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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어도 돌아갈 줄 모르는 사람

시리즈 : 창비시선 [454]

이상국 저 | 창비 | 2021년 0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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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36424565 / 124쪽 / 161g / 125 x 2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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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출판사 리뷰

재바른 것을 멀리하고 허투루 붓을 놀리지 않으며 올해도 낡고 오래된 시 공장을 돌린다 이상국의 시에는 빛바랜 풍경들이 어른거린다. 시인은 과거의 기억들을 불러와 쓸쓸히 사라져가는 것들을 되살려낸다. 아스라이 떠오르는 기억 속에서 시인은 “시장 골목 뒤켠”의 헌책방에서 “낡고 먼 세계문학들”이 “나를 기다리고는 했”던 고향을 그리며 “쌀독 군데군데 강낭콩을 묻어/쌀의 안부를 표시해”(「그리운 강낭콩」)두곤 하던 어머니와 “가을이 오면//물꼬에 쭈그리고 앉아/밤을 새우던 아버지”(「논물」)를 그리워한다. “면(面)이 텅 빈 저녁으로/태평양이 문지방까지 차오르던 농협 숙직실에서/짜장면에 배갈을 마시던”(「물치」) 지난날의 추억에 젖기도 한다. 자연친화적인 이상국의 시는 일견 한가롭고 태평한 듯 보인다. 그러나 음풍영월의 풍경 속에 마냥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다. 시인은 “매일 일곱명 정도가 산업재해”로 “떨어져 죽고 깔려 죽고 불타 죽고 끼여 죽고 치여 죽고 부딪혀 죽고 터져 죽는”(「……라고 한다」) 비참한 현실을 냉철하게 직시한다. 세상은 “비부(鄙夫)들이 판을 치”(「동갑(同甲)의 노래」)고 제 잇속만을 챙기는 “장사꾼들 세상”(「복날 생각 혹은 다리 밑」)이 되었다. 그럼에도 시인은 “어떻든 세상은 정상이다”(「천장지구(天長地久)」)라고 말하는데, 불완전하고 모순투성이인 세상을 ‘정상’이라고 뒤집어 말함으로써 부조리한 세상의 실체를 오히려 더욱 극명하게 드러낸다. 이는 “인생은 진실한 것도 아니고/세상은 정의로운 것도 아니”며 “인생은 악착같이 사는 것처럼 보여도/허술하기 이를 데 없는 것”(「할리우드 영화광」)이라는 통찰력과 맞닿아 있다. 한편 이번 시집에는 이전 시집들과는 다른 면이 눈에 띈다. 우선, 예전의 시와는 대조적으로 거의 모든 시에 마침표가 찍혀 있다. 여기서 우리는 시력 46년에 이른 시인이 오랜 습관을 묻어두고 무언가 시적 갱신을 꾀하고 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또 하나, “뿔은 힘이 세다”(「뿔」), “가을은 사심이 없다”(「논물」), “나의 등은 나의 오래된 배후다”(「배후에 대하여」), “몸은 짐승이다”(「무제시초(無題詩抄)」), “시인들의 말은 뱀 같다”(「꿈의 해석」) 등 이상국 시인만의 발화가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발문을 쓴 정철훈 시인은 이러한 문장들이 “변화의 세월을 다 견딘 뒤의 선언적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시력 46년의 세월 동안 시인은 한결같은 시심을 간직한 채 “재바른 것을 멀리하고 허투루 붓을 놀리지 않으며”(안도현, 추천사) 묵묵히 시의 길을 걸어왔다. 시인은 “사람이 뭘 꼭 하자고 세상에 온 건 아니다”(「우환에게」)라고 말한다. 하지만 언제나 새로운 길을 열어왔던 시인은 “아직 정처가 없는”(「꿈의 해석」) 영혼을 달래가며 “올해도 낡고 오래된 시 공장을 돌”(「공장」)릴 것이다. “아직 오지 않은 나라와 안 살아본 생”(「늙은 처사의 노래」)이 있고, “나를 위해 아직 불지 않은 바람”(「우환에게」)도 있으니. 평생을 “말 따라 노래 따라” “바람처럼 낙타처럼” 세속의 공간을 떠돌며 “가내수공업인 시 공방(詩工房)의 주인”(「시 아저씨」)으로 살아온 그이야말로 천생의 시인일 테니. 그러니 “나는 시인이 아닌 이상국을 상상할 수 없고 이상국만큼 자신에게 딱 맞는 시의 옷을 입고 있는 시인을 알지 못한다”(발문)는 정철훈 시인의 말이 충분히 공감이 자아낸다. - 책 속에서 아주 오래전 일이다. 세상에 온 지 얼마 안 돼 숨을 놓은 조카를 형님이 안고 나는 삽을 들고 따라갔다. 아직 이름도 얻지 못한 그애를 새벽 솔밭에 묻고 여우들이 못 덤비게 돌멩이를 얹어놓고 온 적이 있었다. 내가 사람으로 살며 한 일 중 가장 안 잊히는 일이다. ―「오래된 일」 전문 우리 동네 문구점 주인은 나를 사장님이라고 부른다. 속수무책이다. 가내수공업인 시 공방(詩工房)의 주인으로 치자면 나도 사업주이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사장은 아니다. 동네 문구점 주인이여 나를 아저씨라고 불러다오. 어려서부터 말 따라 노래 따라 해 지고 저물어도 돌아갈 줄 모르는 사람을 사장은 무슨 사장, 아저씨라고 불러다오. 바람처럼 낙타처럼 마을과 장터를 떠돌았으나 아직 동네에서조차 이름을 얻지 못한 나를 그냥 아저씨라 불러다오. 시 아저씨라고 불러다오. ―「시 아저씨」 전문 나도 내가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선덕여왕 시절쯤부터 중천을 떠돌던 내가 어느날 발 크고 소리 잘하던 정선 사람 내 어머니 자궁에 전광석화처럼 뛰어들어 늙은 시인이 될 줄은 몰랐어 그래도 그게 어디냐 벌레도 아니고 마소도 아니고 그것도 노래하는 사람이라니, (…) 오, 생 하나가 고작 이런 것뿐이라니, 그렇다고 그런 나를 어떻게 피해 가겠어 미시령 동쪽 바닷가에 이층 방 한칸 세 놓고 늙어가는 아내와 티브이 드라마를 볼 줄은 몰랐어 나도 내가 여기까지 올 줄 몰랐어 그래도 실없는 나의 노래가 끝까지 내 편이 되어줄 줄 어떻게 알았겠어 ―「끝과 시작」 부분 오래 기다렸다. 길은 사람을 기다리고 사람은 길을 기다렸다. 지구를 다 돌아도 차마 못 가고 아끼고 아껴둔 마지막 길, 언제 가면 못 가랴만 이 길로 우리는 더 갈 데가 있고 올 사람들이 있으니 꿈에 그리던 저 북관(北關), 통천 거쳐 문천 영흥 지나면 함흥이다. 함흥에서 냉면 먹고 덤비 북청 가면 거기서 반나절 나라 꼭대기 청진 나진 눈 내리는 국경을 넘어 유랑과 항일의 땅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절하자. 그리하여 천지를 뚫고 몇날 며칠 유라시아로 가자. 더 먼 아프리카로 가자. 가서 세계를 데리고 오자 ―「동해북부선」 전문 진포(津浦) 가에 내리는 눈은 버려진 그물 위에 내리고 횟집 간판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기도 한다. 진포 가에 내리는 눈은 어판장 핏물 위에 쌓이고 북어 대가리에도 쌓이고 보망(補網)하는 어부들 어깨에도 쌓인다. 진포 가에 내리는 눈은 폐선에 모여 죽은 불가사리들의 꿈을 덮어준다. 진포 가에 내리는 눈은 종일 파도다방 창가에서 누굴 기다리기도 하고 민박집 굴뚝에 올라가 몸을 녹이기도 한다. ―「겨울 아야진」 전문

