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3월 6일 오늘의 책
김숨 | 마음산책 | 2017.12
분류 :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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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으로 쓰여진 편지 형식의 미발표 소설 ‘한결같지만 다른 숨’ 김숨 소설의 새롭고도 아름다운 성취 “바늘의 문장으로 산맥을 창조했다”(소설가 권여선) “한국에 가장 절실한 소설”(소설가 정세랑) “범접할 수 없는 깊이와 내밀함”(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권명아) “가히 달인의 경지다”(한국일보)라는 표현은 최근 작가 김숨의 소설을 향한 말들이다. 일찍이 한 문학평론가는 “바늘 한 땀과 한 땀 사이, 그 고르지만 영원히 포개질 수 없는 차이에...
15년을 연극배우로 살던 ‘나’(한선희)는 무대 위에서 쓰러지고 발작 증세가 계속되면서 결국 배우생활을 접게 된다. 40대의 연극배우로 활동하며 편의점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잇던 그녀가 무대에서 내려와 발길을 돌린 곳은 경주의 한 병원이다. 식물인간 상태로 11년을 지낸 44세의 여성(경희)을 돌보는 간병사가 된다. 8개월의 시간 동안 ‘나’는 말도 미동도 없는 그녀를 돌봐왔다. 이 소설은 ‘나’가 그녀를 ‘당신’이라 호명하며 써내려간 서간체의 글이다.
결핍된 ‘나’
내가 보이나요? (16쪽)
나는 어디에 있는 걸까요. (17쪽)
나는 나를 알고 싶어 했던 적이나 있던가요.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 세상에서 가장 모르겠는 사람은 나 자신이었습니다. (99쪽)
화자는 껍데기 같은 인물이다. 자기 자신이 없는 텅 빈 삶을 살아왔다. 화자가 과거로부터 끄집어내는 ‘어머니’의 기억과 무대에서의 기억에는 냉정하고 괴로운 타인과의 경험이 묻어난다. 무대의 주연을 맡아보지 못했던 15년의 배우 생활처럼, 주변은 물론 그녀 스스로도 자신을 삶의 주체적 위치에 놓지 못했다. ‘당신’에게 건네는 문장들 또한 관념적이고 손에 잡히지 않는 말들이 대부분이다. 경주라는 공간적 배경 또한 그녀를 곧 ‘떠날 사람’, 타향 사람으로 만들어 늘 부유하는 존재로 만든다. 그녀는 경주에 속한 인물이라기보다 경주를 산책하는 방랑자에 불과하다. 뿌리내리지 못한 채 존재하는 시간은 그녀의 결핍을 심화한다.
무대의 연장선에 놓인 ‘당신’의 병실
무대 위에서 의미 없는 행위는 없습니다.
의미 없는 고갯짓, 의미 없는 손짓, 의미 없는 어깻짓……
의미 없는 발짓조차도 무대 위에서는 ‘의미 없는 발짓’을 의미하는 행위니까요.
무대 위에서는 모든 행위가 의미 있는 행위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무대를 떠나지 않으려 했던 가장 큰 이유가요. (127쪽)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분장실 소파에 누워 있었습니다. 무대에 오를 때 만삭이던 배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허무하게 꺼져 있었습니다.
‘아기가 나오려고 해요!’
그것이 내가 까맣게 잊은 단 한 줄의 대사였습니다. (229쪽)
껍데기 같은 공허한 삶을 사는 그녀에게 있어 무대는 대사와 행동이 정해진,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의미 있는’ 것이 되는 분명한 세계였다. 그랬기에 월급 20만원의 배고픈 삶으로부터 모두가 무대를 떠나는 동안에도 끝까지 남아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며 현실을 무대에 내어주고 있었다. 소설의 마지막까지도 그녀는 ‘나는 나를 무대에서 잃어버린 게 아닐까요. 그렇다면 나는 무대로 되돌아가야 할까요. 나를 잃어버린 곳이 무대이니 나를 찾으려면 무대로’라고 말한다. 무대는 그녀에게 삶에 가장 가까운 모습으로 분명한 지침과 의미를 부여하는 공간이다. 그러나 ‘나’는 무대로 돌아가고 싶지만 돌아갈 수 없고, 경주에 내려와 말도 미동도 없이 가만히 살아있는 ‘당신’과 병실에 있다. ‘나’가 ‘당신’과 나누는 대화는 극적이다.
나를 데려가고 싶어요.
어디로요?
나에게로.
나요?
