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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폭주

2017년 7월 11일 오늘의 책

세계폭주

마루야마 겐지 | 바다 | 2017.03

분류 : 시/에세이/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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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장된 길을 달려서는 들끓는 피를 잠재울 수 없다. · 멋대로 사는 삶이야말로 자유로 가는 지름길이다. · 환영이 아닌 진짜 감동을 얻기 위해서라면 나는 앞으로도 어떤 일에든 손을 댈 것이다. · 똑같은 곳에서 늘 똑같은 인간들에 둘러싸여 똑같은 나날을 보내는 것은 실로 어리석은 짓이다. · 우리가 노리는 것은 리허설이 없는 본 경기라는 현실에서 진정한 감동을 움켜쥐는 것이다. “길은 도처에 있다. 아니, 도처가 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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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살고자 이토록 폭주했다


‘여행’이라는 단어를 하루라도 보지 않고 지나치는 날이 있나 싶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 첫 페이지는 적어도 한두 개 여행담을 다룬 게시물이 채우고, 이메일을 열면 보기 좋은 자연과 도시 야경 사진을 덧붙인 여행 상품 안내 광고가 매번 들어와 있다. 한때 여행에 마음이 쏠렸을 과거의 내가 어디선가 개인정보를 흘렸던 것이 분명하다. 가끔은 나도 혹할 만한 ‘맞춤 광고’인 걸 보면.

출발의 설렘을 모르는 것 아니다. 낯선 곳에서의 희한한 감정을 모르는 것 아니다. 돌아올 때의 헛헛함 같은 것도 - 예를 들면 국제공항을 빠져나와 집으로 돌아오는 공항버스를 타기 전 맡게 되는, 살짝 매캐한 공기의 냄새, 그것을 맡았을 때의 약간의 실망감 같은 것 -모르는 게 아니다. 머리를 식히겠다는 여행도 해봤고, 결혼이라는 행사에 따라붙는 ‘허니문’ 여행도 해봤고, 출장에 개인적인 여행 며칠 보탠 방식으로도 이곳저곳을 즐겼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이제 여행이 그다지 즐겁지가 않다. 질릴 만큼 여행을 해서 그런 것 같진 않다. 미궁에 빠졌다. 어느 날부터 갑자기 내가 여행을 즐기지 않는다고 그것이 병인 양 말하는 지인도 있던데, 나는 어느 날부턴가 그렇게 좋아했던 술도 안 마신다. 5년 넘게 한 방울도 마시지 않고 있는데, 마실 생각이 안 든다. 비싼 술을 아름다운 잔에 담아 누군가 건넨다면 술은 버리고, 잔은 가져올 마음이 있다. 갑자기 이렇게 취향이 변하기도 하는 거라서 여행을 꺼리게 된 게 병 같지는 않다. (그 지인은 내가 갑자기 술을 싫어라 하는 것 역시도 병이라고 한다.)

여행이 지겹다. 내 몸으로 하는 여행도 내키지 않고, 여행을 다녔다는 얼굴 모르는 누군가의 블로그 글도, 타임라인을 타고 무작위로 올라오는 SNS ‘친구’의 자랑이 스민 글도 별로다. 파리가 파리가 아니고, 뉴욕이 뉴욕이 아니고, 제주가 제주가 아니다. 다 사진이고 이모티콘이고 해시태그다.

예전의 여행은 곧 연락의 두절이었다. 누군가 일주일, 한 달 “여행 다녀올게.” 하면 그가 돌아오기까진 연락 두절이었다. 이메일 정도 남기고 받을 수 있었던 것도 2000년대 들어서야 가능했으니까. 돌아올 때까진 친구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몰랐고, 그렇게 한참을 못 본 친구를 다시 만나면 왠지 그로부터 새로운 냄새가 풍기곤 했다. 그것이 외국에서 묻혀 온 냄새인지, 조금은 새로워진 정신의 냄새인지. 아무튼,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그런 냄새였다.

그럴 때에 비하자면 요즘의 여행자에게서는 시간의 부재가 통 느껴지질 않는다. 한 달을 떠나있었다는 그가 낯설지가 않다. 어제까지 글과 사진으로 만났으니 나는 그가 낯설지 않고, 그 역시 바다 건너 땅에서 수시로 스마트폰의 창을 열고, 엄지손가락으로 수시로 화면을 두드렸다. 여름휴가를 맞이하여 청량한 색상의 네일아트를 새로 얹은 손톱이 강렬한 이국의 햇살에 연신 반짝였을 것이다. 노천카페에 앉아 시원한 커피를 마시면서 초록 창을 펼치고 실시간 검색어 순위를 일일이 확인했으니 이곳의 소식을 잘 알고 있다. 그는 결코 자신이 거주하던 구역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었다. 단절은 가장 두려운 일이기도 했다. 낯선 곳과 밤의 고독이 무서워서 여행에도 온라인 친구들을 스마트폰에 꼭꼭 담아 데리고 갔다.

