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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시인은 순간에서 영원을 본다. “낮달이 동백 혀에 새겨질 때”를 바라보면서 찰나의 순간에 경이를 발견한다. 시집에 등장하는 첫 시 「단념」에서 “弓弓乙乙(궁궁을을)/弓弓乙乙(궁궁을을)” 주문처럼 중얼거리는 소리는 아마도 동학(東學)에서의 영원한 생명, 완전무결을 상징하는 뜻으로 차용한 것일 텐데, 그러한 의미를 짧은 행간 사이의 넓은 보폭으로 시적 외연을 확장시키면서 탁월한 영원의 장면을 그려낸다. 제목으로 쓰인 ‘단념(丹念)’은 시인의 태도를 일컫는 말이겠지만, 그와 동시에 “수백 년 동안 단념하지 않은” 동백꽃의 ‘단념(丹念)’과도 마주하게 한다. 그 찰나의 시간이 바로 “순간 속으로 영원이 ‘밀려오는’ 형국”(해설, 김형중)이며, 시인의 곧은 화두이다. 이처럼 시인이 몸소 “파도치는 곳으로” 나아가 “파르르” “밀려오”(「친구에게」)는 시간을 빼곡하게 기록한 ‘영원’은 그가 직관적으로 발견한 시간 속 틈의 세계이다. 시인은 미세한 시간의 균열을 착란과 현기증으로 느낀다. 언젠가부터 “작고 사소한 물건들이 사라지기 시작”하면서 “이 공간에 다른 시간이 숨어 있는 것”을 감지하고, “그 지느러미들이 움직이”는 동안 시인은 “바람의 예감은 바람 너머로”(「정전기」) 넘어가는 현기증을 앓아야 했다. 그리하여 모든 정신적, 신체적 감각의 근원은 “알 수 없는 언어로”만 다가와 시인의 “안부는 다른 행성에”(「나는 다른 행성에 있다」) 존재하게 된다. 결국 시인의 그런 어지럼증의 해결책은 다시 ‘단념’으로 회귀되기에 이른다. 그렇기에 자신의 존재를 “삶 속에 계속해서 던져진 것”이라고 말하는 시인의 자조적인 단언과 “눈에 띄는 것이 싫어서/숨어 있거나 일상에 바짝 붙어”(「그림자」) 있다는 자기 고백적 언술들은 적지 않은 슬픔을 불러일으킨다. 시인은 힘들게나마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고 표현하는데, 해설을 쓴 김형중 평론가는 ‘묻다’라는 단어가 ‘의문을 가지다, 질문하다’와 ‘(땅이나 낮은 곳에) 내려놓고 무언가로 덮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상기시키면서, “동음이의어 차용에 능한 시인이니 저 ‘묻다’를 후자의 의미로” 사용했을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렇기에 시인의 안부는 단지 땅에 묻어 버리는 것이 되고, 현기증과 착란으로 겪는 이질적인 시공간도 ‘단념’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게 된다. 한경숙 시인의 시집을 읽는 동안에 독자는 불가항력적인 진공 상태에 놓인다. “순간/펼쳐진 책 위”로 “자음과 모음이 서로의 살을 섞”(「나무는 증발한다」)으면서 “정교한 결을 따라”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어둠을 마시고 있는 하늘”(「호랑가시나무 언덕 위에 서 있을 때」)을 유영하게 된다. 삶이란 결국 한 편의 “슬픈 이야기”이므로 “슬픔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여러 가지 빛깔의 꿈을 꾸는”(추천사, 문순태) 일처럼 의미 있는 일이 또 있을까. 시인이 오랜 시간 감각의 통증으로 겪어 온 시공간의 왜곡은 아름다운 한 권의 행성이 되었다. 