나 (184쪽)
식물인간인 ‘당신’이 말을 건다고 생각하고 자신 역시 ‘당신’에게 말을 건다. 관념적인 말들과 극적인 행동을 취한다. 복숭아즙을 입에 흘려넣고 입을 맞추거나, 자신이 입고 왔던 옷과 구두를 ‘당신’에게 갈아입히기도 하고, 떠나기로 한 순간에는 ‘당신’의 얼굴에 화장을 한다. ‘나’에게 있어서 ‘당신’과 있는 병실은 무대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무대에 있을 때에야 비로소 ‘나’의 몸짓은 의미 있는 무언가가 되기에.
‘당신’과의 애착
‘나’에게 있어서 ‘당신’은 무대를 구성하고 성립하도록 하는 중요한 구성 요소다. 상대 배우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기도 한다. 주변에서는 ‘당신’의 친동생보다도 오히려 ‘나’에게 형제가 아니냐고 묻기도 한다. ‘당신’의 몸을 닦는 행위, 옷을 갈아입히고, 입을 맞추거나 손이 맞닿는 등 ‘나’는 점점 더 ‘당신’과의 애착 관계가 깊어진다. 식물인간 상태인 ‘당신’의 심중은 알 수가 없다. ‘나’의 머릿속에 맴도는 ‘당신’과의 대화는 곧 화자가 머릿속에서 자아내는 자기 자신과의 대화다. 어쩌면 ‘나’는 최초로 주연을 맡아 무대에 올라 있는지도 모른다.
“다른 데로 가신다면서요?”
“아직 모르고 있어요.”
“네?”
박 간호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안경 너머로 나를 바라봅니다.
“아직 그녀에게 말해주지 않았거든요.”
“그녀요?”
“그녀요……” (258쪽)
무대 밖 타인의 입장에서는 ‘나’의 행동이 이상하게 보인다. 식물인간인 ‘당신’을 대화가 가능한 존재인 것처럼 표현하고, ‘그녀’라는 생경한 호칭으로 부를 때 간호사와 ‘당신’의 남편은 당황하는 모습을 보인다.
삶이 옷이라면 그것을 벗어 정 선생님에게 주고 싶었습니다. 어째서인지 정 선생님이라면 내 삶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선생님이 내 삶을 대신 살아주었으면 좋겠어요.”
…
내 삶이, 내 삶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습니다. 나와 삶이 어우러지지 못하고 겉도는 것 같은. 나 자신이 짝이 아닌 받침대 위에 생뚱맞게 올라가 있는 찻잔만 같을 때가요. (84쪽)
‘정 선생님’이라는 인물은 화자가 연극배우로 활동하던 당시 의지하고 따르던 여자다. ‘나’는 과거에는 ‘정 선생님’에게 이와 같은 애착 관계를 형성하고 의존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삶에 주체가 되지 못한 ‘나’는 ‘정 선생님’, ‘당신’ 등 타인에게 의존하며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한다.
‘당신’의 상실, 이후
책의 마지막 장에서 ‘나’는 ‘당신’이 요양소로 떠나게 되었음을 알게 되고 절망한다. ‘나’는 ‘그녀’와 샴쌍둥이처럼 이어져있어, ‘당신과 나를 분리시키기 위한 수술대’를 그리며 병원 안의 수술실 앞을 서성이기도 한다.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데려가지 말아달라고 호소해보기도 하지만, ‘당신’의 남편에게 있어서 그것은 황당한 소리다. 피가 이어지지도 않은 완전한 타인, 그저 간병사로 돈을 받고 일할 뿐인 마흔의 여자가 동년배의 여인에게 집착하고 ‘그녀’라고 표현하는 것에 대하여.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는 잔디밭의 노인을 발견하고 다가간다.
‘무대로 걸어 나가는 심정으로 나는 노인에게 한 발짝 한 발짝 다가갑니다.’(269쪽)
‘불현듯 노인이 어쩌면 내 아이가 아닐까 하는 황당한 생각이 듭니다. 수백 년 전에 내가 낳은, 혹은 수백 년 뒤에 내가 낳을 아이가 아닐까 하는.’ (270쪽)
그녀는 또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무대를 찾아간다. 마치 마지막 홍 선생님의 연극 무대에서 “아이가 나오려고 해요”라는 대사를 내뱉지 못한 채 고꾸라져, 배가 푹 꺼진 채 돌아왔던 그 임산부 역할을 마저 해내듯 말이다.
스스로가 결핍된 삶은 슬프다. 바깥으로부터 자신의 존재를 확인받으려는 필사적인 몸부림. 종종 그것을 목격하고, 또 자행하는 것이다.
| Editor_박태연
ssogum@bn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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