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 23일 오늘의 책
엄기호 | 창비 | 2014.03
분류 : 사회/정치/법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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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관계의 파탄을 해석하는 단연 번뜩이는 기지 가장 소소한 디테일로부터 길어올린, 가장 보편적인 성찰 현대인이 관계를 맺는 현상으로 저자가 착목한 것은 바로 ‘단속’이란 개념이다. 단속은 자신과 다른 의견이나 타인의 고통같이 이질적인 것의 침입을 철저히 차단하면서, 동질적인 것이나 취미공동체에는 과도하게 접속하고 의존하는 사회현상을 개념화한 말이다. 즉, 차단하고[斷] 접속한다[續]는 의미의 결합이다. 아울러 타인과의 진실한 만남이나 부...
나는 6년째 교회 고등부 교사를 맡고 있다. 교회에는 주일학교라는 제도가 있다. 교회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대부분 영유아부서에서부터 청년부까지 학교가 있다. 학교에는 담당 교역자(목사, 전도사)와 담당 부장·부감집사, 그리고 각 반을 맡은 선생님이 있다. 부장·부감은 부서의 예산이나 집행, 각종 행사의 기획에서부터 사후평가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부서 활동에 관여한다. 그리고 부서의 담당 교역자를 지지하고, 부서에서 수고하는 반 선생님들에게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그런데 부장·부감의 활동이 정치화, 속물적이게 되다 보면 차후에 있을 선거(장로, 장립집사, 권사를 뽑는 교회 내 선거)를 위한 사전 활동이 되는 경우가 있다. 모르긴 몰라도 내가 다니는 교회에서는 그렇다. 다음 달에 교회에서 선거가 있는데, 뜬금없이 교회의 청년들에게 페이스북 친구요청이 온다거나 누군지 알 수 없는 번호로 좋은 성경구절이 갑자기 문자메시지로 도착한다. 그리고 해당 부서의 담당 교역자를 지지하고 그의 능력을 칭찬해 주는 것이 아니라 반 선생님들을 강압적으로 통제하고 마치 회사 부하 직원에게 부당하게 대하는 상사처럼 행동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부장·부감 집사를 겪으며 정말 교회도 갈 데까지 갔구나 싶어 참담했다. 한편, 예전의 부장·부감이 임기를 마치고 새로운 부장·부감 집사가 온 이후 부서 전체의 분위기가 완전히 바뀐 적도 있다. 그들은 담당 교역자를 잘 도와주고 반 선생님들에게 아낌없이 지지를 해주고 있다. 교회가 세속·속물화 되는 와중에도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드물게나마 아직 교회에 남아있다는 것이 다행스럽기도 하지만, 슬프기도 하다.
이전 부장·부감의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했던 부분이 ‘남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이었다. 특히 부장집사는 현역교사인데, 이분은 말하는 것을 너무나 좋아했다. 회의를 할 때도 자기만 말하는 것을 가장 좋아하는 듯 했다. 말하는 것만 좋아하면 그나마 다행인데, 자기 의견이 관철되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싫은 내색을 하고, 회의 중에 바쁘다며 나가버리기도 했다. 그 의견에 반대되는 의견을 개진하면, 그는 엉뚱한 소리를 하는 등 회의 분위기를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 분과 같은 부서에 3년이나 있었는데, 그는 변함없이 다른 이의 말을 도통 들으려 하지 않았다.
경청이란 남의 이야기를 듣는 행위다. 그것도 건성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듣는 것이며 자신이 모르는 것,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듣는 것을 말한다. 타자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을 넘어서 타자의 말이 아닌 ‘타자성’에 귀 기울이는 것이다. (269쪽)
엄기호의 《단속사회》는 전작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의 확장된 이야기다.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에서 학교라는 사회를 둘러싼 이해관계와 대립, 갈등과 소외를 담아냈다면, 《단속사회》는 분석의 틀을 학교에서 한국 사회 전체로 옮겨왔다. 《단속사회》에서는 끊임없이 차단(斷)하고, 연결(續)하고 접속하는 현대 한국사회를 냉철하게 분석하고 있다. 엄기호는 남의 이야기를 경청해야 할 것을 강조한다. ‘남의 말 듣기’는 한국에서 병적으로 결여된 사회현상이다. 어제 하루 동안 내가 만나서 이야기 한 사람을 생각해 보면 저자의 말이 그대로 맞았다. 주로 내게 말하는 사람이 많았다. 사무적으로나 일상적인 대화 모두 마찬가지였다. 나 또한 그랬다. 퇴근 후 집에 와서 아내에게 하고 싶은 말들을 쏟아냈다. 모두가 말을 하고 싶어 하는 사회다. 하지만 책의 서두에서 강조하고 있듯 사람들은 쏟아 내고 싶은 ‘말’을 정제된 언어와 상대방이 알아들을 수 있는 문장으로 만들어 내는 능력이 거의 없다고 한다. 하고 싶은 얘기를 자기 방식과 자기만의 언어로 쏟아내기만 할뿐, 상대방이 어떻게 이해해줬으면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없다. 일단 쏟아내면 된다는 생각뿐인 것 같다.
