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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번째 풍선

김정 저 | 이지출판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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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55551912 / 204쪽 / 265g / 135 x 1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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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출판사 리뷰

막달레나 아주머니 신혼 시절, KIST에 다니던 나는 성북구에서 얼마 동안 살았다. 주인집은 조선 시대 양반들이 살았을 것 같은 그런 기와집이었다. 안채와 별채로 나뉜 디귿자. 안채의 격자로 된 유리문을 열면 아주 넓은 대청마루가 있었다. 언제 보아도 반짝반짝 윤이 나는 마루였다. 집안 어디 한 군데 반들거리지 않은 곳이 없었다. 우리는 별채에 살았다. 그 집 주인은 마른 체형에 금테 안경을 쓴 독신 여성이었다. 천주교 신자인 그녀는 성당에서 맡은 직책 때문인지 늘 바빠 보였다. 차가운 인상이었지만 함께 사는 연로한 어머니에게는 극진했다. 청각장애가 있으신 듯한 어머니와 안방에서 대화할 때는 가끔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일하는 아주머니가 한 분 있었다. 이름은 막달레나. 여주인과 비슷한 나이에 눈이 작고, 키는 자그마하고, 언제나 맨얼굴이었다. 파마기 없는 머리는 뒤로 꽁꽁 돌려 고무줄로 묶고 다녔다. 구부정한 허리에 허름한 옷차림이었으나 표정은 맑았다. 그녀 역시 독신이라고 했다. 그 집에는 그렇게 나이 든 세 여인이 살았다. 여주인은 무언가 필요할 때마다 부엌을 향해 큰 소리로 “막달레나! 막달레나!” 하고 불렀다. 막달레나 아주머니는 긴장한 얼굴로 부엌에서 뛰어나와 대청마루 쪽으로 달려가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여주인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을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집안 분위기가 늘 조용했다. ‘파니엘’이라고 부르는 귀가 축 늘어진 갈색 사냥개가 유일하게 소리를 내는 집이었다. 어느 일요일 오후. 막달레나 아주머니의 헛기침 소리가 밖에서 들렸다. “저 선상님, 죄송하지만 잠시 저 좀….” “네, 무슨 일이지요?” “저기, 마당에 잠시만 나와 주시면 안 될까요? 죄송합니다.” 두 손을 계속 비비며 그녀가 남편에게 정중히 요청했다. 그녀의 시선은 늘 바닥을 보고 있었다. 영문을 모르는 남편은 넓은 마당으로 나갔다. 그냥 잠시 마당에 서 있어만 달랬다. ‘서 있기만 하면 된다고?’ 그 집 화장실은 그 시절 그랬듯이 푸세식이었다. 그날은 오물을 치우는 중이었다. 왔다 갔다 하는 인부들이 두어 명 보였다. 인부 중 한 명이 그 집 대청마루에 두 팔을 벌리고 누워 있다가 남편이 나타나자 벌떡 일어나더니 사라졌다. 놀란 남편은 막달레나 아주머니에게 물었다. “저 사람이 왜 남의 마루에 누워 있다 일어나지요?” 그녀가 나직이 대답했다. “똥 푸는 인부들이 일하다가 피곤하다며 저렇게 마루에 눕는 일이 허다하답니다. 이 집에 여자들만 사는 것을 알고 무시하거든요. 선상님, 감사합니다.” 그녀는 집 안에 남자가 있음을 알려 무례한 인부의 행동을 간단히 저지시켰다. 그녀의 한판승, 지혜로운 여인이었다. 그 후 남편은 그 집의 든든한 수문장이 되었고, 나는 그녀와 격의 없이 대화하는 사이가 되었다. 냉정해 보이는 여주인과는 마주칠 때 눈인사를 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던 어느 겨울 아침, 여주인이 대청마루에 서서 큰 소리로 불렀다. “막달레나, 막달레나, 내 신발 어디 있어?” “네네, 여기 있습네다.” 부엌에서 뛰어나온 그녀는 허름한 옷을 헤치고 품속에서 고무신을 꺼냈다. 그리고 허리 굽혀 신발을 댓돌에 가지런히 놓았다. 단아하게 한복을 차려입은 여주인은 따뜻해진 고무신을 신고 막달레나 아주머니에게 살짝 웃어 보이고 총총히 걸어 나갔다. 