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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57284177 / 128쪽 / 250g / 135 x 2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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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세상의 아름다움에는 비밀이 필요하다. 모든 것이 낱낱이 밝혀져서 바라볼 것도, 감각할 것도 없어지면 환상은 질식되어 사라진다. 비밀이 남아있어야 존재에 영적인 아름다움이 허락될 수 있다. 비밀을 만나기 위해서는 한정 없는 기다림과 느림이 요구된다. 그리고 깊이가 필요한데, 얄팍한 곳에는 비밀이 깃들 틈새가 없기 때문이다. 시간의 빈틈들, 생각의 ‘사이’들은 기다림에서부터 온다. 그 틈새에서 존재의 진짜 면모가 드러난다. “바람과 바람 사이로 새가 앉아 있”고 “그 사이에서 바람에 흙과 섞인 향기가 있”으며, “바람과 바람 사이로 공간이 열리는 게 보”인다고 (「손가락 끝에서 나무가 자란다」) 시인은 쓴다. “진지하게 이때 시를 받아 적으려는 사람이 있다면 / 말과 말 사이에 비밀의 방이 들어서고/ 날을 세운 바람을 불러들이는 것이다” (「말을 구경하는 도서관」) 라는 말처럼 ‘시’ 역시 말과 말 사이에 있는 “비밀의 방” 속에서 나온다. 빛나는 찰나의 순간과 그 의미를 잡아내어 시의 행간에 묻고 존재의 본질이 드러나는 작은 일면에 깊이 몰두하는 기다림의 시간을 ‘시의 시간’이라 바꾸어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시간은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게 느껴진다. 시계 위에서 균일하게 움직이는 시침과 분침, 초침을 보고 있노라면 시간은 모두에게 같은 속도로 움직이고 있는 것 같지만 시간에 대한 감각은 사람마다 다르다. 현상학적 시간의식은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시계의 시간’, 보편적인 세계시간과는 구분된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한현수 시에서의 시간은 내재적 시간이며, ‘기다림’의 시간이다. 겨울이 봄을 준비하고, 빈 가지가 다시 돋을 새순을 예비하듯이, 우주적인 기다림 속에서 시간은 흘러가는 동시에 흘러가지 않는 것과도 같다. “이곳에선 시간이 흘러가지 않아요 출입하는 순서와 관계없이 동시적으로 존재해요 언제나 지금 일어나는 것처럼 작동하지요 수십 년 전의 일을 지금처럼 꺼내 보여줘요 수천 년을 허락해도 그럴 겁니다” (「기억사용설명서」)라는 시는 바로 그런 시간 속의 존재를 표현하려 한 것으로 읽힌다. 신은 인간들이 만든 시계의 시간 속에 있지 않다. “시간 밖에서 움직이는 신을 닮았어요 신처럼 항상 오늘이니까”라는 말처럼 현실의 시간이 아닌 신화적 시간 속에서 기억은 점차 영원을 닮아간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영겁을 ‘어두움의 심연’이며 ‘꼴이 없는 두루뭉수리’라고 했다. 이 영원한 시간에는 경계가 없어 어디에나 스며들 수 있다. 기억은 그렇게 편재(遍在)한다. 「첫」에서 ‘너’는 한 계절을 걸어오지만 “나는 100년을 기다려서” 만나는 것으로 그려진다. “나는 그때를 기억한다”는 시적화자에게 그것은 “두렵고 떨리는 그 첫”경험으로 새겨져 있다. 시간은 그들 사이를 관통하면서 흐른다. 내 안에서 ‘너’는 “물의 발자국으로 흘러/ 내 마음에 강을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그 흐름은 서로에게 다른 궤적을 남긴다. 사랑은 마치 시간처럼 지나가고 흘러간다. 「시베리아, 사랑이란 낯선 추상」에서 “사랑은 지나가는 것”이며 “지나가게 하는 것”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창밖에 스쳐가는 풍경들이 마치 추상화의 붓질 아래 뭉개지는 물감처럼 “달려가는 하얀 자작나무와 뭉뚱그려/ 하나의 긴 초록빛 띠의 행렬”로 남는 것처럼 지나버린 사랑은 하나의 인상(印象)으로 남는다. “끝내 지워지지 않을 것”이지만, 내 마음에 새겨진 것과 상대의 마음에 새겨진 것은 서로 다른 이미지일 것이다.