공항 대기 중임을 알리는 트윗으로 여행은 시작하고, 출발을 알리는 포스팅, 때때론 라이브 스트리밍으로 여행을 친구들에게 보고한다. 사람들이 정성스레 짚어준 핫한 스팟들을 하나씩 정복하여 에베레스트 설산 정상에 깃발을 꽂던 모양으로 인증샷을 담아 자신의 계정에 깃발을 꽂았다. ‘좋아요’의 엄지손가락 또는 하트가 후두두. 의도를 미끼처럼 심어 올린 쥐덫 같은 포스팅에 부럽다는 메시지들은 달리고.

몸은 여행을 떠났지만, 마음은 모국에 그대로 남아있다. 그러니 돌아와도 서로가 낯설어질 만한 구석이 없었다. 덕분에 적응은 금세 이루어진다. 친구의 틈에도, 직장에도, 온라인의 세계에도. (여행하는 한 달 동안 올린 글이 없었다면 친구 목록에도 적잖은 변화가 생겼을까?) 이제 여행의 흔적은 블로그의 아카이브에 있다. 타임라인 속에 있다.

고독을 데리고 떠나는 여행은 이제 사라졌을까? 예술가들의 전유물로만 남을까? 아닐 거다. 어쩌면 SNS에, 블로그에 있지 않은 여행 대부분은 여전히 ‘나’를 찾는 조금은 고독한 여행 중일 거라 믿고 싶다. 팔로워를 위한 여행이 전부는 아닐 거다.

여행이란 말과 그 변주들의 홍수 속에서, 속보이는 여행기와 여행서의 무덤 속에서 이토록 방어적인 나의 마음을 가차 없이 흔드는 한 권의 책이 있었으니, 바로 마루야마 겐지의 『세계 폭주』였다.

내 이후에 이 책을 읽고자 하는 이들을 위해 책의 표지에 나의 이름으로 된 경고 문구 몇 줄을 붙인다.

1) 낭만적인 여행담 아니니 덜컥 손에 쥐지 말기를.
2) 실용적 여행 정보라곤 보리쌀 한톨 만큼도 없으니 선택일랑 피하길.
3) 귀를 따갑게 하거나 가슴을 뜨끔하게 하는 ‘독설’ 비슷한 것들의 향연이 있으니 휴가철 캐리어에 담지 말기를.


나 나름 그동안 마루야마 겐지의 에세이는 읽을 만큼 읽었다고 생각해서 이제 더는 읽지 않으려 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이제는 마루야마 아저씨의 마음을, 이라고 생각하며 그냥 건너뛰려는 찰나, 슬쩍 펼쳐본 게 실책이었다. 책 안에는 흑백 사진 한 장, 그리고 또 한 장. 한 장의 사진에는 돋보기 대신 선글라스를 끼고, 만년필 대신 오토바이의 핸들을 붙잡은 이가 있었다. 마루야마 겐지의 젊은 시절의 모습. 물보라를 가르며 오토바이를 타고 질주하는 헬멧 쓴 작가의 또 한 장의 사진. 이럴 수가!

눈이 지독히도 내리는 어느 산촌에서 글쓰기에 열중이라던 사람. 커다란 대형견이나 털북숭이 차우차우와 산책을 한다던 민머리, 날카로운 눈매 노인의 행색만을 떠올리고 있던 나의 팔목을 그 한 장의 흑백 사진이 꽉 잡아 비틀며 말했다. “너, 나랑 여행 떠나지 않으련?”

떠나지 않을 변명을 찾지 못하고 그리하여 나는 그와 여행을 떠났다. 아니, 여행이 아니었다. 모험이었다. 끝도 없는 광야를 오프로드 바이크로 달리는 오스트레일리아 여행에, 세계 각국으로부터 몰려든 랠리 차들, 취재진과 함께 모래폭풍을 일으키며 아프리카의 심장을 꿰뚫고 달리는 케냐 사파리 랠리에, ‘반년의 긴 낮과 반년의 긴 밤이라는 기묘한 리듬'이 있는 나라 노르웨이에, 1849년 이래 황금을 찾아 캘리포니아로 골드러쉬를 떠나던 서부 개척 시대의 기운이 남겨진 미 서부에, 마지막으로 21만 톤급 유조선 ‘쇼엔마루' 타고 소설의 취재차 중동의 연안까지 왕복했던 바다 위에서의 긴 여행에까지 나는 그와 함께했다. 정말이다. 여행이 아니었다. 인디아나 존스 못지않은 오지 탐험 같은 모험이었다. ‘죽어도 미련 없는 사람들’만이 함께한 여행이라고 작가는 말했다. 그런 의지에 나도 슬그머니 떨렸다.

