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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루만지다

2009년 5월 6일 오늘의 책

어루만지다

고종석 | 마음산책 | 2009.01

분류 : 인문/교양/철학

정가
$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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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언어학자가 섬세하게 탐구한 ‘우리말의 에로스’ 글 40편으로 구성된 『어루만지다』에서 저자는 손수 고른 ‘사랑의 말들’을 거점으로 삼아, 그 말들을 연관어聯關語(\u003d관련어關聯語), 그리고 인접어隣接語와 견주고, 때로 뜻빛깔(뉘앙스)과 어원語原까지 더듬어가며 여러 맥락에서 ‘말들의 사랑’을 통찰한다. 이와 더불어 표제어와 관련된 국어사전 뜻풀이의 제시에서 여러 글과 문학작품, 노래가사 등을 통한 의미맥락 파악하기, 그리고 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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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루만지다


살풋이 어루만지는 말들의 향연

살풋이(살포시의 북한말) 연인의 품에 안겨 거리를 걷던 시절이, 아직도 문득문득 피어오른다. 신촌과 혜화동의 밤거리를 우리는 뚜렷한 목적도 없이 쏘다녔다. 분식집에서 대충 허기를 채우고 아는 친구가 일한다는 칵테일 바에서 근사하게 술 한 잔 한 후, 초가을의 밤거리를 걸었다. 서로를 꼭 껴안고서. 안에서 차오르던 뜨거운 멍울은 온 몸을 휘젓고 다녔고, 이내 곧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술 때문이었는지, 다른 이유 때문이었는지. 주위 눈치 보지 않으며 스스럼도 없이 키스하고 서로의 몸을 어루만졌다. 방통대에 몰래 들어가 불 켜진 강의실을 뒤로 한 채 어둑한 벤치에 앉아 나누던 입술과 입술, 홍대 안으로 들어가 길을 걷고 계단을 오르며 느끼던 서로의 다정스럽던 눈짓 그리고 손짓. 짧은 사랑은 어처구니없게도 아직까지 내 머릿속에 또렷하게 각인되어 있다.

내 사랑은 실패한 혁명이었고, 되돌릴 수 없는 발걸음이었다. 일말의 오해와 소통 불가능 속에서 우리는 열정만으로 결실을 맺지 못한 채 짧은 사랑을 끝냈다. 한 번 떠나간 옷자락을 다시 잡을 수는 없었다. 차갑게 식어버린 열정은 내 주위를 청승맞게 떠돌아 다녔다. 그가 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아니, 부러 듣지 않으려고 애썼는지도 모른다. 나 자신에 대해 실망하고, 연인에 대해 실망하고, 실은 내 주위를 둘러싼 모든 것이 허망하다고 느꼈다. 되돌아오지 않는 답장을 기다리다 끝내 길가에 주저앉아 버렸다. 말라버린 눈물을 닦지도 못한 채로 그냥 그렇게 굳어버린 사람 마냥. 그렇게 나는 첫사랑을 매조지었다.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휘감아 도는 별빛 같은 속삭임

고종석의 글은 스멀스멀 읽는 이에게 다가온다. 그러고는 몸과 마음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가열하게 휘감는다. 최근에 나온 고종석의 산문집 <어루만지다>를 두고 하는 얘기다. 마지막 쪽까지 정성들여 읽고 나니 내 몸과 마음은 이미 그의 글은 점령당한 후였다. 풍부한 언어학적 깊이와 남다른 감성 그리고 차분하고 은밀한 속삭임까지. 이 책은 읽는 이를 현실로부터 한 발짝 떨어뜨려 놓은 뒤, 온전하고 또렷하게 사랑의 밀어를 들려준다. 고종석은 역시 다르다. 그의 글은 일반적인 논설위원, 에세이스트와는 차원이 다르다. 언어, 말의 고수가 들려주는 사랑 이야기는 시종일관 읽는 이를 감싸 안는다. 로맨스와 에로스의 경계에서 맺어진 이 텍스트의 안감이 더 없이 포근하고 아늑하다면, 당신은 이미 그의 글에 감염된 것이다.

