있어 주지 않았다면, 나는 고독하고 노쇠한 늙은이 신세로 전락했을 거라고 상상할 수 있다. 나는 무척이나 아팠다. 조금의 희망도 찾을 길 없는 절망적인 상태로 식물인간이 됐을지도 모른다. 이 여인은 그녀의 사랑을 결코 잃지 않았다. 필요할 때면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끔 나를 밀어붙였다. 그녀는 내가 해낼 수 있을 거라 믿으며 늘 거기 있었다. 그녀의 사랑은 무덤으로 곤두박질치려는 내 등을 떠밀어 올려주는 바람 같았다. -535쪽
우리는 시스켈과 에버트와 뢰퍼의 전통을 이어갈 쇼의 제작을 철저히 기획했다. 채즈는 힘든 일과 협상, 계약을 모두 해치웠다. 우리는 공동 제작자가 될 예정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그녀는 그 일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내가 쇼에 더 출연할 필요가 있다고, 심지어 내 컴퓨터 목소리를 이용해서라도 그럴 필요가 있다고 거듭해서 말했다. 내 본능은 나 자신을 방어하는 것이었다. 나는 한때 그랬던 것처럼 다시는 텔레비전에 나갈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말했다. “맞아요. 하지만 사람들은 당신이 어떤 방식으로 말하느냐가 아니라, 당신이 말하는 내용에 관심이 있어요.” 중요한 점은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옳지 않다는 것이다. 중요한 점은 그녀가 나를 독려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는 나보다도 더 큰 믿음을 가진 사람이다. 나는 채즈가 내 아내가 될 여자라는 것을 처음부터 감지했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후 내 느낌이 맞았다는 것을 안다. 그녀는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내 곁에 있어줬다. 내 아픔은 우리가 예상할 수 있었던 것보다 훨씬 더 컸던 게 분명하다. 나는 그녀와 함께 할 것이다. 그녀를 귀감 삼아 더 강해질 것이다. 그녀는 내 인생을 계속 가능하게 만들어준다. 그리고 그녀의 존재는 나를 사랑과 깊은 안정감으로 채워준다. 결혼은 그런 것을 위해 있는 것이다. 이제 나는 그 사실을 잘 안다. -549쪽
내가 더 이상은 먹지도 마시지도 말하지도 못한다고 블로그에 쓰자, 어느 독자가 글을 남겼다. “슬프게 들리네요. 그런 것들이 그립나요?” 사실 그다지 그립지는 않다. 더 이상은 그렇지 않다. 새로운 현실은 서서히 모습을 갖췄다. 수술이 잘못되면 먹고 마시고 말하는 능력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한 번도 듣지 못했다는 것을 나는 이해한다. 먹고 마시는 문제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내가 첫 수술 후에 들은 얘기는 텔레비전 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다는 거였다. 그런 수술의 성공담은 들어보지 못한 얘기가 아니다. 그러나 일은 그런 식으로 진행되지 않았다. 두 번째 수술의 목적은 말하는 능력의 복원이었다. 한동안은 성공한 듯 보였다. 그러다가 그 역시, 외과의의 표현에 따르자면, “실패로 끝났다.” 두 사례 모두,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사람들이 받아들일 만한 외모를 복원하기 위해 내 두 다리에서 취한 뼈와 살로 얼굴을 재건한다는 거였다. 두 수술 모두 실패했다. 혈관들을 다시 붙이는 미세 현미경 수술이 실패했기 때문이다. 닐 파인 박사는 두 차례 모두 훌륭하게 작업했지만, 내가 그의 수술 이전에 받은 중성자 방사선 요법 때문에 혈관 조직이 버텨내지를 못했다. 두 번째 수술에서는 건강한 부위에서 더 위험한 부위로 피를 운반하기 위해 정맥이 사용됐다. 파인 박사는 간호사들과 인턴들에게 정맥이 뛰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지시했고, 나 역시 귀를 기울였다. 부드럽게 고동치는 혈류. 어느 날 그 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다. 이식된 살이 괴사하는 바람에 그 부위를 제거해야 했다. 두 수술 모두 결국에는 경동맥의 최악의 출혈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557쪽
