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0월 2일 오늘의 책
박목월외 | 을유문화사 | 2006.06
분류 : 시/에세이/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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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목월, 조지훈, 박두진의 3인 합동시집『청록집』이 출간된지 60주년을 맞아 초간본 그대로를 싣고 앞에는 현행 맞춤법에 맞게 엮은 새로운 형태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문학평론가 도정일 교수(경희대)는『청록집』에 대해 “『청록집』의 출간은 우리 현대 문학사상 중요한 사건의 하나다. 『청록집』출간이 문학사적 사건을 넘어 문화사적 정신사적 의미를 획득하는 핵심은 ‘서정의 상실’에 대한 거부이고 저항에 있다.”고 언급하였고, 김선학 교수(동국대)도 지면...
이 책을 처음 집은 순간 드는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을유문화사가 ‘사고’를 쳤구나. 그것도 제대로 된 사고를!
청록집이 다시 나왔다. 이 땅에서 제도교육에 편입되어 의무교육과정을 모두 마쳤다면 ‘청록집’을 모르긴 어렵다.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한국의 시 역사를 한 권의 책으로 묶는다면 이 세 명의 시인들은 최소한 한 페이지씩은 충분히 감당하고도 남을만한 이름일 것이다. 이 책을 시대적 배경인‘일본 제국주의’와 연관하지 않고, 우리 말의 조탁(彫琢)과 시적 성취만을 놓고 본다 하더라도 그 자체만으로 가치가 있다.
박목월의 그 유명한 싯구, “나그네”를 보면,
강나루 건너서/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남도 삼백 리// 술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가는 나그네
전통적 7.5조를 차용해 남도의 풍경을 군더더기 한 점 없이 유려하게 뽑아내는 장인의 붓솜씨를 느낄 수 있다. 몇 번을 다시 읽어도 질리지 않는 빼어난 문장이다.
조지훈은 어떤가 ‘봉황수(鳳凰愁)를 살펴보자.
(중략)큰 나라 섬기다 거미줄 친 옥좌 위엔 여의주 희롱하는 쌍룡 대신에 두 마리 봉황새를 틀어 올렸다. 어느 땐들 봉황이 울었으랴만 푸르른 하늘 밑 추석(甃石)을 밟고 가는 나의 그림자. 패옥(佩玉) 소리도 없었다.(중략) 눈물이 속된 줄을 모를 양이면 봉황새야 구천에 호곡하리라.
1940년대에 쓰여진 글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모던한 문장이다. 조지훈의 역사적 자립성과 시의 무대를 풍성케 만드는 조지훈식 드라마투르기의 육성을 생생하게 확장해준다.
마지막으로 박두진, 묘지송(墓地頌)이다.
(중략) 금잔디 사이 할미꽃도 피었고 삐이 삐애 배, 뱃종! 뱃종! 멧새들도 우는데 봄볕 푸근한 무덤에 주검들이 누웠네
박두진 특유의 상상력으로 ‘죽음’에 대한 어두운 이미지를 금잔디와 멧새, 봄볕 같은 환한 오브제 사이에 배치하여 선명한 대비 효과, 긍정적 치환을 이끌어낸다. 그의 시에서는 서러움도 서럽지 않고 죽음마저도 향기롭다.
‘청록집’에 실린 서른 아홉편의 시들은 해방공간의 혼란을 넘어서려는 시인들의 지적 안간힘인 동시에 우리 말의 혼과 전통을 최전선까지 밀어올린 빛나는 문학사적 성과이다. 을유문화사의 '청록집' 제 2판은 단순히 옛 시집을 재발간했다는 데 그치지 않는다. 출판사는 책의 절반을 나눠, 같은 내용을 병렬 배치했다. 앞표지에서부터 읽으면 현대어로 손을 본 가로읽기본의 ‘신판 청록집’을 만날 수 있고, 뒷표지에서부터 읽게 되면 1940년대 장정의 누런 종이, 세로읽기본의 ‘오래된 청록집’을 펼칠 수 있다. 그 딱 중간에는 평론가의 해설이 붙어있어 어느 쪽에서 읽어도 오래전과 지금의 청록집을 비교하면서 이 책에 실린 함의를 풍성하게 돌이켜 보게 해준다.
구관이 항상 명관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법고창신(法古創新)과 더불어 옛 시절과 현재를 더불어 환기하는 것은 언제 어느 때고 중요한 일이다. 을유문화사가 이번에 ‘청록집’을 펴낸 작업은 우리 말의 아름다운 고갱이를 그 속살까지 깊이 맛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세월의 힘은 강하다. 시간 앞에는 장사가 없고, 역사의 심판과 세태의 풍화를 견디고 '명작'으로 살아남는 시집은 당연히 흔하지 않다. '청록집'은 세월을 견디고 고전으로 살아남은 훌륭한 예외 중의 하나다. 오래되어 더 특별한 향기, 깊고 그윽한 문자향을 맛볼 수 있는 기회는 드물다. 이 시집 '청록집'으로 그 특별한 기회를 향유하기를 바란다. 후회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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