내가 글과 말을 팔아먹고 살면서 중요하게 여기게 된 것은 ‘곁’과 ‘이야기’다. ‘곁’은 말하는 자리가 아니라 ‘듣는’ 자리에 가깝다. 곁은 파괴하고 편을 강요하는 것, 이는 우리 사회 전체의 문제이기도 하다. 곁은 파괴되고 편으로 몰아가는 사회. (7쪽)
‘곁’은 파괴되고 ‘편’만 강조하는 사회가 2014년의 한국이다. IMF이후 경제적 상황과 요구만이 개인의 사회 활동과 역량, 가족 구성원의 관계구도를 가름했다. 우리의 ‘곁’은 급속하게 파괴되었다.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벌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취직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정규직이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 아이의 성적을 높일 수 있을까? 하는 것 말고 중요한 화두는 모두 사라졌다. ‘곁’이 파괴된 원인을 개인에게 있다고 보기 때문에 ‘힐링’이 유행처럼 번진다. 하지만 정작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문제는 가장 큰 단위의 사회인 국가가 구조적으로 ‘곁’을 파괴하고 ‘편’을 조장하게끔 만들었다는 것이다. ‘내편’이 아니면 ‘적’이 되어버리는 기구한 굴레에서 사람들이 벗어날 수 없도록 국가와 사회는 맞물려 돌아가고 있다. ‘총체적 난국’의 두 단어가 주는 유의미함이 난국의 개인들에게는 너무나 가혹하다. 총체적 난국인 지경까지 왔으니 사회라는 거대 단위에서 구조적 모순과 한계, 문제를 해결하고 봉합하기보다 손 놓고 ‘개인이 알아서’라며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 파편처럼 흩어져 부유하는 개인은 기댈 곳이 없다. ‘곁’이 없는 것이다. 가족에게 돈을 벌어다 주지 못하는 가장은 무의미한 대상일 뿐이고, 일정 수준의 학업성취를 보이지 못하는 학생은 교실 내에서 문맹이 되어 버린다. 비단 가정과 학교만의 문제도 아니다.
국가폭력이 행사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다. 국민들의 광범위한 동의다. 그런 자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우리 사회가 무너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확산되지 않는다면 불안을 통한 통치는 성공할 수 없다. (223쪽)
사회의 구성원으로 사는 한 ‘내가 쓴 글이 누군가에 의해 고소당하지 않을까?’ 하고, 검열을 해야 한다. 국가기관에서 민간인을 사찰하기 때문이다. 용산참사와 쌍용자동차 노동자 문제에 있어서도 대다수 국민은 쉽게 타올랐다가 한순간에 사그라진다.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 광풍도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해졌다. 모두가 한날한시에 입을 다문다. ‘내 문제’가 아니면 괜히 나서서 긁어 부스럼 만들기 싫은 것이다. 책에서도 언급하듯이 이런 개인적 냉소는 이미 학교에서부터 학습된 것이다.