말하는 능력을 잃은 후, 내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깨닫지 못하고 지낸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 재건 성형이 실패하고 다음 수술이 또 실패하면서, 그 깨달음은 몇 달간에 걸쳐 서서히 현실이 돼갔다. 나는 그 현실로 천천히 들어갔다. 처음 1년간은 전반적인 상황을 안개 낀 것처럼 희미하게 만든 진통제 때문에 의식이 몽롱해진 덕에 진입하기가 쉬웠다. 내 목은 말짱했다. 그러나 다른 부위를 위해 도륙당한 양어깨와 두 다리는 내게 고초를 안겨주고 있었다. 앞을 못 보는 사람들은 청각을 더 예민하게 발달시킨다. 청각 장애인은 주변에서 일어난 일들을 더 잘 인지하고 입술의 빠른 움직임과 수화를 이해할 수 있다. 말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어떨까? 우리는 의사소통 방법들을 확장시킨다. 나는 손 흔들기, 가리키기, 어깨 으쓱하기, 이마를 찰싹 때리기, 손바닥에 글자 쓰기, 마임, 제스처, 내가 꿈꿨던 것보다 더 많이 사용한 “엄지 올리기(thumbs-up)”와 “엄지 내리기(thumbs-down)”를 결합시킨 내 고유의 수화를 쓸 수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어요”라고 반응할 때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나는 잘 안다. 대답을 아는 데도 그걸 표현할 능력이 없을 때의 기분이 어떤지를, 그리고 당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쓰거나 타자치거나 신호를 보내려고 애쓰는 동안에 미팅의 흐름이 당신에게서 저만치 멀어질 때 기분이 어떤지를 특히 잘 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배려심 많고 예의바르다는 식으로 반응하지만, 무의식적으로는 내가 조금 느리다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567쪽
좋건 나쁘건 그건 내 얼굴이었고, 그 얼굴의 대부분은 지금도 남아 있다. 얼굴 이식을 하고 나면 그건 다른 누군가의 얼굴일 것이다. 내 내면에 있는 무엇인가가 그 광경을 보고는 움츠러들지도 모른다. 다른 남자가 자기는 더 이상 쓸모가 없다고 여기는 얼굴을 내가 뒤집어쓰는 데 대한 결벽증은 없다. 나는 온갖 종류의 이식 수술을 지지하며, 내가 죽으면 내 불쌍한 장기들이 누군가에게 쓸모 있게 쓰이기를 희망한다. 스페인의 농부와 오하이오의 여성의 행복을 기원한다. 로버트 앨트먼이 심장 이식을 받으면서 10년을 더 살았다는 것을 알고는 엄청난 감동을 받았었다. 그가 만들 수 있었던 영화들을, 그가 사람들에게 안겨줄 수 있었던 기쁨들을 생각해보라. 그 전부가 좋은 일이다. 내가 언젠가 심장이나 간이 필요할 경우, 나는 그런 장기를 구하려 들 것이다. 그러나 이 얼굴은, 얼마나 불완전하냐와 무관하게, 여전히 내 것이다. 나는 이 얼굴의 소유자다. 나는 이 얼굴을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 나는 이 얼굴이 꽤나 마음에 든다. 나 자신의 그 “마지막 사진”을 찍은 후 한동안, 나는 거울보기를 피했다. 나는 첫 수술이 암은 제거했지만 재건은 실패했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어떤 모습일지 희미하게는 알았지만, 그 얼굴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여전히 내면에, 바로 여기에, 머릿속에서 밖을 내다보며 존재한다. 그리고 내 마음에서 나는 여전히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심지어 나는 내가 더 이상은 보유하고 있지 않는 부위의 감각까지도 느낄 수 있다. “환지(幻肢, phantom limb)” 현상이다. 내가 내 머릿속에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느냐고? 우리는 그걸 어떻게 아는가? 거기가 내 뇌가 사는 곳이고 내 두 눈이 있는 곳이다. 나는 내 가슴이나 손, 발에 있지 않다. 나는 여기에 산다. 그리고 아이언 맨처럼 나머지 부위를 조종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당신들이 보는 게 무엇이건, 나는 여전히 똑같은 얼굴을 상상한다. 물론 결국 나는 거울을 봤고, 내 새 생김새를 차차 받아들였다. 첫 수술을 마친 후 내 모습은…… 으음, 지금보다는 나았다. 두 번째 수술이 끝난 후, 채즈는 내가 꽤 좋아 보인다고 말했다. 세 번째 수술의 경우, 나는 휴스턴 병원의 유명인사에게 찾아갔다. 그는 몇 시간 동안 고생했다. 내 기억은 진통제 때문에 흐릿하다. 그러나 이틀 후, 나는 내가 받아들일 만한 내 자신의 버전처럼 보일 얼굴을 볼 수 있도록 채즈가 거울을 붙들고 있던 것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병원의 전문의가 내 혀를 검사하고는 혀의 움직임이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내가 다시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상황은 좋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수술도 실패했다. 세 번의 수술 동안 나를 수술한 의사들이 그 결과에 개인적으로 슬퍼한다는 것을 나는 감지했다. 나는 그들에게 그저 하나의 병례가 아니었다. 미세 현미경 수술은 힘들고 길며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힘든 수술이다. 외과의가 수술 동안 자신이 가진 온갖 솜씨를 다 투입했는데도 그 수술이 실패하면 슬퍼지는 게 당연하다. 나는 그게 그들의 잘못이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았다. -574쪽