여주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그녀는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저 표정은 무슨 뜻일까?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아주머니, 고무신, 지금 가슴에서 꺼낸 건가요?” 그녀는 수줍은 듯 피식 웃으며 말했다. “고무신이 차가워서… 저렇게 따뜻해진 신을 신고 나가시면 제 기분이 좋거든요.” “아주머니는 이 추위에 양말도 신지 않고, 남의 신발은 품속에서 데우셨어요?” “아이고, 나 같은 거야 아무러면 어드레요? 저는 늘 물일을 하니까 양말 신으면 젖어서 불편해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정말 황송하구먼요.” 그녀는 불편하다며 겨울에도 양말을 신지 않았다. 늘 남자 검정 고무신에다 맨발이었다. 손과 발이 마를 날이 없었다. 손등이 튼 것을 보고 손크림을 드리니 음식에 냄새 밴다고 극구 사양했다. 그녀는 괘종시계였다. 부엌에서 안방, 건넌방 그리고 마루를 쉴 새 없이 들락거리며 시중을 들었다. 걸레를 손에 달고 살았다. 천성이 부지런한 것 같았다. 어쩌다 짬나는 시간은 성경책이나 신문을 읽었다. 가끔 신문의 한자를 물어와 알려 주면 활짝 웃는 모습이 어린애같이 해맑았다. 그녀에게선 감추어진 품위가 느껴졌다. 햇볕이 내리쬐는 어느 날, 툇마루에 앉아 성경을 읽던 그녀가 내게 말을 걸었다. 그녀는 우리 부부에게 늘 선상님이라고 불렀다. “선상님, 죽어서 천국 가면 얼마나 좋을까요? 생각만 해도 좋습네다.” 마땅히 갈 분이리라. 그녀는 겸손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주인을 섬겼다. 한 번도 불평하는 것을 들은 기억이 없다. 표정은 늘 편안했고 작은 일에도 고마워했다. 빙의한 천사가 아니었을까. 명절에 그녀에게 내복을 한 벌 선물했다.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자신은 필요 없다며 손을 저었다. 재차 권하자 망설이듯 조심스레 말했다. “선상님, 제가 갖고 있다가 꼭 필요한 분에게 나중 드려도 괜찮을까요?” 자신보다 덜 가진 자를 먼저 생각하는 그녀였다. 자신은 가진 것이 넉넉하다고 생각하는, 남의 집에서 허드렛일하는 자리를 천국으로 알고 사는 사람이었다. 자기소임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 ‘섬김’을 내게 가르쳐 준 존경스러운 막달레나 아주머니. 지금쯤 또 다른 천국에서 환하게 웃는 모습이 그려진다. 그 내복은 누구에게 줬을까? 중국집 주인에게 받아낸 오십 불 오래전 유난히 뜨거웠던 여름, 캐나다에서 국제약리학회가 열렸다. 내가 다니던 직장에서는 해마다 연구 결과를 이듬해 국내나 외국 학회에서 발표했다. 그해 국제학회에는 나보다 훨씬 아래인 풋풋한 L연구관과 함께 떠났다. 얼굴이 갸름한 그녀는 예쁘고 날씬한 데다 성격마저 싹싹했다. 몬트리올 공항에 도착해 시내 호텔로 가려고 공항 주차장으로 갔다. 한국에서 렌트한 자동차를 찾아야 했다. 막상 가 보니 신청할 때와는 달리 링컨 콘티넨털 같은 대형차가 있었다. 처음 보는 분홍색 차였다. 순간 호기심이 발동했으나 다음 날 소나타 정도의 작은 하얀색 차로 바꿨다. 학회에서 일정이 일찍 끝나거나 시간이 되는 주말에는 둘이서 차를 타고 잘 정돈된 외국 도시의 특유한 정취를 만끽했다. 모든 일정이 끝나고 귀국하기 전날, 저녁을 먹으러 호텔 부근에 있는 중국 식당에 갔다. 식당은 건물 2층에 있고, 건물 옆에 빈 주차 공간이 있었다. 캐나다는 주차 관리가 엄격해서 늘 신경을 써야 했다. 식당에 들어가자마자 주인에게 건물 옆 주차장에 차를 세워 놓아도 되는지 허락을 받고 자리에 앉았다. 식당 안은 저녁이라 매우 붐볐다. 중국인들이 어찌나 크게 떠드는지 북새통을 이루었다. 우리는 간단히 식사를 끝내고 일어났다. 계산을 하고 건물 옆 주차장으로 갔다. 그리 넓지 않은 공간인데 우리 차가 안 보였다. 깜짝 놀라 몇 바퀴를 돌았다. 갑자기 다리가 후들거렸다. 오금이 저려 주저앉을 것 같았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오직 ‘내일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어쩐다? 저 차 값을 어떻게 물어주지? 