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시간은 모두에게 상대적이며 개별적인 시간으로, 사람마다 다른 기억의 층위를 만든다. 이 다양한 층위가 세상을 복잡하고 다층적 의미로 가득 차게 만들며, 여기에서 발생되는 존재의 깊이는 미적 거리를 생성한다. 이 시집에서 시인은 종종 무언가를 호명한다. 누군가가 부르고, 그 대상이 대답하는 순간 존재의 의미는 되살아난다. 그런데 무엇을 호명하기 위해서는 ‘이름’이 필요하다. 「눈물만큼의 이름」에서 시인은 꽃 이름 하나를 불러내기 위해 애쓴다. “꽃 이름 하나가 기억에서 없어진다/ 기다려도 꽃 이름을 불러 낼 수 없다/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라는 질문은 계속 그를 괴롭힌다. 그는 “좀 더 기다리기로 한다. / 문밖에서, 그 이름이 걸어 나올 때까지.” 왜냐하면 “꽃은 그렇게 얻는 이름이어야 하니까” 말이다. 그는 기다리는 동안 상상을 한다. “눈을 감는다, 나무처럼 기다리는 자리에서/ 나는 그 이름과 똑같은 꽃을 피우는 상상을 한다/ 오지 않는 이름을 기다리며”라는 표현처럼 이름을 얻어 존재를 호명하기 위해 그는 인내를 가지고 기다린다. ‘눈물만큼의 이름’은 “망각에 저항하는 이름”이며 하이데거가 말한 ‘존재의 빛’과 같은 것이다. 대상과의 만남은 시적 주체를 흔들리게 한다. 아도르노는 『미적이론』에서 주체가 자연의 숭고 앞에 눈물을 흘린다고 표현했다. 자연이 나를 다시 받아들이고 눈물이 솟구치는 순간, “자아는 자기 안의 감금으로부터 정신적으로 벗어나며”, “주체가 자연 주위에 걸어놓은 마법”을 깨뜨린다는 것이다. 존재를 불러내어 자연의 숭고와 마주치게 되는 전율의 순간, 시인은 눈물을 흘릴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기다린다. “눈물만큼의 이름”이 그에게 올 때까지. 다섯 번째 시집이 나올 때까지 시인이 얼마나 오래 기다림의 시간을 견뎌왔을지 생각해본다. “당신이 꽃받침이라면 그렇게 때를 기다려요”(「달이 없어도 달맞이꽃처럼」) 라는 시인의 속삭임이 들려오는 듯하다. 시인의 말이 마음에 와 닿는 것은 나 역시 기다리는 사람이기 때문일까? 내가 기다리는 것들은 언제 내 꽃받침 위에 피어나게 될지 궁금해진다. 그의 시 한 구절을 빌려, 이렇게 화답하고 싶다. “당신은 저녁의 언어를 꽃으로 바꿔 놓았어요.”
시인의 말 5
1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그해 겨울은 15분 전에 억류되었다 12
계절의 CPR 14
바이칼을 떠나지 않는 이유를 묻지 않는다 16
콘트라베이스 18
사월의 꽃은 배고픈 짐승처럼 19
감자에 싹이 나서 잎이 나서 ―슬픈 모유 21
귀향 23
몸보다 말이 먼저 아픈 25
개미 방아 26
기억사용설명서 27
빨간 사과가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 28
첫 29
생일 31
시베리아, 사랑이란 낯선 추상 33
겨울의 바가텔 34
새순이 빈자리를 채워가지 못하는 계절 36
그믐달 37
아일란 쿠르디 39
콘트라스트 41
카펠교, 먼 훗날의 기억 43
우연히 두 손이 작은 물결을 일으킬 때 44
눈물만큼의 이름 46
벚꽃이 질 때 48
잃어버린 발자국 49
열어주세요, 문 51
검은 교회 53
기억의 공간 55
2부 언어놀이
가시떨기나무 58
여름 계곡 60
손가락 끝에서 나무가 자란다 61
어느 별의 카프카에스크 63
우리가 수선화처럼 비를 맞을 때 65
으름덩굴 66
아침의 단추 67
손수건 69
둥그러워 둥그러워진 달이야, 란 말을 들었다 70
예언의 꽃 72
어느 겨울, 잠들면 물고기만 나오는 꿈 73
눈雪 75
손이 손을 찾아가는 밤 76
말을 구경하는 도서관 77
그림자놀이 79
달이 없어도 달맞이꽃처럼 81
박쥐가 악어 입속으로 들어간다 83
돌탑 85
슬픔은 바람에게 물어요 87
숨바꼭질 89
소수의견 91
무한소급 92
일출 94
목청꾼 95
상실을 대하는 방식 96
만월滿月 98
질문을 위한 질문 99
표현의 두께 100
조용한 소란 102
조금씩 모자란다 103
코골이 104
신율 105
아우라지 106
꽃밭에서 107
해설 시간은 흘러라, 세상 모든 것들의 소음 속으로김지윤 1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