책은 사랑을 할 때 다가오는 거의 모든 것에 대해 다룬다. 사랑의 기슭인 입술, 은밀한 감추기, 교감의 메아리, 자유와 사랑을 오가는 그네, 꽃으로서 오롯이 빛나는 꽃값, 시샘하는 손톱, 꼼지락거리는 발가락, 애달픈 가냘픔, 온전함을 향한 켤레 그리고 사랑의 유토피아인 거품에 이르기까지. 이 책에서 다루는 글의 표제어는 모두 토박이말로 이루어졌다. 그래서일까. 우리 고유의 말들이 유난히도 착착 감긴다. 장을 넘기는 손가락에도, 글자를 따라가는 눈에도, 따라 불러보는 입술에도, 그 소리를 듣는 귓가에도. 때론 섹시하고, 때로는 순수하며 때로는 애달픈 사랑의 수없이 많은 느낌이 모국어 고수인 고종석에 의해 재해석된다. 얄팍한 연애서나 너무 진지하고 난해한 철학서에서는 좀처럼 느낄 수 없는 지성과 감성의 조화로운 교감. 그런 걸 완성할 수 있는 글이, 책이 있다면 아마 이 책 <어루만지다>가 일말의 해답이 될 수도 있겠다.

네 앞에는 무지개가 있어

고종석의 글은 끊임없이 상상력을 자극시킨다. 닫혀있던 머리와 가슴은 겨우내 잠들었다 막 깨어난 곰처럼 어기적거리다가 그네에 올라탄다. 발을 허공에 차면, 고운 선 따라 움직이며 또 다른 세계와 접속한다. 너머의 이룰 수 없는 희망과 몽상. 언제고 우리 앞에 다가올 것만 같은 무지개까지. 이룰 수 없어 슬프다고? 걱정하지 마시라. 그런 떠밀림이 있었기에 우리는 좀 더 한 발 나아갈 수 있었다. 작가도 말하고 있지 않은가.

무지개나 무지개 너머가 상징하는 이 희망들은, 흔히, 이룰 수 없는 희망들이다. 무지개 추적자는 몽상가다. 그러나 희망의 그 어기찬 추구에 떠밀려 세상은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본문 104쪽, <무지개>중에서)

누구나 살면서 사랑한다. 보듬고 아끼고, 그 때문에 울고 웃는다. 한동안 굳게 닫혀있던 싸늘한 마음이 이 책을 읽고 나서 조금은 열렸다. 주위를 둘러보면 내가 어루만져야 할, 또 날 어루만질 인연은 너무나 많았다. 왜 그토록 타인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무심하게 굴었을까. 내 손은, 내 입술은 왜 그토록 묵묵부답이었던가.

길어봐야 백 년 안에 썩어문드러질 제 손을, 제 볼과 입술을, 그런 멋진 일에 써보자. 한 시인의 표현을 훔쳐오자면,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본문 236쪽, <어루만지다> 중에서)

사그라지는 별빛을 맞으며 주름진 피부의 신사가 어둑한 새벽길을 노닌다. 벼락같은 비 무덤의 습격으로 흠뻑 젖은 몸을 이끌어 가면서. 소리 질러도 메아리는 돌아오지 않는다. 아스팔트와 빌딩, 가로등, 희뿌연 공간은 대답하지 않는다. 가녀린 육체는 짝 잃은 신발처럼 슬프고 애잔하다. 그 때, 실바람이 그의 귓가를 간질인다. 그 속삭임이 한 잔 술처럼 그를 녹인다. 길고 하얗게 뿜어내는 긴 한숨처럼 이 외로움과 서러움 가실 날이 오겠지만. 바람이 말한다, 그의 주름진 살결에다 대고. “네 앞에는 무지개가 있어. 굳이 천둥 번개를 헤치며 나아갈 필요는 없어.” 그건 위로이고 배려였으며 열정 그 자체였다. 그가 바람을 어루만진다. 무지개 너머로 해는 떠오른다. 그의 사랑은 다시 시작될 수 있을까. 

서럽고 또 서러워 정처 없이 우니 주위는 어느새 바다가 되어 있었다. 이제 그는 차갑게 식은 열정을 다시 꺼내들어 차분하게 한 발 한 발 다시 내딛는다. 고종석의 <어루만지다>는 살갑게 건네는 주름진 사랑의 말들이다. 기꺼이 받아들어 눈을 다시 감으면, 누군가가 어루만지는 살결의 떨림이 느껴진다. 다시, 사랑의 시작이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자크'님은?

책을 한 꺼풀 한 꺼풀, 벗겨낼 때마다 어두운 방안의 스탠드는 더 환하게 빛납니다. 이 작은 직사각형의 종이뭉치들이 있어 밤이 외롭지 않습니다. 마지막 장까지 다 읽고 나면 차오르는 환희는 두서없이 머릿속을 맴돌다, 몽클 문자라는 기호로 아주 살짝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글의 보드라운 안감이 파르르 떨리는 손끝에서 느껴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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