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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우리가만나는곳

2015년 8월 17일 오늘의 책

여기우리가만나는곳

존버거 | 열화당 | 2006.03

분류 : 소설

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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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션과 에세이를 넘나드는 존 버거의 2005년 신작 세월이 흘러도 희미해지지 않고 반대로 점점 더 명료하고 새롭게 되살아나는 기억이 있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이미 세상을 떠난 이들의 모습과 목소리. 그들은 실제로 만난 사람일 수도, 책 속에서 알게 된 사람일 수도 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들로부터 세상의 모든 복잡한 문제의 답을 너무나 간단하고 명쾌하게 얻게 되기도 한다. 그럴 수 있는 것은 아마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 그들의 삶이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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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비밀


자전거를 타고 다니느라 종아리에 체인이 자주 채였다. 생채기가 났다는 느낌이 며칠, 지나고 나면 아물었을 거라는 무관심으로 여러 날을 지났다. 어제는 모처럼 쉬는 날이 길어 맨다리를 볼 여유도 있었다. 오래된 멍과 이제 막 든 멍이 겹으로 있었다. 보지 않아도 아픔으로 있는 자국이었으나 눈으로 확인하자 구체적으로 아프기 시작했다. 통증이란 눈으로도 앓는 것이라는 생각을 잠시 했다.

나는 그 풍경의 손짓을 사랑한다. 그것이 나를 어디로 이끌건 간에. (172쪽)

고향에 다녀왔고 그 길을 수년 만에 걸었다. 중학교 근처는 더 없는 '밤'을 보여주었다. 사위가 어두워 그 속에 오래 있어도 사방이 익숙해지지 않았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십수 년 전 다녔던 독서실을 물어보았다. 가건물에 책상을 놓아두고 황급히 꾸려낸 독서실은 운영을 그만둔 지 아주 오래전이라고 했다. 철제 계단이 시간을 견디면서 라면을 먹고 잠을 자주 자던 추억의 입구로 안내하고 있었다. 지금은 관리가 되지 않아 무엇으로 쓰고 있는지 모르겠다고도. 도서관이 황급히 떠올랐다. 꽤 탄탄한 건물이었다. 고향에서 보기 어려운 구조였고, 모든 것에서 새 냄새가 났었다. 그는 여기서부터 저쪽까지 손으로 둘레를 치고 아파트가 들어올 거라고 했다. 그곳에 도서관이 있던 자리도 있었다. 도서관이 있는 큰길은 내가 처음으로 오토바이를 배웠던 장소였다. 좁은 샛길을 따라가면 초등학교가 나왔다. 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 평지였다. 도서관이 사라지고, 오토바이를 배우던 길도 사라지면 그때 시간은 이제 다 어디로 가는 걸까? 묻지는 않았다.

차로 몇십 분을 달리면 바다가 있는 동네였다. 저기는 왜 이렇게 불이 많지, 물으면 저쪽은 항만이라는 이야기, ㅁㅁ항이라고 설명이 돌아왔다. 곳곳에 공장이 많았다. 여긴 시멘트 공장, 저기는 발전소, 다 언제부터 있었을까? 오래되었다는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내가 저들보다 이곳에 있던지 오래되었다는 걸 그도 모르진 않았을 것이다.

불빛이 줄어들지 않는 밤 속에 찌가 작은 불빛으로 함께 출렁였다. 화살처럼 쏘는 낚싯대를 보았다. 휙휙 하는 소리에 밤은 줄어드는 맥주 속에 동동 떠 있었다. 우리가 이 나이가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 아니, 이 나이가 되도록 아무것도 되지 못 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지. 물수제비는 기울어 더 이상 떠오르지 않았다. 팔아야 할 추억도 이제 끝이다. 새로 올라올 아파트 건너편으로 십수 년 후면 이곳을 지키는 주민의 태반이 사라지지 않겠느냐는 말을 그가 이었다. 모르지 않았다. 슬픔은 눈으로 몰려 오는 거라는 생각이 마저 떠올랐다. 종아리가 시큰시큰했다.

내일은 아버지 생신이었다. 초가 많아서 좀 줄여서 축하했다. 더위에 케이크가 녹아서 초를 뽑을 때마다 뭉근하게 생크림이 묻어 올라왔다. 그것은 구멍이었고, 깜깜했다. 그날 밤에는 별이 몇 개나 보이나 보려고 나갔는데, 기껏해야 십 분이 안 되었을 빈자리, 아버지는 주무시다 일어나서 술렁이셨다고 했다. 현관을 열고 들어오자 왜인지 울고 왔느냐고 하셨다. 왜 그렇게 물으시는 거지? 맨 얼굴로 머쓱하게 그냥 하늘 좀 보다 왔다고 했다. 그러냐, 하고 다시 뒤를 돌아 주무시는 잠. 덮어드릴까 하다가 그냥 방으로 들어왔다.

우리네 삶 속으로 스며드는 생의 수는 헤아릴 수 없다. (161쪽)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은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비밀에 대해서 혼자 묻고 혼자 대답한다. 시처럼 이어지는 존 버거의 문장이 어지러울 때도 있다. 어지러우면 어지러운 대로 좀 있다 오면 된다. 공간도 없고, 시간도 없는 곳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정리해 말하기가 쉽지 않은데, 그건 내가 말을 주저하거나 말하지 않기를 주저했던 일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기 어려운 것과 결을 함께한다. 삶에 대해 말해보라고 하면 어떤 장부터 읽어야 할지 난감하듯. 헤아릴 수 없는 생의 수를 겹겹 펼쳐 놓았고, 그 장면이 나와 만나는 이야기는 기억마다 다르다. 누구나 자신만의 비밀을 쓰지만 궁금증을 불러오기 쉽지 않다. 그대로 비밀이 되어 묻히는 것이 태반의 생. 안타깝다. 내게 물어봐 준다면, 셜록보다 날렵하고 긴박하게, 놀랍도록 많은 이야기를 밤새도록 이야기해 줄 텐데.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나라는 비밀을, 당신이 물어봐 준다면 끝없이 이야기할 수 있을 텐데. 밤이 기울기 시작한 여름밤을 안타까워하며 밤이 길어지는 겨울녘을 벌써 기다릴 수 있도록. 여기 나라는 이야기를 한 가지 쓰고 한 밤을 지난다.

| 펜벗 일문일답


Q. 이번 펜벗 주제 ‘비밀이라書’ 서평을 쓰기 위해 또 어떤 책을 두고 고민하셨나요?
성性에 대해서 쓰려고 했습니다. 『섹슈얼리티 :  성의 정치』를 가까이 두고 있었는데요, 그렇게 마음을 먹은 게 벌써 7월초, 계획이 언제나 그렇듯 그냥 지나갔습니다. 제목만 여태 읽고 있습니다.

Q. 클렌징크림 님이 쓰신 문장을 늘 신기하게 쳐다 봅니다. 다른 이의 서평에서는 느껴보지 못했던 필력이 전해지기도 하고, 몰랐던 작가의 작품을 보는 것도 같습니다. 문장을 잘 쓰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시는지요.
제 문장에서 좋은 느낌을 찾을 수 있다면, 읽어주시는 분이 어렵게 찾아내주신 덕분입니다. 늘 ‘어떤 노력’을 하고 싶습니다. 혹시 노력을 ‘한 장소에 오래 머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쓰기와 무관하게 노트북이나 빈 노트 앞에 오래 있다는 점을 간신히 말씀드립니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클렌징크림'님은?

읽고 쓰는 사람.





[클렌징크림님의 테마북 –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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