저자 소개

1946년 강원도 양양에서 태어났다. 1976년 『심상 』에 시 「겨울 추상화」 등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우리는 읍으로 간다』 『집은 아직 따뜻하다』 『어느 농사꾼의 별에서』 등이 있다. 심상신인상, 백석문학상, 민족예술상, 유심작품상, 불교문예작품상 등을 수상했다.

머리말

어쩌다보니 생이 바람 든 무처럼 허술해지고 가까스로 시만 남았다. 서로 무능하고 미안한 일이다. 그래도 아직 가보지 못한 미지의 나라가 있고 그곳에서 나를 만나려고 줄을 서 기다리고 있는 말들을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
시는 나에게 사물의 배후나 삶의 은밀한 거처가 되어주었으면 한다. 하지만 나는 늘 길 위에 있거나 말 속에 말을 숨길 줄 모른다. 그러다보니 나 자신도 가리기가 쉽지 않다. 여기저기 나무도 심고 집을 늘리고 싶다.

2021년 3월
미시령 아래서
이상국


 

책 속에서

아주 오래전 일이다.

세상에 온 지 얼마 안 돼 숨을 놓은 조카를

형님이 안고 나는 삽을 들고 따라갔다.

아직 이름도 얻지 못한 그애를 새벽 솔밭에 묻고

여우들이 못 덤비게 돌멩이를 얹어놓고 온 적이 있었다.

내가 사람으로 살며 한 일 중

가장 안 잊히는 일이다.
―「오래된 일」 전문

우리 동네 문구점 주인은 나를 사장님이라고 부른다.
속수무책이다.
가내수공업인 시 공방(詩工房)의 주인으로 치자면
나도 사업주이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사장은 아니다.
동네 문구점 주인이여
나를 아저씨라고 불러다오.
어려서부터 말 따라 노래 따라
해 지고 저물어도 돌아갈 줄 모르는 사람을
사장은 무슨 사장,
아저씨라고 불러다오.
바람처럼 낙타처럼
마을과 장터를 떠돌았으나
아직 동네에서조차 이름을 얻지 못한 나를
그냥 아저씨라 불러다오.
시 아저씨라고 불러다오.
―「시 아저씨」 전문

