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 가는 게 쉽지 않았던 어린 시절. 주말이 되기만을 손꼽아 기다린 데는 주말의 명화와 명화극장이 있었습니다. 독특한 시그널과 함께 성우의 더빙으로 친근하게 전해지던 그때의 브라운관 속 영화들은 지금까지도 장면 하나하나가 생생합니다.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줄리아 로버츠가 나오는 영화를 할 해면 언제나 비디오테이프로 녹화해 몇 번이고 돌려보기도 했습니다. 그중에서 녹화 테이프가 늘어질 때까지 봤던 영화는 두 편이었습니다. 줄리아 로버츠의 리즈 시절을 보여주는 '귀여운 여인'과 '적과의 동침'입니다.
귀여운 여인이야 모르는 분이 없겠죠. 그러나 당시 초등학생이던 나에게 더 큰 인상을 남겨준 건 적과의 동침이었습니다. 결벽증에 의처증으로 폭력을 마구 휘두르던 사이코 남편에게 학대받던 여인이 목숨 건 탈출 끝에 자신의 삶을 찾는다는 미국 영화입니다. 이 영화가 인상 깊게 남아 있는 것은 영화 전반에 흐르던 베를리오즈의 환상 교향곡 덕분입니다. 사이코 남편의 BGM이라 할 수 있는 이 음악은 영화의 긴장감을 극대화하는 데 큰 역할을 합니다. 풍부하게 울리는 관현악 선율이 오싹함을 배가시키는 환상 교향곡은 극중 남편의 캐릭터를 설명하는 데 더없이 좋은 장치가 되었습니다.
'마데우스' 나 '불멸의 연인' 처럼 음악가가 주인공인 영화가 아니더라도 영화 속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클래식 음악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들 음악은 오랜 시간 갈고 닦은 '고전'의 힘으로 한 장면을 우리 머릿속에 박제시키는 놀라운 힘을 발휘합니다. 제 머릿속에 환상 교향곡처럼 말입니다. 오랜만에 나간 서점에서 주말의 명화처럼 반가운 책을 발견했습니다.
이미 클래식 음악 분야에서는 꽤 알려진 필자인 김성현 기자의 『시네마 클래식』입니다. 책은 역시 미스터리, 음악은 역시 클래식이지요. 『시네마 클래식』에서 소개하는 영화는 모두 32편입니다. 주인공의 심경을 들려주는 클래식, 영화의 주제를 암시하는 클래식, 결정적 장면에 흐르는 클래식이라는 카테고리로 되어 있어 보고 싶은 내용을 먼저 읽어도 되는, 참으로 편리합니다.
차례를 훑어보다가 좋아하는 영화 제목을 찾아 먼저 골라 읽을 수 있으니 참으로 좋습니다. 나는 망설임 없이 베토벤의 현악 4중주가 있는 '마지막 4중주'를 펴서 읽었습니다. 무엇보다 이 책의 매력은 읽을 때마다 장면이 머릿속에 그대로 재현된다는 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글'이라는 평면적 텍스트가 '음악'이라는 청각의 기억을 만나 '영화'로 재현되는 신기한 체험이랄까요. 예전에는 무심코 흘려들었던 '배경음악'이 하나의 온전한 '음악'으로 다시 기억되는 기분입니다. 화면을 지우고 음악만 들어도 그 장면에서 느꼈던 감동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 같아 책을 읽는 내내 귀와 눈이 즐거웠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쇼생크 탈출'편입니다. 지금은 고전 영화라는 이름으로 불리지만, 20년 전 그 당시에는 너도나도 영화 포스터를 방안에 걸어둘 만큼 인기 있는 영화였습니다. 아무튼, 다들 아시겠지만 쇼생크 탈출에는 천재 작곡가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이 등장합니다. 부인을 죽였다는 혐의를 받고 교도소로 온 앤디는 은행장이었던 기술을 살려 교도소장 및 교도관들의 탈세를 돕는 어둠의 회계사입니다. 물론 자기 일에 누구보다 환멸을 느끼지만 자유에 대한 갈망을 놓지 않았기에 암흑 같은 현재를 묵묵히 견뎌 나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끊임없는 탄원서 세례 끝에 받은 기금으로 산 중고 음반과 도서들 사이에서 '피가로의 결혼' LP를 발견한 앤디는 교도소 사무실 문을 걸어 잠그고 들어가 스피커를 통해 오페라를 틀어줍니다. 화창한 대낮의 교도소 운동장, 사람들은 무기력하게 앉아 멍하니 담배를 피우며 잠깐의 시간을 보내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여인의 고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앤디는 단짝 친구 레드의 회상은 그때의 감동이 어떠했는지 잘 보여줍니다.
레드의 말처럼 오페라는 언어로 듣는 음악이 아닙니다. 마리아 칼라스의 아리아를 들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최고의 악기는 어쩌면 인간의 목소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여기, 레드와 같은 감동을 느낀 이가 있습니다. 바로 '귀여운 여인'의 비비안입니다. 거리의 여인이었던 비비안은 에드워드의 힘으로 레이디가 되어 전용기에 오릅니다. 오로지 오페라를 위해 샌프란시스코로 날아간 두 사람은 샌프란시스코 오페라하우스에서 라이트라비아타를 관람합니다. 비비안이 이탈리아어를 알 턱이 없지요. 하지만 그녀는 오페라가 주는 벅찬 선율과 그 내용을 이입한 나머지 "오줌을 쌀 뻔한" 감동을 느끼게 됩니다. 음악의 힘이란 이런 것인가 봅니다. 오페라를 즐겨 듣는 나 역시 그 내용을 모두 알아들어서 좋아하는 것은 절대 아니니까요.
『시네마 클래식』을 읽는 동안 나는 비비안이 되기도 했다가 레드가 되기도 하면서 영화와 그 음악에 빠져들었습니다. 오랜만에 책을 읽고 느껴보는 유쾌한 흥미입니다. 손에 땀을 쥐는 흥미진진한 전개는 아니지만 머릿속이 뭔가 개운해지는 기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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