우리가 무슨 보험을 들었더라?’ 하는 생각만 빙빙 돌았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무작정 식당으로 다시 뛰어들어갔다. “우리 차가 없어졌어요. 어떻게 된 일이지요?” 다행히 식당 여주인이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흥분한 그녀가 두 손을 좌우로 흔들며 우왕좌왕하더니 본인도 당황한 듯 우리에게 물었다. “차가 없어졌어요? 정말요? 음, 당신들 한국인인가요?” “네, 그래요. 거기 당신네 식당 주차장 아니에요?” “맞지만 우리가 정기적으로 불법 주차를 확인해요. 아까 내가 어떤 차 번호 호출했는데 아무 대답이 없어서 우리 식당 손님 차 아니라고 한 적 있어요.” “예에? 난 당신이 부르는 소리 못 들었어요. 식당 안에 손님이 많아 시끄러웠잖아요? 그리고 들어올 때 당신한테 허락받은 거 기억하지요?” 내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어쨌든 내가 호출했을 때 당신이 대답 안 했어요. 그러니 난 책임 없어요.” 여주인의 황당한 억지에 어이가 없었다. 그녀는 멀쩡한 식탁을 닦으며 일을 하는 척했다. 무도복 같은 시커먼 옷을 입은 다른 종업원들이 슬슬 한 명씩 사라졌다. 홀에는 여주인과 우리밖에 없었다. 그 상황에 놀라 L연구관은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인형같이 큰 눈을 더욱 크게 뜨고 나와 식당 주인만 번갈아 쳐다봤다. 난감했다. 순간 ‘별일 아닐 거야’를 연신 중얼거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적어도 그 중국인에게 추한 한국인의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나는 침묵으로 버티기로 했다. 홀 가운데 팔짱을 끼고 말없이 서 있었다. 키가 작은 여주인은 머리 하나쯤 더 큰 내가 홀 중앙에 버티고 서 있자 불안한 듯했다. 그녀의 당황하는 모습을 보니 본심은 순진한 듯했다. 그렇게 한참 시간이 흘렀다. 사방에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난처해져서 얼굴이 벌게진 여주인이 여기저기 전화를 하더니 내게 다가왔다. “그 차가 견인된 것 같네요.” 정신이 번쩍 났다. 일단 제일 큰 도난 걱정이 레몬 사탕 녹듯 사라졌다. 코에서 단김이 훅 나왔지만 안심한 내색을 감춘 채 다음을 궁리했다. 창밖은 어느새 칠흑 같았다. 건너편 빌딩의 네온 빛이 깜빡깜빡하며 ‘시간 없어, 시간 없어’ 하고 나를 재촉했다. 견인됐다면 우선 장소와 벌금 문제를 확인해야 했다. 입이 바짝 말랐었는데 차츰 호르몬 작용인지 침도 나오고 숨도 제대로 쉴 수 있었다. 견인 벌금은 100불 정도라고 했다. 양쪽에서 반반씩 내는 것이 합리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안 나오는 헛기침을 억지로 두어 번 했다. 자동차 가격에 비하면 벌금 100불은 오히려 협상할 용기를 주었다. 나는 상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못 들은 책임이 있고 당신은 내가 미리 얘기한 것을 기억 못한 책임이 있으니 반반씩 냅시다. 당신이 50불을 주면 내가 차를 찾아갈게요.” “뭐, 뭐라고요? 내가 왜 내요? 나는 못 내요.” 주인의 눈이 두 배나 커졌다. 우리가 먹은 식사비가 30불인데 50불을 내라니 어처구니가 없었나 보다. 나는 말없이 그냥 의자에 버티고 앉아 있었다. 속마음을 감추고 읽지도 못하는 중국어 메뉴판을 뒤적거렸다. 정적이 흘렀다. 돌아갈 생각을 않는 우리를 보다 못한 그녀가 드디어 현금 50불과 견인된 곳 주소를 적어 주었다. 택시를 타고 어둠의 터널 속을 지나 견인 장소로 갔다. 십 분 정도 걸리는 그곳이 왜 그렇게 먼지. 자동차가 줄을 맞춰 빽빽이 서 있는 넓은 광장에서 그 차를 발견했다. 긴장해서 힘주었던 어깨가 제자리로 내려왔다. 그 차가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오신 것보다 더 반가웠다. 엉뚱한 돈을 내고도 큰 걱정을 덜었다는 마음에 한숨이 터졌다. 국수 한 그릇 먹고 80불이 날아갔는데, 중국인한테 받아낸 50불 때문에 호텔로 돌아가는 길은 그리 억울하지 않았다. 그 50불로 내 자존심이 조금 위로받았다고 생각하니 아직도 내 속에 그들을 향한 태고의 찌끼가 남아 있음이 분명한 듯하다.