나도 내가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선덕여왕 시절쯤부터 중천을 떠돌던 내가
어느날 발 크고 소리 잘하던 정선 사람
내 어머니 자궁에 전광석화처럼 뛰어들어
늙은 시인이 될 줄은 몰랐어
그래도 그게 어디냐
벌레도 아니고 마소도 아니고
그것도 노래하는 사람이라니,
(…)
오, 생 하나가 고작 이런 것뿐이라니,
그렇다고 그런 나를 어떻게 피해 가겠어
미시령 동쪽 바닷가에 이층 방 한칸 세 놓고
늙어가는 아내와 티브이 드라마를 볼 줄은 몰랐어
나도 내가 여기까지 올 줄 몰랐어
그래도 실없는 나의 노래가
끝까지 내 편이 되어줄 줄 어떻게 알았겠어
―「끝과 시작」 부분

오래 기다렸다.

길은 사람을 기다리고
사람은 길을 기다렸다.

지구를 다 돌아도 차마 못 가고
아끼고 아껴둔 마지막 길,

언제 가면 못 가랴만
이 길로 우리는 더 갈 데가 있고
올 사람들이 있으니

꿈에 그리던 저 북관(北關), 통천 거쳐 문천 영흥 지나면 함흥이다. 함흥에서 냉면 먹고 덤비 북청 가면 거기서 반나절 나라 꼭대기 청진 나진 눈 내리는 국경을 넘어 유랑과 항일의 땅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절하자. 그리하여 천지를 뚫고 몇날 며칠 유라시아로 가자. 더 먼 아프리카로 가자.

가서 세계를 데리고 오자
―「동해북부선」 전문

진포(津浦) 가에 내리는 눈은 버려진 그물 위에 내리고
횟집 간판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기도 한다.

진포 가에 내리는 눈은 어판장 핏물 위에 쌓이고
북어 대가리에도 쌓이고
보망(補網)하는 어부들 어깨에도 쌓인다.

진포 가에 내리는 눈은 폐선에 모여
죽은 불가사리들의 꿈을 덮어준다.

진포 가에 내리는 눈은
종일 파도다방 창가에서 누굴 기다리기도 하고
민박집 굴뚝에 올라가 몸을 녹이기도 한다.
―「겨울 아야진」 전문

한미한 가문에서 태어나 겨우 시를 읽었으나 버릴 데가 없었으므로 같잖은 문장으로 여기저기 글을 내다 팔고 한때는 절머슴을 살기도 했네. 조선인으로는 혁명을 꿈꾸었던 교산이나 생과 시를 일치시켰던 매월당, 술에 먹을 갈았다는 연암을 좋아했고 한국인으로는 봉하 처사 무현당(武鉉堂)을 사랑했네. 이들은 누구에게 매이길 싫어했거나 스스로를 우습게 여겼던 자들로 명절에 따로 메를 지어 올리네.

생각건대 나는 나의 늙은 감옥, 내 먼 조상에는 광개토대왕도 있었으나 나는 너무 오래 서울과 일인칭에 시달렸네. 아, 어디에 광막천지가 있어 광개토라니. 그래도 아직 오지 않은 나라와 안 살아본 생이 있고 눈비 오는 진포(津浦) 가 어디쯤 술 파는 노래방도 있으니……
―「늙은 처사의 노래」 부분

길 가다가 시 한행을 주웠다.
그걸 잃어버릴까봐 천천히 걸었다.

(…)

텅 빈 공양간에서 늙은 보살 혼자 저녁을 자신다.
해 질 때는 부처도 가엾다.

(…)

공자를 화장실에 두고 읽는다.
소인배는 혼자 놔두면 나쁜 생각을 한단다.
―「무제시초(無題詩抄)」 부분

 

목차

제1부
누군가 있는 것 같다
오래된 일
밤길
뿔
유월의 이승
도반(道伴)
논물
누이 생각
오빠 생각
시 아저씨
배후에 대하여
나를 위한 변명
끝과 시작

제2부
북천에 두고 온 가을
심심하니까
장맛비가 내리던 저녁
물치
7번 국도
동해북부선
아름다운 풍속은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
복날 생각 혹은 다리 밑
그리운 강낭콩
망연(茫然)
겨울 아야진
저녁 월리
다저녁때 내리는 눈

제3부
쓸데없는 하루
마스크와 보낸 한 철
역병이 도는 여름
하늘
귀를 위한 노래
부적의 노래
오늘 하루
마당의 풀을 뽑다
노변잡담
반지의 전설
동갑(同甲)의 노래
늙은 처사의 노래
신과 싸울 수는 없잖아
……라고 한다
임피리얼 팰리스 호텔 저녁 여섯시
할리우드 영화광
공장
천장지구(天長地久)

제4부
우환에게
개싸움
한동안 우울했네
아프리카 형수
수건에 대하여
노지백우(露地白牛)
무제시초(無題詩抄)
중생에 대하여
어느 청소 노동자에 대한 생각
국수 법문
미황사 생각
서천(西天)
별 이야기
누비옷을 입은 시인
꿈의 해석

발문|정철훈
시인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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