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6월 8일 오늘의 책
윤성희, 백수린, 강화길 외 | 다산책방 | 2020.05
분류 :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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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할머니’의 존재성을 전면에 내세운 첫 소설집 ‘여자 어른’으로서 할머니는 여전히 우리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맞벌이 가정의 아이들 중 절반가량이 할머니의 손에 길러지는 현실에서 우리의 할머니들은 관절염과 우울증에 시달리면서도, 제대로 된 양육비를 받지 못하면서도 중노동에 가까운 ‘두 번째 육아’를 묵묵히 감내하고 있다. 남편에게도 가정에서의 동등한 권위를 (아마도) 인정받지 못했을, 또 (다분히) 사회적으로도 ...
처음 기억하는 할머니의 모습은 일곱 살, 증조할아버지의 장례식이다. 어른이 눈물을 보이는 일을 상상하지 못했던 어린 나는, 할머니가 엉엉 우는 모습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눈물을 흘린 것은 잠시뿐, 이내 할머니는 마음을 추스르고 손님들을 척척 모셨다. 어린 나는 장례식장 구석에 앉아 좋아하는 음식을 집어 먹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고, 할머니는 나를 안방으로 데려다 재워주셨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이래로는 방학이면 한 달 동안 할머니 댁에 머물렀다. 매일매일 모험을 떠날 만큼 넓게 느껴졌던 뒷산과, 새참을 먹는 게 즐거워 도왔던 논밭 농사, 그리고 옷이 흠뻑 적셔 늘 할머니를 고생시켰던 개울가의 물놀이를 잊지 못한다.
그러나 중학교에 올라간 뒤로는 방학 때 할머니 댁을 찾아가지 않았다. 일 년에 서너 번, 많으면 대여섯 번쯤 명절과 생신에 할머니를 뵈었다. 어렸을 때의 따스함과 즐거움을 기억하는 나는 할머니와 살갑게 이야기하는 사이지만, 그뿐이었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푼 할머니에게 어여쁜 손자로 지내오며 한 번도, 한 번도 할머니의 삶을 돌아보지 못했다. 폐지를 줍거나 병상에 누운 늙은 누군가를 보면서 ‘노인’이나 ‘할머니’의 삶을 생각해본 적이 있을지언정, 건강하게 함박웃음을 짓던 우리 할머니의 지난 삶에 관심을 가져보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런 나에게, 혹은 할머니의 지난 생애를 생각하지 못했던 우리에게 『나의 할머니에게』는 그 삶에 가닿기 위한 이야기이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다면, 그 아이가 또 건강하게 자라 아이를 갖는다면 우리는 언젠가 할머니가 될지도 모르겠다. “손주가 태어나면 구연동화를 해주”는 할머니가 되고 싶었던 「어제 꾼 꿈」의 여성은 우리에게 할머니는 할머니로 태어나지 않음을 알려준다. 그녀의 삶은 예상치 못한 일들─늘 술에 취했던 전남편, 사고로 죽고 만 전남편, 멀어진 자식들─의 연속이었고, 그 삶을 지나오며 언젠가 할머니가 될 거라 생각했지만 할머니가 되지 못한다. 그녀의 삶은 예상치 못한 일들을 겪어오며 할머니가 된, 우리 할머니들의 삶을 떠올리게 한다.
「흑설탕 캔디」는 우리가 할머니에게 대입해보지 않았던 애틋한 마음을 상상하게 한다. 남동생의 말에 우연히 할머니의 일기장을 들춰보게 된 ‘나’는, 낯선 이국땅에서 손녀를 돌보던 할머니의 삶을 떠올려 본다. 외국어를 배우는 것이 어려워 아이를 돌보는 것 이외에는 무엇도 하기 어려웠던 할머니. 쑥쑥 자라 거리를 두는 아이들과 항상 바쁜 아들 사이에서 외로워하던 할머니의 삶에, ‘나’는 사랑 이야기 하나를 슬그머니 상상해본다. ‘나’의 머릿속에서 할머니는 “삶에 대한 갈망과 미래에 대한 기대가 또다시 차오르는” 만남을 갖는다. ‘나’와 남동생이, 우리가 사랑을 해오고 씁쓸한 이별을 맛보았듯 할머니가 겪었을 사랑 이야기를 생생하게 상상해낸다. 그 속에서 우리는 또, 새로운 할머니를 그려보게 된다.
