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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짐승아시아하기

2019년 9월 23일 오늘의 책

여자짐승아시아하기

김혜순 | 문학과지성사 | 2019.07

분류 : 시/에세이/기행

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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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핀 시문학상 수상 시인 김혜순의 아시아 여행기 『여자짐승아시아하기』가 로 출간되었다. 올해 시작(詩作) 40년을 맞이한 김혜순은 여성시인으로서의 글쓰기에 대한 고민을 바탕으로 거대 담론과 남성적 세계를 향한 비명에 가까운 시쓰기를 지속해왔다. 13권의 시집에서 ‘프랙털 도형’처럼 모습을 바꾸며 무한 증식하고 확장하여 스스로 움직여온 김혜순의 시적 언어는 하나의 커다란 질문에 대한 다종다양한 답변 같기도 하다. 페미니즘이 시와 만났을 때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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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로 여자짐승아시아하기


나는 문학적 보편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남성적 원전에 부대끼면서도, 페미니즘이라고 불리는 서양적 담론으로부터도 멀리 떨어져 사는 제3세계의 여성 시인이다. 그럼에도 이 자리, 이 이중 삼중의 식민지 속에서 나는 여성의 언어도 여성적 존재의 참혹과 광기와 질곡과 사랑을 드러내는 글쓰기에 대해 말해야 한다. (김혜순,『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본문 중)

 

‘문지 에크리’는 문학과 지성사에서 새로이 엮은 산문집 시리즈다. 여기서 에크리ecrire란 프랑스어로 ‘쓰인 것’ 혹은 ‘(그/그녀가 무엇을) 쓰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쓰다’라는 행위에 방점을 찍은 만큼 ‘문지 에크리’는 지금까지 자신만의 문체로 특유의 스타일을 일궈낸 문학 작가들의 사유를 동시대 독자의 취향에 맞게 구성·기획한 산문 시리즈다. 한마디로 작가들의 표현방식이 자유롭다. 일례로 『여자짐승아시아하기』 이전에 같은 시리즈 중 이광호 평론가의 『너는 우연한 고양이』를 읽었는데, 산문이나 에세이라기보다는 (산문 형식의) 시에 가깝다고 느꼈다.

 

나는 여자하기와 짐승하기로 실재하는 아시아를 여행했다. 여행은 ‘나’라는 존재가 붙박인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과정이며 운동이라는 것을 일깨워준다. 여행은 ‘나’를 떼어내어 분산시키는 하나의 작용이다. 여행하는 동안 나는 설설 끓는 솥에서 분출하여 사라지는 안개처럼, 당신의 얼굴이 사라진 다음 그 주위를 맴도는 부사처럼. 아련한 그 모습, 여자이면서 짐승이기도 한 아시아의 ‘아시아’가 내 주위를 맴도는 것을 느꼈다. (말머리, 14쪽)

 

『여자짐승아시아하기』는 지난 6월 6일 그리핀 시 문학상을 수상하며 한국 시문학사에 한 획을 그은 김혜순 시인의 산문집이다. 아니다, 이 책도 그저 산문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시詩하기’를 말하는 만큼 시와 산문의 영역을 넘나들며, 여행기를 표방하고 있으나 관광지에서의 경험 혹은 정보보다는 거기에서 들여다본 사람들, 거기서 촉발된 여러 생각들, 그리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과정이 나타난다. 여행기라는데 어디를 여행하고 있는지 명확하게 읊어주지 않는다. 이 나라가 어디인지, 여긴 어느 도시인지, 시인이 어느 지점을 지나고 있는지 본문에서 일러주지 않으며, 되돌아보자 화려하지 않은 목차에 작게 쓰여있는 게 전부다. 그런데 그러한 사실은 별로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지난 학기에 꼭 돈을 모아 방학 때 해외여행―정확히는 중국―을 가보라고 신신당부하는 교수님이 계셨다. 말이 통하든 그렇지 않든 내가 직접 계획을 짜서 바다를 건너고 낯선 곳에서 사람들과 부딪히고 헤매어도 보고 일정이 꼬이더라도 꾸역꾸역 보고 싶은 장소를 찾아가는 경험을 하고 돌아오면 세상을 보는 시야가 전보다 넓게 트인다는 이야기다. 여행하면 달라진다니, 꽤 진부한 말이 아닌가? 들을 때는 워낙 늘 중국 얘기를 하시는 교수님이다 보니 흘려듣고 말았지만, 『여자짐승아시아하기』를 읽으며 문득 그때 들었던 것들이 떠올랐다.

 

신시가지에 오면 나 또한 이 같은 가설무대에서 살다가 왔다는 생각이 엄습한다. 무대에서 잠자고 일어나고, 그리고 이 쥐가 보이지 않는 가설무대에서 내 인생의 연극을 멈출 수밖에 없다는 생각. 형언할 수 없는 곤혹. 나는 무대 밖의 사람들을 보려고 여기에 와 있나? (「쥐」, 91쪽)

 

그러니까 비록 오랜 세월 몇 번이고 인용된 말이라 비루하더라도, 여행이란 나를 알고, 나를 사색하고, 돌아보고, 먼 데서 기어이 ‘나’라는 사람을 발견하고 인지하는 게 아닐까 한다. 그래서 『여자짐승아시아하기』는 여행기이다. 김혜순 시인은 그의 아시아 여행기가 여행인 동시에 시 쓰기의 과정이고, ‘여자의 몸으로 복수적이고 관계적인 경험’을 겪는 것이고, ‘여자짐승아시아하기’의 움직임의 궤적을 기록하려는 시도라고 말한다. 여행하듯 글을 쓰고 글을 쓰는 것처럼 여행한다.

 

부끄럽게도 김혜순 시인의 저작을 한 번도 접해본 적이 없다. 『여자짐승아시아하기』는 산문집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과 시론집 『여성, 시하다』의 연장선에 있다고 한다. 그러니 여자하기, 짐승하기, 아시아하기는 ‘이제 했다’ 혹은 ‘거쳤다’기보다는 시인에게 이미 와있는, 여태껏 해왔고 하고 있으며 할 일일 테다. 그는 여성 시인으로서, 아시아인으로서, 중심부에서 밀려나 자꾸 타자화되는 여자짐승으로서 발화하고 지평을 넓히고 시하고 적는다. 이 책의 마지막 꼭지로 글을 마치고 싶다.

 

글을 쓰는 여성이 스스로의 언어를 발명하려는 지난한 몸짓. 여성성에 ‘들리는’ 과정에서 뾰족하게 솟은 ‘지독하게 붉어서 눈이 시린 모음’의 언어. 그런 글을 읽으면 내 안에서 기쁨에 찬 한 여자가 뛰쳐나오리. 바람이 그곳을 지키고 앉아 있다. 사람의 걸레 커튼 밑에서 여자는 하루 종일 무엇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여자의 눈동자가 흐리다. 마치 사막에 시달려 백내장에 걸린 것처럼. (「지독히 붉어서 눈이 시린 모음」, 254쪽)

 

오늘의 책을 리뷰한 '펜벗 9기 숨니'님은?
글쓰기가 일이 아닌 습관이 되고 싶은 사람. 책을 통해 일상의 영역을 넓히는 대학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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