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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 듯 저물지 않는

2018년 1월 24일 오늘의 책

저물 듯 저물지 않는

에쿠니 가오리 | 소담 | 2017.12

분류 : 소설

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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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 듯 저물지 않는 어느 여름날의 황혼 낮도 밤도 아닌, 그 어스름한 때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 쉰이 넘었지만 여전히 어린애 같은 생활 패턴으로 살고 있는 미노루는 탐독가다. 책을 읽을 땐 밖이 더운지 추운지도 모른다. 부유한 부모가 남긴 유산으로 먹고사는데, 유산은 친구이자 세무사인 오타케가 관리해주고 있으니 집이 어디에 몇 채가 있는지 재산은 얼마나 되는지 확실히 알지 못한다. 자유분방한 옷차림을 즐기고, 소프트아이스크림이 좋아서 가게를 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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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매한 온도를 조심해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 『저물 듯 저물지 않는』은 해가 저물어가는 시간처럼, 뜨거운 청년기를 지나보내고 서서히 온도가 가라앉는 중년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전작 『벌거숭이들』이나 『장미, 비파, 레몬』처럼 여러 인물이 등장하여 번갈아가며 각자의 목소리를 낸다. 이번 소설에서는 특이하게도 책을 좋아하는 주인공 ‘미노루’가 읽고 있는 북유럽 미스터리 소설이 사이사이 자리를 차지한다.

재미있는 점은 미노루가 책을 읽다가 주변 상황에 의해 책에서 눈을 떼는 순간, 그 문장에서 북유럽 미스터리의 흐름을 끊는 것이다. 게다가 액자식으로 삽입된 ‘소설 안의 소설’은 『저물 듯 저물지 않는』의 첫 장에 자리한다. 미노루와 그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가 물론 이 책의 뼈대가 되는 서사지만 작가는 과감하게 ‘소설 안의 소설’로 책을 시작한다. 미노루가 읽고 있는 책 속의 인물들은 오히려 더욱 극적이고 생동감 있게 움직이며 미노루의 세계를 역전한다.

나이 50이 넘은 미노루는 물려받은 재산으로 단조로운 일상을 사는 인물이다. 아내와 이혼한 뒤 떨어져 살게 된 딸 ‘하토’와 가끔 만나기도 하고, 멀리 해외에 나가있는 누나 ‘스즈메’가 돌아와 함께 맛있는 걸 먹으러 가기도 한다. 홀로 사는 미노루를 친구이자 재산관리인인 오타케가 간간이 찾아와 그의 생활을 돌보며 염려 섞인 잔소리를 하기도 한다. 아이스크림 가게를 차렸지만 가게 안의 기계를 켜는 방법조차 모른다. 누나인 스즈메와 늦은 시간 찾아간 자신의 가게에서 직원에게 전화를 걸어 커피머신의 작동 방법을 묻기도 한다.

책의 제목인 『저물 듯 저물지 않는』은 인물들이 머물러있는 ‘중년’이라는 삶의 지점에도 대응되지만, 미노루의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애매한 온도 또한 그 표현에 걸맞다. 그렇기에 주변 인물들과 미노루 사이의 미묘한 온도차가 그리는 불협화음이 재미있는 소설이다. 미노루의 동창 ‘준코’는 그와 하룻밤 몸을 섞었지만 평소와 다름없는 그의 태도에 실망한다. 미노루에게 그것은 크게 ‘특별한’ 일이 되지 않으며 심지어 가슴을 드러내고 기대앉은 준코의 모습에 불편함을 느끼기도 한다. 분명 그는 준코와 몸을 섞었지만 섹스와 준코는 동떨어진 키워드인 것이다. 어쩌면 그 사이를 잇는 ‘감정’이라는 부분이 결핍되어 있는 탓일지도 모른다.

미지근한 온도에 머물러 있는 그는 타인의 온도에 크게 관심이 없다. 그와 닮은 인물인 딸 하토와 누나 스즈메 정도가 그의 곁에서 함께 책을 읽을 뿐이다. 그렇기에 그에게 어떤 감정적인 교류를 기대하고 다가선 이들은 대개 엉뚱한 반응을 돌려받거나, 그의 온도를 파악하고 한 발짝 물러선다.

과거의 어느 시기에 미노루와 같은 온도를 조우한 적이 있다. 그와 한 공간에 있을 때는 늘 조심스레 행동하고 되도록 그와는 멀찍이 떨어져 있으려 했다. 그가 무심코 내뱉은 말이나 행동들은 기묘하게 왜곡되어 돌아왔고, 나는 그 사람 몰래 무안해지거나 상처를 받곤 했으니까.

상대의 온도를 파악하고 그에 맞춰 스스로의 온도를 조절하는 일. 미노루를 보며 과거의 그를 떠올린다. 그 또한 아무 악의 없는, 그저 그 사람다운 자연스러운 몸짓이었으리라 짐작한다. 다만 다시 한 번 그 미온수에 사는 물고기를 만난다면, 나는 또 도망칠 뿐이다.


| Editor_박태연
ssogum@bn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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