「선베드」에서는 할머니를 향한 또 다른 형태의 사랑이 드러난다. 할머니의 곁에서 자란 ‘나’는 어른이 되어서도 할머니에게 걱정을 끼치며 지내온 사람이다. 상대와 거리를 두는 것이 서툴고 감정에 쉽게 휘둘리는 ‘나’는 곧잘 무례와 실수를 저지르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를 잘 수습해주는 친구가 있다. 할머니는 ‘나’에게 쓴소리를 하고 친구를 잘 아끼라고 늘 조언했지만, 어느새 알츠하이머에 걸려 게걸스럽게 음식을 탐하는 모습으로 ‘나’의 앞에 앉아 있다. 스스로를 돌보는 것조차 여전히 어렵고 어색한 ‘나’는 할머니의 병문안을 가는 날에도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어느새 할머니를 돌봐야 하는 나이에 이르렀지만 그러기엔 요원하기만 한 ‘나’의 모습에서 할머니와의 관계를 돌아보게 된다.
한편 「위대한 유산」에서는 집안을 휘어잡았던 새로운 할머니의 모습이 드러난다. 할머니는 어마어마하게 큰 저택의 주인으로, 그 집에는 ‘나’를 데리고 들어온 어머니와 집안일을 하던 아주머니까지, 오로지 여자들만 머물고 있다. 이곳에서 할머니와 어머니는 전혀 애틋한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아주머니를 통해 알게 되는 할머니와 어머니와 나의 모습은 조금은 섬뜩하기까지 하다.
「11월행」에서는 “엄마 둘에 딸 둘”의 여행, 그러니까 할머니와 어머니와 손녀의 여행이 이렇다 할 사건 없이 잔잔하게 펼쳐진다. 어머니와 딸을 데려온 입장인 ‘나’의 시선이 주로 그려지는데, 그녀는 딸아이와 어머니 둘 어느 쪽과도 조금의 거리감을 느낀다. 그러나 어머니를 향해 “나와는 너무 다른 사람”이라고 느끼면서도 딸을 대하는 그녀의 모습은 은은하게 어머니를 닮아 있다. 딸에서 어머니, 그리고 어쩌면 할머니를 향해갈지도 모르는 그녀의 모습이 조금 상상이 되는 작품이다.
「아리아드네의 정원」은 “하루하루 살아 오늘날에 도달”한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시점은 ‘지금 여기’가 우리가 도달할지도 모르는 어떤 미래의 모습을 그려낸다. 점점 노령 인구가 많아지는 사회에서 할머니, 곧 “늙은 여자”는 A에서 F로 나눠진 유닛에 속해져 관리된다. 무기력한 현재의 모습에 몸과 마음이 메말라가는 “늙은 여자”들을 돌봐주는 것은 이민자 수용 정책으로 이곳에 살게 된 이들의 자녀다. 그들은 그들대로 “남아 있는 희망도 없이 긴 시간을 견뎌야” 함을 느끼고 있다. 조금은 절망적인, 그러나 지극히 현실적인 미래의 이야기는 이미 도래한 현실에 관해 고민하게 만든다.
소설을 끝까지 읽고 나서도 사실, 할머니의 삶을 이해하는 것은 조금 요원하게 느껴진다. 내가 살아온 시간보다, 할머니와 나와의 간격이 더 멀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므로 더더욱 그 삶에 가닿기 위해서는 무던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할머니가 우리에게 보여주었던 모습, 보여주고 싶었던 부분은 아주 작은 일부일 테니까.
하지만 이곳에, 자신이 이해거나 상상한 할머니의 모습들을 펼쳐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긴 인생의 일부를 만나다 가는, 옅다면 옅고 강하다면 강한 그 인연을 탐구하고 추억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할머니를 향한 애정과 삶에 대한 상상력으로, 때로는 냉정하기까지 한 현실 인식으로.
그 이야기에 기대어 뒤늦게나마 할머니의 삶을 마주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정확한 이해가 아닌 조금 애틋하고 따스한 오해일지라도.
오늘의 책을 리뷰한 'pianica01'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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