내가 잘 아는 사람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스터즈 터켈이다. 나는 시카고로 이주한 직후에 그를 만났다. 올드 타운에 있는 허먼과 메릴루 코건의 아파트에서였다. 허먼은 내가 『선 타임스』에 취직하는 계기를 마련해 준 『시카고 데일리 뉴스』의 편집장이었다. 그날 저녁은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 대화는 조금도 쉬지 않고 이어졌지만 논리가 정연했다. 이 사람들에게 잡담이나 한가한 수다 같은 것은 없었다. 어른들과 같은 테이블에 앉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오래지 않아, 노벨상 수상 소설가 도리스 레싱이 시카고를 방문했다. 스터즈는 내가 케이프타운 대학에서 공부하는 동안 그녀의 책을 모두 읽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는, 이게 더 중요한데, 내가 차가 있고 운전할 줄 안다는 것도 알았다. 스터즈는 운전을 배우지 않았다. 그는 나를 운전사로 선발했고, 나는 스터즈가 그의 본고장인 시카고를 레싱에게 구경시켜 주는 것을 관찰하며 이틀을 보냈다. -584쪽
나는 백만장자 목사라는 우스꽝스러운 지도자들이 이끄는 대형 교회에는 관심이 없다. 그런 교회에서 벌어지는 일은 영적인 일이 아니라 사회 정치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바늘구멍을 지나가려고 애쓰는 부자에 대한 복음을 믿는다. 공화당원이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게 낙타가 천국에 가는 것보다 더 쉽다고 믿는다. 나는 공격적으로 복음을 전도하는 교회들을 도저히 참아낼 수가 없다. 나는 구원을 받으려면 반드시 해야 할 일들에 대한 지시를 받는 데 관심이 없다. 나는 나를 향해 측면에서 지시를 내리는 수평적인 기도보다는 천국을 향해 직접 기도를 올리는 수직적인 기도를 좋아한다. 훌륭한 교회는 홍보가 아니라, 신도들을 끌어들이는 매력을 통해 성장해야 한다고 믿는다. 나는 광신자들이 걱정스럽다. 심지어 나는 어렸을 때에도 “교황보다 더 신실한 가톨릭”이라는 얘기를 종종 듣는 사람들이 미심쩍었다. 우리가 우리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믿음이 받을 자격이 있는 것과 동일한 만큼의 존경심으로 그들의 믿음을 대해야 한다. -604쪽
그게 오고 있음을 안다. 그래도 나는 그게 두렵지 않다. 죽음 저편에는 두려워할 게 하나도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그리로 가는 길에 겪어야 할 아픔이 되도록 크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완벽하게 만족했었다. 그래서 죽음도 똑같은 상태일 거라 생각한다. 나는 지능과 사랑, 경이로움과 웃음이라는 재능을 받은 것에 감사한다. 내 삶이 흥미롭지 않았다는 말은 결코 할 수 없을 것이다. 내 평생의 추억들은 내가 여행에서 집에 가져온 것들이다. 나는 파리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 가져온 조그만 에펠탑 기념품만큼이나 그 추억들을 영원히 필요로 할 것이다. 내가 얼마 안 있어 죽게 될 것이라고 예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죽음은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당장 일어날 수도 있다. -607쪽
목차
옮긴이의 말
기억
1. 이스트 워싱턴 410번지
2. 우리 집안
3. 아버지
4. 어머니
5. 세인트 메리
6. 요요맨 댄-댄
7. 여름
8. 차, 테이블, 카운터, 또는 택호마색
9. 블래키
10. 소명
11. 신문사 시?절
12. 고등학교
13. 대학
14. 『데일리 일리니』
15. 할리우드 여행
16. 케이프타운
17. 런던 답사
18. 이리 맨션
19. 나 홀로 외로이
20. 『선 타임스』
21. 새 직업
22. 종카
23. 맥휴
24. 오루크스
25. 이론 수업을 받는 여유시간
26. 알코올 중독
27. 책은 방을 꾸며 준다
28. 러스 메이어
29. 인터뷰어
30. 리 마빈
31. 로버트 미첨
32. 빅 존 웨인
33. “어빙! 그것들 가져와!”
34. 잉그마르 베르히만
35. 마틴 스코시즈
36. “동전들이 있는 길모퉁이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라”
37. “사람들이 내가 인기 있다고 생각하던 때 나는 인기가 없었어요.”
38. 베르너 헤어초크
39. 빌 낵
40. 시내에서 가장 멋진 자동차
41. 진 시스켈
42. 급소
43. 토크쇼
44. 내가 자습실에서 소리 내 웃었을 때
45. 로맨스
46. 채즈
47.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
48. 입으로는 식사 금지
49. 내 마음에 대한 명상
50. 사물에 새 얼굴을 씌우기
51. 고등학교 동창회
52. 스터즈
53. 유언
54. 나는 신을 어떻게 믿나
55. 평온하게 가라
감사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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