두터운 이 책 안 어느 페이지에도 관광 명소, 맛집 정보 같은 건 단 한 줄도 없었다. 실용적으로 따지면 죄다 쓸데없는 문장들뿐이다. 오로지 관찰과 그로부터 떠오른 단상만이 책 한 권 빽빽하게 채우고 있다. 마루야마 겐지의 다섯 번의 여행 기간을 합하면 반년 가까운 기간이다. 나는 그의 여행에 동행하며 때론 모닥불 앞이나 낡은 모텔에서, 때론 열기로 들끓는 광활한 아스팔트 위를 달리며 숱한 얘기를 나눴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우리가 나눈 이야기는 인류학, 비교인문학, 종교, 철학, 정치, 사회, 문화, 일본의 문학 풍토까지, 그러니까 우리가 말하지 않은 주제를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마루야마 겐지, 그의 의견이 전부 맞는 것도 아니었고 진리도 아니었을 것이다. 시각이 다른 의견에는 나는 언제고 받아쳤다. 내 의견을 툭 끄집어 꺼냈다. 그는 그래도 될 사람이다. 그가 거침이 없고 장식적인 말로 꾸며 말하는 것은 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는 건 그의 글을 읽어봤던 독자라면 다 아는 사실이니까. 반대말이라 하여 분명 내치지 않았을 것이다. 인적 하나 없는 까만 밤하늘 아래 그렇게 둘이거나 셋인 사람들이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다 잠이 들었고 새벽이슬에 몸을 움츠리곤 했다. 먼저 깨어난 사람이 버너에 물을 올려 따뜻한 커피라도 준비했다. 몸을 녹이고 정신을 차리면 바이크에 시동을 켜고 오늘의 길을 어제처럼 떠났다. 간밤의 생각들은 이미 대기 속으로 증발하듯 사라졌고 우리에게 남은 것이라곤 모래밭 사이로 끝도 없이 곧게 뻗은 아스팔트와 오늘이라는 시간뿐이었다.

유난히 흥미롭던 여행은 마지막 장(章). 유조선을 타고 나선 바다 여행.

출판사와 소설 한 편을 약속하고 출발하는 상황과 배 안에서 주인공을 만들고 다음 날부터 곧바로 자신이 그 주인공의 연기를 펼치며 소설을 쓰기 시작했던 상황들이 나의 관심을 붙들었다. 그는 당시의 취재일기를 첨부해 보여준다. 이 모든 것이 오히려 한 편의 소설처럼 보였다. 소설 작법을 다룬 책들보다도 훨씬 생생하고 설득력이 있다. 『세계 폭주』를 통해 함께 했던 긴 여행을 이제 멈춰야 한다. 그러기가 여간 서운한 게 아니다. 그의 동료들마저도 모두 나의 동료가 됐다. 실로 오랜만에 여행다운 여행의 감흥을 만끽하며 내달렸던 시간이다. 정말로 모험 같던 여행이다. 나는 모터사이클을 타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야말로 세계를 ‘폭주'했다! 제대로 살기 위해 우리는 폭주했다. 오랜만에 도시 바깥 세계로부터 지구가 내는 굉음과 진동을 몸으로 들었고 그럴 때마다 내 심장은 미친듯 쿵쾅댔다.

자, 이제 시간이 됐다. 나는 여행길로부터 흙 묻고 때 낀 손톱이 한눈에 보이는 내 양손을 들어 그들에게 흔들어야겠다. 모두 안녕히! 함께한 마루야마 겐지 씨에게 사랑을!

젊은이들이 자신을 잊기 위해 오토바이를 탄다면 우리는 자신을 되찾기 위해 탄다.
전자가 행복할지도 모른다. 오토바이를 몰면서 자신의 한계를 알았다고 해서 별거 없는지도 모른다.
몸부림의 연장선에 있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어차피 원래 자리로 돌아가기 위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자각이야말로 중요하다.
- 마루야마 겐지 『세계 폭주』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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