저자 소개

  • 저자 : 김정
저자 : 김정(김옥희)
강원도 춘천 출생
서울대학교 대학원 약학박사, 식품기술사
식품의약품안전처
강원대학교 겸임교수
중앙대학교 대학원 출강
미국 퍼듀대학 Visiting Scholar
현재 그리올식품 기술고문
《한국수필》 등단(2020)
한국수필가협회, 일현수필문학회 회원
수필집 《천 번째 풍선》(2022)

그림 : 현경식
세종대 회화과 졸업
국전 입상 2회, 목우회 이사장상 및 아세아 현대미술전 우수상

목차

구슬을 꿰며 4

제1장 과거에는

막달레나 아주머니 12
중국집 주인에게 받아낸 오십 불 18
로마에서 당한 사기 24
자존심 살리다 31
박 사장님, 안녕하시지요 38
촌지 44

제2장 My better half

천 번째 풍선 50
영화 속 주인공 58
괄낭무구(括囊無咎) 63
오지랖 집사 69

제3장 집사의 마음

지옥에 갔다 온 참새 모자 78
돌아온 ‘메이’ 84
길고양이 중성화 작전 90
고양이 96
집사의 마음 104
서달산 동네 아파트 주민들에게 110

제4장 고맙고 또 고맙습니다

두 눈물 118
마지막 선물 124
고맙고 또 고맙습니다 129

제5장 지금 이 모습 이대로

비교의 힘 140
계영배(戒盈杯) 145
지금 이 모습 이대로 150

제6장 소소한 즐거움

물감놀이 158
소소한 즐거움 164
들꽃 171
하우스 콘서트 177

제7장 돌아갈 때

돌아갈 때 188
나의 주치의 선생님에게 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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