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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체 연습

2021년 1월 18일 오늘의 책

문체 연습

레몽 크노 | 문학동네 | 2020.10

분류 : 소설

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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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쪽짜리 이야기 하나가 99개가 되는 문체의 혁명, 글쓰기의 마술 “『문체 연습』은 에세이도 아니고, 소설도 아니며, 단편 모음집이라고도 할 수 없고, 또한 콩트라고 하기에도 어려움이 따른다…… 크노는 문학 전통 속에서 꾸준히 진화하며 고유한 역사를 갖게 된 문체, 아직 형식을 부여받지 않은 무형식의 문체, 문어보다는 입말로 자주 실현되는 문체, 일상적으로 사용되지만 문학의 언저리에 좀처럼 진입하지 못하는 문체, 사라진 문체, 낡은 것으로 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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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발하고, 획기적이고, 틀을 벗어난 글

 

20세기 프랑스 문단의 거장, 초현실주의자, 언어학자, 작사가, 갈리마르 출판사 편집자, 수학자, 영화인, 번역가, 소설가, 시인… 이상이 저자에 대한 첫 안내서처럼 여겨지는 문구들이다. 책의 내용을 들여다보기 전에 우선 띠지에 있는 저자의 얼굴을 먼저 보자. 같은 얼굴이지만 각기 다른 표정을 짓고 있는 한 인물. 그렇지만 하나하나의 얼굴을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느낌을 받게 한다. 익살스럽기도 하고 심각하기도 하고 피곤해 보이기도 하는 등….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떠올린 것은 저자의 표정이었다.

 

다시 책의 내용으로 돌아가 보자. 내용은 그저 단순 그 자체다.

 

「약기略記」
출근 시간, S선 버스, 스물여섯 언저리의 남자 하나, 리본 대신 끈이 둘린 말랑말랑한 모자. 누군가 길게 잡아 늘인 것처럼 아주 긴 목. 사람들 내림. 문제의 남자 옆 사람에게 분노 폭발. 누군가 지날 때마다 자기를 떠민다고 옆 사람을 비난. 못돼먹은 투로 투덜거림. 공석을 보자마자, 거기로 튀어감.
두 시간 후, 생라자르 역 앞, 로마광장에서 나는 그를 다시 만남. 그는 이렇게 말하는 친구와 함께 있음: “자네, 외투에 단추 하나 더 다는 게 좋겠어.” 친구는 그에게 자리(앞섶)와 이유를 알려줌. (11쪽)

 

무심코 흘려보낼 수 있는 이 문장이 99개의 문체로 변화되어 읽는 이들에게 새로운 경험을 선사했다면, 과연 문학적인 그 느낌은 무엇이라고 평가해야 할까? 저자는 바흐의 푸가를 듣다가 이 책을 썼다고 한다. 읽는 내내 천재는 이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라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

 

위의 문장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른 변주와 그 문학적 형태는 그야말로 다양하다. 소설 속의 한 장면을 서로 다른 입장에서 바라본 글들을 읽은 독자라면 이 문장을 두고 저자가 쓴 글에서 동시에 각기 다른 패턴으로 나아가는 생각들이 언어란 도구로 어떻게 그려지는지 알아갈 수 있다.

 

‘당사자의 시선으로’, ‘다른 이의 시선으로’, ‘객관적 이야기’를 통한 내용들이 그렇고, 글에 맛을 느끼게 하는 묘사들, 일본어의 단가를 차용해 쓴 글, 미쿡 쏴아람 임뉘타, 무지갯빛을 드러내는 문장들, 더욱 놀라웠던 장면은 저자의 수학자적인 면모를 드러낸 부분이 아닌가 싶다.

 

「단카」
버스가 오네
재즈 모 청년 타니
어이쿠 충돌
차후 생라자르 앞
이제 단추가 문제

 

「집합론」
S선 버스에 앉아 있는 승객을 집합 A로, 서 있는 승객을 집합 D라고 간주한다. 어떤 정류장에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집합 P가 있다. 또한 버스에 오르는 승객 집합 C가 있다. (…)

 

이 책의 분류는 프랑스 소설이라고 되어있지만, 해제 부분을 보면 사실 전통적인 문학의 관점에서는 소설이나 에세이, 그렇다고 콩트에도 부합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야말로 획기적인 도발이자 언어의 새로운 도전이라고 할 수 있다.

 

기존의 정형화되고 틀에 박힌 언어를 해체하고, 부수고, 다시 되돌리거나 앞지르는 실험적인 방식은 문학에 한정된 양식이 아닌 과학과 수학의 범주, 각기 다른 나라의 언어 뉘앙스를 차용한 글을 통해 이렇게도 색다른 경험을 느낄 수 있는 문학이 존재할 수 있구나 하는 걸 느끼게 해준다.

 

저자 자신은 이 책에 대해서 “사람들은 여기서 문학을 파괴하려는 시도를 보고자 한 것 같은데” 사실 그것은 전혀 자신의 의도가 아니었다고 말한다. 자신의 의도는 순수한 “문체 연습”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어쩌면 고루하고 여러모로 녹슨 문학에서 문학을 잘라내는 결과를 가져온 것 같다”(157쪽)고 말한다.

 

이야기가 문체보다 우선하며, 문체란 바꿀 수 없는 특정한 현실을 이해하기 위한 창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크노는 문체란 절대 투명하지 않으며, 우리가 이해하는 현실을 형성하고 정의하는 것은 언어 자체라는 것을 폭로하고 있다. 문체 연습에서 우리는 유쾌하고 눈부신 방식으로 이러한 주장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소설은 로렌스 스턴에서 제임스 조이스, 알랭 로브그리예로 이어지는 소위 ‘반反 소설’의 전통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이야기가 아니라 그 이야기를 어떻게 하느냐다. (본문 중에서)

 

작가의 의도는 순수한 말 그대로 문체 연습이었을지는 몰라도 읽는 입장에서는 새로움 그 자체로써 받아들여진 작품이다. 특히 책의 절반에 해당하는 해제 부분을 통해 저자의 의도와 번역가의 지대한 노력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한국의 사투리를 차용하거나 한국적인 뉘앙스를 풍기게 한 부분 등 읽으면서 궁금했던 부분들에 대해서도 말해준다.

 

책 표지 또한 저자의 의도를 잘 드러낸 글자 배열인 것 같다. 책 뒷부분의 ‘번역가와 편집자’ 부분은 저자를 닮은 듯한 센스 폭발이 드러나는 글이라 유쾌하게 읽었다.

 

필사를 많이 하는 것이 독자적인 글쓰기의 발전으로 이뤄진다고들 말한다. 유명 소설가들을 보면 이러한 필사의 과정을 거쳤다는 이야기를 종종 본다. 독자적인 글쓰기에 도전해보고 싶은 독자라면 크노처럼 우선 문체 연습부터 시작해보는 것은 어떨까? 너무도 기발하고 획기적이면서, 틀을 벗어난 글의 향연을 느껴보고 싶다면 바로 이 책을 읽어보라고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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