그리하여 시인의 깊은 ‘단념’은 무한한 진공의 상태를 느낄 만큼이나 색다른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시인의 말 관계에서 오는 아름다움이 아픈 세상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게 합니다 나를 알지 못한 까닭입니다 꺼내면 꺼낼수록 펼치면 펼칠수록 나는 여전히 시가 아프고 나를 알지 못하게 합니다 처음 떠나는 모험처럼 ‘괜찮다.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말에 위로가 됩니다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고백합니다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 사랑하고 또 사랑합니다 2023년 1월 한경숙 추천사 한경숙 시에는 신산한 삶의 이야기가 내면에 앙금처럼 녹아 있어 잔잔한 울림을 준다. 어쩌면 삶이란 슬픈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슬픔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여러 가지 빛깔의 꿈을 꾸는 것인지도. 그런 의미에서 시는 삶의 고행苦行에서 의미 있는 길 찾기와도 같다. 그 길 찾기 과정에서 만난 세상 사람들과의 소통과 자연에 대한 깊은 통찰을 통해 얻어낸 감통感通의 세계가 바로 시詩 아니겠는가. 한경숙의 시 역시 슬픈 여정 속에서 감당할 수밖에 없는 고된 삶의 편린들이 오랜 시간 쌓이고 응축되어 숙성된 시어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놋쇠 그릇, 꽃상여, 까마귀, 논바닥, 웅덩이, 몸짓, 장작, 황토, 아리랑, 각시 같은 일상적 언어에는 한경숙 시인의 개인적 정서와 삶의 편린들이 녹아 있다. 무채색의 언어들이 지나간 시간에 대한 아쉬움과 그리움으로 되살아나고 있다. 이 같은 과거 시간 속 언어들은 이미지를 만들어내면서 언어의 정보 기능을 넘어, 색깔 있는 메타적 기능으로 새로운 생명력을 얻는다. 한경숙의 시에서 이 같은 언어는 은유적 용법에 의해 심상을 나타내고 표현의 아름다운 짜임새와 함께 미학적 기능까지 되살려 주고 있다. 문예창작과 재학 시절에 열심히 시 공부를 했던 한경숙이 졸업 후 20여 년이 지나서야 첫 시집 『나는 다른 행성에 있다』를 펴냈다. 이것은 시인 한경숙의 엄숙하고도 단호한 선언과도 같다. 이제는 오래 묵힌 묵정밭을 갈아엎고 은밀하게 숙성시켜 온 시의 씨앗을 뿌려 알찬 알곡을 거두게 되리라. “처음 떠나는 모험”이라는 한 시인의 말대로, 첫 항해의 모험을 통해 아름다운 시인의 나라에 안착하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 - 문순태 (소설가·시인) 책 속에서 낮달이 동백 혀에 새겨질 때 붉은 멍이 들었으나 상관없을 것이다 弓弓乙乙 弓弓乙乙 농민군들의 시체가 왕의 무덤처럼 쌓여 있다 ---「단념」중에서 손톱은 몸에 붙어 있는 화석 같다 자신의 눈을 떠돌며 태어나는 새들처럼 도시의 네온, 콘크리트 원시림 속으로 새떼가 날아오는 밤 까만 손톱 밑에도 새떼가 가득 들어 있다 나는 그들을 붙잡지 않았다 쑥잎 같은 안개가 자욱한 밤 우거진 슬픔과 사라지는 안개 공기는 손길이 닿지 않는 바다로 간다 골짜기처럼 좁아진 바다 위를 새떼는 등대가 되어 떠다닌다 나는 손톱을 바닷물에 담가 보았다 바다에서 죽음도 다시 태어난다 물 잠긴 손톱 위에 새떼가 떠오른다 달을 찾아 입을 벌리고 날아오른다 ---「달의 뒷면 1─손톱 위에 새떼가 떠 있다」중에서 어린 왕자는 하루 종일 