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22일 오늘의 책
나희덕 | 하늘바람별 | 2012.09
분류 : 시/에세이/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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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은 흘러가면서 그것을 바라보는 이에게 많은 것을 흘려보낼 수 있게 해 준다. 그동안 쓴 산문들을 정리하는 일이 내게는 시간의 강물을 바라보는 일과도 같았다. 강 저편에서 하나둘 켜지는 불빛들이 거기 누군가 살고 있음을 전한다. 돌아보니, 상처 많은 삶에도 온기 어린 순간들이 적지 않았다. 그 기록이 또한 누군가에게 작은 불빛이 되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13년 만에 산문집을 묶는다.” 13년 만에 엮은 나희덕 시인의 새 산문집. 시...
기억의 자리
어렵게 멀어져간 것들이
다시 돌아올까봐
나는 등을 돌리고 걷는다
추억의 속도보다는 빨리 걸어야 한다
이제 보여줄 수 있는 건
뒷모습뿐, 눈부신 것도
등에 쏟아지는 햇살뿐일 것이니
도망치는 동안에만 아름다울 수 있는
길의 어귀마다
여름꽃들이 피어난다, 키를 달리하여
수많은 내 몸들이 피었다 진다
시든 꽃잎이 그만
피어나는 꽃잎 위로 떨어져내린다
휘청거리지 않으려고
걷는다, 빨리, 기억의 자리마다
발이 멈추어선 줄도 모르고
예전의 그 자리로 돌아온 줄도 모르고
- ‘기억의 자리’ 전문,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창비, 1994
걷고 있으나 나아가지 않는다. “피어나는 꽃잎 위로” “시든 꽃잎” 떨어져내리듯, 새로이 맞는 시간에 지난 과거가 지루하게 겹친다. 도망치고픈 기억이 가혹하게 스민다. 고장 난 오디오처럼 듣기 싫은 구간반복을 계속한다. 스스로도 질리고 남 또한 질려버릴, 낯익은 오늘들이다. 어렵사리 어제로 밀어낸 것들이 다시 돌아와 발목을 붙든다. “예전의 그 자리”로 도망치는 뒷덜미를 잡아 주저앉혀버린다. 부질없이, 제자리걸음의 속도만 빨라진다.
그 말이 나에게 온다, 나를 뒤흔든다. 내 삶이 알은채 한다, ‘기억의 자리’를. 하나의 사람이 온 생(生)을 들고 내게 다가온다, 손을 내민다. 멋쩍게 그 손을 잡고 걷는다, 생의 기억을. 등 돌릴 필요 없는, 도망칠 까닭 없는, “기억의 자리마다 발이 멈추어”선 한 사람을 펼친다, 그 삶의 발자국 따라 함께 걷는다, 천천히.
점은 가장 간결한 존재의 형태로서 그 자체가 하나의 작은 세계이다. 하지만 점은 스스로 침잠해 있기에 자기중심적인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점은 다른 점과 만나 선이 되려고 한다. 점이 점에게로 움직여 간 궤적이 곧 선인 것이다. 면은 선과 선이 어떤 각도와 방향에서 만나느냐에 따라 그 안정감과 저항력이 달라진다. (…) ‘점’이 한 개체의 내밀한 모습을 나타낸다면, 점과 점이 만나는 ‘선’은 개체와 또 다른 개체의 만남을 의미한다. 또한 다양한 선들이 만들어 낸 ‘면’은 사회 또는 공동체를 뜻한다. (…) 결국 몇 개의 점과 선과 면으로 남게 된 지난 십여 년의 시간을 이만 떠나보낸다. 잘 가라, 그 시간들이여, 그 불빛들이여. (5-6쪽)
점에서 선으로, 다시 면으로 향하는 시인이 말한다, 《저 불빛들을 기억해》. “저렇게 수많은 방 속에서 (…) 자신과 싸우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너는 혼자가 아니라는 걸…….” (111쪽) 점처럼 뭉쳐있기만 했던 삶이 다른 점을 만나고 다른 점에게로 움직이고 가림 없이 점들을 받는 선이 있음에 안도하고 기꺼이 면으로까지 확장되는 시간의 품에 안기고, 그리하여 웅덩이처럼 고인 ‘기억의 자리’마저 아직 선이 되지 못한 점들의 미숙함임을, 언젠가 나에게도 그 시인의 말이 찾아올 것임을, 어렴풋이.
잘 가라, 그 시간들이여, 그 불빛들이여
- 컨텐츠팀 에디터 현선(anejsgkrp@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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