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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남아 먼 사랑을 하였네

김점용 저 | 걷는사람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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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89128968 / 149쪽 125 x 2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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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출판사 리뷰

저자 소개

  • 저자 : 김점용
저자 : 김점용
경남 통영에서 태어나 1997년 《문학과사회》로 등단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오늘 밤 잠들 곳이 마땅찮다』 『메롱메롱은주』, 평론집 『슬픔을 긍정하기까지』를 펴냈다.

머리말

꼬박 3년을 앓았다.
지금까지 기도하고 격려하고 응원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특히 삼척에서 서울까지 대관령을 서너 번 왕복해 주신 소설가 박문구 선생님께는 뭐라 드릴 말씀이 없다.
아내가 없었다면 이 시집은 나오지 못했다.
여보, 이 시집은 당신 거야. 고마워.
나도 이제 일어날 때가 되었다.
2020년 11월
김점용

책 속에서


배가 고파 고구마를 삶는다
냄비에서 김이 피어오르고 고구마가 익는다
다 익었나 싶어 젓가락으로 고구마를 찔러 본다
들어간다
고구마는 울지 않는다
나도 가만히 있는다
고구마를 맛있게 먹으려면 고구마 속울음이 다 익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흰 뱀 두 마리가 머리를 꼿꼿이 쳐들고 내 발을 물었다
어떤 고통은 가장 깊은 곳에서 오히려 고요하다
제 울음을 품은 채 고구마가 익어 간다
찔러둔 내 젓가락을 끝까지 다 받아 주면서
—「고구마」전문

내게 밥을 줘야 할 백반집 아주머니가
식탁에 엎드려 자고 있다
빈 소주병이 두 개
숟가락 담긴 국밥 투가리
귀잠에 든 듯
아주머니 아주머니 낮게 불러도
대답이 없다
그 어떤 피로와 슬픔의 파도가
저를 여기까지 밀고 온 것인지
혼곤한 잠으로 거대한 입 하날 버티고 있다 틀어막고 있다
다 놔버리고 싶어도 놓아지지 않는 것
여인이 환하게 웃는 달력 아래
영산홍 한 그루
붉은 밥 한 상 조용히 차려 놓고
너도 배가 고프냐
말없이 묻고 있다
—「거대한 입」전문

늙은 남자의 코 고는 소리 들린다
매일같이 들린다
아버지는 벌써 돌아가셨는데
아버지를 피해
고향 떠나 서른 군데도 넘게 이사를 다녔는데
아버지는 태연히 코를 골며 주무시네
아버지는 가난하여 손수 시체를 끌고 산으로 가셨다 했지
아버지의 시체를 끌고 선산으로 가는 말들을 난 그냥 지켜보았어
그 늙은 말들, 장례 행렬에 줄줄이 서 있던 의심스러운 마귀할멈들은 어디로 갔나
아차, 뒤늦게 늦었다며 맹렬히 달려가도
선산은 언제나 비어 있고
아버지는 내 곁에서 코를 골며 주무시네
그때 그 의심스러운 마귀할멈들,
아버지와 붙어먹고 어머니와 대판 싸우던
째보할멈한테서 시신을 빼앗았어야 했는데
빼앗은 아버지의 살을 우그적우그적 씹어 먹고
내가 아버지가 되었어야 했는데
장례를 제대로 치르지 못한 대가가 너무 크구나
—「불편한 잠」부분

어머니는 자꾸 숨겼다
처음에는 옷장 속에 쌀통 안에 보일러실에 돈을 숨기더니
새로 산 신발을 숨기고 시금치 씨를 숨기고
호미를 숨기고 얻어 온 옆집 똥거름을 숨기고 호미도 숨기고
커다란 빨래 건조대까지 숨겼다
선산에 묻힌 아버지를 숨기고
부산의 정신병원에 입원한 막내 이모를 일본 대마도에 숨겼다가
우리에게 들키자 다시 내 여동생 속에 꼭꼭 숨겼다
(…)
오늘은 저 바다에 무엇을 숨겼을까
선창가에서 올라오는 어머니 뒤로
서쪽 바다가 시뻘건 노을에 뒤덮여 있는데
어머니가 거대한 황혼을 뒤로하고 난데없이 숙제를 낸다
내 좀 찾아봐라 온 동네를 다 뒤져도 안 보인다
—「황혼」부분

모두가 떠나간 곳에서
꿈도 바닥도 없는 곳
너의 대답도 아무 대책도 없는 곳에서
나 혼자 남아
먼 사랑을 하였네

모든 일이 기적이었지
첫눈 한 송이
옛날 순댓국집에 피어오르던 김발
부용천변에 마른 갈잎 흔들리는 일조차
기적이 아니고는 설명할 수 없었지

어느 해 초겨울
국화분을 들고
널 찾아간 적이 있었지
오뎅 국물 세 컵을 다 마실 때까지
아무도 네가 어디로 갔는지 알려주지 않았어
그냥 북쪽으로만 갔다고 했지

쏟아지는 눈발 속에서
의정부북부역이 어디냐고 물어도
사람들은 묵묵부답

아무래도 나는
좀 더 북쪽으로 가야 할 것 같네
—「의정부북부역」부분

요즘은 책이 싫고 공책이 좋다
아무리 책을 읽어도 마음에 터럭 하나 움직이지 않는다
공책을 읽자
그냥 책은 읽지 말자
공책에는 수많은 말들이 있고 이미지가 있다
꽃이 있고 바람이 있고 아이들이 자라서 걸어오고 있다
양파 한 알에도 공책이 있다
내 몸 어딘가에 잘 익은 침묵이 있듯이
까도 까도 공책이 있다
—「공책이 없다」부분

목차

1부 모든 별들이 살아 있는 죽음을 나르는 칠성판
꽃아, 가자
스위스행 비행기
눈물을 깎는 법
가건물
모르는 사이에
치료사의 왼쪽 귀
나의 발작은, 어느 날
우나기
햇볕의 구멍
달마도를 걸다
고구마
비행기야
고양이 삼각관계
식은 죽을 먹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천루

2부 죄의 완전연소를 꿈꾸는
흰 목련에 먹줄을 놓고
얼룩
저 섬에 가려면
외로운 식사
양희은이 트랙터를 몰고
팽나무의 궤도
모자의 운명
벚꽃 테니스
라디오 좀 틀어 주세요
거대한 입
귀신집

3부 어머니가 거대한 황혼을 뒤로하고 난데없이 숙제를 낸다
검은 고양이를 받아 줘
다시 1월의 세계
뿔
까다로운 방문객
불편한 잠
울음통 물음통
황혼
인공위성이 지나가는 시간
강아지풀이 흔들리면
요양원 입구

4부 나는 좀 더 북쪽으로 가야 할 것 같네
비, 구름의 장화
의정부북부역
코골이 합창단
나를 부르며 빙빙
눈물의 마니보석이 둥둥
공책이 없다
거울 속 이사
술잔 속에 집을 짓다
들판은 하나 하늘은 둘
수제비집 배꽃
그러면 뭐 하나

해설
체공의 시학, 꿈에서 공기로 - 권정관(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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