비가 내리면 그곳으로 갔다 하얀 바람을 만나 해가 지는 강을 좋아했고 금성이 머물러 있는 저녁에 걸터앉아 잔잔한 강물 속에서 헤엄치는 달빛에 머물렀다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하얀 바람을 만나 흔들리는 풀잎에게 닿을 수 없는 먼 곳에 있으면서도 늘 안부를 묻고 이별을 이야기했다 안개 가득한 산 아래 강을 아직 건너지 않았고 사시사철 불어온 하얀 바람을 나는 한 번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곧, 비 냄새가 흩어졌다 꽃잎에 매달린 봄이 그치고 짙은 녹음으로 가려질 아득한 계절에 금성이 머물러 있는 저녁에 걸터앉으면 알 수 없는 언어로 너는 나에게 건너온다 나의 안부는 다른 행성에 있다 ---「나는 다른 행성에 있다」중에서 오늘 본 영화는 슬프지만 사람에게서 슬픔이 오지 않았다 ---「이게 이별일까?」중에서 모래바람이 불어왔어 거짓말처럼 쌓이고 쌓였어 수평선 따라 집을 지었지 눈이 부시게 반짝거리는 사람이 그리웠나 봐 성큼성큼 다가왔어 모래사람의 약속은 노을빛처럼 흩어지고 웃음도 주고 안아 주었어 후~~ 불면 사라지고 없어질 모래, 난 무엇을 내어 줄 수 있을까? 그냥 바라만 보았어 감정도 눈물도 없는 사람에게서 가슴이 뛰면 어쩌나 두려웠어 사라지면 어쩌나 바람 불면 어쩌나 생각한 사이 파도가 밀려와 모래성도, 모래사람도 가져가 버렸어 해가 지고 날이 밝아 오는 날까지 명치끝이 아팠다 꺼이꺼이 울었어 난 모래사람을 본 적이 없어 ---「거짓말」중에서 무덤 주변으로 어둠이 내려도 산은 여전히 온갖 소리들로 요란하다 거기 무덤 옆 산벚꽃 핀다 봄날 무덤 하나 환하다 낡아 가는 것들에도 아름다움이 깃들고 식물은 결국엔 짐승을 이긴다 산벚꽃에서 짜낸 빨간 눈물을 마셨을 때 찻잔에 새소리가 쌓인다 ---「산벚꽃」중에서 산 그림자가 바다 위에 누워 잠들었을 때 버스에 몸을 실었다 칠산대교를 건너 희미한 기억 속에 닿아 쩌-억 쩍 갈라진 비릿한 바람 태양이 독한 마음으로 너의 전부를 통과할 때 즈음 그 바람으로 몸을 씻고 뜨거운 그리움을 맞이했다 눈꽃 내음 일렁이던 그해 겨울 설도雪島 하얗게 언 하늘이 발등에 내려왔다 ---「설도」중에서
1부 슬픔이 벌레처럼 따뜻한 나의 집
단념
놋쇠 그릇 꺼내고 닦는 날
모판
부산떡 김오례 여사께
바람의 울음
장미가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정전기
실업급여 수급자 인정일
평택에서 온 음성
침대를 보내던 날
벌레
가계도
달의 뒷면 1
2부 얼음을 그리는 마음
그 사람 얼굴에 달이 스민다
나는 다른 행성에 있다
그림자
얼음산
두려움은 늘 혼자일 때만
이게 이별일까?
소문들
태어난 날 꾸었던 꿈
거짓말
호랑가시나무 언덕 위에 서 있을 때
구름
3부 캄캄해서 너무 맑다
가을 목어
노래하는 사람
부용동 정원에서
춤추는 가얏고
와온에서
세방낙조
산벚꽃
설도
가을 소나기
와운 마을 천년송
두 개의 심장 168번 느티나무
윙컷
백 년을 읽는 동안
4부 흰 눈으로 돌아가고 싶어
괜찮다는 말
아침
문득 쳐다본 밤하늘에 찾아온 메시지
말이 말굽이 될 때까지
까마귀들이 날아오르는 시간
나무는 증발한다
뿌려지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사라져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랑 이야기를 읽고
싶어
독방에서 독방으로
오랜 침묵
친구에게
해설
말의 발굽
―김형중(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