아는 형님의 첫아이가 올해 초 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입학한지 3일째 아침부터 갑자기 학교에 가기 싫다며 떼를 썼다고 한다. 왼손잡이인 아이에게 담임선생님이 “왼손으로 쓰는 것은 잘못된 것이니, 오른손으로 쓰라.”고 했단다. 학교에서부터 국가나 거대 단위 사회가 원하는 대로 학습되고 교육받는다. 일렬로 서야하고 질문은 가급적 하지 않아야 하며, 선생님의 말은 무조건 들어야 하는 것이 옳다고 아는 학생, 그렇게 모범 학생이 된다. 모범이 된 학생은 커서 국가가 주입하고 가르치는 프로파간다에 그대로 동조한다. 동의하지 않더라도 ‘모난 놈 정 맞는다.’라는 구언을 철석같이 믿고 따른다. 이렇게 파편적으로 일상이 채워지다 보니 ‘곁’은 파괴되고 ‘편’을 찾게 된다. ‘내편’끼리만 모여 있으면 편하고, ‘내편’만은 내 얘기를 들어주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교, 직장, 여타 관계에서 말이 없는 사람도 자신의 SNS에서는 누구보다 활발하게 자신의 일상을 고백하고 토로한다. 끊임없이 단절되었다 연결되는 현대한국인의 자화상이다.
다름과 차이를 차단하게 되면서, 서로의 경험을 참조하며 나누는 배움과 성장은 불가능해진 ‘사회’. 곁을 만드는 언어는 소멸해 버리고 편만 강요하는 ‘사회’. 책임은 오롯이 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사회’.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사회’. 이 세계를 과연 사회라고 부를 수 있을까? (10쪽)
나는 그나마 교회에서 만난 사람들과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속내를 드러내 놓고 대화한다. 하지만 해가 갈수록 나누는 이야기들이 피상적이고 수동적이다. 더 깊은 속내가 있겠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책에서 소개된 일선 교사는 부당한 학교장의 지시와 요구에 대해 동료 교사와 이야기할 수 없어 철학관을 찾아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냈다고 한다. 사회에 꾸며진 개인은 소외되고 격리된다. 모두가 할 말은 많지만 제대로 전하지도, 전할 방법을 알고 있지도 못하다. 다름과 차이를 학습하고 경험했더라면 총체적 난국에 빠진 각종 사안에 대해 적어도 공감할 수 있었을 텐데. 나와 다르면 ‘틀린 것’으로 생각한다. 정부에서 이야기하는 것에 반대하면 나는 종북 세력이 되어 버린다. 직장 내 문제에 대해 의견을 제시하면 동료들로부터 싸늘한 시선을 받는다. 결국 다시 힐링과 자기계발의 최면에 빠져 끝도 없이 추락한다.
《88만원 세대》를 읽고 짱돌을 들고자 마음먹기도 했고, 이명박 정부 시절 광우병 소고기 파동 때는 촛불을 들고 거리에 서 보기도 했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다. 들고 있던 짱돌과 촛불은 거리에서 버려진다. 다시 ‘내방’으로 기어들어가고 만다. 지난 철도노조 파업 당시 정부와 사측, 보수언론에서는 어김없이 ‘귀족노조’를 운운했다. 우선됐어야 할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했다. 개인적 박탈감이 우선이었다.
경청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깨닫게 되는가? 그것은 자기도 모르던 자기의 삶, 즉 자기 삶에 내재되어 있는 타자성이다. 그 타자성을 깨달음으로써 나와 너는 그 타자성을 공유한 사람으로서 공통의 운명이 된다. (271쪽)
저자는 책의 결론을 명확히 하지 않았다. 이 사회에서 어느 누가 명확한 결론과 대책을 낼 수 있을까 싶다. 다만, 경청하는 것. 그래서 ‘너’를 ‘편’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화’해 공감할 것을 강조한다. 사회에 일어나는 각종 사안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과 대책을 쏟아내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데, 모두 자기만 옳다고 생각한다. ‘너의 말’을 먼저 듣지 않아서다. 공감은 개별 단위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가정, 학교, 직장, 우정 관계에서. 속내를 털어놓는 것은 ‘너의 말’을 들은 다음이다. 개별 주체간 신뢰를 회복하는 길도 여기에서 시작해야 한다. 우르르 몰려갔다가 허무하게 빠져 나오는 파편화의 반복은 무의미하다. 믿을 수 있는 관계가 되려면, 우선 ‘너의 말’을 들어야 한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lmicah'님은?
아무리 책을 읽어도 글솜씨가 나아지지 않는 대구에 살고 있는 소시민. '앙가주망'을 삶의 모토로 삼았지만 우물쭈물 하느라 타이밍을 잡지 못하는 30대. 10년을 연애한 아내와 지겨울 때까지 농담하고 장난치는 것이 가장 재미있는 자칭 애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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