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궁전』, 내가 대학생이던 시절 반했던 폴 오스터는 이런 느낌이었다. 물론 10년이 훌쩍 지났으니 그때와는 다소 다른 감상이겠지만, 비교적 최근작인 『어둠속의 남자』, 『겨울일기』와는 다른, 당시 '내 청춘이 좋아했던' 폴 오스터의 느낌이다.
『달의 궁전』은 자발적으로 파산해서 부랑자가 된 포그의 기이한 삶과 그가 만나게 되는 이들의 극단적인 인생 이야기를 다룬다. 각자의 삶을 극단으로 몰아감으로써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세 명의 남자가 있다. 주인공의 포춘 쿠키에서 나온 '태양은 과거고 세상은 현재고 달은 미래다'라는 문장은 세 남자의 삶을 연결하는 고리이기도 하고, 이야기의 처음과 끝을 연결하는 '달'에 대한 암시이기도 한다. 소설의 끝은 포그의 삶의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다.
대학 시절의 나는 이유 없이 삶을 극단으로 포기하는 주인공에게 끌렸다. 인간이 달 위를 처음 걸은 해에 그는 이제부터는 미래가 없을거라고 생각하며 위태로운 삶을 살고자 한다. 책을 읽던 당시의 나 역시 주인공 포그처럼 '앞길이 구만 리 같은 젊은이'였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무력감과 세기말적 허무주의에 빠져 있었다.
나의 청소년기와 이십 대가 세기말과 세기초, 심지어 밀레니엄을 거쳤던 시기라서, 혹은 자발적 허무주의가 청춘의 특권이라고 여겼는지도 모른다. 당시의 나는 포스트모더니즘에 푹 빠져 있었고 특히 니체를 좋아했다. 또한 성장과 발전을 추구해 온 모더니즘에서 벗어나려 했던 포스트모더니즘과, 플라톤적 세계관과 기독교적 세계관을 깨부수는 니힐리즘에 반해 있었다. (물론 실제적으로 니체는 허무 속에서 몰락하는 수동적 니힐리즘에는 반대했으며 최종적으로는 삶을 긍정하는 능동적 니힐리즘의 옹호자였지만) 당시 하루키의 반영웅주의를 사랑했듯이 『달의 궁전』의 주인공의 심정에 이입했던 것이다. (당시의 난 들뢰즈의 정신분열증적 인간형으로 살고자 했고, 천계영의 만화 『DVD』의 명대사 "인생 한번 한심하게 살지 않을래?"를 인생의 좌우명으로 삼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속된 말로 ‘손발 오그라드는’ 부끄러운 시절이다.)
나이를 먹고 『달의 궁전』을 다시 읽었을 때는, 주인공의 극단적인 심정에 이입하지 않았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되려 이야기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한 세 명의 여인들의 삶과 내면이 궁금했다. 세 명의 남자들을 만났던 세 명의 여인들은 무슨 생각을 했으며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남자도, 사랑도 모른 채 결혼하고 남편을 거부하기만 하다가 그가 떠나기 전 하룻밤으로 아이를 갖게 된 엘리자베스, 육체의 미보다는 정신의 아름다움에 반해 사랑에 빠졌으나 그를 떠나 미혼모의 길을 선택한 에밀리, 그리고 '중력의 법칙을 거스를 만큼 강력한' 사랑으로 추락하는 포그를 구해 낸 키티. 그녀들이 궁금하다. 남자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이야기에서 그녀들의 심정을 읽기 어렵다. 다만 그녀들은 원하지 않는 임신이라는 동일한 상황에서 서로 다른 선택을 했다. 엘리자베스는 아이를 부정하고 마침내 자기 자신도 부정하고 만다. 에밀리는 학생이었던 자신의 삶 대신 어머니의 삶을 선택했다. 왜 미혼모의 길을 선택했을까? 사랑을 후회했던 걸까? 키티는 무용의 꿈을 위해 아이 대신 자신의 삶을 선택한다. 그녀들의 마음을 읽기 어려워 독자는 마음대로 상상해 볼 뿐이다.
세월이 흐르고 경험이 달라지는 만큼 책을 읽는 마음도 달라진다. 어린 시절 읽었던 책들을 지금 다시 읽는다면 보는 관점이 많이 바뀌었음을 체감할 것이다. 지금처럼 '경험한 삶' 보다는 '경험하지 않은 삶'에 기반해서 생각하던 그 시절이 조금 그립기도 하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승승이'님은?
인간에게는 경멸해야 할 것보다 찬양해야 할 것이 더 많다고 믿는 이상주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